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대중문화 진단2」 대중문화에 점령당한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박지훈
▲ 콘서트 장을 연상하게 하는 현대 교회 예배의 한 장면
어느 토요일 아침, K 집사는 자동차를 몰고 교회로 향한다. 자동 출입시스템을 갖춘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운 K 집사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1층에 자리한 대형 카페로 들어간다. 이번에 새로 지은 교육관에 문을 연 이 교회 카페는 이미 근처 주민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저렴하고 맛 좋은 커피를 제공하면서도, 종교시설의 분위기를 전혀 풍기지 않는 이런 편안하고 널찍한 장소를 사람들이 마다할 리가 없다. 참으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너그럽고 개방적인 교회 문화의 상징이라고 할 만하다.
마침, 성탄절이 가까워서 그런지, 카페 중앙에는 커다란 산타와 루돌프 인형이 놓여있고 기분 좋은 캐럴 음악이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자신이 낸 건축헌금이 이렇게 멋진 건물을 짓는 데 쓰였다는 사실에, K 집사는 새삼 뿌듯한 기분을 느낀다.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주문하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동료 집사 여럿이 옆자리에 앉아 골프를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K 집사 역시도 그 자리에 끼고 싶지만, 그가 참여하는 바이올린 동아리 모임이 시작될 시간이다. 간단하게 인사만 나누고, 주문했던 커피를 받아 위층의 동아리실(室)로 향한다.
K 집사가 다니는 교회에는, 스포츠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고 활성화된 동아리도 아주 다양하다. 그래서 K 집사는 동아리를 놓고 많이 고민했지만, 마침 악기를 하나 정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바이올린 동아리에 가입했다. 우리 바이올린 동아리에는 근처 아파트에 사는 비(非)신자들도 몇 명 참여하고 있다. 동아리 활동을 통해 불신자들이 교회를 자연스럽게 드나들며 분위기에 적응하고, 다른 회원들의 권유로 이내 예배에도 참석하게 된다. 아, 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효과적인 전도법인지! K 집사는 이처럼 지혜로운 방법을 고안해 낸 담임 목사님이 늘 존경스럽다.
동아리 모임 후에는 중등부 교사회의가 있다. K 집사는 재작년부터 중등부를 섬겼고, 현재 교사회 서기를 맡고 있다. 오늘의 안건은 성탄절 발표회 준비다. 매년 성탄절이 되면, 교회 학교는 부서별로 한 가지씩 공연을 교우들 앞에 올려놓는다. 올해는 청년부가 단막극(Skit Drama), 고등부가 찬양 인도를 맡게 되어, 중등부는 몸 찬양을 준비해야 한단다. 단막극은 준비할 부분이 많아 번거로운데, 중등부가 맡지 않게 되어 잘됐다는 생각을 한다.
여러 가지 의견이 오가던 중, K 집사는 얼마 전 TV에 나와 트로트 CCM을 부르던 목사를 떠올린다. ‘그래, 이거다! 성탄절 캐럴을 트로트 풍으로 바꿔 부르면서 몸 찬양을 하면 어떨까?’ 이 의견은 다른 교사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역시, 아이디어 뱅크 K 집사야.”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아이들의 의상은 원단 도매를 하는 L 교사가 찬조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분위기에 맞춰 반짝거리는 천으로 만든 빨간 산타 의상을 준비해오겠단다.
