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대중문화 진단1」 그리스도인과 문화
김재호
문화는 기본적으로 그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정서와 가치관에 의해 형성되고 발전한다. 쉬운 예로, 우리 민족은 기본적으로 둥글둥글하고 정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도드라지는 것을 꺼리고 무엇이든지 원만하게 하나로 엮으려는 성향이 강하다. 그런 민족 정서와 가치관은 모든 일에 구심점 노릇을 해 줄 권위 있고 능력 있는 인물이나 기준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열망을 공유하게 했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그럴 만하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나 기준이 공식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 너나 할 것 없이 그리로 몰려들어 힘을 보태고 보호해주려고 한다. 2002년 월드컵, IMF 금 모으기 운동, 새마을 운동 등과 같이 세계 역사에서 좀처럼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발적인 사회, 문화적 현상은 그러한 민족 정서가 빚어낸 대표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문화의 치밀함과 철저함, 그리스 문화의 자유분방함과 합리성, 로마 문화의 실용성, 중국 문화의 호방함과 다양성 등도 다 그 나라의 민족 정서와 가치관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문화에 접근할 때, 항상 사람의 정서가 지니고 있는 기본 속성을 잘 파악한 상태에서 접근해야 한다. 미국물 3년만 먹으면 반은 양코배기가 되어 온다는 말처럼, 사람은 문화를 통해 전달되는 정서적 특징에 쉽게 동화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문화에 잘못 접근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기본 특징을 다 잃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 이에 관해서는 로마 시대에 일어난 한 사건이 좋은 본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그리스도인은 로마인들이 사랑한 원형경기장 난투극을 천벌 받을 살인의 죄악으로 여기며 최대한 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친구였던 알리피우스는 몇몇 친구의 권유에 못 이겨 원형경기장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눈을 꼭 감고서 잔악하고 포악한 장면을 보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그러나 갑자기 사방을 뒤흔드는 큰 함성이 들려오자,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눈을 뜨고 말았다. 그는 눈앞에 어떤 광경이 벌어지더라도 무시하기로 단단히 마음먹었었지만, 그런 결심은 경기장에 가득한 피를 보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는 흥분하여 고함치고 날뛰며 경기에 빠져들어 갔다. 심지어 자리를 떠날 때도 흥분이 가라앉지 않아서, 잔뜩 상기된 채 친구들을 인솔하여 그곳을 떠나갈 정도였다.1 잠시 방심했다가 그리스, 로마 문화의 육적이고 방탕한 정서에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의 정서가 무엇이며 어떻게 작용하는지 잘 이해하고 대응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 문화라는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파선하는 일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1. 정서를 이해하는 기초 토대
사람의 정서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접근하려면, 우선 정서가 절대로 ‘자유롭게’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 시대의 문화는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문화이기에, 사람들은 마치 자기 정서가 참으로 자유로운 상태에 있다는 잘못된 인상을 받기 쉽다.
그러나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정서는 마음의 성향이라는 주인에게 철저히 복종하는 충직한 노예와도 같다. 정서는 마음의 성향이 가리키는 방향과 일치하는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반대 방향에 서 있는 것을 미워한다. 정서는 마음의 성향이라는 주인이 없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어떤 것을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계속 ‘혼란스러워’할 따름이다.
또한, 정서를 올바르게 대하려면, 정서가 본질적으로 동적(dynamic)이며 느낌(feel)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사실도 잘 이해해야 한다. 이 세상에 정적(static)으로, 다시 말해 기계적으로 정서 활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정서가 작용하려면 우선 움직여야만 한다.
