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10) 반(反)부흥주의, 대각성과 맞섰던 보수 신앙 운동
김재호
1. 성급한 감정주의, 대각성 진영에서 발화한 들불
대각성 확산의 최대 걸림돌은 성급한 감정주의라는 모조품이었다. 에드워즈는 처음에 그것을 참된 각성에 뒤따르는 작은 부스럼 정도로만 여겼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이 대각성 운동의 근본 속성을 잠식해가는 모습을 분명하게 본 뒤에는 가장 위험하고 치명적인 해악으로 재평가했다.1
에드워즈가 처음에 성급한 감정주의를 비교적 온건하게 대한 데에는, 사람의 연약함에 대한 그의 많은 경험이 주된 역할을 했다. 예전에 그는 분명히 회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예비 단계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자신이 혹시 자기 기만에 빠진 것은 아닌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근심했던 적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그때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영적인 사투를 벌여야 했다. 더불어 기질적으로 허약했던 아내가 우울함에 거의 짓눌리는 모습을 옆에서 고스란히 지켜봐야만 하기도 했다.
이런 부정적인 징후는 그들의 영적인 각성이 진실하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니었다. 오히려 에드워즈 부부는 그런 어둠 속에서도 모든 것을 이겨내게 하는 참된 신앙의 능력과 특징을 충분히 발견하고 체험해나가고 있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대각성이 하나님의 참된 역사하심이라는 큰 틀 아래서, 나타나는 모든 부작용을 말씀과 기도로 충분히 이겨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면 에드워즈는 참된 영적 각성의 본질과 특징이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는 무엇을 바라보았기에 눈앞의 온갖 부정적인 징후들에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일까? 에드워즈는 참된 각성의 본질을 절대로 감정이나 경험의 강렬함에 두지 않았다.
그는 성령 하나님께서 비상하게 역사하시면 상식을 뛰어넘는 이례적인 일이 일어날 수는 있으나, 그런 이례적인 일은 진정 성령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말미암음인지 아닌지를 신중하게 시험하고 확증해야 한다고 했다.2 이처럼 에드워즈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엇이 아닌, 그러한 일을 일으키는 근본 요인에 주목했던 사람이었다.
그런 에드워즈에게 참된 영적 각성의 본질이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그 자체였다. 즉, 에드워즈에게 영적 각성이란 그분을 참되게 ‘아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성령님께서 한 사람의 심령 안에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에 관한 지식을 온전히 뿌리내리게 하셨느냐 아니냐가 가장 중요했다. 경험의 강렬함이나 감정의 고양은 그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그의 인격 안에서 자리 잡은 범위 안에서만 유효했다.
물론, 에드워즈는 진정 각성한 사람이라고 해도 연약함으로 인해 그 경계선을 넘어갈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가 경험한 하나님은 그 선을 부주의하게 넘어가는 이들에게 진노하는 지극히 거룩하고 엄위하신 분이셨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자기 감정의 고양이나 경험에만 근거하여 ‘성급하게’ 극단으로 치닫는 이들에게 엄중하게 경고하면서 본질에 다시 충실할 것을 권고했다.