이런 일을 자주 경험한 K 집사는 재빨리 회의 기록에 ‘중등부 성탄 행사 찬조 L 집사 – 주보에 기재, 행정실에 부탁.’이라고 적는다. 아이들 지도는 몸 찬양과 찬양 인도에 소질이 있는 청년 교사 세 명이 맡아주기로 했다. 교사들의 적극적인 헌신 속에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역시, 이 맛에 교회 다니는 것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한 달 뒤, 성탄 전야 발표회에서 중등부 학생들은 화려한 무대를 선보여 교우들의 엄청난 박수갈채를 받았다. 아이들도 교사들도 보람을 느꼈고, 행사가 끝나고 다 함께 둘러앉아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기쁨을 함께했다. 그 자리에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분명 크게 영광을 받으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혹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거북하거나 이상하게 다가온 부분이 하나라도 있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평범한 현대 교회 시대상에 발맞추지 못하는, ‘시대에 뒤떨어진’ 기독교인 임이 분명하다. 위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교회에서는 너무나 익숙하게 벌어지고 있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물론, 교회마다 세세한 차이가 꽤 있어 똑같이 적용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10~20년간, 교회가 그 이전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작은 교회들은, 우리는 그런 변화와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항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교회들 역시도 형편이 안 되어 못했던 것일 뿐, 늘 이러한 변화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지 않았던가?
위의 이야기에서 언급한 교회 건물 안의 카페, 교회가 지원하는 동아리 활동, 교회 연례행사로서 행해지는 연극, 급진적인 CCM과 몸 찬양 등은 현대 대중문화와 맞물려있는 교회 문화의 전체 항목 중에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들은, 지난 수 천 년의 교회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교회에 도입되지 않았던 대단히 신선하고 충격적인 변화들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변화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교회가 스스로 창조해 냈을까? 아니면 성경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은, 교회가 외부로부터, 다시 말해 세상의 대중문화로부터 수입해온 것들이다. 유행처럼 교회에 카페가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에 접어들면서 온 나라에 카페 문화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던 때부터였다. 동아리 활동은 물론이거니와, 세속 음악을 겨우 개사한 수준에 불과한 CCM도 마찬가지다. 어디 그뿐인가? 이제는 어지간한 교회 건물의 생김새조차도 십자가만 빼면, 여느 빌딩과 별로 다를 것이 없을 정도다. 심지어 목사 가운까지도 박사 가운을 사용하는 일이 유행이지 않는가? 이렇듯, 현대 교회가 대중문화를 긴밀하게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려야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대중문화란 과연 무엇인가? 대중문화는 대중이 중심이 된 사회에서, 그 사회에 속한 거의 모든 구성원이 보편적으로 누리는 평균적인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이 대중문화는, 계급에 따른 차별이 뚜렷했던 유럽에서 벗어난 미국을 중심으로 크게 번성하여 점차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다시 말해, 대중문화는 문화적인 평등을 추구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미국의 사회학자 앤 더글러스는 이를 가리켜 “평균에 대한 찬미가 대중문화의 상표이다.”라고 표현했다.1
대중문화가 태동하기 전 시대의 문화는 계층별로 차별적이었으며, 각 계층 간의 그 차이도 무척 뚜렷했다. 대중문화는 이러한 차별을 혐오한 사람들에 의해 생겨났기에, 기본적으로 차별적인 진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다. 왜냐하면, 대중문화는 평등의 상징과도 같으며, 진리는 대중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2 그러므로 이런 문화에서 대중의 지지는 생명과도 같다. 문화를 생산하는 사람이라면 모두 대중의 관심과 인기를 얻는 일에 촉각을 곤두세우게 된다. 대중의 인기를 잃어버린 문화는 사실상 사형선고를 받은 것과 다름없어서, 이내 생명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한 해 동안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던 연예인이, 불과 몇 년 뒤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이처럼, 대중문화는 변화무쌍하며, 전 사회가 공유하므로 파급력 또한 엄청나다. 따라서 일단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게 되면, 그 대상이 사람이든 집단이든 간에 대중문화의 특성을 그대로 닮아가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거의 모든 현대 교회가 대중문화를 깊이 받아들이고 있는 현실은 참으로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상황이 심각한 이유는, 대중문화가 진리의 척도를 대중에게 두고 움직이기 때문이다. 반면, 교회는 진리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하나님과 성경 말씀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기독교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고 싶다면, 절대로 대중문화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교회와 대중문화는 완전히 상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쯤 되면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는 진리를 소유했기 때문에, 대중문화를 조금 받아들인다고 해서 결코 무너지거나 물들지 않는다.”라고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그들이 말하는 ‘교회가 가진 진리의 힘’이란, 교회가 오직 진리에 순종할 때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대중문화는 그들의 생각처럼 그리 허술하지 않다. 자기와 손잡는 모든 대상을 다 자기 색으로 물들여 버리고 만다. 교회라고 해서 특별히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와 손잡는 순간부터, 교회는 대중문화의 특성을 전혀 거스르지 못한다.