이처럼 사람의 정서 활동이 근본적으로 동적인 성격을 지니므로, 정서는 어떤 대상과 직접 접촉하여 무엇이 어떠하다는 사실을 ‘실시간으로 감지해내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더불어 그러한 작동 방식으로 인해, 정서 활동을 따라 전해지는 정보도 자연스럽게 유동적인 속성을 물려받는다. 그러므로 정서를 통해 전달되는 모든 정보는 어느 정도의 가변성(可變性)을 내포한다. 사람의 정서 활동은 그 가변적 속성으로 인해 언제나 ‘~인 것 같다.’라는 결과물을 내놓는다. 다시 말해, 정서적 정보는 어떤 요인에 의해 그 내용이 변할 수 있는 여지를 언제나 포함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도 하나님께만 있는 무한성이 존재했다면, 사람의 정서적 정보는 가변성을 내포하지 않고 영원한 현재라는 계속성을 내포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은 그리스도의 나라가 ‘영원할 것’을 선포하지, ‘영원할 것 같음’을 선포하지 않는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성자 하나님을 더 사랑하거나 덜 사랑하지 않으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계속해서 사랑하신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처럼 무한하지 않고 유한하다.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정서 활동을 통해 얻은 정보가 일정한 범위 안에서만 움직여 다닐 수 있게 하는 건전한 지성적 테두리가 필요하다. 만약 정서가 그러한 지성(知性)의 역할을 거부한다면, 정서는 결국 엎질러진 물이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되는 신세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정서가 만약 지성의 확인과 확증 과정을 수용하여 일정한 기본 범주 안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정서는 지성의 불변성을 물려받은 상속자가 된다.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자유자재로 모습을 바꾸면서, 어떤 대상의 특징을 계속 포착해내어 그 대상의 다채로운 측면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쉬지 않고 하게 되는 것이다.
정서가 그렇게 활발하게 활동하기 시작하면 지성도 그 영향을 받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지성은 앵무새처럼 틀에 박힌 말만 반복하는 고리타분한 지성이 아니라, 사방팔방으로 불을 토해내는 ‘불타는 지성’이 된다. 그런 지성은 어떤 사실을 말할 때 냉랭하게 말하며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뜨겁게 불타오르면서 수없이 다양한 방식과 맥락으로 사실을 전달한다. 그 사실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목숨도 내어놓기를 마다치 않는 뜨거운 열정이 스며들어, 전해지는 사실이 살아 숨 쉬게 된다. 이는 지성이 정서의 동적 속성을 물려받아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게 되는 현상이다.
이처럼 정서와 지성은 세속 철학과는 다르게 어느 하나가 우월하거나 열악하지 않고, 서로 도우며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어떤 사상 체계나 지적 결과물을 볼 때는 그 결과물 자체보다도, 그런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원동력을 제공해주는 동기나 전제를 훨씬 더 눈여겨봐야 한다. 그런 동기나 전제가 없었다면, 그러한 결과를 낼 수 있는 지점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동기나 전제를 제대로 파악하는 데 실패하면, 그 사상 체계에 담긴 진행 방향과 함의를 파악하는 일에도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19, 20세기의 교회는 이러한 사실의 중요성을 간과했다가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그때 교회는 고등 비평이라는 지적 골리앗 앞에서 심하게 요동했다. 그동안 교회가 굳게 믿고 고수했던 성경의 역사성과 신뢰성은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고, 많은 이가 성경이 명제적 진리(propositional truth)를 진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포기하고 말았다. 성경이 그런 진리를 말하고 있다고 끝까지 고수한 이들은 꿈과 현실, 전설과 역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광신자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토록 합리성과 객관성을 부르짖던 고등 비평이, 결국에는 각자가 소망하는 기독교나 예수를 만들어낼 뿐인 지극히 주관적인 학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시 말해, 고등 비평을 그 자리까지 올려놓았던 근본 정서와 전제가 심히 뒤틀려 있고 모순적이라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진 것이었다.
그 결과, 현재 고등 비평은 학문적인 동력 대부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만약 19, 20세기의 교회가 고등 비평을 가능하게 한 정서적 동기와 전제가 무엇인지 처음부터 파악하고 대응했다면, 그 세련되고 정교한 비평 작업물의 홍수 앞에서도 별로 흔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지적 결과물이 양산되는 현상을 아주 흥미롭게 바라보면서, 그것이 어떤 정서와 도움을 주고받으면서 나온 결과물인지 꾸준히 추적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해당 정서를 붙들어준 마음의 근본 성향을 밝혀내고, 그 성향 자체를 성경에 근거하여 집중적으로 다루었을 것이다.
