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걸러내기」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자유주의의 실체 (하)
이종현
4-4. 성경에 관하여
– 필요성은 인정, 유일성은 부정
메이첸의 말대로, 우리는 다른 종교에서도 기독교적인 관념을 발견할 수는 있다. “이웃을 사랑하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의 내용 말이다. 하지만 타 종교에서 기독교를 발견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관념의 종합을 통해 형성된 종교가 아니라,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1 성경은 유일하게 그 사건을 증거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성경의 유일성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구절을 통해 성경이 영감되었음을 선포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바른 영감론이란, 성경의 기록 자체가 참되다는 것과 성경의 저자들이 오류로부터 완전히 보호받았으므로, 그들의 생각과 표현의 습관이 유지되었음에도 그 책들이 ‘믿음과 행위의 무오한 규칙’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2 이것이 교리적으로 바른 ‘유기적 영감론’이다. 메이첸은 이를 ‘완전 영감 교리’라고 명명한다.
문제는 자유주의 신학이 이 교리를 ‘기계적 영감론(성경의 저자들이 성령께서 불러주신 대로 단순히 받아 적었다는 이론)’이라고 비판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참된 기독교는 절대로 그런 내용을 주장하지 않는다. 완전 영감의 교리, 즉 유기적 영감론은 저자들이 정상적인 방법으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유기적 영감론은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의 인격과 기질, 은사와 재능, 교육과 교양, 어휘, 말투, 문체를 그대로 사용하셨다고 믿는다.3 또한, 성경이 쓰일 때의 역사적인 상황을 가볍게 여기지도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비판들은 모두 근거가 없으며, 참된 영감론을 부인하는 이론은 결국 성경의 무오성을 공격하게 될 뿐이다.4
현대 자유주의 신학은 종종 성경의 권위보다 예수님의 권위를 더 앞세울 때도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구약의 잘못된 도덕적 규범, 혹은 바울의 궤변론적 논증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수용할 수 없다고 한다.5 그러나 실상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을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는, 보기에만 좋은 변명에 불과하다.
그들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온전히 믿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자유주의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 바로 지옥, 선민(選民), 심판 등과 같은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대체로 현대의 관념과는 맞지 않는다. 그들이 긍정의 신호를 보내는 대목은, 오직 예수님의 가르침 중 현대의 관념과 어울리는 구절일 뿐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이다.6
그렇게 그들은 성경에서 자신의 관념(현대의 지배적인 관념)에 맞는 일부만 차용한다. 그들에게 참된 권위는 개인의 경험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각 개인을 ‘도울 수 있는 것’만이 진리가 될 수 있다.7 하지만 진리가 특정한 환경에서 일부에게만 효력이 있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 무상(無常)하고 자기중심적인 회의주의일 뿐이다. 기독교와 자유주의가 전혀 다르다는 메이첸의 말은 맞다. 각자 서로 다른 토대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4-5. 구원에 관하여
자유주의 신학은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자유주의 신학과 정통 기독교는 구원의 방법과 근거가 명확하게 다르다. 자유주의자들도 속죄를 말하기는 하지만 매우 드물다. 또한, 정통 기독교와는 다른 맥락에서 그 용어를 받아들인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믿는다.8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죽음은, ‘자기희생’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구체적인 형태로 표현해주는 상징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자유주의 신학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십자가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 또는 교훈을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구원과 관련된 정통 교리 중 4가지를 조롱하는데, 그 4가지는 다음과 같다.
구원의 역사성, 구원의 배타성, 그리스도의 대속 능력,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먼저, 구원의 역사성부터 살펴보자. 그들은 구원이 역사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공격한다. 2,000년 전에 그리스도께서 팔레스타인에서 하셨던 일보다, 각각의 신자들을 위해 지금 하고 계신 일에 집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9 그러나 기독교를 참으로 기독교 되게 하는 것은, 신자의 경험과 예수가 세상에 존재했던 역사 간의 연결에 있다.10
둘째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정통 교리에서 말하는 구원으로는 구원받는 사람이 너무 적기에 편협하다고 한다. 그들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명제를 전제하면서, 정통 교리가 말하는 구원의 길을 많은 길 중 하나로 정의해버린다. 복음을 전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구원의 한 방법이긴 하지만 다른 방법 역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다.11
하지만 구원의 범위는 오직 말씀이 선포한 범위 안으로 국한되어야 한다.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다. 인종, 계층, 성별을 불문한다. 또한, 교회는 성령을 힘입어 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상 끝까지 전할 능력과 소명이 있다.12 따라서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게 전파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순전히 인간의 책임이다.
