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디언 영화비평 (2) 천일의 앤
(원제: Anne Of The Thousand Days)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영국 국교회의 기원에는 관심이 있지만 역사책은 죽기 싫어할 만큼 읽기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가 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실제 역사를 바탕으로, 역사적인 사실을 쉽고 재미있게 그려낸 볼 만한 작품이다.
천일의 앤은 1969년(천일의 앤, Anne Of The Thousand Days)과 2008년(천일의 스캔들, The Other Boleyn Girl)에 각각 한 편씩 제작되었다. 둘 다 잘 만들었지만, 1969년에 개봉된 영화가 좀 더 역사적인 내용에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너무 오래전에 만들어진 터라 일반인이 구해보기는 좀 어려울 듯싶다.
영국 역사와 영국 교회사는 사실상 하나의 연결고리로 엮여있는 역사다. 어느 한쪽을 떼놓고 말하기가 어렵다. 물론 20·21세기에 들어오면, 정치와 종교가 더 확고하게 분리되지만 말이다. (사실, 그보다는 영국 국민의 기독교 신앙이 급속하게 쇠퇴했다는 편이 더 정확하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영국에서는 종교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와 여러 가지로 연결되어 많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중, 영국 국교회의 설립은 참으로 연애 소설과도 같은 사건으로부터 말미암았다.
영국 국교회를 설립한 헨리 8세는 강력한 왕권을 자랑하던 왕이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의 전신 초상에는, 강인하고 남성스러운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만큼 여성편력이 심하기도 했다.
그는 다양한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왕실 최고의 스타였다(오늘날의 찰스 황태자처럼 심한 바람둥이였다). 여러 여성과 은밀하게 밀회를 나누고, 여러 여자와 결혼하면서 타락한 정욕을 마음껏 쏟아내며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후계자가 없는 것이었다. 왕에게 후계자는 자기 생명과도 같은 권력을 이어받을 사람을 뜻했기 때문에, 후계자 문제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헨리 8세는 후계자를 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지만, 한결같이 사내아이를 낳아주지 못했다. 그러다 앤이라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 (영화 속에 이 과정이 잘 나온다.) 원래 앤은 왕과 사귈 마음도 결혼할 마음도 없었지만, 헨리 8세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마음이 움직이고 말았다(사실, 앤은 정치적인 야망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한 목적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다. 헨리 8세는 과부가 된 자기 형수와 정략적인 이유에서 결혼한 상태였다. 따라서 앤과 결혼하려면 우선 현재 부인과 이혼(형수와의 결혼이므로, 결혼 성립을 인정하지 않고 무효로 돌리는 일)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 이혼을 로마 교황이 도무지 허락해주지 않는 것이었다.
교황은, 헨리 8세가 이혼하려고 하는 현재 부인이 자신의 인척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혼을 허락하기에는 정치적으로 곤란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헨리 8세는 로마와의 관계 정립, 종교적인 독립, 왕의 권위 등 다양한 정치적인 명분을 내세우며 영국 국교회를 세웠는데, 실제로는 순전히 앤과 재혼하기 위해서였다.
처음부터 많은 어려움 속에 이루어진 헨리 8세와 앤의 결혼 생활은 금세 암초를 만나게 되었다. 앤이 사내아이가 아닌 딸을 낳고 만 것이었다. 둘째 아이는 그토록 바라던 아들이었지만 사산되었다. 그러자 비난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고, 헨리 8세의 마음도 식어버리고 말았다. 헨리 8세는 다시 한 번 바람둥이 기질을 발휘하여 또 다른 여자에게 마음을 주었고, 앤도 결국 전 부인과 같이 버림받고 말았다.
앤은 대단히 강한 여성이었고 헨리 8세도 무척이나 강한 남성이었다. 헨리 8세가 다른 여인을 왕비로 맞아 들이려고 하자 앤은 강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그 시대는 아무래도 여성이 더 많은 고통과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헨리 8세는 앤에게 간통죄라는 누명을 씌웠고, 앤은 왕비의 자리에 오른 지 1,000일 만에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앤을 천일의 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을 낳았다는 것 때문에 버림받고 비참하게 죽은 앤이 낳은 이 딸이 바로,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회자되는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앤은 비록 비극적으로 죽었지만, 결국 그의 딸이 영국의 왕이 되고 만 것이다).
이렇듯, 영국 국교회는 헨리 8세와 앤과의 추문으로 말미암아 생겨난 교파다. 그렇다고 영국 국교회를 무슨 콩가루 집안에서 태어난 근본도 없는 망나니처럼 여겨서는 안 된다. 영국이 종교개혁의 영향력 아래 있었기 때문에, 영국 국교회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 위에 세워져 있다(영국 국교회 39개 신조를 읽어보라).
그러나 아무래도 개혁의 시발점이 다소 엉뚱한 데 있다 보니, 로마 카톨릭적인 예식 및 예전과 같은 것들이 많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이런 잔재를 소중히 여기고 계속 지키려는 이들을 고교회파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 미진한 요소들을 개혁하려고 한 세력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청교도다(이런 잔재 예식에 영적인 의미를 두지 않는 이들을 저교회파, 또는 복음주의자라고 부른다). 청교도는 영국 국교회 안에서 개혁하려다 수많은 핍박과 고통을 받았고, 결국 그 후예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처럼, 영국 국교회는 보수파(고교회파)와 개혁파(저교회) 사이에 개혁으로 인한 치열한 내부적인 싸움과 또 비국교도(역시 청교도 일파)와도 다양한 외부적인 갈등을 빚은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 중에, 영국 국교회가 배출한 걸출한 성직자가 바로 조지 휫필드, 존 웨슬리, J. C. 라일 등이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는 19세기 들어 전 유럽을 휩쓴 독일 자유주의 고등 비평과 여전히 로마 카톨릭을 따르려는 고교회파의 강력한 세력확장으로 서서히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그때, 국교회 내에서는 J. C. 라일이 유일하게 국교회가 성경의 진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외쳤다. 특히, 국교회가 로마 카톨릭화하는 일을 대단히 크게 경고했다).
그러다 20세기 중반쯤, 존 스토트를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 성향의 성직자들이 영국 국교회를 다시 일으키려는 운동을 강력하게 전개했다. 그러나 영국 국교회 내의 복음주의자들은 넓은 관점의 포용적인 신학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영국 국교회를 복음에 충실하게 회복시키는 일은 사실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 존 스토트는 영국 국교회를 제대로 개혁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도 넓은 관점의 포용적인 노선을 추구했다. 이는 동시대를 살아간 비국교도 목회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가 걸어간 길과 크게 대비를 이룬다.)
오늘날 영국 국교회는 사실 이름만 국교회다. 한때는 영국 국민을 강력하게 기독교 신앙으로 인도했지만, 지금은 그 영향력이 미미하며, 내부적으로는 로마 카톨릭과의 연합·일치에 깊숙하게 빠져들고 있다. 외부적으로는 이슬람에 밀려 휘청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영국 국교회의 수장은 여전히 영국의 왕이다. 그러나 지금의 영국 여왕은 거의 믿음이 없다. 나머지 왕실 가족들 역시, 영국 국교회의 형식적인 신자에 불과하다.
비록 영국 국교회가 엉뚱한 요인으로부터 세워진 교파이지만, 한때 영국 국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이 대영제국 곳곳에 전해졌다는 사실만큼은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의 영국 국교회가 예전의 영적인 영광과 부흥을 다시 찾으려면, 하나님께서 휫필드나 라일 같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주셔서, 복음과 진리의 나팔을 크게 불도록 하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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