이처럼 마음의 성향은 정서를 움직이고 정서는 가치관(세계관)을 만들어낸다. 사람은 그렇게 형성된 각자의 세계관(문화)을 따라 장차 있을 일을 대비하고 지난 일을 평가하면서 살아간다. 그런 과정 가운데 해당 문화가 떠받들고 있는 정서는 더욱 힘을 얻고, 해당 정서를 붙들어준 마음의 성향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그런 견고함 속에서 역사와 전통이라는 열매가 맺히며, 그 열매는 별일 없는 한 후대로 계승된다. 이처럼, 문화는 사람의 정서라는 바탕 위에서 마음의 성향이라는 물을 먹고 자라나 결실하는 열매와 같은 것이다.
2. 죄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
그러므로 유익하고 올바른 문화가 형성되고 결실하려면, 사람이 진실한 마음으로 유익하고 올바른 것들을 선택하고 추구하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이 ‘근본적으로’ 무익하고 그릇된 것을 추구한다는 것에 있다. 이에 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여호와께서 그 땅에 사람의 죄악이 많고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다(창 6:5, 바른 성경).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들을 살피시며, 명철하여 하나님을 찾는 사람이 있는가 보시니, 모두 치우쳤으며 한결같이 타락하여 선을 행하는 사람이 없으니, 하나도 없구나(시 14:2~3, 바른 성경).
보아라, 이것이 내가 깨달은 유일한 것이니, 하나님께서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인간들이 많은 꾀를 생각해 냈다는 것이다(잠 7:29, 바른 성경).」
실제로 자연인의 마음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잘 추적하고 관찰하여 종합해보면, 위의 성경 말씀이 참으로 진실하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쉬운 예로, 사람은 보편적으로 올바르고 선한 교훈을 들으며 자라난다. 부모나 선생님이 아이에게 형제나 친구들과 다투고 싸우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유치원 선생님이 아이에게 거짓말 조기 교육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착하고 겸손하며 올바른 인물로 자라가라고 끊임없이 훈계하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에게서도 배우지 않은 나쁜 것들을 스스로 깨우쳐서 실행에 옮긴다. 남자라면 분명히 부모님께서 아끼시는 물건을 망가뜨리거나 깨뜨려놓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위장해 본 일이 다들 있을 것이다. 여자라면 자신보다 잘나고 예쁜 아이를 뒤에서 몰래 헐뜯으면서 고소함을 느꼈던 경험이 다들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보다 더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 보이는 사람의 반응이다.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고 먼저 사과하며 피해를 배상하려는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옮길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우리 마음은 그런 상황과 마주하면 우리가 저지른 일의 그릇됨보다도, 그런 일로 인해 우리에게 돌아올 피해에 ‘자연스럽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가능한 해를 입지 않기 위해 애를 쓰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내가 저지른 일의 그릇됨에도 눈길을 주기 시작한다.
그래서인지 이 세상에는 잘못을 저질렀어도 손해를 입지 않는 방법이 아주 많이 개발되어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귀신 작전’이라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문제의 본질보다도 우선 상대방의 결점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피장파장의 형국을 조성한 다음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타협하거나 아예 없던 일처럼 덮어버린다. 세상은 그런 일 처리 방식을 지혜롭고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이처럼 사람의 마음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헤아리는 것보다도 자기 손익을 따져보는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자신에게 손해가 돌아온다 싶으면 옳고 그름 자체를 뒤엎어버리려고 날뛰는 경우가 그토록 많은 것이다. 또한, 옳은 것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일과 잘못된 일을 하지 않기 위해 자기 유익을 포기하는 일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엇이 참으로 올바르고 유익한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자신을 유익하게 하는 그릇된 길을 사랑하며 그쪽으로 발길을 옮기기를 좋아한다. 마치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에 모두 공감하고 지지했던 수많은 쥐 가운데, 정작 그 일을 실행할 쥐를 찾는 데는 실패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사람의 근본 마음은 자기 유익에 쏠려있으므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선한 일 대부분은 사실 ‘마지 못해서’ 하는 것에 불과하다. 필요악이 아니라 필요선인 셈이다.
