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3) 청년 에드워즈
김재호
1. 모교의 위기
조나단 에드워즈가 다닌 예일 대학의 전신은 코네티컷 대학이다. 1701년에 세워진 이 영세한 대학은 1718년에 엘리후 예일의 기부금으로 뉴헤이븐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예일 대학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출발했다.1 이때의 대학은 현대의 대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경건한 목회자 양성―으로 설립되고 운영되었다. 그중에서도 예일 대학은, 보스턴의 하버드 대학이 정통 청교도 교리를 포기하고 인크리스 매더를 학장직에서 쫓아낸 일에 맞서 세운, 특별한 의미를 지닌 대학이었다. 그러나 1722년 가을, 이러한 예일 대학의 학장이 ‘국교도 전향(영국 성공회로 귀의하겠다는 뜻)’을 선언하여 모두를 경악하게 했다.2
이 당시, 국교도 전향이 크게 문제가 된 이유는 대략 세 가지였다.
첫째, 미국의 청교도 중에는, 1660년 영국의 왕정복고(王政復古, Restoration)와 함께 시작된 큰 박해를 견디다 못해 미국으로 건너온 사람이 무척 많았다.
둘째, 국교회주의는 비국교도 목회자가 거룩한 직분을 ‘불법적으로’ 행사하고 있음을 내포했다.
셋째, 근대주의의 영향으로 번져가던 인간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정서를 지닌 이들의 도피처가 바로 국교회였다. 즉, 아르미니우스주의로 돌아서려는 마음을 품고 있는 이들이 우선 거치는 관문이 바로 국교회주의였다.3
이렇듯, 당시 청교도 사회에서 ‘국교도 전향’은 여러 면에서 ‘배교’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그날, 티모시 커틀러 학장은 다음과 같은 충격적인 구절로 졸업식을 끝마쳤다. “다 같이 아멘합시다.” 이 말은 마치 졸업식장에 번개가 내려치는 것과 같이 울려 퍼졌다.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그 학장에게 벼락이 내리쳤더라도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두 세기 후, NAACP(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 집회에서 대통령이 연합군의 깃발을 높이 치켜든 것이나, 밥 존스 대학교 졸업식장에서 설교자가 성모 마리아에게 드리는 기도로 설교를 마친 것에 비길 만한 것이었다. 커틀러의 말은 국교회 기도서에서 그대로 인용한 것이었다. 이것은 뉴잉글랜드 교리의 최고 수호자로 선출된 사람이 스스로 적군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4
그로부터 1년 뒤, 에드워즈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논박하고 규정적 원리(예배는 오직 성경에 규정된 원리로만 드려야 하며, 나머지는 규제되어야 한다는 원리)를 옹호하는 논문을 졸업식에서 발표하여 석사 과정(M. A.)을 무사히 수료하였다. 그가 졸업논문의 주제를 이것으로 정한 이유는 명백하다. 아직 파장이 남아있었던 일련의 어수선한 일과 관련하여, 명확하게 태도를 밝히고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자 했던 것이다.
살다 보면 한 사람이 본래 어떠한 사람이었는지는 종종 생각지도 못했던 시점에 밝히 드러나곤 한다. 가장 든든한 우군인 줄로만 알았던 이가 되려 가장 크게 뒤통수를 때리기도 하며, 반대로 어떤 이는 위기 속에서 자기 신앙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매사에 방심하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에 우리 영혼을 겸손하게 내맡기며, 위기가 찾아올수록 더욱 믿음이 분명하고 확고한 자가 되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위기 가운데 넘어져 물러가는 이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2. 환경의 어려움과 영적인 기쁨
학교를 졸업한 에드워즈는 이제 적당한 사역지를 찾아 부임해야 했다. 에드워즈가 본래 원했던 사역지는 뉴욕이었다. 그가 이 지역을 희망했던 이유는 그곳의 성도와 나누었던 교제와 사랑 때문이었다. 1722년 8월, 아직 학생 신분이었던 에드워즈는 뉴욕의 한 조그만 교회 임시 부목사로 청빙받았고, 그로부터 8개월 동안 사역을 감당했었다. 에드워즈는 그곳에서 나누었던 성도의 교제를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나누게 될 성도의 교제에 대한 모형으로 회고할 만큼 그들을 깊이 사랑했다.5 그래서 뉴욕으로 가려고 노력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더하여 그러는 동안, 연구 활동에 적합한 모교의 도서관과 가까운 노스헤이븐 지역으로 부임할 기회마저도 흘러 가버리고 말았다.
