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3) 오직 믿음
김재호
기독교에서 믿음은 매우 중요하다. 모든 종교가 믿음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기독교만큼 강조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믿음이 무엇이냐는 질문의 대답이 천차만별이라는데 있다. 그 답을 가만히 듣고 있자면,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행하던 사사 시대가 지금이 아닌가 싶다(삿 17:6). 기독교 신앙에서 믿음이 중요한 만큼,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데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듯,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이 무엇인지를 사려 깊게 헤아려봐야 한다.
1.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신념을 믿음으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은 신념이 아니다. 믿음을 자기 신념으로 오해하는 부류는 대개 번영 복음(prosperity gospel), 즉 긍정적∙적극적 사고방식을 따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자기 긍정, 자존감 등이 바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믿음이라고 주장한다. 조엘 오스틴, 조용기 등으로 대표되는 이 부류는 삶에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에너지가 늘 넘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늘 웃음을 잃지 않고 목표를 향해 전진해간다. 그것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다고 하면서 말이다. 그들에게는 이러한 ‘믿음’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의 보고에 연결하는 콘센트 플러그와 같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믿음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1) 신앙 원리의 주체가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다
– 최근, 조엘 오스틴의 아내는 유튜브에 올린 한 동영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 드리거나 순종할 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할 때 그분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위해서’ 그분을 예배하고 그분께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며, “오늘 아침에 여러분에게 알리고 싶은 말은 그것이 하나님에게 가장 큰 기쁨이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 나올 때, 예배드릴 때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선을 행하라.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때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녀의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다.」1
이 말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바는, 번영 복음이 결국 믿음의 초점을 누구에게로 맞추게 하는 가이다. 그들의 신앙 원리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신념에 근거하기 때문에, 결국 자아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일에 큰 의의를 두게 된다. 나를 즐겁고 기쁘게 하는 일에는, 하나님께서도 넉넉한 아저씨처럼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함께 기뻐하신다. 반면, 내가 슬프고 괴로우면 하나님께서도 슬프고 괴로우시다.
그러므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며, 나를 괴롭게 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 된다. 자, 이것이 우상숭배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 우상숭배라는 말인가? 바울은 자신이 그동안 사람을 기쁘게 해왔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라고 했으며(갈 1:10),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셨다(눅 22:42).
(2) 맹신을 조장하고 공의를 파괴한다
– 이들의 원리를 따르면, 모든 것이 ‘항상 해피 엔딩’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이 과연 그러하던가? 결국, 이들의 삶에는 ‘현실 부정’과 ‘은폐 및 합리화’가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런 일마저도 긍정적으로 소화하기에 여념이 없게 된다. 죄나 과실에 대한 진실한 책임이나 건전한 사리 분별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무조건’ 만사형통이어야만 한다. 정직하게 답해보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고’ 따라오라고 하신 이유가 이런 사람들을 만들기 위해서였는가, 아니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거룩한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였는가?
2. 믿음은 신비체험이 아니다
신비한 일을 체험하는 일을 믿음으로 여기는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는 대개 기적이 넘친다. 다른 신자들에게는 평생에 한 번 있을 법한 일이 매일 일어난다. 그들은 그 비결을 바로 ‘믿음’에 둔다. 다른 이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믿음’이 없어서다. 성령님께서는 그 믿음의 능력을 통해, 이들이 참되고 본받을만하다고 증거하신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능력과 신비체험을 사모하지 않는 이들은 성령을 소멸한 영적으로 죽은 자가 되며, 심지어 그들을 반대하는 자는 용서받지 못하는, 성령을 모독하는 엄청난 죄를 짓는 자가 된다. 그러나 이들이 말하는 믿음도 참된 믿음이 아니다. 이번에도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만 들어보겠다.
(1) 본말(本末)을 뒤집어 놓는다
– 물론, 신앙생활에 신비한 일 자체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신비한 일이 신앙의 근간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사역이 신비한 일을 일으키는 데 있었던가? 만일 그랬다면 예수님께서 돌로 떡을 만드시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시는 일을 거절하실 이유가 없다. 오히려 반드시 그리하셔야만 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거부’하셨다. 그리고 ‘기록되었으되’라는 성경 인용으로 대응하셨다(마 4:1~10).
