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걸러내기」 교회를 다니지만 교리를 알지 못하는 이에게
신요한
“시모어 경(卿), 제 말을 믿으십시오. 교리문답(catechism) 없이는 주님의 교회는 보존될 수 없습니다. 교리문답은 마치 좋은 씨앗이 시들지 않고 세대와 세대를 이어 번성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1
– 존 칼빈
교리란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당신은 ‘교리(敎理)’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제가 예전에 다녔던 교회의 청년들은, 교리에 대해 ‘법률과 같은 것’, ‘보수적이고 구시대적인 것’, ‘딱딱하고 재미없는 것’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왜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까요? 이는 교회가 교리보다는 삶에 초점을 맞추고 성도를 양육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한때 교회의 정체성이며 보물과 같았던 교리(신앙고백 및 각종 신조, 교리문답 등이 포함됨)는 어렵고 고루하며 무가치한 것으로 전락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교리(敎理)의 정의를 명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교리는 본래 ‘종교적인 원리나 이치, 진리라고 규정한 신앙의 체계’를 이르는 말로써, 간단히 말해 ‘하나님의 말씀(성경)이 가르치는 내용’을 뜻합니다. 이를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에서는 “성경은 첫째로 사람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그리고 둘째로 사람이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지를 중요하게 가르친다”2고 좀 더 자세히 진술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리는 우리가 믿고 행하는 바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분별하게 하는 기준입니다. 교리는 진리의 성전인 교회를 지탱하고 있는 중요한 기둥으로서, 교회는 교리 없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옛 이스라엘 백성을 보시고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 4:6).”라고 탄식하셨으며, “이러므로 나의 백성이 무지함을 인하여 사로잡힐 것이요 그 귀한 자는 주릴 것이요 목마를 것이며(사 5:13)”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라고 약속해 주시면서,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렘 3:15).”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해주시며, 그 계시를 가르치고 배우는 지식, 즉 교리로써 당신의 백성을 양육하십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교리적일 때, 가장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교리적인 기독교야말로 사람을 가장 많이 변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생활의 원동력은 감정적인 충동이나 고양으로 말미암지 않고, 진리에 의해 무엇이 올바른지 깨닫고 이해하는 것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3
교리 없는 삶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습니다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면, “그리스도를 향한 진정한 사랑만 있으면 된다.”거나, “중요한 것은 교리가 아닌 삶이다.”라고 하는 사람들이 꼭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 없는 사랑은 있을 수 없으며, 교리 없는 삶은 무가치합니다. 이에 대해 칼빈의 말을 들어보겠습니다.
“사랑은 믿음과 소망보다 먼저 있다고 하는 스콜라 철학자들의 가르침은 미친 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 속에서 처음으로 사랑을 일으키는 것은 오직 믿음이기 때문이다.4
믿음의 근거는 무지가 아니라 지식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은 하나님뿐만 아니라 신적인 뜻에 관한 지식이다. ……(중략)……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화목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시라는 것과 또한 그가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의와 성결, 생명으로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다.”5
우리는 알지 못하는 존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대상이 어떠한가를 알지 못하는 사랑, 즉 지식 없는 사랑은 결국 맹목적인 사랑이 되고 맙니다. 그런 사랑은 자기중심적이기에 자기만족을 무엇보다 우선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런 자신을 여전히 위로하고 합리화하기 바쁩니다. 한 마디로 위선과 거짓 사랑으로 변하고 마는 것입니다.
