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 상 –
김재호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주권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의존한다. 이 말은, 세상만사에 내포된 참된 ‘의미’를 파악하려면 반드시 그분의 은혜를 따라 사고(思考)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나타내시려고 모든 만물을 지으셨고, 지금도 그 목적 안에서 이 세상을 유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구속사적인 맥락 안에서 사고하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이라는 이 어려운 주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구속사적인 전제(前提)의 도움 없이 철학의 개념들을 ‘먼저’ 들여놓아서는 절대 안 된다. 이 둘의 순서를 무시할 경우, 숲의 나무만 바라보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지경에 빠지고 말 것이다. 진정 지혜로운 사람은 개별적인 나무의 특징에 주목하기에 ‘앞서’ 전체 숲의 모양을 파악하려고 한다. 그처럼 우리는 어떤 주제를 생각하든지 항상 하나님의 구속과 은혜에 ‘먼저’ 눈을 돌려야 한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사용하곤 하는 ‘영원함’이라는 개념은 사실 우리에게 매우 추상적이다. 시작도 끝도 변함도 없는 그 ‘무엇’이다. 우리는 그것을 ‘막연히 감지되는 무언가가 저 너머에 있을 따름’이라는 정도로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사변(思辨)과 철학의 근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영원함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비추어 다시 바라보도록 하자. 그리하면 왜 영원함이 선한지를, 또 실재할 수밖에 없는지를 온전히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그런 이해 안에서 영원함이란 개념이 그 사랑 안에 본래부터 내포되어 있었던 것임을 보게 된다. 영원하지 않은 사랑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런 사실을 정말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면, 시간이 흘러가면서 변하고 사라지는 것들이 왜 우리 마음에 참된 만족을 줄 수 없는가를 참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자연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지면서, 세상 사람들이 온갖 좋은 것에도 불구하고 왜 그토록 영생을 갈구하는가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지으셨기에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기까지는 쉼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속사적인 전제 안에서 사고하면, 철학이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씩 완전하게 풀려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계시해주신 은혜의 속성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창조, 인간의 타락, 택한 자의 구원과 유기된 자의 최후 심판이라는 구속 역사의 전 과정을 따라가면서, 이번 주제와 관련된 모든 내용을 하나씩 통합해가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이라는 어려운 문제도 충분히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게 된다.
먼저, 창조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은혜를 베푸시려고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즉,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창조 이전부터 서로에게 베풀며 누리고 계셨던 사랑의 영광스러움 안에서 세상이 안식하게 하시려고 세상을 지으셨다. 그리고 그 창조 목적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 목적 달성에 실패하신다면, 그 목적 안에서 창조된 우리 역시도 모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라는 존재조차도 우리에게 별 의미를 주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이 다 공허하고 허무할 뿐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진정 사실임을 인식하면, 곧장 꽤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가 우리 앞에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미움, 시기, 다툼, 죽음과 같은 실패와 악들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 이것들이 실패가 아니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란 말인가? 무신론 철학자들은 대개 이 대목에 주목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봐라, 너희가 말하는 신(神)의 창조 목적은 명백하게 실패했다. 따라서 너희가 말하는 신이 진짜로 존재한다면 그는 참 신일 수 없다. 자기가 의도한 목적도 온전히 이루지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어떻게 신일 수 있느냐? 반대로 신이라는 존재가 없다면, 무신론적인 우리 삶의 태도는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러므로 나는 무신론자이다.”