이렇듯, 예수님의 기적은 단순히 신비한 일을 일으키거나 일상의 필요를 채우는 목적으로 행해지지 않았다. 본질적으로 그 일은, 구약이 가르친 구속의 약속이 바로 지금 너희 눈앞에서 성취되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해 행해진 것이었다. 즉, 예수님의 모든 기적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속 언약의 성취와 완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분이 베푸신 모든 기적의 핵심을 이룬다(요 20:30, 31).
그러나 신비체험에 기초를 두는 이들은 반대로 간다. 하나님의 약속과 구속 사역이 어떻게 예고되어 왔고,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고, 장차 있을 그분의 재림 때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에 관한 내용은 완전히 무시된다. 온갖 신비한 일이 넘쳐나지만, 그것을 구속사의 전개 및 완성과 전혀 연관하지 못하고 할 수도 없다. 존 맥아더는 이러한 일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도에 대한 이 운동의 주요 교과서인 윔버의 『능력 전도 (Power Evangelism)』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속죄의 교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다. 그러한 결함에 대해 집중적인 비판을 받은 윔버는 (2백 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칭의, 중생 및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고작 열세 페이지를 할애한 새 책을 냈다.2
은사주의자들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유일성을 버렸고 그 결과는 영적인 무한 경쟁이다. 무언가 새롭고 비밀스런 것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굳은 확신을 대체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탄의 거짓으로 이끄는 유혹이다. 혼란, 오류, 심지어 사탄적인 기만은 그 불가피한 결과다.3」
정직하게 답해보라. 성경에 수많은 기적이 기록된 목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신비한 능력을 자랑하고 사람들을 초능력자로 만들기 위함인가? 이런 믿음을 좇는 사람들은 능력과 신비한 일은 날이 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과 재림, 성도의 거룩과 같은 본질적인 내용은 어린아이만큼도 말을 못한다.
(2) 다른 영을 따르게 한다
– 성경이 가르치는 구속 역사에서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재림하시기까지 전체 기간이 ‘말세’로 분류된다. 이 ‘말세’라는 말의 뜻은 명확하다. 구속의 역사는 다양한 모형들(모세, 다윗, 여호수아, 가나안 땅 등)을 통해 장차 나타날 실재를 예고하면서 계속 성취되어 왔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바로 그 예고되었던 ‘실재’라는 뜻이다.
이렇듯,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예표였기 때문에, 그분께서 세상에 실제로 나타나실 ‘그다음 때’ 또는 ‘그때’를 얼마든지 기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세’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예고된 ‘그 실재’가 이미 나타났으므로, 그다음에는 오직 영원한 심판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의 마지막 시기라는 뜻인 ‘말세’라고 불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세 동안에는, 모든 일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실 때 이루신 일 안에서만 이루어진다. 여기서 벗어나는 일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이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철저하게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 이루신 구속의 사역 안에서만 일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오직 당신의 대속 사역에만 근거하여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다. 사도들은,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약속 안에서 성령을 따라 일했지, 자기 스스로 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말씀대로, 그들은 진짜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다(행 1:8). 물론, 여기서 말하는 땅끝이란 당시 온 세상을 뜻하던 ‘로마 제국’ 전역을 의미한다.
누군가는 여기서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땅끝이란 전 지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맞다. 그러나 그 말은 예수님께서는 말세 기간 전체를 통틀어 내다보시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예를 들어, A.D. 70년에 일어난 예루살렘 함락 사건은 명백하게 예수님께서 재림할 때를 배경으로 한다(마 24:1~35). 더하여 예수님께서 그 말씀에서 그리고 계신 종말의 그림은 구약의 다니엘서를 배경으로 한다. 쉽게 말해, 예수님께서는 구약 성경이 예언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세상 마지막 날, 즉 말세의 기간이 모두 지나갔을 때 일어날 일을 당시 유대인들에게 적용하여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이런 말씀들이 함축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백하다. 말세 기간 전체에 있을 일들을 그 시대에 미리 다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 즉, 성도가 말세 기간을 살며 전혀 새로운 가르침이나 신비한 일을 따라가지 않고, 오직 사도들이 전한 가르침(성경) 안에 머물게 하실 것이라는 뜻이다(엡 2:20, 살후 2:1~2, 고전 4:6, 딤후 3:15~17).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의 사역 속에 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셔서, 말세 기간 내내 모든 일이 충분하게 확증되게 하셨다(막 16:15~20). 우리는 이러한 터 위에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하며, 그 일이 이루어질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마 24:14).