교리 없는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을 나무로 치면, 교리는 나무를 지탱해주는 뿌리에 해당합니다. 뿌리 없이 열매가 맺히기를 바랄 수 없는 것처럼, 교리 없는 삶은 결국 그리스도가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한 삶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교회는 이런 지식 없는 사랑과 삶을 추구하다가, 결국 하루에 열두 번도 넘게 변하는 인간적인 감정에 중심을 둔 신앙이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교리가 없는 삶의 문제에 대해, 구(舊) 프린스턴 신학교의 교수였던 메이첸은 이미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나의 친구들이여, 속지 말라. 사람이 무엇을 믿는가 하는 것은 크게 중요치 않다는 이러한 생각, 교리는 중요치 않고 생활이 우선이라는 이러한 생각은 사단의 병기 창고 전체에서 발견될 수 있는 가장 악마적인 오류들 중의 한 가지이다.”6
교리와 사랑과 삶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리는 우리 삶의 기초이며, 사랑의 근거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칼빈은 종교개혁의 성공 여부가 전적으로 교리 교육에 달려 있다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교회가 교리에 의해서 권위를 얻게 된다고 역설했습니다. 교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며, 신자들의 신앙은 교리에 의해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교리의 존재가 곧 교회의 존재며, 교회의 존재는 교리의 존재라고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교리는 그 어떤 것도 자체적인 권위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교리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었습니다.7
이처럼 교리가 없는 교회는 존재할 수 없으며, 바른 교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교리는 그만큼 교회와 우리의 신앙생활에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합니다.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적인 신앙생활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입니다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적인 신앙생활은 결국 공허하고 비참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교리가 모습을 감춘 오늘날의 교회에서는 찬양(주로 CCM)도 열정적으로 부르고, 기도도 울부짖으면서 하는 사람을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교리가 없으니 감정에 불타오르는 정도로 신앙의 건전성을 헤아려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결과, 현대 신자들은 예배당에 불타오를 준비와 기대를 하면서 나옵니다. 무언가 이해하고 파악하기도 전에, 대강 분위기만 잡으면 이미 반쯤은 자신의 감정에 취해 있습니다. 그들은 감격해 눈물도 흘리며, 하나님의 은혜(?)에 흠뻑 빠져 말할 수 없이 행복한 표정도 짓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멀리 내다볼 것도 없이, 설교만 시작되어도 그 엄청난 은혜는 단잠으로 바뀌어버립니다. 그러니 예배를 드리는 시간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들의 삶은 불신자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일반적인 행태가 이와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런 현상을 세상의 공연장에서도 똑같이 엿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관객은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보여줄 공연에 빠져들어 갈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공연장을 찾습니다. 감미로운 발라드풍의 노래가 나오면 마치 황홀경에 빠진 것처럼 어쩔 줄 몰라 하며, 박자가 빠른 댄스 음악이나 곡조가 격렬한 록 음악이 나오면 마치 미친 사람처럼 날뛰며 열광합니다. 이들도 이때만큼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도 오래가지 못하며 허전함과 허무함에 무너져 내립니다. 그리고 이내 공연장을 다시 찾고 맙니다.
이렇듯, 교리가 없는 감정 중심의 교회는 결국 사람의 감정만 잔뜩 부풀려놓는다는 점에서 세상 공연장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감정이 폭발할 때는 천국 가장 높은 곳을 거닐다가, 이내 지옥 가장 밑바닥을 기어 다닙니다. 실제 삶은 전혀 변하지 않으며, 부풀어 오른 감정에 속아 진정 은혜를 받은 것처럼 착각하게 됩니다.
일반적인 교회수련회나 찬양집회에 열심히 참여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준도 기초도 없는, 그저 자기 감정적 욕구충족에만 매달리게 하는 신앙생활이 과연 제대로 된 신앙생활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렇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허무함과 회의감에 시달리고 있습니까? 교리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로, 그저 감정적 열심만 앞세운 결과가 이처럼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있는 저 역시도 이 문제의 중요성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무지한 그리스도인 중 하나였습니다. 20년 이상 교회를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교리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였으니, 제 신앙생활은 안정적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 교회 대부분이 이런 오류에 빠진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며, 그것이 오류인지조차 모르고 있는 일은 뭐라고 더 말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비참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이런 오류를 점점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진정 올바른 기독교인지 지도해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신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신학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저는 신학교 도서관에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바른 믿음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섭리 하심으로 개혁주의 책을 접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밴드 오브 퓨리탄스’8라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까지 성경적인 것이 무엇인지 잘 분별하지 못했던 저는 이때부터 개혁주의 신학에 기초한 참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배우게 되어,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달라져 갔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깨달은 중요한 사실은, 이 시대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앞서 말했듯이 ‘교리의 부재(不在)’라는 것입니다. 교리 부재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밴드 오브 퓨리탄스’의 오인용 목사가 쓴 다음의 칼럼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처럼 기독교에서 파생한 이단이 많은 나라가 세상 어디에 있는가? 세상에서 유명하다는 이단은 한국에 다 모여 있다. 이것은 그저 웃고, 울고 불면서, 감동과 은혜만 있으면 된다는 이들의 잘못된 영적 취향이 만들어낸 사이비 신앙이다. 목회자들은 자기가 목양하는 교회에서 철저하게 교리를 가르쳐야 한다. 교리를 가르치면서 성경을 가르쳐야 하는 것이다. 교리 없는 기독교가 결국 지금에 와서 무너지는 것을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는가?