그들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 있고 당당하게’ 살아간다. 미신의 굴레와 저주에서 벗어나 ‘참 자유’에 이르렀다고 하면서 크게 즐거워한다. 그러나 그들은 ‘참 자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모든 억압에서 벗어나 ‘내가 원하는 것을 마음껏 하는 것’ 정도를 참 자유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 소중한 ‘참 자유’를 법으로 제한하고, 그 책임을 묻는 촌극이 벌어져도 태연하기 그지없다. 그것도 내 자유라나 뭐라나…
누군가는 이쯤에서 ‘도덕’을 무대 위에 올린다. 그러나 그들도 그 ‘도덕’과 앞서 말한 ‘자유’, 그리고 ‘지성’이 정확히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무엇을 기준으로 각자의 영역을 구분할 수 있는지, 또 어떻게 해야 서로가 충돌하지 않고 조화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일 뿐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런 대목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뭔가 큰 진리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호들갑을 떠는 것들을 유심히 잘 살펴보면, 결국 다 이런 식으로 어물쩍 넘어간다. 그들이 발견했다는 그 ‘큰 진리’는 여전히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그것이 정말 진리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실패한 쪽은 하나님이 아니다. 오히려 담대하게 하나님이 없다고 선언한 쪽이 완벽하게 실패했다. 참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들이 보여주는 이러한 어리석음과 실패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완전하게 성공하고 있음을 가장 극적으로 증명해준다.
더 나아가, 이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실패와 악’은 도리어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실재를 분명하게 증명해준다. C.S. 루이스가 한 말처럼 ‘직선의 개념이 없다면 굽은 선이라는 개념도 없는 것’이다.1 후자는 전자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개념이다. 그러므로 세상 사람들이 그러한 것들을 진정 ‘실패’로 인정한다면, 그러한 것들을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는 영원한 성공이 여전히 실재한다는 사실도 역시 인정해야만 한다.
또한 그러한 사실은 그들이 기꺼이 인정하는 그 모든 실패가 ‘처음부터’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들어가 있었음을 가르쳐준다. 하나님을 좌절에 이르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이쯤 되면 사방에서 비난의 화살이 날아들기 시작한다. 불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자들로부터도 격렬한 항의를 받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너는 지금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든 악과 사망의 조성자로 만들어서, 그분의 영광에 크게 먹칠을 하고 있다. 속히 그 망언을 철회하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깊이 사죄하라!”
이 시점에서 앞서 언급했던 ‘곡선과 직선의 개념’을 되풀이하는 일은 실로 무의미할 것이다. 한계가 있는 사람의 지혜에 의지하여 계속 버티기보다는, 성경도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편이 훨씬 더 나은 대응일 것이다. 그런 뜻에서 다 함께 성경이 말하는 천지창조의 때로 가보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빛이 있어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고 하나님께서 그 빛을 보시니 좋았다. 하나님께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부르시며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었다. (창 1:3~5, 바른 성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대목이 하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는 “어둠도 있어라.”라는 대목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빛을 보시고 좋아하셨지만, 신기하게도 빛과 어둠을 나누셨고 각자에게 낮과 밤이라는 이름도 붙여주셨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빛뿐만 아니라 어둠까지도 익히 알고 계시며 그 어둠을 온전히 주관하신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그 말은 그냥 ‘생략’된 것이 아니냐? 빛을 창조하셨으니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어둠의 창조는 생략한 것이 아니냐?”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음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모든 좋은 선물과 모든 온전한 선물은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니, 그분께는 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약 1:17, 바른 성경)」
야고보 사도는 이 말을 하기 전에 시험(유혹)에 관해 말하는 중이었다. 그는 시험이라는 ‘어둠’이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았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성도들에게 경고하는 맥락에서 위의 말을 꺼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둠을 직접 명하여 창조하시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보내어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분이 아니시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어둠을 보내신 일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빛을 세상에 보내시고, 빛을 기뻐하시며, 빛 가운데 행하신다. 즉, 그분께는 회전하는 그림자조차도 없으시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빛과 어둠을 나누신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 일을 당신의 손으로 직접 행하시지는 않는다. 오히려 ‘세상’이 스스로 어둠을 만들어내면서 빛과 나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일조차도 ‘처음부터’ 당신의 창조 목적 아래 두고 계셨던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둠이 자기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지금도 억제하고 관리하신다. 그리고 그것조차도 결국은 선하게 사용되게끔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실패와 악은 그분의 창조 목적을 조금도 무너뜨리지 못한다. 그런 일도 ‘처음부터’ 원래 계획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 전에 예정된 그 일은 이 세상 속에서 정말로 일어났다. 그러나 그 실패의 ‘주체와 책임’은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에 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실행하신 일에는, 이 세상이 당신의 은혜와 사랑 속에서 빛나게 하시려는 선한 뜻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 일이 곧 세상의 실패를 함축한다는 사실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신다.
