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 하 –
김재호
이제 이 일을 순전히 사람의 입장에서 다시 한 번 살펴보도록 하자. 아담은 분명히 처음에는 죄가 없었다. 세상도 지극히 아름답고 자유로워서 문제의 소지가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곱씹어보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웠다고 선언하셨을 때의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이 어우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가 마구 섞여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나뉜 채로, 하나님의 뜻 안에서 서로 합력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선하게 쓰였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이 서로 어울려 조화를 이룰 것을 예고해준다. 하나님께서는 그 모두를 완전하게 보존하시면서 서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이루실 때, 사람에게 어둠(지옥, 심판, 실패 등등)은 예전에 알고 있던 의미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그 어둠마저도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목적에 완전하게 합력하고 있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둠을 사실상 빛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실을 자연 만물에 미리 풍성하게 계시해두셨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사람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 것에 관하여 ‘동시에’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그리고 예고하셨던 대로 정말 한 걸음 뒤로 물러나셨다.
아이의 자전거를 잡고 있었던 아버지의 손이 놓인다. 그러자 자전거가 ‘진짜로’ 비틀거리기 시작한다.
‘어라, 이거 장난이 아니네. 어, 이것 봐라, 넘어지기까지 하잖아?’
그래도 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이를 계속 바라만 본다.
‘아, 야속하다. 저 사람이 진짜 내 아빠가 맞나? 이거 좋은 거라며, 뭐가 이래? 못 믿겠어. 저 사람이 진짜 내 아빠라면 이런 일을 계획했을 리가 없어. 뭔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게 있는 게 분명해.’
이처럼 사람이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들어가면, 참 역설적이게도 어둠이 이전과는 다르게 영원한 실재처럼 다가오기 시작한다. 명목상으로만 존재하는 듯했던 것들이 실제 위력을 발휘한다. 이때 아담이 해야 할 일은 아주 명확했다.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말씀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당황스럽고 달갑지 않은 지금의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면서 계속 순종하는 것이었다(마 4:1~11).
물론, 아담도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 이 상태가 곧 ‘두 마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담이 완전한 자유를 보장받기 이전에는, 그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로만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담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경외로만 가득했다. 예고된 어둠은 아무런 실제 효력이 없었고, 오히려 빛을 더욱 빛내주는 역할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예고되었던 타락의 가능성이 실제로 열리면서, 동시에 완전한 자유의 상태에 들어가는 순간 상황은 달라진다. 그때까지 말로만 들었던 어려움이라는 의미가 처음으로 실제적으로 다가온다. 예전과 다르게 상당히 힘이 있고 공감이 간다. 정말 그럴듯하다. 아담은 선물로 받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서 이 어려운 상황을 잘 헤쳐가야 했다. 그러면 약속된 영생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의 마음은 이미 둘로 나뉘어있다는 점에 있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예전과는 다르게 좀처럼 마음이 따라주질 않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는가? 그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전적인 사랑으로써 늘 한결같이 행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것이다. 즉, 자유와 무조건적인 사랑의 조화가 이루어질 날은 분명히 찾아올 것이지만, 그 날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임할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명백한 실패와 만나면 더 엇나가려고 하지 말고, 마음과 눈을 들어 그러한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복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데로 나가야 한다. 사람은 그렇게 행할 때만 약속된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우리가 악의 유혹을 만나 의심과 근심에 잠기게 될 때를 가만히 되돌아보자. 악은 상당히 매력 있고 강렬하며 또한 그럴듯하다. 이것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이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떨쳐낼 정도로 마음의 심지가 굳건하지는 못하다. 금세 마음이 둘로 나뉘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게 된다.
악이 그런 우리를 가엾게 여겨서 그냥 물러나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어둠의 왕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는 굳은 의지를 지닌 자라서, 그 좋은 기회를 절대로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다. 이처럼 어둠의 왕이 물러날 의사도 없고, 하나님께서도 그저 우리 선택에 맡기실 뿐이라면 결과는 이미 나와 있다. 타락의 유혹에 속절없이 끌려다니는 중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명령의 중대함이 점차 흐릿해지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죄를 짓지 않고는 못 배기게끔 되고 만다.