사악한 로마 천주교도 마귀적인 자기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치는데, 정작 개신교는 성경의 교리를 오래 전에 폐기처분해서 교회가 거덜이 나고 있다. 교회에서 허수아비 같은 명목상의 교인들이 양산되어, 사회의 독(毒)이 되는 이유는 성경 교리를 배우지 못하고 교회에서 헛된 설교를 들으며 자라기 때문이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성도는 죽는 그 순간까지 교리를 공부하고 성경을 배워야 한다. 교리 공부를 졸업하는 날은, 그가 죽어 장사되는 날이다.”9
저는 이 칼럼을 처음 봤을 때 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떻게든 좋게만 포장하려는 교리 없는 교회를 향한 일침이었고, 교리 없는 상황의 심각성을 경고하고 깨우쳐주는 글이었습니다. 이 칼럼은 교리를 배우지 못한 그리스도인은 살아 숨쉬지 못하는 허수아비와 같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알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히 교리를 공부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바른 교리를 통해 성경을 올바르게 배우는 일에 뿌리를 두기 때문입니다. 감상적인 신앙생활은 결코 온전한 열매를 맺을 수 없으며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꼴입니다.
교리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신앙생활의 지표입니다
교리를 강조하면, 사람들은 “성경만 읽으면 된다.”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이 말에는 아주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체적으로 읽지 않으면, 결국 자기만의 틀에 갇혀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왜 생겨났겠습니까? 성경을 보기는 했으나, 자기만의 기준에 억지로 성경을 끼워 맞추며 읽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칼빈이 교리에 대해 강조한 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비록 성경이 그 누구도, 아무것도 첨가할 수 없는 완전한 교리를 포함하고 있기는 하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안에 그의 지혜의 무한한 보화들을 보여 주시기로 의도하셨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학습하지 않은 자는 어느 정도의 지도와 안내를 받아야 할 상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 안에서 찾아야만 하는 바를 알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고 확실한 길을 붙잡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언제나 성령께서 그를 부르시는 목표를 향하여 전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중략)…….
이 책(기독교 강요)이 적어도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로 하여금 성경을 선하고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로 나아가게 하는 길을 열어 주는 열쇠의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고 약속한다.”10
이처럼, 교리는 잠긴 문을 여는 열쇠와 같으며, 흐릿하고 부정확하게 보이던 사물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는 안경과도 같습니다.
한편,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각종 이교(異敎)의 가르침이 교회 안으로 들어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경이 아닌 사람들의 취향과 눈높이에 맞춰지고 있습니다. 여기가 교회인지 문화센터나 카페인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교회는 좌우를 분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다 교회가 이렇게 돼버린 것일까요? 바로 교리를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이 성경적인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작성자인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는, “오늘날 온갖 교리의 풍조에 이리저리 밀리는 자들이 그렇게 많고, 또한 그리스도께로부터 적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가는 자들이 그렇게 많은 원인이 바로 교리문답을 소홀히 하는 데 있다.”11라고 했습니다. 또한, 마틴 로이드 존스도 다음과 같이 지적했습니다.
“교회 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定義)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하도록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교리를 함께 고찰해 보는 일이 지금보다 더 긴급하게 필요한 때는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떤 토대에 서 있는지 알아야 하며, 우리를 공격하기 위해 오는 모든 원수, 모든 교활한 원수,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고 오는 마귀가 사용하는 모든 계략을 알아야 합니다.”12
제가 신학대학교에 다닐 때, 한 학우와 하나님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그 학우는 하나님을 긍정의 하나님으로만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긍정적이기만 하신 분으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처럼 긍정적이시라면, 왜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그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겠는가? 이처럼 죄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자 그 학우는 돌연 제가 이단 같다고 답했습니다. 그런 반응에 저는 정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신학생들조차도 성경보다는 자기 경험과 체험으로 형성된 자기만의 기준을 따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습니다.