결국, 남은 사역지는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가 강력하게 원했던 볼턴이라는 작은 농촌 마을뿐이었다. 볼턴은, 티모시 에드워즈가 사역하는 이스트 윈저에서 겨우 24km 떨어진 곳에 새롭게 세워진 마을로서, 아버지 에드워즈는 자기 아들이 뉴욕에서 사역하고 있을 때부터 이 지역으로 부임하기를 이미 요청하고 있었다.6 왜 그랬는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자신의 영향력 아래 좀 더 다듬어지거나, 또는 시골에서 겸손하고 조용하게 목회에만 전념하는 삶을 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모든 길이 막히고 오직 볼턴만이 유일한 사역지로 남게 되자,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청빙을 받아들이며 그곳에서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에게 그 선택은 그리 내키지 않는 선택이었다.
「10월 4일자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오늘 나는 그것을 결정했다. 만일 나의 의무를 다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신실하게 약속하신 것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그리고는 그의 삶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만일 내가 그 문제에 대해 불신하게 된다면 나는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불경건이라고 고백할 것이다. 결심문 57번, 6월 9일자 일기 참조.” 결심문 57번과 6월 9일자 일기에는 “불행과 역경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 때”에라도 “의무”를 다하자는 결심이 담겨있다.」7
볼턴으로 부임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의 심적인 어려움과 관계없이 맡겨진 의무를 성실하게 감당하였다. 자신이 겪고 있는 내적인 갈등, 주민들의 쉽게 다투는 투박하고 거친 성향 등에 매몰되지 않고, 신앙의 밝고 긍정적인 부분을 주로 연구하고 가르쳤다.
많은 이가 청교도적인 경건을 항상 우울함에 시달리고 염세적이며, 뭔가에 얽매인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오해한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청교도 경건의 정수는 기쁨이다. 물론, 그 기쁨은 세속적이고 육적인 향락을 즐거워하는 기쁨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워하는 거룩한 기쁨이다. 심지어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이 지극히 자연적인 일상 속에서도, 그 안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는 신앙이 바로 청교도 경건인 것이다.
에드워즈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감지하고 기뻐할 수 있게 하는 그 영적인 감각을 제6의 감각이라고 부르면서, 성령께서 거듭난 자에게 주신다고 했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와 청교도는 오감에만 근거한 육신적이고 감각적인 세상의 즐거움을 배격하는 동시에, 믿음을 따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발견하고 실천하는 기쁨은 적극적으로 가르치고 실천했던 것이다.
또한, 청교도는 그러한 기쁨을 진정으로 소중하게 여겼기에, 그 감각이 무디어져 자신도 모르게 육신의 소욕에 다시 종노릇하게 되지 않도록, 매사를 지극히 경계하며 절제했던 것이다.8 에드워즈는 영원한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영적인 기쁨과 소망을 누림으로써, 개인적인 모든 어려움을 잘 헤쳐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보여준 이러한 행보는 현실 속에서 많은 어려움과 마주해야 하는 우리에게 좋은 본보기가 된다. 성도는 어느 때나 영원한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즐거워해야 하며, 특별히 모든 일이 어렵고 힘들 때 더욱 그리해야 한다(히 11:1~3, 시 119:92, 93).
3. 영적인 침체와 성도의 교제
여러 면에서 인내하며 2년 동안 볼턴에서 무사히 사역한 에드워즈는 예일 대학의 교수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그토록 바라던 모교에서의 생활은 볼턴에서보다도 더 어렵고 괴로웠다. 어찌나 괴롭고 힘들었던지, 에드워즈는 결국 탈진하여 쓰러지고 말았다.
에드워즈를 힘들게 한 이유는 크게 네 가지였다.
첫째, 학생들의 무질서와 방종
둘째, 천성적으로 내성적이고 완벽주의적인 그의 기질
셋째, 아직 구원의 확신을 얻지 못한 영적인 상태
넷째, 과도한 업무와 마음 속 가득한 영적인 열심
먼저 학생들의 무질서와 방종은, 예일 대학이 커틀러 학장의 배교 이후 아예 학장도 없는 상태로 2년간 방치된 일로부터 말미암았다. 그 뒤로도 교구 목사들이 임시로 학장직을 번갈아 수행하여 겨우 학사일정을 유지하다가, 1726년에 가서야 겨우 전임 학장을 둘 수 있었다. 그 사이, 예일 대학은 술 취함과 난동, 교수의 권위를 거스르는 일 등의 악한 일로 깊이 물들어갔다. 그 탓에 교수들은 학생들의 끊임없는 잡담소리를 감내하며 수업을 진행해야만 했다. 영적으로 예민한 에드워즈가 그런 학생들과 일주일 중 6일을 밤낮으로 부대껴야 했으니, 그에게는 이만한 고역도 없었을 것이다.9
둘째, 기질적인 면에서 에드워즈는, 선이 굵어 무엇이든 쉽게 떨쳐내고 잊어버리는 유형의 사람이 전혀 아니었다. 무엇이든지 깊이 생각하며 그 본질과 상태를 완전하게 파악하기 전까지는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더하여 그 생각들을 메모하고, 신앙과 관련하여 묵상하면서 일기로 정리하기까지 했으니, 사소한 일 하나까지 쉽게 잊어버리는 법이 없었다. 머릿속으로 바둑 한국을 복기(復碁)하며 한 수 한 수를 숙고해보는 사람을 연상한다면, 그가 천성적으로 어떤 기질을 갖고 있었는지 이해하기 좀 더 쉬울 것이다.