다시 말해 대각성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믿음, 성경을 사랑함, 세상을 사랑하지 않음, 다른 그리스도인을 아끼고 사랑함을 결실하는 신앙 운동이어야 하지, 무절제, 무질서, 권위 무시 등을 낳는 잘못된 운동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3
▲ 참된 영적 각성의 특징을 가장 잘 다룬 작품인
『신앙과 정서 (Religious Affections)』
또한, 에드워즈는 대각성을 후천년설(後千年說)의 시각에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는 최근에 일어난 비상하고 전례를 찾기 어려운 광범위한 신앙 부흥(대각성)을 천년왕국의 도래를 알리는 전조(前兆)이자 신호탄으로 여겼다.4 즉, 온 세상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하게 되는 일의 시작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대각성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어가고 계시는 구속 역사의 위대한 한 조각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에게 지금의 상황은 성경에 나오는 일들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성경에는 구속 역사의 성취와 진보를 방해하는 온갖 일들이 끝내 실패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와 있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현재의 모든 잘못된 일들이 결국에는 다 극복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마귀가 사람의 미숙함을 통해 온갖 폐해를 일으켜서 대각성의 확산을 크게 훼방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대각성이 그 모든 마귀의 궤계를 무찌르면서 전 세계 방방곡곡으로 퍼져나갈 것이었다. 즉, 앞으로도 수없는 사건, 사고, 부흥 중단 등의 부정적인 징후가 끊임없이 나타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끝내 그 모든 것을 제압하고 승리하실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로서는, 성급한 감정주의로 치닫는 이들보다도 부흥을 반대하고 동참하지 않으려는 이들이 훨씬 더 위험하고 심각한 상태에 빠져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전자는 좋은 목양과 권면, 구속 역사의 진전을 따라 자연스럽게 해소될 비교적 사소한 문제를 안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후자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를 짓고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5 그래서 에드워즈는 성급한 감정주의라는 작은 ‘부스럼’ 때문에, 부흥 전체를 매도하고 거부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심각하고 엄중한 내용의 경고를 보내면서 정면 도전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전투는 에드워즈의 예상과 꼭 맞게 흘러가지 않았다. 성급한 감정주의는 작은 부스럼이 아니라, 대각성의 근본을 파괴해 들어가는 암 덩어리라는 사실이 점점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에드워즈는 성급한 감정주의가 어떻게 사람들의 눈과 귀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강렬한 감정과 체험’으로 옮겨가게 하는지를 분명하게 보았다.
그렇게 신앙의 초점이 바뀐 이들은 더는 자기를 부인하고 낮추면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겸손함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강렬한 자기 감정과 체험’을 앞세워서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에게 이목이 쏟아지게 하는 일을 즐겼다. 또한, 자신이 마치 완전한 재판관이라도 된 듯이 행세하면서, 자신과 같은 ‘강렬함’이 없는 이를 회심하지 않은 이로 판결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6
대각성의 불길은 원래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하나님만 높이려는 거룩한 불길이었다. 겉으로 볼 때, 성급한 감정주의는 대각성과 별 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실제는 타오르면 타오를수록 자기를 높여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불이었다. 그러므로 반부흥주의에 대항하는 에드워즈의 기본 노선과 대응방식은 다소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에드워즈는 1742년까지 진행된 그리스도 중심적인 대각성과 성급한 감정주의로 변질된 대각성(열광주의)을 ‘근본적으로’ 구분하고 분리하는 조처를 했다. 더불어 더 심각하게 다루는 문제도 반부흥주의에서 성급한 감정주의로 바꾸었다.
물론, 에드워즈는 그러는 중에도 기존 입장을 고수하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는 참된 각성에도 부정적인 징후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만일 어떤 부정적인 징후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아닌 ‘다른 것’에 몰두하게 한다면, 그때는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피상적인 감정 동화 현상’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논박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다시 말해, 만약 누군가 강렬한 체험과 정서 고양 자체에 몰두하면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무시하고 거스르는 길로 나아간다면, 그는 성령님이 아닌 ‘다른 영’에 사로잡혀 있음을 증거하는 것이었다.
에드워즈에게 참된 신앙 감정이란 그리스도를 높이고 자기를 부인하면서 그분의 신적 성품을 닮아가게 하는 거룩한 감정이었다. 그러므로 신앙 감정을 앞세워서 자기를 높이고 어떤 특정한 부분만 유달리 강조하여 건전한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면서,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의 계명을 가볍게 여기는 길로 나아가는 이들은 자기 열정과 참된 신앙 감정을 혼동하며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처럼 에드워즈에게 대각성을 반대하는 이들이 ‘성령을 훼방하는 자’와 같았다면, 성급한 감정주의에 치우친 자들은 거룩한 주님의 제단에 다른 불을 드린 ‘나답과 엘리후’와 같았다.7 에드워즈는 그렇게 부흥의 불길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만 담도록 ‘제한’함으로써, 성급한 감정주의라는 유사품이 더는 매연을 뿜어내지 못하게 했다.