이는 참으로 전선(戰線)에 나간 군인이 자기 적과 임무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사람은 전선에서 북한군을 만나면, 우리 동포니 뭐니 하면서 얼싸안으려다가 총에 맞아 죽고 말 것입니다. 또, 인체를 잘 모르는 의사가 칼을 잡고 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당신은 그에게 자기 몸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사람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일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는 기본 중의 기본임에도, 유독 그리스도인만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면 그리스도인답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훈련을 받는다는 신학생이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목회자조차도 자기 정체성과 임무를 잘 모르고 있으니, 참으로 비탄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에 다니면서도 체계적인 교리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겸비한 마음으로 자신이 기독교인이면서도 기독교를 잘 알지 못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보다는 내 경험과 감정과 생각을 신뢰했기에, 무엇을 믿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해 늘 불안하고 참된 기쁨이 없었으며, 하나님보다는 원수 마귀를 기쁘게 했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자기 비참함을 알 때, 비로소 하늘을 향해 머리를 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먼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얼마나 부족한가를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나님께 참으로 은혜를 구하며 달게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가 교리를 몰랐을 때는, 이단을 만나더라도 그들이 왜 이단인지 몰라 그들을 그저 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에서 포교하는 여호와의 증인이나 하나님의 교회 사람들을 만났을 때는 그들의 주장에 쩔쩔매면서 황급히 자리를 뜨기 일쑤였습니다. 기독교의 근본 교리인 삼위일체 교리조차도, 성경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서 누군가 무엇을 알려주면,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사람들을 보며 정말 신기해했습니다. 비록 방언하는 사람들이 이상하게 보이기는 했지만, 오히려 그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습니다. 교회가 사람을 끌어모으기 위해 세속 문화를 받아들이는 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오게 하려고 그 열심을 본받지는 못할망정, 어떻게 비판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듯, 교리를 모르면 마귀의 계략에 보기 좋게 넘어가 허우적거릴 수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교리를 모르니, 성경을 읽어도 무언가 성경의 가르침과 진정 일치하는지 아닌지 가늠해 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를 모르는 사람은 지도도 없이 여행하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지도가 없으면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떤 경로로 따라 무엇을 타고 가야 하는지 몰라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지도가 있으면 지도에 목적지를 표시하고, 목적지까지 경로를 확인하면서 적당한 탈 것을 타고 평안하게 그리로 갈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교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뜻하신 올바른 길을 헤매지 않고 따라갈 수 있습니다.
교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주며, 그분에게 영광 올리는 참된 삶의 목적과 기쁨을 가르쳐줍니다
교리를 알게 되면 무엇보다도 ‘참되신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게 됩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은 하나님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본래부터 그리고 스스로 존재, 영광, 복되심, 그리고 완전함에 영원하시며, 완전히 충족하며 영원하고 불변하며 이해를 초월하고 편재하고 전능하시다. 그는 또한 모든 것을 아시며 가장 지혜롭고 가장 거룩하며 가장 공의롭고, 가장 긍휼하고 은혜로우며 오래 참고, 선하심과 진리가 충만하시다.”13 이 교리에서 나타나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많으시면서도 또한 매우 공의로우십니다.
여러분은 혹시 하나님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으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무지함 속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사랑한다고 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당신이 꿈꾸는 하나님과 실제 하나님은 무척 다르기에, 당신의 신앙고백은 아무리 진솔하여도 당신을 부끄럽게 할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의 참된 기쁨과 위로 역시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교리를 통해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게 되면, 참된 기쁨과 위로 속에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계속 배우다 보면, 하나님께서 오늘도 온 천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신다는 ‘섭리의 교리’도 배우게 됩니다. 그러면 성도는 만사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역경 중에 인내하며 순경(順境) 중에 감사하게 됩니다. 장래 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을 든든히 의지하며, 그 어떠한 일이나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기뻐하게 됩니다. 이는 ‘모든 피조물들이 완전히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어서, 그분의 뜻이 없이는 아무것도 움직일 수가 없다.’14는 사실을 교리를 통해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정의 교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비록 많은 이들이 이 교리를 거북하게 여기고 있지만, 예정의 교리를 통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셨다는 사실의 참 의미를 깨닫게 되면, 그 사람은 참으로 볼품없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앞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택함 받은 것은, 우리가 훌륭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신 은혜이기 때문(엡 1:6)”15입니다.