그렇다면 이는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가 아닌가? 어떻게 그런 사실을 아시면서도 막지 않으실 수가 있는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일을 허용하시는 일이야말로, 피조물의 자유와 책임을 떠받드는 유일한 토대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지극히 선한 목적 안에서, 세상이 스스로 실패하도록 그냥 ‘내버려’ 두신다. 이는 전혀 모순이 아니고 미필적 고의도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냥 말장난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이 어려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본성이 사랑임을 믿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자유와 책임’을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리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무언가를 ‘억지로’ 하는 것은 사랑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런 일은 로봇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사랑은 우리에게 의무를 ‘자발적으로’ 감당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정 당신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세상을 만드셨다면, 이 세상에 자유와 책임의 토대를 ‘반드시’ 마련해주셔야만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면, 결국 모두가 참된 안식에 이르지 못하는 상황이 찾아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기꺼이 동의하고 자원하여 그것을 따라 행할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지켜보시는 경륜을 세상에 베푸셔야만 했다.
이는 아버지가 자기 아이를 가르칠 때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아버지는 아이를 가르칠 때, 아이가 올바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모든 개념과 방향을 먼저 상세하게 가르쳐준다. 그러고 난 뒤에, 아이가 직접 해볼 수 있도록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아이를 지켜본다. 그때 아이는 비로소 완전한 자유와 책임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전까지 아이의 자유와 책임은 성립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물러나시는 경륜조차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으므로, 그 뒤에 일어나는 일이 하나님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다고 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어떤 일도 하나님의 등 뒤에서 몰래 일어나지 않는다. 멀리서 아이를 지켜보는 아버지처럼 지켜보시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당신의 통제 아래 두신다.
그러나 어쨌든 이때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시며 지켜보시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 상태에서 사람은 자기 마음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그를 막아설 만한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거하기를 기뻐하면서 영원히 그 진리 안에 머물기를 택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저버리기를 얼마든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선택을 지켜만 보실 뿐이다. 여기에 직접 개입하시면 자유와 책임의 터전 역시도 함께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리켜 미필적 고의라고 할 수는 없다.
쉽게 말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직접 자전거를 타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타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약, 그 과정에서 우리가 넘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자전거를 타게 했다는 것이 정말로 미필적 고의에 의한 유죄에 해당한다면, 자기 아이에게 자전거를 타게 하려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가 처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넘어지고 당황하고 구르는 일은 이미 아버지의 계산 안에 ‘충분히’ 들어가 있다. 문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자체가 아니라,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가 마음으로 자원하여 ‘택한’ 길에 있다. 우리는 바로 그때 보장받은 자유를 사용하여 곧장 ‘반대로’ 가기를 택했던 것이다.
자전거를 탄 아이는 비틀거리며 나아가더니 얼마 못 가 넘어진다. 그러더니 씩씩거리며 일어나 자전거를 발로 걷어차며 짓밟기 시작한다. 이따위 것 다시는 안 탄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더니, 그 길로 쪼르르 집을 나가버린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참된 안식을 주시려고 사람에게 자유와 책임을 보장해주시는 일이 오히려 사람이 ‘엇나가는 일’을 불러올 것을 잘 알고 계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엇나간 사람을 그 상태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러한 사람의 넘어짐과 실패를 당신의 은혜가 임하는 통로로써 선하게 사용하실 계획을 이미 창세 전부터 확고하게 세워두셨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설명했던 이 모든 일의 실제 상황이 펼쳐지는 에덴동산으로 같이 가보자. 에덴동산의 아담은 창조 목적에 ‘참여하라’는 말씀과 그 목적을 ‘역행하지 말라’는 말씀을 ‘동시에’ 들은 상태에서 자유를 선물로 받았다. 그러므로 그는 동산의 모든 실과를 단 하나도 빼놓지 말고 전부 다 따먹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대한 완전한 순종을 의미한다.