따라서 우리가 서 있는 이 터전을 다시 확증할 필요가 없다. 더하여 성취되기로 예고된 구속사적인 실재도 더는 남아있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기적을 통해 자신의 신실성을 확증하려 든다면, 그는 근본적으로 자신이 사도와 동급, 또는 그 이상(보혜사 성령)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고 만다. 그리고 이는 결국 자신을 점점 재림 예수처럼 여기게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마지막 날(말세)에 나타날 거짓 선지자와 자칭 재림 예수, 그리고 거짓 기사와 표적을 하나의 맥락에서 함께 다루고 있는 것이다(마 24:23, 24).
따라서 기도와 금식이라는 은혜의 방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특별하게 섭리하시는 아주 예외적이고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신비한 일에 관심을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 사도들을 통해 말세 기간 전체에 걸쳐 이미 충분하게 확증되었기 때문이다(골 2:2~5). 그런데도 신비한 일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자가 있다면, 그는 결국 그리스도를 잃어버리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3. 믿음은 행위가 아니다
믿음을 어떤 의지적인 결단이나 결심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많다. 이런 이들은 주로 몇 날, 몇 시, 몇 분에 특정 성경 구절을 따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행위’에 자기 신앙의 토대를 둔다. 이런 이들에게는 간증이 넘쳐난다. 그러나 그 간증의 주인공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부활이 아닌, 윤리·도덕적 공로 개념의 선행, 불굴의 의지, 자기 희생, 그때의 그 사건 등이다. 이들이 말하는 믿음도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니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율법주의를 조장한다
– 율법주의란,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특정 기준을 ‘충족’하여 그 행위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서려는 태도를 말한다. 이들은 정말 눈물겨울 정도로 자기 의지와 노력, 정서, 재물 등을 쏟아 부어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기준들을 만족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려면,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벽하게 지켜야 한다(약 2:10~11). 그것도 인생 전체를 통틀어 일분일초도 예외 없이, 온 마음과 뜻과 생명을 다하여 지켜야 한다.
누구를 도와주었다, 고해성사를 했다, 교회에 빠짐없이 출석했다, 40일 금식기도를 했다, 누구보다 착하게 살았다 등등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쉽게 말해, 전 생애를 예수님과 똑같이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자가 있는가? 그래서 마틴 루터는 공로주의를 가르친 로마 카톨릭을 가차 없이 적그리스도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2) 무율법주의도 조장한다
–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의지적인 결단에 의존하는 일은 무율법주의로 가는 관문 역할도 한다. 자기 의지와 행실을 신앙의 토대로 삼는 자 중에 절반가량은 무율법주의에 이른다. 이들에게 구원은 참으로 값싸고 간편하기 그지없는 상품과 같다. 동전을 넣으면 자판기에서 물건이 떨어지는 것처럼 이들은 구원을 뽑아간다. 몇 날, 몇 시, 몇 분에 ‘영접 기도’라는 동전을 구원 자판기에 넣는다. 그러면 틀림없이 구원이라는 상품이 떨어져 나오고, 그는 그 상품을 덤덤하게 주머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죄를 지을 때마다 주머니에서 그 상품을 꺼내 보며 스스로 자기를 안위한다. 영접한 행위(그들에게는 믿음)를 통해 구원받았으니, 더는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가 없다며 죄를 합리화한다. 그로 인해 삶이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가도, 절대 다른 생각을 품어서는 안 된다. 죄 때문에 마음이 상하여, 자기 신앙을 잠잠하게 돌아보는 일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와 같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믿음을 가리켜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그 정도는 귀신들도 갖고 있다. 심지어 그 귀신들은 하나님 앞에 두려워 떨기까지 한다(약 2:17~19). 쉽게 말해, 무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은 마귀들 수준이거나 그보다도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믿음은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은 구원받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아니고, 구원받았으니 방종을 합리화해주는 수단도 아니다. 성경은 오직 구원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을 지극히 ‘사랑하여 온 힘을 다해 지키게 하는 믿음’을 말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이 아닌 거짓 믿음들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참 믿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이 가르치는 참 믿음은 다음과 같다.
1. 참 믿음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나온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며(존재), 그분이 어떤 분이신가(속성)를 아는 영적인 감각과 지식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 사람을 죽은 사람에 비유한다(엡 2:1). 죽은 사람은 아무것도 듣지 못하며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것처럼, 세상 사람은 온 세상이 하나님의 영광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제대로 깨닫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롬 1:20).