이처럼 아담이 처한 상황은 한시가 급한 상황이었다. 그냥 두면 분명히 땅에 나뒹굴게 될 것이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저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한다. 그러면서 일어나 다시 타면 그만이라고 할 뿐이다. 아이에게는 그 말이 가장 얄밉다. 그래서 아이는 자기 아버지를 흘겨본 뒤에, 평소 아버지와 험악하게 지내던 옆집 아저씨(마귀)가 내미는 손을 잡고 일어난다.
그런 다음, 그 아저씨의 말을 따라 아버지가 선물로 준 자전거를 발로 차고 집어 던지며 마구 침을 뱉는다. 그러자 그 아저씨는 아이에게 부당한 억압에서 벗어나 독립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축하한다는 격려를 건넨다. 그러나 아이는 그 모든 일이 즐겁기보다 두렵고 무섭다. 분명히 뒤따를 아버지의 진노와 책임 추궁에 이빨이 딱딱 마주치며 몸이 부르르 떨린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그 자리에 더는 있을 수가 없어 부리나케 도망간다. 구석진 어디엔가 꼭꼭 숨어서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고 한다. 아버지가 곧 자기를 매질하고 죽이기 위해 올 것이라는 공포에 벌벌 떨면서 말이다.
이 아이의 생각은 다름 아닌 우리가 죄악의 노예였을 때,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했던 바로 그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은 우리의 생각처럼 그냥 물러서 계시지만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다시 돌아오신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전거가 있는 곳으로 가더니 한숨을 한 번 크게 내뱉는다. 그리고 아들이 짓밟은 자전거를 세워 타고서 그 못난 아들을 찾으러 길을 떠난다. 얼마 못 가, 그리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어느 건물 한쪽 구석에서 웅크리고 벌벌 떨고 있는 아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자기 아들에게 손을 내민다. 아이가 예상했던 무지막지한 ‘진노’와 ‘형벌’의 선고는 없다. 죄가 자기 아버지를 너무도 크게 오해하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오만방자함을 용서하시고 은혜로 그를 끌어안으신다. 그러시면서 창세 전부터 예비해두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가리켜주신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라고 하시면서 죽음의 공포에 질려 있는 그를 안심시켜주신다. 그와 함께, 당신의 주권적인 사랑 안에서 세상을 안식하게 하시겠다는 그 말씀이 전혀 헛된 소리가 아니었음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나간 아이의 잘못과 오해는 도리어 아버지가 진정 어떤 분이셨는지를 밝히 드러내 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이런저런 것들을 ‘전혀’ 요구하지 않으신다. 삼위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누리고 계시는 그 주권적인 사랑을 사람의 상황이나 상태와 관계없이 홀로, 즉 일방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런데 정말로 사망의 공포에 떨고 있는 사람은 자기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자기의 모든 것을 다해 바로 그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찾고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은 자연스레 ‘완전한 자의’로 그 사랑과 용서를 온 마음을 다해 받아들이게 된다. 그 은혜를 거절할 수 있는 죄인은 없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기 전에 먼저 사람을 찾아 나서신다. 그리고 ‘잃어버린 양’을 어깨에 메고 즐거워하며 돌아오신다. 사람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찾으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우리를 ‘찾아주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구원받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가 이같이 말한다. “칼에서 살아남은 백성이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으니, 곧 내가 가서 이스라엘에게 안식을 주려 할 때이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내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인애로 너를 인도하였다. 처녀 이스라엘아, 내가 다시 너를 세울 것이니, 네가 설 것이며, 네가 다시 작은 북을 들고 즐거워하는 자들이 춤추는 곳으로 나올 것이다.
네가 다시 사마리아 산들에 포도나무를 심을 것이니, 심는 자들이 심어 그 과실을 먹을 것이다. 파수꾼들이 에브라임 산에서 외치는 날이 올 것이니, ‘일어나라. 우리가 시온으로 올라가 여호와 우리 하나님께로 나아가자.’할 것이다.” (렘 31:2~6, 바른 성경)」
또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아주 중요한 부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되찾기 위해 찾아오시고 끝내 품에 안으신 뒤에, 놀랍게도 우리를 ‘다시’ 세상으로 내보내신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잘못했다며 우는 아들의 눈물을 닦아준 다음에, 괜찮으니까 어서 이 자전거를 다시 타보라고 한다. 아들은 울먹이며 다시 자전거에 올라선다. 아버지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그러자 아들은 다시 페달을 밟는다. 아이는 또 비틀거리고 넘어지고 구른다.
