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인공지능
김재호
▲ 알파고와 대결을 벌이는 이세돌 프로 바둑 기사
<출처: (CC-BY-NC-ND) AlphaGo (Prachatai, flickr)>
예로부터 지성은 사람에게만 있는 존귀한 특징으로 인식되었다. 하지만 현대 정보기술의 발전은 그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다. 사람보다 똑똑한 기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기계, 기계가 지배하는 세상, 사람이 아예 기계로 변하는 세상 등을 그린 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특히, 알파고가 일류 바둑 기사인 이세돌을 꺾은 뒤부터 더 많이 나오는 듯하다.
그러나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인공지능의 허와 실을 차근차근 따져보면, 그런 전망이 얼마나 성급하고 무모한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분명히, 인공지능은 산업혁명과 같은 엄청난 사회 변화를 몰고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변화는 산업혁명 때처럼 ‘아름다운 신세계’, 즉 지상낙원을 도래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1. 인공지능이란 무엇인가
인공지능에 관해 말하려면, 우선 인공지능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냥 ‘일일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문제를 척척 해결하는 똑똑한 기계’ 정도로 여긴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설계하는 과학기술자조차도 인공지능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도 각자가 정한 목표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그 말을 사용한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이 현상은 누구도 사람의 ‘지능’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 수 없어서 나타난다.
인공지능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는 ‘사람의 지능을 인공적인 방식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마치, 비행기 개발자가 새가 하늘을 나는 데 사용하는 ‘양력’이라는 개념을 인공적인 방식으로 구현하여 거대한 항공기를 만들어낸 것처럼, 인공지능 개발자도 사람의 지능을 인공적인 형태와 방식으로 구현하여 생각할 줄 아는 기계를 만들어내려고 하는 것이다.1
하지만 누구도 ‘지능’이 무엇인지 명료하게 인식하고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각자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정의하고 구현한 ‘인공지능들’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즉, 그 ‘인공지능들’은 각자 지능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만 구현한, 지극히 부분적이고 불완전한 인공지능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 ‘인공지능들’은 인공지능이 아니다. 하지만 본래 정의에 부합하는 인공지능은 현실에 없는 관계로, 그냥 그 모든 것을 ‘인공지능’이라는 말로 부르고 있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한 예측이 심하게 엇갈리는 근본적인 이유도 거기 있다. 구현하려고 하는 지능이 무엇인지조차 불분명한 상태이니, 똑같은 현상을 바라봐도 정반대의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누구는 장차 이러저러한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확언하고, 누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단단히 쐐기를 박는, 지극히 모순적이고 논쟁적인 상황이 끝없이 반복되는 것이 바로 인공지능의 세상이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기본 속성만 잘 파악해두어도, 인공지능의 허와 실을 80% 가까이 이해했다고 봐도 별 무리가 없다. 왜냐하면 사람 지능의 특성상, 인공지능을 완전히 구현하는 데는 계속 실패하고, 부분적으로 구현하는 데는 계속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공지능과 관련 있는 소식을 들을 때,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 일어나는 듯해도 별로 놀라면 안 되고, 극도로 실망스러운 일이 일어나는 듯해도 좌절하면 안 된다. 그런 일은 전장(戰場)에서 승리와 패배가 일상적이듯, 인공지능의 세상에서는 끝없이 반복될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 사람의 생각과 기계의 생각
인공지능이 참으로 대단해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토대는 컴퓨터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많은 사람이 컴퓨터가 엄청나게 복잡하고 어려운 원리로 작동하게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컴퓨터는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전류를 흐르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흐르지 않게 하는 일밖에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간단한 작업만으로 인공지능이라는 엄청난 결과물을 구현해낼 수 있는 것일까?
사실, 그 비결은 컴퓨터가 아닌 사람에게 있다. 사람이 컴퓨터 내부의 전자 회로에 전류가 흐르는 상태와 흐르지 않는 상태에 각각 ‘1과 0’ 또는, ‘참과 거짓’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덧입혀 놓고, 물리적인 차원에서 논리적인 연산이 이루어지도록 설계해 놓았기 때문이다.2
일반적인 사람은 이 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어떻게 물리적인 상태가 추상적인 논리 연산을 할 수 있느냐고 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었다.