셋째로, 예수님의 대속에 의문을 던진다. 어떻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죄책은 개인의 것이며, 개인의 잘못 때문에 다른 사람이 고통받는다고 해도 죄책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13 그래서 자유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죽음으로부터 자기희생의 모범을 찾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것━아니면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게━이 있다.
바로, 예수님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은 영광의 주(主)님이시다. 그래서 얼마든지 인간의 죄를 짊어지시고 그 죄를 씻겨주실 수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순한 자기희생의 모범으로 간주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로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한 대가를 대신 치를 수 없기 때문이다.14 자신의 죄 문제조차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가능하다. 우리는 특히 구원의 영역에 관하여, 예수님과 우리의 비슷한 면이 아니라, 우리와 그분 사이의 심오하고 무한한 차이를 발견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자유주의자들은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오해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정통 교리는 하나님을 마치, 사람들에게 구원의 값어치를 냉정하게 요구하는 매우 저급한 신처럼 보이게 한다고 주장한다.15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죄를 회개하기를 원하며 기다리시기보다, 기꺼이 죄를 용서해주기 원하신다고 설파한다.
하지만 죄를 이렇게 가볍게 처리하는 것은, 다시 말해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의 필요성을 외면하는 경향은 자유주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 대해 불쾌감을 감추지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에 너그러우며 심지어 사람이 회개하기 전부터 죄를 이미 용서하고 계시는 사랑 많은 하나님에 대한 그림을 자꾸 만들어간다.
하지만 성경은 죄가 가져온 비참한 현실을 분명히 말한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명백하게 증거한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모든 것을 포용하지는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지 못할 죄에 대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의 심각성을 절대로 가볍게 말씀하시지 않으셨다.16
대속과 심판의 교리가 사랑의 하나님과 모순된다며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그들이 속죄 교리를 너무도 크게 오해했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죗값이 치러질 때까지 냉정하게 기다리다가 치러진 뒤에야 죄를 사하는 것이다.’17
하지만 참된 교리는 전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죄를 위한 희생제물을 내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셨다. 그리고 구원의 영광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다. 모든 값을 치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로 인해, 우리는 영원한 소망을 얻었다. 참된 교리는 사람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는, 값을 따지지 않는 참사랑을 가르쳐준다.18
4-6. 교회에 관하여
교회는 구원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교회는 크나큰 죄를 저지르고 있다. 한 번도 합당한 신앙고백을 한 적이 없고 복음을 완전히 역행하는 사상을 가진 이들을 대거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19 단순히 교인으로 여기는 것도 모자라 교회의 교사, 장로, 설교자로서 받아주고 있다.
그 결과, 교회의 모든 기관과 직분을 그들이 암세포처럼 장악하게 되었다. 메이첸의 말대로, 우리가 자유주의를 따르는 ‘개개인의’ 신앙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인가 아닌가를 완전무결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자유주의 신학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점이다.20
그러므로 교회라는 거룩한 울타리 안에 자유주의와 정통 기독교가 함께 있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 자유주의 신학으로 말미암아 현대 교회에 발생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두 파(派)가 분리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유일한 해답이다.21
하지만 많은 이들이 애써 분리를 피하려고 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시 133:1).”라는 구절을 모토로 삼는다. 그들은 사소한 일이랑 뒤로 미루고 더 중요한 바에 함께 집중한다면, 모두가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사소하다는 일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 있다는 사실은 어찌할 것인가?22
이렇듯, 자유주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니다. 전혀 다르고 새로운 자연주의 종교지만 기독교의 탈을 쓴 채 교회를 버젓이 장악하고 있다. 이는 결국 기독교의 총체적인 몰락을 의미한다. 결국, 허무한 열망으로 가득 찬 자연주의 종교가 거룩한 교회의 모든 것을 빼앗고 무너뜨릴 것을 의미한다.
그 징조는 이미 교회 안에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부하는 사역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전통적인 용어를 모호하게 사용함으로써, 또 단순한 성경 해석의 차이로 설명함으로써,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조차 망각하고 부인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으로 밀려 들어오고 있다. 자유주의라는 든든한 다리를 통해서 말이다.23
예수님께서 동정녀에게서 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아도 어엿한 교인이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성경이 전적으로 무오하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칭송받는 목회자, 장로, 권사로서 등장한다. 전혀 성도가 아니면서도 교회에 속한 `그들은’,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왕좌에서 끌어내어 자기 인생의 동반자, 또는 스승쯤으로 격하해버렸다. 그들은 성경 무오론이 성경을 우상화하는 우상숭배라고 하며 부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철저히 난도질하여 모순과 오류가 가득한 책으로 만들었다. 형제애라는 미명 아래 진리의 교회를 더럽히고, 각종 세상 윤리와 철학을 교회 안으로 들여왔다.