「에드워즈가 자신이 목격한 1742년의 대각성이 그 이후에 급격히 거짓된 열광주의로 바뀌었다고 철저히 냉정하게 평가하는 문맥을 볼 때, 『신앙감정론』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같이 단순히 촌시의 공격을 되받는 또 다른 반격만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오히려 열광적인 현상들이 어느 한 방향이나 다른 방향을 증명해주지 않는다는 평가를 내린 것이 주목적이었던 다른 두 권의 책8과는 달리, 『신앙감정론』은 무엇보다 많은 사람을 교만한 자기 기만으로 빠져들게 하는 극단적인 새빛파의 잘못된 강조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에드워즈가 제시한 첫 번째 표지는 개인의 경험(대각성 이후에 미국 복음주의 풍조였던)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험의 신적 기원에 대한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이 표지에 대해 요약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것은 경험적인 기준이 아니라 동어 반복과 같았다. 즉, “참으로 영적으로 은혜로운 감정은 마음에 미치는 영향과 작용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영적이며 초자연적이고 신비한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사역을 참되게 경험하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특징들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마치 과학자적인 관찰자와 같이 말하기를, 그런 경험 자체가 참된 신자들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귀중한 것이지만, 죄가 그런 인식들을 왜곡시키고 사탄이 이런 특징들의 모조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그러므로 그럴 듯한 심오한 경험에만 기초해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9
성령 하나님께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신성이 지닌 무한한 영광을 우리 영혼에 밝히 증거하신다. 그러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영혼 가장 깊은 곳에 뿌리내리는 것이 바로 참된 영적 각성이다. 그렇게 각성한 이의 전인격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한다.
그러므로 어떤 주관적 경험이나 감정만을 유달리 강조하고 앞세우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종교적 정서와 행위는 영적 각성이 아니라 영적인 덫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몹쓸 덫을 놓는 이들을 자신이 놓았던 그 덫에 빠져들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2. 철학과 전통, 반(反)부흥주의의 기초 토대
반(反)부흥주의와 반(反)종교개혁 사이에는 참으로 묘한 공통점이 있다. 반종교개혁이 교회 개혁 자체의 필요성을 거부하고 반대했던 운동은 아니었던 것처럼, 반부흥주의도 참된 신앙 부흥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거부하고 반대하려고까지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종교개혁이 기존 질서에 더욱 충실함으로써 결국 종교개혁과 맞서는 길로 들어섰듯이, 반부흥주의도 기존 질서에 더욱 충실하려다가 결국 대각성과 맞서는 결과를 내고 말았다.
반부흥주의자들은 원래 청교도의 선한 유산을 수호하려는 열심으로 가득했던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정통 교리에 비교적 충실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각성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반부흥주의자들은 대각성이 일부 선하고 좋은 유익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선한 청교도 유산과 질서를 무너뜨린다고 여겼다.10
반부흥주의자들은 점점 심해지는 대각성의 무질서함을 보고서, 자기 선조가 힘을 다해 싸웠던 열광주의를 떠올렸다. 그들은 한껏 달아오른 자기 감정에 도취한 무뢰한이 또다시 나타나서 참된 신앙과 선한 질서를 위협하고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반부흥주의자들은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항하듯이 대각성에 대항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는 가운데, 참 신앙은 합리적인 이성에 근거해야지, 저등하고 불완전하며 동물적인 감정에 기초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11
분명히 그들이 물려 받은 유산과 열심은 선한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체에 기초하지 않은 성급한 열심이 참된 영적 각성을 변질시켰던 것처럼, 반부흥주의자들의 ‘성급한 이성주의와 전통주의’는 에드워즈의 성령 훼방에 대한 경고를 결국 현실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참된 각성이 힘을 잃어버린 하버드 대학은 철학을 근거로 삼위일체를 부정하는 유니테리언(Unitarian)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영적 각성이 뒷걸음친 미국에는 자유주의가 상륙하여 건전한 복음주의의 토대를 갉아먹어 버리고 말았다.12