100개의 실과 중에 99개를 기쁨으로 따먹고 딱 하나만 예외로 해도 안 된다. 사랑은 언제나 예외 없는 완전함을 요구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참 사랑이 어찌 배우자에게 1년 중 364일은 순결하게 행하고, 딱 하루만큼은 예외로 하는 일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반대로 동산 중앙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절대로 따먹으면 안 되었다. 어떤 상황이 다가오더라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해주셨던 말씀을 넘어서서 사람 스스로 선과 악을 판별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되었다. 즉, 장차 세상에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해서, 그 일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기를 ‘자유롭게’ 택하면 절대로 안 되었다. 이를 종합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의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자유를 허락해주신 것이 된다.
“나는 네게 영원한 안식을 주기 위해, 네 앞에 생명과 사망이라는 두 가지 길을 만들어 두었다. 그러니 너는 내가 준 자유를 사용하여 어떤 상황에서든지 ‘온전히’ 나를 믿고 순종하기에만 힘쓰며, 네 생각과 명철을 ‘조금도’ 의지하지 마라. 그리하면 나는 영원한 생명을 네게 주어 너를 영원히 쉬게 할 것이다. 그러나 네가 나의 말을 믿지 않고 스스로 높아져서 너의 생각을 나의 말과 같은 위치에 두기로 선택한다면, 너는 그로 인해 영원히 사막을 떠돌며 목말라 하는 자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신적 초월성이 전제되어 있는 그 말씀과 함께, 공은 사람에게로 넘어왔다. 사람은 정말 어느 쪽도 ‘자유롭게’ 행할 수 있었다. 물론, 그 ‘행위’에는 온당한 ‘책임과 결과’가 꼭 뒤따른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 안에서 세상을 안식하게 하시려는 창조 목적에 비추어, 사람이 자유롭게 행한 행위에 해당하는 책임을 물으시고 그에 합하는 결과로 갚아주신다. 순종은 생명으로, 불순종은 사망으로 말이다.
사실, 이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자신의 죄성을 따라 애써 부인할 수는 있겠지만, 이해하지 못할 수는 없다. 이 사실은 심지어 아기조차도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부터 본성적으로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는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한 사실이다.
이 자유로운 상태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명백하게 이는 참 사랑 속에서 안식하기를 택하라는 하나님의 더없이 ‘은혜로운 초청’이다. 여기에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과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자기 발로 일어나서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고, 또 사망에서는 멀리 떨어지기를 바라는 부모의 간절한 마음이 깊이 녹아 있는 것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큰 잔치를 마련하였으니 너희는 와서 먹고 쉬어라. 오지 않는다면 너희는 굶어 죽게 될 뿐이다. 나는 진정으로 그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와라, 망설이지 말고 나아와라! 너희의 자유를 올바른 곳에 사용하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
이 감미로운 사랑의 초대는 물론 ‘보편적’이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나 다 해당하며 차별이 없다. 그러므로 천국 문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있다. 이 초대는 환경이나 조건에 제한을 받지 않는다. 누구나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또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충분하고 자명하다. 그리고 성경은 이와 같이 선인과 악인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이에게 베풀어주시는 보편적인 은혜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말한다. 다 함께 다음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들이 자신의 길로 행하도록 내버려 두셨으나, 자신을 증거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니, 곧 선한 일을 하시고, 너희에게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시며 결실의 때를 주시고, 너희 마음을 음식과 기쁨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행 14:16, 17, 바른 성경)
그리하면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들이 될 것이니, 이는 그분께서 악한 자와 선한 자 위에 똑같이 자신의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위에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이다. (마 5:45, 바른 성경)」
이를 가리켜 신학 용어로는 ‘일반 은총’이라고 한다. 이 일반 은총의 경륜 안에서는 앞서 언급한 자유와 책임을 기초로 하는 공의가 완전하게 성립하고 적용된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러나 선한 쪽(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순종하는 쪽)으로 나아와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교만함으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이 일반적인 은총을 따라 영원한 안식에 이르기를 택할지, 아니면 그 은혜를 대항하여 영원한 진노에 이를지는 온전히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 그러므로 이후에 일어날 모든 일은 순전히 사람의 책임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해 온 세상에 베푸시고 확증하신 이 일반적인 은혜는 명백하게 인간의 자유와 책임을 영원히 보장하고 붙들어준다.