그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자는 살아난다. 생명의 말씀이 그의 심령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실존과 영광을 감지하게 한다. 비로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듣고 아파하며 탄식한다. 죄에 매여 사망의 종노릇하는 비참한 현실에서 자신을 건져내 주실 분을 간절히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된다(눅 11:9~13). 그러다 결국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발견하고,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게 된다.
(1) 이 지식은 성령께서 마음에 심어주신다
– 우리는 수학 공식을 외우듯,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시고, 그분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는지 달달 외울 수 있다. 『천로역정』의 수다쟁이(달변, say-well)처럼 지식에 관하여는 참된 성도에게 전혀 뒤처지지 않을 만큼 박식하게 될 수 있다.4 그러나 꿀을 연구하여 ‘달다’는 개념을 갖게 된 사람과 그 꿀을 직접 맛보고 ‘달다’는 개념을 갖게 된 사람은 전혀 다르다.5
성경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영광스러우시며 자비와 능력과 권세가 무한하신가를 가르친다. 이러한 가르침은 명백하게 영적인 개념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어떠하신가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그 지식을 온전하게 소유하기 위해서는, 죄로 죽은 마음의 감각과 영적인 성향이 새롭게 되는 일이 ‘반드시’ 선행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일을 ‘홀로’ 행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성령님께서는 죄로 죽어 있는 사람의 영혼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불어넣으셔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신다. 심령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성령님의 이 역사로 말미암아,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우시며 찬양받기 합당하시다는 사실을 인격적으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2) 이 지식은 그리스도를 높인다
– 하나님의 영광, 그 영광스러움의 정수는 바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에 있다.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골 2:3). 따라서 진정으로 믿음을 갖게 되었다면, 선지자와 사도, 또한 모든 성경이 그리하는 것처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높이며 전하게 된다. 선지자와 사도가 그리했으며 성경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자신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대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을 깨닫고 돌이켜 구원받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원하신다. 그분께서는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사람을 깨우치시며, 그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시려는 열심을 갖고 계신다(요 16:8).
따라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영광에 초점을 두지 않고, 온갖 잡다한 것들에 관심을 두고 즐거워하게 하는 영은 ‘절대로’ 성령님이 아니다. 그 영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면 결국 가라지로 판명 날 뿐이다(마 7:21~23). 성령으로 말미암은 자는 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사람들에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을 풀어 가르치고 그 안에 머물게 한다(벧후 1:12~21, 고전 4:6, 요이 1:9,10). 여기에 예외란 없다.
2. 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생겨난다
참 믿음은, 내가 무언가를 의지적으로 충족시키는 행위가 아니라, 그것을 이미 이루신 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이다. 행실은 그 은혜에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변해간다. 우리는 다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기에 바쁜 못된 자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을 그리스도 예수께 담당시키시고 우리를 용서해주셨다.
우리는 이 은혜를 믿음으로써 새 생명을 얻는다(사 53:6). 성도가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은혜가 바로 영원한 생명이요, 참 자유임을 성령님께서 그 영혼에 밝히 조명하셨기 때문이다.
(1) 이 은혜는 주권적이다
–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시고자 하는 자에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하신다. 그러나 그 행위 때문에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이 아니다. 실상은 정반대다.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사람의 인격과 마음을 주권적으로 감화하고 붙들어 영생을 향해 달려가게끔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했다’고 하셨다(요 15:16). 하나님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누구도 주님께 나갈 수 없다(요 6:44).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어떠하고 그러한 존재를 인내하며 새롭게 하시는 은혜가 무엇인지 세상에 분명하게 드러내신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당신을 찾고 구하는 일을 조금도 방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사람이 그렇게 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참으로 원하신다. 그러나 사람의 부패한 본성이 그렇게 하기를 원치 않는다. 백이면 백, 모두 죄에서 떠나기 싫어한다. 결국, 살길을 찾으라는 권고조차 듣기 싫어하여, 귀를 틀어막으며 자기를 합리화하고 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를 강권하여 주권적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눅 14:23). 구원에 이르고 이르지 않고를 결정하는 주체는, 사람의 부패한 의지가 아니라 은혜로우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의지다. 구원을 계획하신 분도, 성취하신 분도, 적용하시는 분도 모두 하나님인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모든 어려움을 넉넉히 참을 수 있게 된다.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자족하면서 늘 평안을 누릴 수 있다. 또한,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아 이제는 세상에 더는 구원받을 자가 정말 없을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의뢰하며 소망 중에 한결같이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다(롬 11:3~5).