대중문화를 받아들인 교회는 좋으나 싫으나 이제 대중의 눈치를 살펴야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르쳐주는 대로가 아닌, 교회 회원과 전도대상자의 기호와 성향을 따라가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예배당은 금세 텅텅 비게 된다. 대중문화와 손잡은 현대 교회의 비참한 현실이 드러날 때면, 그들은 이렇게 변명하곤 한다.
“우리 주님께서도 ‘사람을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눅 14:23).’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사람을 채운다는 명분으로, 온갖 것들이 교회 안으로 무분별하게 흘러들어온다. 커다란 LED 화면, 현란한 조명, 웅장한 음향 기기, 화려하기 짝이 없는 악기들, 귀를 즐겁게 하는 음악, 교세(敎勢)를 과시하는 거대한 규모의 성가대와 오케스트라, 편안한 좌석, 따뜻한 분위기… 그들 말마따나 교회는 ‘사람을 채우기 위해’, ‘사람이 보고 듣고 즐기기에 좋은 것들’로 가득 채워지고 만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욱 급속도로 대중의 전유물이 되어간다.
현대 교회가, 과거 수천 년간 참된 교회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었던 이 요란한 변화를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유도, 대중이 교회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대중문화를 받아들인 교회는 성도들의 영적인 참된 필요를 채워주기 보다 대중의 입맛을 두루두루 만족하게 하여, 그들을 예배당 안에 붙들어 놓기에만 급급하게 된다. 결국, 참된 성도는 교회에서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만다.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게 더욱 심각한 문제를 가져온다. 교회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대중문화의 거센 압박을 받아 변해버린 것이다. 원래 성경이 말하는 복음 자체는 지극히 단순하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어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진노 앞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것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내용에는 대중의 신경을 건드리는 부분이 있다.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그리고 ‘구원의 길은 오직 그리스도밖에는 없다.’라는 대목이다.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아들인 교회는 이런 가르침에 거부감을 가진다. 교회는 사랑과 긍휼이 많고 참으로 너그러워야 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기분조차 절대로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이다. 결국, 복음의 내용은 점차 수정되고 전도방식은 매우 세속화된다. 서두의 이야기에서 다룬 카페나 동아리 등도 그중 하나다. 이런 것들은 ‘지역사회를 섬기는 교회’라는 아주 듣기 좋은 말로 포장되곤 하지만, 실상은 ‘대중문화에 깊이 물든 교회’라는 말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복음의 내용이 바뀌었으니, 그에 맞추어 전도의 목적도 바뀐다. 이제 전도의 목적은 죄인을 깨우쳐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을 교회에 앉혀 놓으면 충분하다. 혹, 복음에 관하여 이야기해주더라도, 절대로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교회 외부의 대중은, 전혀 변화되지 않은 상태로 교회 안으로 유입되어 교회를 더욱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게 된다.