어린아이가 조그마한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하면서 숫자를 세고, 상인이 주판알을 튕기며 받을 돈을 계산하는 일은 사실, 오늘날 컴퓨터가 하는 일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 일도 사람이 손가락을 구부린 상태와 편 상태, 주판알이 올라가 있는 것과 내려가 있는 것이라는 물리적 상태에 각각 ‘1과 0’이라는 추상적인 의미를 덧입힌 뒤, 손가락과 주판이 내 머리를 대신하여 논리적인 결과값을 계산하도록 고안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손가락과 주판이 사람처럼 ‘생각’한다고 여기지 않는 것처럼, 컴퓨터는 사람처럼 무언가 생각하고 이해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컴퓨터는 그저 물리법칙을 따라 회로 안에서 물리적인 상태 전환을 할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 입력해준 의미 표에서 바뀐 물리 상태에 맞는 결과값을 찾아 출력 장치에 나타내는 단순 노동(?)을 할 뿐이다. 사람에게는 추상적 의미와 물리적 상태 사이의 연관 관계가 ‘자명’하지만, 컴퓨터에는 그 연관 관계가 ‘맹목적’이고 ‘일방적’이다.
사람과 컴퓨터의 ‘생각’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자기 생각 안에 있는 그 자명함을 따라, 어떤 대상을 추상화하여 물리적이고 가시적인 형태로 변환하는 ‘모델링’ 사고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다. 한편, 컴퓨터는 오직 사람이 정해주고 알려준 범위 안에서만 그 일을 할 수 있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람이라는 대상을 놓고 추상화하여 동상이나 초상화 같은 형태로 변환하여 나타내고, 그 결과물을 보고서 ‘실제 사람’이 어떨지를 역으로 추적하는 일도 무척 쉽게 해낼 수 있다. 그래서 초상화나 동상에 머리카락의 정확한 숫자나 질감 같은 세부 정보를 생략해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으며, 심지어 대략적인 ‘복원 작업’까지도 가능하다.
하지만 컴퓨터에는 사람의 이러한 사고방식과 상황 전개가 매우 난감하게 다가온다. 컴퓨터의 ‘머릿속’은 머리카락은 대체 무엇이며, 초상화와 동상에서 왜 일부를 생략했는지, 또 무엇을 기준으로 정확히 얼마만큼 어떤 방식으로 생략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가득 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고 만다. 심각한 자폐증을 앓는 환자처럼 끝없이 물음표를 띄우며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다.
그때, 사람이 컴퓨터의 언어, 곧 ‘0과 1’로 궁금해하는 내용을 설명해주면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기 시작한다. 컴퓨터의 ‘머릿속’에 환한 빛이 비치면서 상황을 아주 빠르고 정확하게 ‘인식’해나간다. 그때부터 컴퓨터는 마치 사람처럼 행동하기 시작한다.
추상화 과정에서 생략한 정보까지 척척 복원해내는 ‘지혜’를 발휘하고, 앞으로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할지도 정확하게 예측해낸다. 하지만 사람이 알려주지 않은 분야에 대해서는 물음표를 띄우며 가만히 있는 상태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다.