(2) 이 은혜는 변하지 않는다
– 사람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않으신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어제나 오늘이나 한결같으시다(약 1:17).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절대로 취소될 수 없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하심이란 없다(롬 11:29). 물론 이 말은, 신자가 연약하여 죄를 지을 때 하나님께서 탄식하지도 않으시고, 인자한 옆집 할아버지 마냥 허허 웃기만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탄식과 진노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은혜로 바꾸셨다는 뜻이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호되게 책망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이미 그를 긍휼히 여기며 용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의 모든 불의와 허물로 인한 진노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완전하게 용서하셨다. 성도는 그 변하지 않는 은혜와 자비를 믿기에, 악한 옛 행실을 벗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열심을 더욱더 품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변함이 없으니, 성도의 삶에 이러한 일이 끊이는 법도 없다.
3. 참 믿음은 열매가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전인격을 변화시킨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의 지·정·의 모두를 새롭고 거룩하게 하지, 지성이나 정서 또는 의지만 따로 변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속의 은혜를 ‘아는’ 이들은 그리스도를 ‘사랑’하게 되고 그분께 ‘순종’하게 된다.
그분을 알면서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면서 그분을 닮아가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둠 가운데 행하며 그분을 믿는다고 하는 일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것이며, 그분의 말씀이 그 심령 안에 없는 것이다(요일 1:5~10).
(1) 믿음은 거룩과 화평을 결실한다
– 윤리와 도덕이 이 세상에 진정한 평화를 가져오고 사람을 깨끗하게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세상이 다투는 근본 원인은 탐심과 정욕을 따르기 때문이다(약 4:1~3). 그러나 이 탐심과 정욕이 하나님께 범죄한 일로 말미암았다고 명확하게 진단하고 처방한 윤리나 도덕은 하나도 없다. 결국, 윤리와 도덕의 최대치는 ‘이러면 안 되며 이러저러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믿음은 하나님께 저지른 죄라는 근본 문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한다. 따라서 세상이 윤리와 도덕으로 겨우 죄를 억누를 때, 믿음은 참된 자유 속에 죄를 떠나게 한다. 그 결과, 사람 사이에는 참된 화목과 화해가 깃들게 된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참된 평화를 위해 먼저 ‘떠나라’고 한다. 화평이 먼저가 아니라 거룩이 먼저이며, 거룩은 윤리·도덕적인 개선이 아니라 실제로 죄에서 떠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2) 믿음은 인내와 담대함을 결실한다
– 믿음은 성도 사이의 참된 화평과 함께 세상과의 불화도 가져온다(마 10:34).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으니,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믿고 따른다면 세상은 반드시 우리를 대적한다(요 15:19, 20). 따라서 믿음은 세상이 주는 고난을 인내하면서 말씀을 따라 살게 한다. 세상의 모든 위협에도 요동하지 않고, 오직 말씀만 따라 담대하게 살게 한다. 그래서 세상이 가져다주는 고난은 성도의 인내와 용기를 촉진하는 양분과도 같다(약 1:3, 4).
참된 믿음은 악한 세상이 성도를 어렵게 할수록 더욱 밝게 빛난다. 더욱 하나님을 찾고 의뢰하게 하여, 모든 면에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이다. 욥이 그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약 5:11). 이렇듯 참 믿음은 인내와 담대함을 결실한다.
성경이 말하는 믿음이란 이와 같다. 믿음은 신념이 아니며 신비체험이나 행위가 아니다. 믿음은 오직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은혜를 따라 그분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그 믿음으로 인해, 우리 삶은 죄에서 떠나 거룩하게 변화되어 간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어떠한가? 전자라면 속히 회개하고 어디서 떨어졌는가를 살펴 망하지 않게 하라. 후자라면 넘어질까 주의하며 의의 열매를 맺는 일에 더욱 힘쓰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 안에서 역사하시는 분께서 마지막 날까지 그 일을 이루어가실 것이다(빌 1:6).
각주
1 http://christiantoday.us/sub_read.html?uid=22047§ion=sc73§ion2
2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Chrismatic Chaos)』,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8, p. 211.
3 위의 책, p. 82.
4 존 번연, 『천로역정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98~100.
5 조나단 에드워즈, 『신적이며 영적인 빛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p. 39,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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