심지어 교회 안의 어떤 사람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조차 거부감을 갖고, 승려를 예배에 초청하여 강단에 세우거나 타 종교를 서로 추켜세워주면서 함께 사회구제 활동을 하는 것과 같은 급진적인 모험도 서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천국과 지옥, 교회의 권징과 같은 주제는 현대 교회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거나, 있더라도 내용이 매우 흐릿해졌다. 그런 주제를 뚜렷하게 강론하는 목회자는 참으로 독선적이고 율법적이며 사람을 존중하고 사랑할 줄 모르는 차가운 사람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지금까지 언급한 현상들은 가장 두드러진 변화만 모아 놓은 것으로서, 전체 현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여기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소소한 변화들이 많이 있지만, 기본적인 원리는 전혀 다르지 않다. ‘대중이 원하는 것이 바로 진리’라는 것이다. 물론, 대중문화를 받아들인 교회는 아주 강력하게 “우리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주장하든 말든, 그들의 교회는 이미 대중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러니 그 사실을 아는 사람 중에, 누가 과연 그들의 공허한 주장에 귀 기울여주겠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대중문화의 특징 및 대중문화가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오면서 일으킨 문제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이렇게 문제를 표면적으로만 살피고 고치는 정도에 그친다면, 교회가 세상의 여타 집단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교회는 하나님께서 직접 제정하신 기관이므로, 교회가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문제의 진정한 근원과 해결책을 말씀으로 돌아가 더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 관하여, 성경이 무어라고 가르치고 있는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이에 관한 가르침은 에베소서 5:21~33에 가장 잘 나타난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가운데 서로 복종하여라.
아내들아,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심과 같이 남편이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친히 몸의 구주이시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모든 일에 아내들도 남편들에게 복종하여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같이 하여라.
이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서 티나 주름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을 사랑하는 것 같이 해야 한다.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언제든지 자신의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자신을 양육하고 보살피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하시듯이 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 이 비밀이 크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한다.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몸같이 하고, 아내도 남편을 경외하여라.” (엡 5:21~33)3
누군가는, 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난데없이 왜 결혼과 관련된 본문을 제시하는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남녀 간의 결혼이 아니라 교회와 그리스도의 연합에 관한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연합을 남편과 아내의 연합에 비유하여 웅장하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남편이고, 교회는 그분의 아내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신 것같이”와 같은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의무는 사랑과 복종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가 세워진 이래로 언제나 성실하게 그분의 교회를 극진하게 사랑하셨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구원의 은혜가 참된 교회를 떠나간 일은 없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의무를 다하셨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교회의 의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라는 본문의 가르침이 현대 교회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앞서 우리는, 교회의 중심이 그리스도로부터 대중에게로 옮겨져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백번 양보하여 그리스도와 대중이 교회의 중심을 양분하고 있다 하더라도, 신부 된 교회에게 그런 행동은 불륜이고 간통이다.
대중문화를 받아들이는 것이 뭐가 그렇게 문제냐고 신경질을 내는 사람들은 자기 양심에 진지하게 자문해보라. 성경에 그 일이 대수롭지 않다고 하는 구절이 단 하나라도 있는가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멍에를 함께 메지 마라. 의와 불법이 어떻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떻게 사귈 수 있겠느냐?” (고후 6:14),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이루어 육과 영의 모든 더러운 것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고후 7:1) 등과 같은 말씀으로 우리를 훈계하신다. 만일, 교회가 세상의 온갖 문화와 풍조로부터 분리되어야 함을 지지해주는 구절을 일일이 제시한다면, 아마도 성경의 절반 이상을 써넣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그리스도께 온전히 복종하는 일에 약속받은 축복은 너무나 크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신부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교회를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셔서, 티나 주름과 같은 것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상할 수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도인 바울조차도 이것에 대해서는 “이 비밀이 크다.”라고 진술하며 그 경이로움을 칭송하고 있다. 교회는 그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머리가 되신다. 교회는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뜻을 시행하는 지체로서 살아가는 엄청난 영광을 누린다. 머리가 그의 몸이 싫다고 해서 그 몸을 버리고 다른 몸으로 갈아탈 수 없듯이, 그리스도께서는 결코 그분의 교회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라는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 교회에 속한 성도 한 명 한 명이 바로 이렇게 영광스러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경이롭고 영광스러운 언약을 깨뜨려버린 교회가 너무나 많다. 언약을 깨뜨리면 그 언약에 수반되는 축복도 없다. 그리스도와 영원히 연합하는 소망을 잃어버린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서 바르게 설 수 있다는 말인가?