그러나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재앙은 로마 카톨릭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간 것이었다. 청교도의 오랜 원수이자 대적이었던 로마 카톨릭은 짧은 시간 동안 급속하게 성장했고, 이제는 미국에서 가장 많은 이가 믿는 종교로 발돋움했다. 이처럼 좋은 신앙 유산을 참된 영적 각성이 아닌 이성과 전통으로 보존하려고 했던 보수 신앙 운동은, 오히려 자신의 모든 보화를 철학과 전통의 여왕에게 갖다 바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반부흥주의자들의 열심과 노력이 얼마나 부질 없는가를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상대방의 주장을 그대로 되돌려주는 데 명수였던 에드워즈는 ‘성급한 감정주의’, 즉 열광주의에 대한 저들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면서 그것을 다시 저들을 논박하는 일에 도로 사용했다. 다시 말해 참된 각성이 결여된 ‘성급한 감정주의’가 참 신앙을 파괴하는 것처럼, 참된 각성이 없는 ‘성급한 이성주의’ 역시도 참 신앙의 근본을 파괴해 들어가는 암 덩어리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철학을 가장 즐겨 사용하는 사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성경의 빛 없이 스스로’ 무엇을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 철학의 근본적인 허황됨과 반기독교성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기도 했다.13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사람의 정서와 경험의 근거 및 존귀함을 발견하고 사용했던 것처럼, 인간 이성의 근거와 존귀함 역시 ‘신적이고 영적인 빛’ 안에서 발견하고 사용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앙적인 사고방식은 훗날 철학의 교만함을 지적하는 맥락에서 쓰였으나, 동시에 가장 철학적인 작품인 『참된 미덕의 본질 (The Nature of True Virtue)』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난다.
「에드워즈는 촌시가 『시론』에서 밝히고 있는 감정에 대한 이 저속한 견해가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철학에 근거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공격했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들은 성경 대신 철학을 이 역사의 판단 기준으로 삼고 있다. 감정의 본성과 기능, 그리고 정서에 대해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철학적 개념들이 특히 그러하다.”고 비난했다. 에드워즈는 성경적 관점과 일치하기 위해서는 “비록 사람의 영혼에 감정과 의지라는 두 기능이 있다 하더라도 감정과 의지가 분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앙 감정과 의지를 동일시함으로써 에드워즈는 두 가지 모두를 필수적인 고등 기능으로 보았다.
물론 인간을 잘못 인도하고 그것을 의지할 수도 없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서 비롯하는 열정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고귀한 감정은 그런 저속한 충동들과 똑같이 취급되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의 중심을 변화시키는 감정적 특징에 대한 성경의 기록들을 무시하는 완고한 철학적 범주는 이런 비평적 구분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1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적인 수단과 지혜’를 의뢰하면 안 된다. 당장은 큰 외적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결국에는 더 큰 해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어리석고 미련한 지혜’를 좇아서 감당해야 한다(고전 1:25).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보다 더 똑똑하며 잘났다고 자부했던 ‘자칭’ 지혜로운 이들을 모두 광야에 묻으셨음을 명심해야 한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97, 418.
2 같은 책, p. 348.
3 같은 책, pp. 346~348.
4 같은 책, p. 388.
5 같은 책, p. 351.
6 같은 책, pp. 417, 421.
7 같은 책, 미주 p. 792.
8 『성령의 역사 분별 방법 (The Distinguishing Marks)』, 『균형 잡힌 부흥론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Revival)』
9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418, 420, 421.
10 같은 책, p. 397.
11 같은 책, pp. 402, 413.
12 데이비드 웰스 편집, 『프린스톤 신학 (Reformed Theology In America)』, 박용규 옮김, 엠마오, 1992, pp. 71~75, 106.
13 로버트 L. 레이몬드, 『최신 조직 신학 (A New Systemat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나용화 외 3명 옮김, CLC, 2004, pp. 211, 212.
14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413, 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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