그러나 아까와는 한 가지가 다르다. 아이는 아버지가 조금도 밉지 않다. 비틀거리는 게 당황스럽고 넘어져서 아픈 것은 매한가지다. 그러나 아이는 아버지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다. 은혜가 아이의 마음을 온전히 붙들어준다. 아이의 마음은 예전처럼 나뉘지 않는다.
넘어진 아이는 뒷짐을 지고 묵묵히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진심을 이해하면서 씩씩하게 다시 일어난다. 그리고 이전에는 절대로 갈 수 없었던 그 길로 힘차게 페달을 밟으며 나아간다. 결국 자유롭게 자전거를 타면서 즐거워하게 된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참된 의도와 계획을 깊이 이해하고 아버지의 지혜와 사랑 앞에 감사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머리를 숙이게 된다. 이때부터 사람은 은혜 안에서 자원하여 악을 거부하고 의를 행하기를 ‘즐거워하게’ 된다.
성경은 이 부분을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그의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의 아들을 죽이려 할 때, 여호와의 천사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니, 아브라함이 말하기를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였다. 천사가 말하기를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고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마라.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까지도 내게 아끼지 않으니, 이제 나는 네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을 알았다.” 하셨다. (창 22:10~12, 바른 성경)
그러나 좋은 땅에 떨어진 것들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잘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자들을 뜻한다. (눅 8:15, 바른 성경)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이다. (약 2:26, 바른 성경)」
누군가는 이 경륜을 심히 오해하곤 한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고 또다시 행위로 구원에 이르러야 한다는 등의 아주 잘못된 인식을 갖게 되곤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중간에 실수로 구원에서 떨어져 나가 영원히 파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륜은 은혜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전혀 새로운 차원에 속한 자유와 책임의 경륜이다. 다시 말해, 이는 오직 하나님께서 소유하셨던 그 온전한 자유를 은혜 안에서 세상이 실제로 누릴 수 있게 해주셨다는 사실을 뜻한다(요 8:32).
그래서 성도는 그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법을 힘써 따르기 원하는 실로 ‘자유로운’ 상태가 된다. 그들은 그 일을 자원해서 한다. 물론,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일은 여전히 어렵고 고되다. 그러나 그들은 온 마음을 다해 그 일을 사랑한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들의 마음에 참 자유를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의 삶은 선한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 선한 열매가 그들을 구원하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선한 열매는 그들의 구원받은 상태를 나타내고 ‘확증’할 뿐이다. 그들이 구원받은 근거는 오직 은혜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서 나타나는 수많은 선한 결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그들의 유일한 영광이시며 구원의 근거가 되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피조물이 참 자유를 누리며 안식하게 하시려는 본래의 계획을 홀로 성취하신다. 그리고 정말로 그러한 일을 이루셨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증해 보이시려고 다시 한 걸음 물러나신다. 만일 이 경륜이 은혜받은 뒤에 행위로 다시 구원을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였다면, 사람의 선택은 항상 완벽해야 한다. 자전거에 완전히 숙달된 어른이 자전거를 가지고 놀 듯해야 한다. 넘어지는 순간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
만약 우리 선택과 의지로 받은 은혜를 유지하고 보존해야 한다면, 우리는 이미 지옥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위해 우리를 세상에 다시 보내시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가 ‘이미’ 받은 구원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사실을 세상에 ‘확증’해 주라는 의미에서 그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자에게 오는 시험과 고난은 항상 영광스럽고 유익하게 사용된다. 결국에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성취되었음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유기(遺棄)의 문제를 다루어보자. 이 유기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구원 사역의 최종 마침표를 의미한다. 그러나 유기가 어떻게 구원 사역의 최종 결말을 뜻하는지를 알려면, 우선 이 유기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정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사람들은 유기라는 주제 앞에서 다시 한 번 넘기 어려운 장벽을 만난 것 같다고 하곤 한다.