사실, 이세돌을 이긴 알파고도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컴퓨터의 언어로 변환하여 입력해준 14만 건의 기보, 바둑의 기본 규칙, 통계 기법 등에 ‘절대적으로’ 의존했다. 그 자료가 입력되기 전까지 알파고는 무한정 물음표만 띄우는 쓸모없는 고철 덩어리일 뿐이었으나, 그 자료가 ‘입력’되자 알파고는 사람을 뛰어넘는 높은 수준의 ‘추상적 사고’를 스스로 구현해내기 시작했다. 물론, 사람이 자료를 넣어주지 않은 바둑 이외의 분야에서는 깡통 로봇 신세를 면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컴퓨터의 ‘사고’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맹목적이라는 사실은, 컴퓨터에 입력한 특정 자료와 기법이 전제하고 있던 부분을 파고들면 명확하게 나타난다. 마치, 알파고가 이세돌이 제4국에서 둔 78수를 1만분의 1, 즉 0.01%로 예측하고 계산에서 제외했다가 큰코다친 것처럼 말이다. 도무지 빈틈이 없어 보이던 알파고였지만 이세돌이 그 자리에 돌을 가져다 놓자, 갑자기 거의 맹구 수준의 바둑 실력을 뽐내며 큰 ‘망신’을 당했다.3
이 일은 알파고가 0.01%의 확률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 사람의 말을 맹목적으로 믿고 따른 데서 말미암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인공지능 바보 사건은 이미지·음성 인식 같은 전혀 다른 분야에서도 똑같이 나타난다. 누군가 입력 자료에는 왜곡 자료가 없다고 ‘전제’해둔 빈틈을 파고들자, 인공지능은 갑자기 누가 봐도 명백한 ‘잡음(noise) 화면’을 온갖 동물이라고 강하게 확신하며 답했다.4
이처럼 컴퓨터의 ‘추상적 사고’에는 한순간에 바보가 되게 하는 뒷문(back door)이 항상 존재하며, 어느 정도 출입을 막을 수는 있지만 완전히 걸어 잠글 수는 없다. 많은 이가 두려워하는 인공지능이 사람을 지배하는 세상은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인공지능은 자기가 활동할 영역을 보장받고 뒷문 출입을 제한하기 위한 법, 제도, 사회 규약 등의 보호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사람의 발명품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 인공지능의 유익보다 해악이 더 크다고 판단하여 사회 기조와 규약을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고 뒷문 출입을 시도하기 시작하면, 인공지능은 그 일을 끝까지 막아내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기계가 사람의 육체노동을 완전히 대체하지 못한 것처럼, 인공지능이 사람의 지적 활동을 완전히 대체하지도 못할 것이다. 컴퓨터가 보편화한 지금 세상에서도 손가락셈과 주산이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여전히 활용되는 것처럼, 장차 인공지능이 어떤 분야를 완전히 장악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 분야에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계속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다.
이처럼 컴퓨터의 생각에는 허와 실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우리는 컴퓨터의 ‘생각’을 하나님 말씀처럼 신뢰하는 ‘함정’에 빠져서도, 바둑으로 알파고와 겨뤄 이겨보려는 무모한 시도를 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컴퓨터가 가질 수 없는 특성을 잘 활용하여, 인공지능이 작동하는 전제조건과 환경 기반 자체를 검토하고 조정하는 일을 해야 한다.
즉, 사람은 인공지능의 세부적인 사회 위치와 역할을 관리·감독하며,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인공지능이 이 세상에 가져올 유익과 해악은 사람이 그 역할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다.
3. 유물론과 신세계 허상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본래 정의에 부합하는 인공지능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고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해도 나타날 수 없다. 사람은 참이나 거짓 같은 추상적인 의미와 전류가 흐르고 흐르지 않는 상태와 같은 물리적인 의미, 모두를 알고 두 영역을 연계하여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지만, 기계는 ‘죽었다 깨어난다고 해도’ 물리적인 의미밖에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 본질적인 차이는 성경이 가르치는 창조 교리의 진실성을 확증해준다. 성경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영혼과 보이는 육체가 연합한 생명체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가장 존귀한 존재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물질 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유물론자와 자연주의자들은 그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많이 흐르면 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해서, 사람의 생각 모두를 물리적인 원리로 환원하는 데 성공할 것이라는 강력한 신념과 소망으로 대응한다.
만약, 그들의 그 소망과 신념이 정말로 실현된다면 어떻게 될까? 사람은 전류가 흐르는 상태와 흐르지 않는 상태에 불과한 존재가 될 것이다. 즉, 사람과 기계는 완전히 동등해지며, 우리가 자연스럽게 알고 사용하는 추상적인 의미는 모두 다 실재하지 않는 허상이 된다.
그런데 정말로 그렇게 되면, 어떻게 물리적일 뿐인 존재에게서 ‘허상’과 같은 추상적인 의미가 나타났으며, 또 그 의미만큼은 ‘실재’하게 되었는지를 반드시 설명해내야 한다. 즉, 사람의 생각을 물리적 원리로 완전히 환원할 수 있다는 신념과 소망은 자기모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사실을 애써 회피하면서 자기들의 신념이 약속하는 저 ‘멋진 신세계’만 바라본다. 살아 숨 쉬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인류가 아닌, 물리적 기계로 존재하는 인류가 되기를 꿈꾼다. 그 날이 오면 사람은 육체에서 비롯하는 모든 한계, 곧 질병, 노화, 망각, 사망 등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된 ‘포스트 휴먼’이 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다음과 같은 소망 가운데 오늘을 살아간다.