실제로 이 세상의 수많은 이가 ‘어쩔 수 없이’ 선을 행한다. 쉬운 예로, 우리 시대 여성들은 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사람다운 사람으로 길러내는 지극히 귀하고 선한 일에는 별로 큰 의의를 두지 않고 살아간다. 로마 제국이 그토록 거대한 제국을 이루는 일에 로마 여성들의 견실한 자녀 양육이 주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을 알고 주목하는 여성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대신, 사회에 나가 자기 꿈과 능력을 펼치고 발휘하는 ‘자아실현’적인 삶을 살고 싶어하는 여성은 쉽게 만나볼 수 있다. 그들이 자기 꿈과 능력을 펼치려는 과정에서 참으로 고귀한 자녀 양육은 할아버지, 할머니 또는 학교, 학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런 그들에게 유년기 아이에게 어머니의 역할과 책임이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이야기해주면 대부분 공감하면서 인정한다. 그러나 그 일을 위해서 내 꿈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러다가 부모님 건강 악화와 보육 시설 부족이라는 큰 어려움이 찾아오면, 눈물을 머금고 집에 들어와 그 귀하고 선한 일을 ‘마지못해’ 떠맡는다. 그러니 ‘자아실현’을 위해서 최대한 부모 봉양과 효도를 외면하다가, ‘마지못해’ 부모 노후를 함께하면서 유산이나 탐내는 그릇된 시대상이 허다해 진 것도 그리 이상하다고 할 수만은 없다.
이처럼 이 세상의 선함은 자기를 사랑하고 위하는 근본 성향이 큰 고통과 어려움으로 인해 좀 수그러드는 정도와 정비례한다. 마치 조련사의 채찍을 감당할 수 없는 사자와 코끼리가 상당히 온순해지고 사람과 꽤 친밀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짐승의 야성 본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지못해 잠시 수그러든 것이다. 아무리 조련이 잘 된 사자라도 사람이 등을 보이면 본능적으로 달려들게 되어 있다. 그와 같이 아무리 선한 일의 유익과 좋은 교육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일지라도, ‘자아실현’이라는 냄새가 그 코를 자극하기 시작하면 다 ‘선한 사람’이라는 명찰을 내던져버리고 ‘자아실현’을 손에 쥐려고 하게 된다.
이런 일은 사람의 근본 성향이 하나님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쏠려 있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 사람들의 정서나 가치관(문화)에서 온전한 열매가 열릴 것을 기대하는 일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에서는 채찍을 피하고 살코기를 얻어먹기 위해 발톱을 감추고 꼬리를 내리는 정도의 선함밖에 기대할 수 없다.
3. 세상 풍조를 멀리함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어떤 문화에 동화되거나 친밀해지는 일이 근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어떤 문화가 일부 선하고 좋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해도, 그 밑바탕에는 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불경건함이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문화든, 중세 문화든, 근대 문화든, 현대 문화든, 서양 문화든, 동양 문화든, 아메리카 원주민 문화든 상관없이 다 똑같이 적용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산속 깊은 곳으로 가야 하는가? 그곳에 틀어박혀서 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하고 살아야 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성경은 그러한 생각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전 5:9~13).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가서 수많은 불신자와 얼굴을 마주하며 꿋꿋이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세상에 가기 전에 자기 영혼을 경건과 거룩으로 단단히 둘러싸고 가야 한다. 마치 거센 불길이 소방관의 두툼한 방화복을 뚫어내지 못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천국을 향한 일편단심으로써 세상 문화를 통해 달려드는 불경건함의 불길을 잘 막아내고 물리쳐야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불경건함을 향해 진리의 물대포를 힘껏 발사해야 한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반역의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지 못하게 막아내고 진압해서, 이 세상에서 선함이 계속 유지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마 5:13~15).