다만 죄 중에 태어나는 사람이 하나같이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께 순종하기를 싫어할 뿐이다. 하나님께 자기 스스로 나아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사람은 나중에 자기 죄가 가져온 결과에 대해 조금도 핑계할 수 없다. 성경은 이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들이 그들 안에 밝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주셨다. 세상 창조 때부터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분께서 만드신 만물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나 알게 되었으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다. (롬 1:19, 20, 바른 성경)」
그런데 아담은 대체 왜 그러한 은혜의 ‘초대’를 거절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기를 선포하는 데 이르렀을까? 도대체 왜 지극히 선하고 올바른 길을 굳이 마다하여서 수많은 후손이 고통받게 했을까? 많은 이들이 이 부분에서 어려움을 느끼곤 한다. 그러나 이 부분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숙고해보면 답이 나온다. 하나님의 사랑은 근본적으로 ‘주권적인’, 다시 말해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은 자기 자녀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시려는 ‘안식’이란, 주권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피조물의 완전한 자유가 함께 어우러진 안정된 상태를 뜻한다. 그러나 피조물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경륜 아래서는 그러한 상태를 이룰 수가 없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인간의 ‘선택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 이는 아담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경우를 가정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그럴 경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했기 ‘때문에’ 약속된 모든 것을 얻게 된다. 그 완전한 안식을 얻고 못 얻고를 결정한 기초 토대는 순전히 사람의 ‘자유’이다. 즉, 사람이 자기 자유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실현하고 못하고를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완전한 ‘결정’에 박수나 쳐주셔야 하는 실로 난감한 처지에 놓이게 되고 만다.
마치 부모와 자녀가 완전히 동등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히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시작하셨고, 사람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 완성하였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이 완전히 같아져 버렸는데, 어떻게 주권적인 사랑이 이 세상에 나타날 수가 있겠는가? 이처럼, 사람의 완전한 순종은 하나님의 사랑이 주권적이라는 본래 의미를 감쪽같이 사라져버리게 한다. 즉, 그런 일은 피조물이 무조건적인 사랑 안에서 영원히 안식하게 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창조 목적까지 무너지게 하는 셈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일반적인 은혜의 ‘초청’을 세상에 주시는 순간, 참 역설적이게도 세상의 ‘어둠’ 역시 함께 확정된다. 물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오직 빛이다. 하지만 빛 되신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속성은 인간의 자유와 책임 안에서 일어날 실패까지 함께 확정해버린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선한 뜻에서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와 책임을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책임과 결과는 전부 사람에게로 귀속된다. 그러나 참 신비하게도 그러한 공의의 경륜이 곧 사람의 실패를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자율적인 선택과 그로 말미암는 타락에는 조금도 관여하지 않으시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일을 확정하시고 당신 뜻에 맞게 끌어가신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자유롭게’ 악한 길로 나아가리라는 사실을 창세 전부터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아담의 실패는 정말로 하나님의 성공을 가리키게 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던 아담의 실패가 실제로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성공이 아니라, 반대로 실패와 범죄를 통해 예비해두신 그 선물을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롬 11:32). 그러나 사람이라는 못난 녀석은 그러한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고 자전거를 거칠게 집어 던지면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서 살고 있는 우리의 실제 모습이고 현실이다.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 하 – 에서 이어집니다.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7) 하나님의 주권과 사람의 책임 – 상 –
각주
1 C.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 장경철 역, 홍성사, 2009-특별보급판, p.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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