5. 성도의 의무
이 처참한 상태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무엇인가? 메이첸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을 당부한다.
첫 번째로, 기독교의 진리를 수호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최전선에서 지적∙영적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사람들을 격려해야 한다. 물론, 복음 사역에는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복음을 수호하는 일 역시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두 번째로, 교회를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사역 후보자의 자질을 엄격하게 판단해야 한다. 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참되고 유일한 구속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님의 귀한 양들을 맡길 수는 없다.
마지막으로, 메이첸은 기독교 교육의 갱신이 있어야 한다고 당부한다.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고 메이첸이 지적한 대로, 우리에게는 무엇보다도 교리 교육이 시급하다. 무지가 확산되고 교회가 무너지고 있는 것은, 자유주의자들의 거짓말에 속아 기독교가 교리 중심이 아닌 삶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 사람들 때문이다.24
그러나 기독교 정통 교리는 자유주의 기독교의 모든 허상을 밝히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을 쳐서 깨뜨려버린다. 정통 교리, 즉 개혁주의 교리는 목회자와 성도가 불신앙과 영적 타락의 늪에 빠지지 않고, 항상 구원에 이르는 바른길을 찾도록 등불 역할을 해준다. 따라서 지금의 교회가 무엇보다 시급하게 붙들어 매야 하는 대상이 바로 바른 교리인 것이다.
기독교 정통 교리는 성경이 성령에 의해 무오하게 영감된 하나님의 계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더불어,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 및 사역을 상세하게 알려준다. 또한,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이며 그래서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한다. 죄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영생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라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것도 기독교 정통 교리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 신분, 직분 및 그분을 통한 속죄를 명제적이고 체계적으로 설명한다(기독론). 그분의 구속 사역이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알려주고(구원론), 구원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도 기독교 교리다(중생, 회심, 칭의, 성화). 어디 그뿐인가? 교회의 본질과 독특한 표지 및 권세를 자세하면서도 바르게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정통 교리다.
필자는 실제로 자유주의 및 에큐메니칼 신학의 영향력이 강한 신학교를 다니고 있다(현재 2학년). 그래서 메이첸이 지적한 자유주의 기독교의 문제점을 짧게나마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수업이나 세미나에서, 교수와 선배들은 작금의 한국교회에 나타나는 문제가 마치 교리주의에 경도된 결과인 것처럼 암시한다. 오히려 그 반대인데도 말이다.
신학 개론 수업 시간에, 정통 교회(혹은 기존 교회)에서 주장하는 영감론은 기계적인 영감론이며 근본주의라고 비판하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어떤 교수는 성경 무오설을 주장하는 것은 성경을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또한, 어떤 선배는 비진리에 투신하는 사람이라도, 그 태도가 진실하면 그것 자체가 진리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진리는 관계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런 신학교의 현실과 마주하며 가장 가슴 아팠던 사실은, 그들이 명백히 다른 복음(갈 1:6)을 믿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모든 열심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 한, 그 끝은 멸망의 구렁텅이일 수밖에 없다.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며 기회를 주고 계실 때, 속히 회개하고 돌이켜 살길을 찾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참고 문헌
– J. G.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황영철 옮김, 복 있는 사람, 2013
– 존 스토트·데이비드 에드워즈, 『복음주의가 자유주의에 답하다』, 김일우 옮김, 포이에마, 2010
– 루이스 벌코프,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 박희석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 밴드오브퓨리탄스 카페: 자유주의 신학 비판 (1) (2) (3)
– 밴드오브퓨리탄스 카페: 자유주의 신학이란 무엇인가
– 밴드오브퓨리탄스 카페: 낙관적인 인간관
각주
1. Ibid, p. 113.
2. Ibid, p. 117.
3. 루이스 벌코프, 『벌코프 조직신학 개론(Manual of christian doctrine)』, 박희석 옮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2001, p. 38.
4. 『기독교와 자유주의』, p. 118.
5. Ibid, p. 120.
6. Ibid, p. 122.
7. Ibid, p. 123.
8. Ibid, p. 172.
9. Ibid, p. 174.
10. Ibid, p. 175.
11. Ibid, p. 178.
12. Ibid, p. 179.
13. Ibid, p. 180.
14. Ibid, p. 181.
15. Ibid, p. 185.
16. Ibid, p. 188.
17. Ibid, p. 189.
18. Ibid, pp. 189~190.
19. Ibid, p. 224.
20. Ibid, p. 225.
21. Ibid, p. 225.
22. Ibid, p. 225.
23. Ibid, p. 245.
24. Ibid, p. 225.
「거짓 걸러내기」자유주의는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중심으로 살펴본 자유주의의 실체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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