우리는 그 진리 앞에서 참된 겸손과 기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교리를 알게 되면 신앙생활을 ‘새로 시작한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완전히 바뀝니다.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고,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되며, 느낄 수 없던 것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그럼에도 “교리는 사람을 차갑고 메마르게 한다.”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바른 교리를 지키고 강조한 칼빈주의자들은, 항상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누구보다도 불타는 열정과 뜨거운 가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감격하며 살았습니다. 칼빈주의자인 벤자민 워필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진정한 칼빈주의자는 모든 현상 배후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이 모든 현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보며, 기도하는 태도로 자신의 전 생애를 살아가며, 구원에 있어서 자아 의존을 전적으로 배제하며, 하나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이다.”16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의 설교는 교리 중심적이었으나, 그 설교의 결실은 전혀 차갑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성도가 진리에 대한 사랑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기쁘게 감당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훈과 계명을 저버리느니 차라리 자기 생명을 내놓을 만큼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C. H. 스펄전, 시이저 맬런, 로버트 머레이 맥체인을 비롯한 영국 국교회와 분리해 나온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지도자들은, 설교할 때 늘 교리 전파에 최고의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습니다.17 교리는 사람을 차갑게 하는 것이기는커녕, 오히려 불길이 더 타오르고 지속하게 하는 연료입니다.
다 함께 겸손한 마음으로 교리를 공부합시다
앞선 세대가 그처럼 뜨거운 심령으로 교리를 가르치고 지켜온 결과, 우리는 그 보물과도 같은 교리를 너무나 손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독교 강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과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벨직 신앙고백서 등, 성경의 가르침을 올바르게 알려주는 좋은 책이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기독교 교리를 아직 잘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우선 겸손한 마음으로 이 책들을 통해 교리 공부를 시작하기 바랍니다(롬 10:14, 17).18
앞서 인용한 아더 핑크의 『영적인 실천』에서 나오는 “교리는 인간을 낮추고 겸손하게 함과 동시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라는 말은 참으로 옳습니다. 교리는 인간의 교만한 심령을 낮추어 바닥까지 끌어내리며, 하나님에게 대항하는 인간의 영광을 무너뜨려 하나님 홀로 높임 받으시게 합니다. 교리는 인간을 하나님의 발등상에 붙은 먼지로 격하시킵니다.19
참으로 교리는 진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그 진리를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인생(人生)의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창조된 이유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인간의 삶은 무가치하며, 짐승의 삶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믿으며, 말씀에 순종하여 그 진리를 삶 속에서 나타내는 그리스도인은, 원수 마귀의 그 어떤 공격에도 결코 쓰러지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녀이자 충성스러운 종으로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게 됩니다.
부디, 이 글을 읽는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속에 교리 공부를 통해 하나님 말씀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게 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을 인용하며, 이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궁극적으로 교리 공부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며,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에 들어가며,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경이로운가를 어느 정도 알게 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렇습니다. 계속 성경을 읽고 연구하도록 하십시오. 하지만 세부적인 것들에 매여 헤매지 마십시오. 이 위대하고도 강력한, 교리의 최고봉들을 뽑아내어 그것들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자신의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도록 합시다.”20
각주
1 장수민, 『존 칼빈(신학과 목회)』, 칼빈아카데미, 2010, p. 705.
2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문답
3 A. W. 핑크, 『영적인 실천』, 엠마오, 1985, p. 248.
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상)』,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6, p. 112.
5 Ibid, p. 42.
6 그레샴 메이첸, 『기독교와 현대신앙』, 김효성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1981, p. 95.
7 정준모, 『교육신학자 존 칼빈』, 한들출판사, 2009, pp. 115~116.
8 밴드 오브 퓨리탄스(Band of Puritans), 이곳은 청교도 개혁주의에 기초하여 바른 신앙을 추구하고, 시대를 분별하며 사탄의 다양한 세력들을 드러내고 미혹과 배도와 배교의 세력들에 대항하는 곳입니다. http://cafe.naver.com/thebandofpuritans
9 http://cafe.naver.com/thebandofpuritans, 오인용 목사, <교리 없는 기독교의 재난>, 2012
10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6, p. 59.
11 자카리아스 우르시누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해설』, 원광연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6, p. 58.
12 마틴 로이드 존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임범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7, p. 27.
13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제7문답
14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문답
15 마이클 호튼, 『은혜의 복음이란 무엇인가』, 윤석인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4, p. 130.
16 헨리 미터, 『칼빈주의』, 박윤선, 김진홍 옮김, 개혁주의신행협회, 1959, p. 18.
17 A. W. 핑크, 『영적인 실천』, 엠마오, 1985, p. 253.
18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4, 17, KTV)
19 A. W. 핑크, 『영적인 실천』, 엠마오, 1985, p. 254.
20 마틴 로이드 존스,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 임범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7, 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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