어떻게 주권적인 사랑 안에서 안식하게 하려고 지으신 피조물 중 일부를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그냥 내버려두신다는 것인가? 그것은 창조 목적의 실패가 아닌가? 맞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성립하려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모든 사람을 구속하시기로 예정하셨다.’라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우리가 그렇게 말하면 대번 이런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대체 그건 또 무슨 말이냐? 그럼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멸망에 이르게 하려고 창조하신 피조물도 있다는 뜻이냐?”
놀랍게도 답은 “그렇다.”이다. 우리는 앞서 세상에 완전한 안식을 주시려고 사람의 타락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과정에서 온전히 빛 가운데 행하셨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속성은 오직 한 쪽만 행하시면서도, 반대쪽도 함께 확정하는 신비를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이는 ‘유기’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를 특별히 선택하신 ‘일부에게만 우선적으로’ 적용하신다. 그들은 그 ‘특별한’ 은혜에 절대로 저항할 수 없으며 거절할 수 없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일부에게만 우선적으로’ 그 은혜를 적용하실까? 만약 하나님께서 ‘모든 이에게 한꺼번에’ 이 주권적인 은혜를 적용하신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는 결국 특별 은총에 의한 일반 은총의 폐기를 뜻한다. 그렇게 하면 일반 은총, 즉 사람의 자유와 책임이 활동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특별 은총에 의해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아이와 화해한 아버지가 한 발 뒤로 물러나 아이를 지켜보는 대신, 아버지가 아이를 뒤에 태우고 집에 돌아가는 격이다. 그러면 아이는 자전거를 배울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로써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결국 실패로 막을 내리게 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우선 일부’에게만 적용하신다. 그리고 그들을 일반 은총의 경륜으로 다스려지고 있는 이 세상에 돌려보내신다. 그러면 이 세상은 그와 함께 태초부터 예고된 참 자유와 안식의 실체가 확증되어 나타나는 것을 ‘분명히’ 보게 된다. 또한, 그러한 은혜를 택하라고 권함을 받는 맥락에 놓이게 된다.
저 높은 산 위에 거대한 방주가 장차 지어질 것이 아니라 ‘이미 지어져’ 있다. 그리고 그 방주의 문은 그들을 향해 활짝 열려있다. 이 세상은 일반 은총의 경륜 안에서 유지되고 있으므로, 그 안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은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방주로 나아올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도 그들이 택한 대로 대우해 주시기로 뜻을 정하고 계신다. 그러나 그들 중에 누구도 돌이키기를 원치 않는다. 한결같이 그 귀한 초청을 거부하기에 바쁠 뿐이다. 무죄한 아담도 실패했는데 하물며 원죄의 지배를 받는 그의 후손이 과연 어느 쪽을 택하겠는가?
성경은 구속사(救贖史)의 완결 부분에 해당하는 이 유기의 경륜에 관해 이렇게 기술한다.
「”’온 땅이 내 것이니, 이제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잘 지키면 너희가 모든 백성들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며, 또 너희는 내게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 하여라. 이것이 네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할 말이다.” (출 19:5, 6, 바른 성경)
그분을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않으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으니, 이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심판은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다. 악을 행하는 자는 누구든지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않으니, 이는 자기 행위를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8~20, 바른 성경)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큰 만찬을 베풀고 많은 이들을 초대하였다. 만찬시간이 되어 초대받은 자들에게 그의 종을 보내어 말하기를 ‘오십시오, 이미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하였으나,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변명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이는 그에게 말하기를 ‘내가 밭을 샀으므로 나가 보아야겠으니, 당신께 부탁컨대, 나를 용서하시오.’라고 하였고, 다른 이도 말하기를 내가 ‘소 다섯 겨리를 샀는데 그것들을 시험하러 가니, 부탁컨대, 나를 용서하시오.’ 하였으며, 또 다른 이도 말하기를 ‘나는 아내를 맞이하였으므로 갈 수 없소.’라고 하였다.” (눅 14:16~19, 바른 성경)」
이처럼, 그들이 유기되었다는 말은 구원으로 ‘나오라’는 진심 어린 초대를 받았다는 뜻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그 초청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를 ‘순전히’ 그들의 손에 맡겨두시기로 창세 전에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굽어 있는 자기 마음을 따라 그 귀한 ‘초청’을 스스로 거절할 뿐이다.
