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3) 방황
김재호
「”그렇다면 왜 그렇게 멍하니 서 있는 겁니까?”하고 전도자가 다시 물었을 때 그 사람이 대답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몰라서 그럽니다.” 그러자 전도자는 양가죽으로 만든 두루마리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 거기에는 ‘장차 올 진노를 피해 떠나라.’라고 쓰여있었다.
이 글을 읽은 후 그 사람은 전도자를 주의 깊게 바라보면서 “어디로 떠나야 할까요?”하고 물었다. 전도자는 손을 들어 저쪽으로 뻗은 넓은 평야를 가리키면서 “저쪽에 있는 좁은 문이 보입니까?”하고 물었다. “안 보이는데요.”하고 그 사람이 대답하자 전도자가 다시 물었다. “그럼 저쪽에서 빛나고 있는 밝은 광채는 보입니까?”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럼 그 광채를 바라보면서 똑바로 올라가 보십시오. 그러면 좁은 문이 나타날 것이며 문을 두드리면 누군가 나와서 당신이 어떻게 해야 좋을 지를 가르쳐줄 것입니다.”」1
기록된 말씀을 통해 성령 안에서 참된 빛을 받은 이들이라도, 곧바로 “이제 이렇게 하면 되겠다.”라고 깨닫지는 못한다. 오히려 대부분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고작 하나님의 엄청난 진노가 코앞까지 닥쳐왔다는 것뿐이다. “여기서 벗어나야만 한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가야 한다. 이대로 있으면 모든 것이 실로 무의미하고 허망하다.” 이 사실은 그 누구보다도 더 잘 안다.
그러나 ‘어떻게’ 벗어나는가? 그렇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들은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물론, 성경은 그 답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그러나 그들의 눈에는 그 모든 것이 나무 같은 것의 걸어감과 같다(막 8:24). 성경이 분명히 무언가를 말해주고 있는데, 정확히 무엇을 말하고 누구를 가리키는지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다.
어디론가 가기는 가야겠는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너무도 캄캄하다. 마치, 그들은 사람으로 가득한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친 어린아이와도 같다.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걱정하면서, 겁에 질려 울고 불며 엄마를 찾아 사방을 헤매고 다닌다. 그러다 얼마 못 가 주저앉는다. 그저 목놓아 우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한다. 그들에게는 진정으로 도움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한다.
“빌립이 달려가서 그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지금 읽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가 말하기를 ‘나를 지도해주는 자가 없으니, 내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하고, 빌립에게 마차에 올라 자신과 함께 앉기를 청하였다.” (행 8:30,31, 바른 성경)
“그가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서 서 있는 다른 이들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말하기를 ‘왜 당신들은 온종일 할 일 없이 여기에 서 있소?’ 하니, 그들이 말하였다. ‘아무도 우리를 고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당신들도 포도원에 들어가시오.’라고 하였다.” (마 20:6,7, 바른 성경)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들을 돕기 위해 올바른 사역자를 보내주신다. 그들은 주님을 찾는다고 나서는 이들 중에 과연 어떤 이가 진정 세상과 결별할 만한 상태인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참으로 도움이 필요한 영혼에는 장차 맞이하게 될 수많은 갈림길의 존재를 알려주면서, 오직 좁은 길을 따라가라고 한다.
이들은 대체 왜 이런 권면을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저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는 바로 그분께서 그들을 좁은 길 끝에서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일까? 그것은, 본인이 이미 그 길을 따라가서 그분을 만나 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처럼 방황하는 영혼을 돕는 이들을 이렇게 그리고 있다.
“추수하는 자가 품삯을 받고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거두어들이니, 심는 자와 추수하는 자가 함께 기뻐할 것이다.” (요 4:36, 바른 성경)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으니,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그의 추수를 위하여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하여라.’” (눅 10:2, 바른 성경)
여러분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을 얻었다면, 이처럼 주님을 찾아 헤매며 어찌할 줄 모르는 이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는 일에 참된 긍휼을 품고 함께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들에게 썩을 육체가 가장 애착을 품는 바로 그 죄를 떠나라고 조언해줘야 한다. 그 썩을 일들이야말로 사람을 넓은 길로 치우치게 하는 원수이며, 그 끝에는 사망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라고 가르쳐줘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을 풀어서 속으로 여전히 옛 육체를 사랑하는 이들은 절대로 갈 수 없는 심히 험난하고 가파른 ‘그 길’을 따라가야만 한다고 가르쳐줘야 한다. 물론, 목회자가 이런 일을 가장 크게 감당한다. 누구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회자만 이런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말에는 누구나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따라서 여러분이 진정 성도라면 이 일에 항상 힘써야 한다. 이 일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외 없이 자기 환경과 영역 안에서 힘써야 하는 거룩한 의무다.
반면, 이 세상에는 이렇게 방황하는 이들을 넓은 길로 인도하려는 자들도 있다. 그들을 따라가는 사람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영적인 재난을 당한다. 그런 재난 속에서 결국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명목상의 신자도 실제로 나오게 된다. 이들은 참으로 주님께 품삯을 받은 적도 없는 거짓 일꾼이다. 그러나 이런 자들일수록 겉모양이 더 번드르르하고 화려하다. 번쩍번쩍하고 온갖 신기한 일들이 잇따른다. 사람도 많이 모이지만, 그 속에는 정작 중요한 알맹이인 거룩함만은 빠져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런 자들이 나타날 것을 이미 경고하고 있다.
“그 날에 많은 이들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들을 행하지 않았습니까?’라고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하기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할 것이다.” (마 7:22,23, 바른 성경)
“이런 규정들은 자의적 경건과 거짓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에는 지혜의 모양을 가지나,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에는 무익하다.” (골 2:23, 바른 성경)
따라서 우리는 회개와 성화의 중요성을 약하게 하는 ‘기복 신앙’과 ‘능력 전도’를 가르치는 이들을 배나 더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많은 면에서 옛 육체의 소욕에 호소한다. 그들을 따르면 따를수록 더 거룩해지는 대신, 세상을 향한 사랑이 늘어가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닌 온갖 신비한 일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세상 사람들도 좋게 대하며 즐길 수 있는 것들이다. 한번 양심적으로 대답해보라. 그 길 끝에 과연 거룩하신 주님께서 서 계시겠는가? 이들이 제시하는 그 길 끝에는 실로 낭떠러지가 있을 뿐이다.
주님께서는 방황하는 영혼을 무한한 긍휼을 품고 바라보고 계신다. 문이신 당신을 통해 영원한 피난처로 그들을 들이고자 하시는 열심을 품고 계신다. 따라서 우리는 그들을 인도할 만한 선한 자들이 되려고 매사에 힘써야 한다. 또, 그런 선한 인도자를 더 많이 보내달라고 간구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간구와 손길을 통해, 방황하는 저 가여운 자들을 영원한 의의 나라로 불러들이실 것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p. 37,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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