참되고 정결한 어느 남녀 간의 결혼을 생각해 보라. 신랑은 신부를 바라보고 신부는 신랑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눈에는 자신이 사랑하는 한 사람만 보일 뿐이며, 한눈을 파는 일은 생각할 수조차 없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두 남녀는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아내는 남편의 몸이 되어, 여전히 두 명이지만 동시에 하나로서 하나의 생애를 함께 살아가게 된다. 이는 아담이 그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를 처음 보았을 때 기쁨에 못 이겨, “이는 내 뼈 중의 뼈이고 살 중의 살이다.”(창 2:23)라고 외쳤던 것과 같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신부로 삼으시기 위해 하신 일은 이보다 더 놀랍고 아름답다. 그분께서는 하늘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교회를 위해 자신을 내어’ 주셨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셔서 물과 피를 모두 쏟아주셨다. 마치 여자가 남자에게서 취한 것으로 지어진 것처럼, 교회도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부터 취하여져서 이 땅에 나타났다. 대중문화라는 외간 남자와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있는 교회들이 돌아오는 주일마다 예배 시간에 소리 높여 외치는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라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교회가 대중문화와 더불어 하고 있는 이 타락한 실험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라는 이 장엄한 지식을 완전히 잊어버렸기 때문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아니면 적어도 신학으로는 배워서 머리로 알기는 하되, 마음으로는 전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그뿐만 아니라 에베소서 1장 23절은 “교회는 그분의 몸이며,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분의 충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충만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충만을 이룬다4고 하는 이 엄청난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 위격이시며 그분 스스로 계신, 아무것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이 완벽한 분이시다. 그러나 ‘중보자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통하여 그분의 충만하심을 온 세상에 나타내실 것이다.
이 약속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감동적인지 생각해보라. 그리스도께서 오늘도 내일도 끊임없이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시고, 교회를 자기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내서 티나 주름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마지막 때가 되면,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깨끗하고 흠이 없게 하신 신부, 곧 교회를 하나님의 존전(尊前)으로 데리고 올라가실 것이다. 그날에 신부 된 교회와 우리 성도들은, 저 천국에서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혼인잔치를 벌일 것이다. 교회를 이루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거룩하게 구별되어,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원토록 살게 될 것이다. 이토록 영광스러운 교회가 세상의 대중문화에 깊이 빠져 있으니,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 된 자들이여. 필자는 지금, 교회가 이 세상과 동떨어진 천상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악한 세속의 문화가 넘실대는 이 지상에 서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를 언제나 보호해주시고 저 천국으로 이끄시는 우리 신랑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현대 교회 대부분은 이미 그리스도만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세상으로 옮겨버렸다. 그리고 대중문화라는 외간 남자와 어울리며 머리 둘 달린 사생아를 낳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였다. 그리고 그 수치를 가려보려고, 진짜 머리인 그리스도를 떼어내거나 대중문화라는 다른 머리를 그 옆에 이식해보려고 하는 어리석은 일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이 세상 어떤 생명체도 그 머리가 떨어져 나가거나, 이 머리와 저 머리가 서로 다투면서 생명을 이어갈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하나의 유기체인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매사에 거룩하게 살아야 하며, 교회의 일을 할 때는 더욱더 철저하게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원리만 따라야 한다. 마지막으로 형제∙자매들이여. 에베소서 5장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언제나 기억하기를 바란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가, 오직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가운데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여, 교회에 침투한 대중문화의 악영향을 잘 분별하고 자기를 성결하게 하는 주의 성도들이 되기를 권면한다.
오직 하나님께서만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각주
1 데이비드 웰스, 『신학실종(No Place for Truth)』, 부흥과개혁사, 2006, p. 300에서 재인용.
2 위의 책, p. 300.
3 바른 성경(KTV), 한국성경공회, 2008.
4 마틴 로이드 존스, 『에배소서 강해 6 – 영적 생활』, 기독교문서선교회, 1999, p. 236.
「대중문화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대중문화 진단2」 대중문화에 점령당한 교회,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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