셋째, 에드워즈는 그때까지도, 자신이 자기기만에 속은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을 완전히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버지와 청교도 선배들이 제시한 회심의 단계라는 주제가 의미하는 바를 완전하게 파악하고 넘어선 상태가 아직 아니었다. 따라서 영적인 어려움이 찾아올 때면, 어김없이 자신의 마음이 온전하게 변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여기는 일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일은 에드워즈를 종종 깊은 낙심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되곤 했다.
넷째, 에드워즈의 일과는 오전 6시에 드리는 예배를 시작으로, 오후 4~5시까지 말도 잘 안 듣는 학생들에게 강의한 뒤, 밤 11시까지 자기 연구를 했다. 더하여, 그는 어려움이 찾아올 때면 그 어려움을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한 모든 영적이고 정신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그것이 정 여의치 않을 때에야 비로소 대화나 여행, 휴식, 운동 등의 자연적인 휴식 수단을 찾았다.10 한 마디로 그는 될 수 있는 대로 쉬지 않으려고 했고, 도저히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잠깐씩 쉬어가려고 했던 것이다.
이렇듯, 어긋나버린 모교 생활에 대한 기대, 많은 업무, 희박한 휴식, 영적인 내적 갈등, 타고난 완벽주의 및 내성적 기질이 한데 어우러지자, 결국 탈진에 이르고 만 것이다. 에드워즈는 아버지를 보러 가던 길에 쓰러져 친구인 아이작 스타일의 집으로 후송되었고, 그 병세가 너무 심하여 어머니가 급히 그 집으로 내려와 그를 따뜻하게 돌보아주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영적으로 무기력하고 힘들었을 때 얻었던 휴식기간이라고 회고했다.11
「그러나 조나단의 일기를 보면, 칼빈주의 성도들은 결코 한결같이 영적 순풍 만을 타고 항해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시기도 하고, 사탄이 그들을 거친 바다에 던져 넣도록 허락하시기도 하기 때문에 신앙이란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종종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것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또한, 종종 스스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조나단은 비록 훗날 그녀(사라 에드워즈)가 아주 어린 시절 회심했다고 인정하기는 했지만, “더 낮은 은혜의 단계에 있을” 때에는 “신앙의 기복을 수없이 반복했음”도 알고 있었다. 그의 설명의 따르면, 그녀는 “우울증에 걸리기 쉬운 체질”(그에게도 있었던 침체에 빠질 성향)이었으며, “종종 쉽게 우울증에 걸렸다.”12
로이드 존스 박사는 당시 잉글랜드에서 시작되고 있는 교리적 기독교를 회복하는 운동의 중심에 있는 인물이었다. 4년 뒤, 그러니까 1949년에 이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목사가 잠시 우울증을 앓았을 때, “번쩍이는 빛처럼” 그에게 도움을 준 것은 우연히 읽게된 핑크의 한 설교 말씀이었다.13」
아무리 거듭나서 천성(天城)을 바라보며 항상 기쁨으로 살아가는 성도라고 해도, 육체를 지니고 있는 이상 여러 가지 한계와 기복을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탈진에 이르기 전에 미리미리 적절한 휴식을 취하여, 몸과 마음이 혹사당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그러면서 계속 영적인 열심을 내어 경건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또한, 침체의 골짜기를 지나는 형제·자매가 있다면 그들을 잘 도와주어야 한다. 더욱 깊은 근심과 회의에 잠기게 하지 말고(그러기 쉬우니 조심해야 한다), 참된 온유와 긍휼로서 그들이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옆에서 기도와 권면으로 도와주어야 한다. 그리하면 성령 하나님께서 침체 속에 무뎌진 그의 영적인 감각을 새롭게 하여, 다시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안식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게 인도하실 것이다. 한 사람이 넘어지면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바로 성도가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67.
2 위의 책, pp. 136, 140.
3 위의 책, pp. 135~139.
4 위의 책, pp. 134, 135.
5 위의 책, p. 94.
6 위의 책, pp. 93, 150.
7 위의 책, p. 151.
8 위의 책, p. 152.
9 위의 책, pp. 160, 161.
10 위의 책, p. 168.
11 위의 책, pp. 168, 169.
12 위의 책, p. 169.
13 이안 머레이, 『아더 핑크(The Life of Arthur W. Pink)』, 김원주 옮김, 복 있는 사람, 2013, p.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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