한편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문화, 사회적 역할을 후천년적 소망과 연결하여 잘못 이해한 이들도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벌이는 진리의 활동으로 인해 세상이 완전히 거룩해질 것이며, 그런 뒤에야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생각의 최대 문제점은 그리스도인의 세상 문화 참여에 대한 제동 장치와 한계선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다. 후천년적 소망에 깊이 빠져들면 저 불경건한 세상을 다 쳐부수고, 주님의 재림을 앞당겨야 한다는 거룩한 열망으로 활활 불타오르게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이 세상이 불의 심판으로 멸망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크게 역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지구 상의 모든 사람을 죄에서 건지시지 않고 택하신 일부만 구원하신다. 나머지 사람들은 자기 죄에 더욱 탐닉하다가 ‘느닷없이’ 심판과 멸망을 받게 하신다(살전 5:1~3).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불경건의 불길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세진다. 그런 불길은 그리스도인이 처리할 수 있는 성질의 불이 아니다. 소방관이 모든 불길을 진압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소방관도 불길이 너무 엄청나면 피신하여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불같은 핍박과 박해가 일어날 때, 거기 맞서지 말고 피하라고 하신 것이다(마 10:21~23). 그런 광란의 불길은 마지막 날에 주님께서 친히 짓밟아 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항상 교회를 중심으로 사회 활동을 하면서, 이 세상 속으로 너무 깊이 들어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또한, 세상에 들어가기에 앞서 늘 방화복과 소방 장비를 점검해야 하며, 불의 세기와 성질을 헤아려서 지혜롭게 대처해야 한다. 더불어 빠져나올 길을 항상 기억하고 표시해두어야 하며, 1주일에 한 번씩은 꼭 소방서(교회)로 돌아와 장비를 손질하고 보강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낡은 방독면 틈새로 세속 문화의 유독 물질이 새어 들어와 영혼을 질식하게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 이 세상과 문화를 구하러 들어갔다가, 되려 자신이 목숨을 잃는 어리석은 일은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먼저 자기 영혼을 구원하는 데 힘써야 하며, 많은 훈련과 연단을 거치고 난 뒤에 세상이라는 현장에 들어가야 한다. 또한, 안전 수칙(교리)을 철저하게 지켜가면서 구호 활동(복음 전파)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트로트를 부른다는 구모 목사는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과 같다. 그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을 신명 나게 순종하는 중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절대로 발을 들이지 말라고 하신 곳에 멋대로 뛰어들어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중이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안전 수칙을 우습게 여긴 대가는 아주 혹독할 것이다. 머지않아 그의 온몸은 불경건과 세속에 데어 성한 곳을 찾아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부디, 그런 재앙을 당하기 전에 그 위험천만한 곳에서 속히 빠져나오기를 바랄 뿐이다.
4. 마무리하며
이 세상 죄는 근절할 수 없는 불치병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세상에서 건짐 받아 하나님 나라 시민이 된 자들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이 세상 문화에 동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생명수로 죄의 불길을 진압하여 그 안에서 고통받던 이들을 구해낸다.
그러나 이 세상의 완고함은 꺼진 불길을 다시 살려낼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도 더 큰 불길이 되게 한다. 주님께서 친히 그 완고함을 짓밟아 무너뜨리시기까지 그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이 세상 문화를 신중히 대하도록 하자. 먹든지 마시든지 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면서 주일 성수에 힘쓰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가나안 땅에 모두 무사히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3권: 니케아 시대와 이후의 기독교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3)』, 이길상 옮김, 크리스찬다이제스트, 2004, p. 122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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