그들은 그 귀한 하나님의 구원보다도 자기 죄를 더 사랑한다. 죄와 결별해야 갈 수 있는 천국은 그들에게 지옥과도 같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죄를 따라 하나같이 구원의 초청을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 모든 책임은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결말을 아담의 타락만큼이나 잘 알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그렇게 멸망하기를 정말 손톱만큼도 원하지 않으시나, 세상이 자기 멸망을 자초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참된 안식을 위해 아담의 타락 때와 같이 그러한 악을 허용하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확정하신다. 그들의 그러한 어리석음과 파멸은 궁극적으로 온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확증해 보여주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택함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자기 구원이 진정 의로운 것이며, 따라서 누구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의 파멸을 통해 다시 한 번 이해하고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마치, 홍해에 빠져 멸망한 애굽 군대를 보며 하나님께 기뻐하며 찬송했던 이스라엘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유기를 통하여, 선악을 알게 된 사람이 스스로 생명나무의 과실도 따 먹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섭리하신다(창 3:22).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 저 사람이 택한 자일까 아닐까를 구별하며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진실하게 구원으로 초청하면 된다. 그리하면 택함 받은 자는 은혜를 따라 주님께로 나아오고, 유기된 자는 자기 죄를 더 사랑함으로써 멸망에 머물기를 자청한다. 멸망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보다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를 더 사랑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유기된 자를 볼 때 한없이 마음 아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임할 나라의 영광스러움과 의로움, 그리고 영원함을 바라보면서 마음에 참된 소망을 얻게 된다. 그들은 그러한 일 속에서 하나님 영광의 극치를 발견한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주님께서 이 세상을 철장으로 다스려 무너뜨릴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하는 찬송을 하나님께 얼마든지 올려드릴 수 있었던 것이다(시 2:1~12).
물론, 세상 사람들은 성도의 그런 행동에 깊은 거부감을 드러내면서, 성도가 너무 이기적이고 비정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성도는 유기된 자를 향한 말로 다할 수 없는 긍휼을 마음에 품고 있다. 심지어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 중 얼마를 건질 수 있다면 기꺼이 그리하겠다고까지 한다(롬 9:3).
그와 함께, 성도는 그러한 한없는 긍휼을 품고 살게 해 준 하나님의 은혜가 밝히 빛나는 나라가 머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도 바라본다. 그들은 일반 은총의 경륜 안에서 확증된 성도의 참된 자유와 악인의 유기를 통해, 저 너머에서 밝히 빛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확실성을 바라보면서 구속의 영광을 노래하게 된다. 부디 성도가 악인의 멸망 그 자체를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오해를 갖지 않았으면 한다. 성도는 악인의 멸망 그 자체는 참으로 안타까워하고 슬퍼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이라는 극히 어려운 주제를 구속사의 흐름에 맞추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비록 그 진리의 가르침이 우리가 씹어 삼키기에는 조금 딱딱하더라도 끝까지 씹고 소화해내려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 그러니 주 안에서 사랑하는 모든 친구들이여, 믿음으로 말씀을 더 진지하고 끈질기게 연구하도록 하자. 그런 연구에 도움을 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있다면, 계속 질문해서 그 사람이 좀처럼 쉬지 못하게 하자.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더 닮아가기를 원하는 만큼 이 일에 열심을 내도록 하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많은 결실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실 것이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반드시 기쁨으로 노래하며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올 것이다. (시 126:6, 바른 성경)」 -아멘-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 하 –
(※ 한 주간 1 명, 총 939이 읽었습니다.)
이 글은 원래 코너를 기획하면서 제일 처음으로 써두었던 글입니다.
처음에는 코너를 이런 식으로 운영하려고 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좀 무리한 기획이었던 것 같습니다.
글이 좀 길고 이해하기 어려우시더라도 양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좀더 명료하고 간명한 글을 기획하고 쓰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귀한글 감사합니다.
글이 조야합니다. 과찬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