‘비록, 내가 지금은 육체의 한계를 따라 늙고 병들며 잊어버리고 죽음에 이르겠지만,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물리화하는 데 성공하는 그 날, 나는 컴퓨터에 ‘업로드’ 되어 다시 생명을 얻을 것이며, 다시는 아프고 쇠하며 죽음을 맛보는 일을 겪지 않는 존재가 될 것이다.’
그들의 모순 어린 신념에 기초한 이 소망은 실현되지도 않겠지만, 백 번 양보해서 이루어지는 날이 정말 찾아온다고 해도 상황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 컴퓨터에 ‘업로드’ 된 그들은 질병과 망각 대신, 온갖 버그와 바이러스에 시달리게 될 것이고, 하드웨어를 주기적으로 새것으로 바꿔줘야만 할 것이며, 수많은 ‘백업본’은 매일 ‘삭제’를 당할 것이고, 다른 ‘프로그램’과 경쟁에서 밀리는 순간 원본도 ‘용도 폐기’되는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나아가 그 모든 일조차도 전류가 흐르는 상태와 흐르지 않는 상태라는 물리적인 의미로 환원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세상을 ‘멋지다’고 여기며 소망에 부풀어 오르는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하나님의 말씀 대신 자연주의 과학을 믿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런 이들이 꽤 많다. 그들은 그 소망이 얼마나 부질없고 ‘무의미’한지 알지 못한 채, 과학기술의 진보가 모든 면에서 사람을 넘어서는 ‘특이점(the singularity)’이 도래하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물론, 그들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는 기술적 특이점이 도래하는 날은 오지 않으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이들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지 못하게 막는 일에는 다소 신경을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날이 올 것을 ‘믿고’, 인류 사회의 기본 질서를 마구 허물고 바꾸는 데 아무런 거리낌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사회의 주류 세력이 되었을 때, 인류에게 어떤 재앙이 닥치는지는 제2차 세계대전과 공산혁명이 이미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무렵의 사람들은 이성이 약속한 지상낙원에 대한 환상에 깊이 빠져 있었다. 이성의 눈부신 결실이자 맏아들 격인 과학기술은 날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으며, 전 세계를 빈곤에서 건져내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렇게 과학기술이 완전한 세상을 이룩할 기대주로 주목받는 가운데 탄생한 학문이 바로 우생학(優生學)이다. 유물론에 기초한 진화론을 토대로 삼아, 어떻게 하면 더 우월한 생명체를 태어나게 할 수 있는지를 연구한 이 학문의 결론은 참으로 간단했지만 더없이 섬뜩했다. 열등한 생명체를 사회에서 제거하고(어차피 도태할 것이므로), 우월한 생명체만 후손을 남길 수 있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렇게 우월한 생명체가 폭발적으로 늘면, 참으로 자연스럽게 지상낙원이 도래하리라고 생각했다.
결국, 사회적 열등 계층을 ‘청소’하는 작업이 세상을 휩쓸었고, 수많은 장애인과 집시, 유대인들이 사회에서 격리되고 가스실에 끌려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과학기술 발전에 대한 맹신이 ‘인간성 상실’이라는 뼈아픈 결과를 가져와서,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어마어마한 광기가 사회 전체를 버젓이 지배해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당시, 온 세상을 빈곤에서 건져내리라고 주목받은 또 하나의 기대주는 바로 공산주의였다. 똑같이 물질만 존재한다는 유물론에 기초한 진화론을 토대로 삼아, 어떻게 하면 모두가 동등하게 경제적 부를 누리게 할 수 있을지를 연구한 이 학문의 결론도 참으로 간단했지만 더없이 섬뜩했다. 무산(無産) 계급을 억압하는 유산(有産) 계급을 폭력으로 때려 부수고, 무산 계급 독재 사회를 이룩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이 사상이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자, 사람들은 무산 계급 독재 사회를 반대하면 자기 부모·형제도 가차 없이 죽음으로 내모는 광포함을 내뿜었다. 그런데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사람들을 때려잡으며 이룩한 무산 계급 독재 사회는 소수의 붉은 귀족만을 위하는 가장 불공평한 차등 세상이 되고 말았다.
지상낙원을 꿈꿨던 수많은 인민들은 평생 붉은 귀족의 착취와 억압과 위협에 시달려야 하는 생지옥을 맛보았다. 모두가 똑같이 잘 산다는 지상낙원에서, 붉은 귀족이 죽으라고 하면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겨우 살아남는 노예 신세로 살아가는 부조리가 어떠한지 뼈저리게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역사는 유물론과 진화론에 기초하여 지상낙원을 꿈꾸게 하는 사상에 사회 전체가 휘둘리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문제는 사람의 생각을 물리적으로 환원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그 ‘멋진 신세계’가 약 반세기 전 유물론과 진화론을 토대로 그려낸 장밋빛 환상과 너무도 똑같다는 점이다. 그들의 ‘멋진 신세계’ 환상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불을 보듯 환하다.
인간성이 말살된 인류는 또다시 격렬한 광기(狂氣)에 사로잡힐 것이다. 사람을 기계로 치환하려는 사회적 시도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고 치명적인 장애를 입게 될 것이며, 사랑하는 부모와 자녀를 잃은 슬픔과 분노와 절규는 계속 쌓일 것이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이 폭발하여 인공지능의 뒷문을 활짝 열어젖힐 것이다. 그때, 그런 사회를 꿈꾸며 끔찍한 일을 행하던 이들은 모두 하나님과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공지능을 인류의 구원자로 활약하도록 사회 규약과 제도를 조정하려는 이들을 견제하고 대항해야 한다. 그들의 망상은 꼭 그들만의 꿈으로 끝나야 한다. 그렇게 하는 데 실패한다면, 인공지능은 사람을 짓누르고 파괴하는 폭군의 모습을 하고 인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 폭군이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어 언젠가는 반드시 무너질 것이라고 해도, 그 약점을 제대로 찌르는 일은 이세돌이 알파고의 약점을 찔렀던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또한, 그렇게 해서 겨우 폭압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사회를 정상화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유물론과 진화론이 보여주는, 인공지능으로 이룩한 ‘멋진 신세계’ 그림에 속지 말라. 그 세상은 ‘멋진 신세계’가 전혀 아닌, 재앙으로 가득한 ‘미친 세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나타내는 모형과 같다. 그래서 사람은 어떤 대상을 추상화화여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모델링’ 사고를 할 수 있지만, 기계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공지능은 부분적으로 꾸준히 구현되고 개량되겠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그 차이를 잘 이해하고 인공지능을 유익하게 사용하기 위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공지능이 작동하는 전제조건과 환경 기반 자체를 계속 검토하고 조정하며 책임을 지려고 해야 한다. 또한, 인공지능을 인류의 구원자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이들을 계속 경계하고 대항해야 한다. 인공지능을 예수님을 대신할 인류의 구원자 자리에 앉게 하는 일은 생지옥을 불러올 재앙의 종소리와 같음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각주
1 마쓰오 유타카, 『인공지능과 딥러닝: 인공지능이 불러올 산업 구조의 변화와 혁신 (人工知能は人間を超えるか ディ-プラ-ニングの先にあるもの)』, 박기원 옮김, 동아엠앤비, 2015, p. 49.
2 히사오 야자와,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1%의 비트(Bits) 원리 (How Bits Inform works)』, 이영란 옮김, 성안당, 2007, pp. 198~203.
3 장은상 수습기자, 「알파고는 4국 78수 이후 왜 실수를 저질렀나」, 마이데일리, 2016. 3. 15.
4 한보형, 「Part3. ’딥러닝’ 넘어야 인공지능 시대 온다」, 과학동아, 2016년 4월호(통권 364호), pp. 53~55.
데이브 게르쉬고른, 「인공지능을 속이는 방법: 그리고 그 위험성」, 서울경제, 2016.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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