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2) 오직 성경 -하-
김재호
불신앙, 죄의 핵심 원리
성경 본래의 가르침이 이러하다면, 그것을 비틀고 왜곡하는 가르침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우리가 성경의 본래 가르침을 구원의 속성에 따라 순금을 분류하는 것처럼 분류했듯이, 성경의 가르침을 어지럽게 하는 거짓도 똑같이 걸러낼 수 있다. 진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믿도록 사람을 이끄는 반면, 거짓은 늘 사람을 믿음에서 떠나게 한다. 거짓이 언제나 바라보고 소망하는 바는 배교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가 근간을 이루고, 배교는 교만과 이기심과 자기 사랑이 핵심이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은혜를 따라 자원함으로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낮춰 여자의 아들로 세상에 나셔서 목수의 일을 하며 부모에게 온전히 순종하셨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잔치의 귀빈 자리와 선생님 소리 듣기를 탐하면서도, 겉으로는 율법들을 열심히 지켜 경건한 자인 척했다. 이들은 거짓 선생이 되어 다른 소경들을 인도했으며,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었다(마 23:15). 성경은 구원 역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 거짓의 기원과 마지막을 기록하고 있다. 이번에도 간단하게 네 구절만 추려서 살펴보도록 하자.
그 뱀이 그 여자에게 “너희가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고 말하였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는 먹음직하고,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였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니, 그도 먹었다. 그러자 두 사람의 눈이 열리고 자기들이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었으며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자기들을 위하여 치마를 만들었다. 날이 서늘할 무렵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창 3:4~8).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죽었거나 혹 이 광야에서 죽었어야 했는데, 어찌하여 여호와께서는 우리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시는가? 우리 아내와 아이들이 사로잡힐 것이니, 차라리 이집트로 돌아가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그들이 서로 말하기를 “우리가 우두머리를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하니 (민 14:1~4)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율법의 더 중요한 것들인 의와 긍휼과 신뢰는 버렸기 때문이다. 너희가 이것들도 행해야 했으며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맹인된 인도자들아, 너희가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고 있다.” “너희에게 화가 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그 속은 착취와 방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맹인된 바리새인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하게 하여라. 그러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 (마 23:23~26)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가 와서 내게 말하기를 “이리 와라. 내가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여주겠다. 땅의 왕들이 그 여자와 더불어 음행을 하였고, 땅에 사는 자들도 그 여자의 음행의 포도주로 인해 취하였다.”라고 하였다. 그가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광야로 갔다. 그때 내가 붉은 짐승 위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았는데, 그 짐승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름들로 가득하였으며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여자는 자주색과 붉은 색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미고 손에 역겨운 것들과 음행의 부정한 것들로 가득찬 금잔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마에는 ‘비밀이고, 바빌론이고, 음녀들과 땅의 혐오스러운 것들의 어머니’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 또 내가 보니, 그 여자가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하였다(계 17:1~6).
죄의 기원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당신의 모든 영광을 보이시고, 참된 경외함으로 당신을 믿고 순종하기를 바라셨다. 따라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겸손함과 믿음으로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말씀대로 해야 했다. 예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당한 똑같은 종류의 시험을 믿음으로 훌륭히 통과하셨다(마 4:1~11).
반면 사람은 하나님보다는 자기 실존을 더 믿고 의뢰했으며, 그로 인해 마음에 탐심이 일어 죄를 범했다. 탐심이 모든 소욕을 비틀어, 하나님의 영광을 육체의 정욕으로 대체하는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이다. 죄를 지은 사람은 그러한 자기 수치를 가려줄 것을 찾아,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 뒤, 사람은 그와 같은 상태로 태어나게 되었다. 탐심의 노예, 올바른 해결책을 추구할 능력조차 남아있지 않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이러한 죄의 속성은 모세를 따라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서도 유감없이 펼쳐진다. 하나님께서는 크신 권능과 신실함을 수없이 보여주셨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와서 그 약속을 저버렸다. 그들의 시선은 다시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졌고, 잠시 있을 육체의 안위를 위해 종의 멍에를 매러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광야와 칼에 쓰러지게 하기 위한 술책’으로 여겼다. 그 결과, 수많은 이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정말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리새인 역시 자기 의에 취해 하나님의 의를 저버렸다. 그동안 지켜온 율법들과 그것을 지키기 위한 많은 열심과 노력, 결단 등을 좋게 여겼지만, 그것이 바로 무화과나무 잎으로 만든 치마에 해당한다는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했다. 그들의 무지한 열심은 결국 마음을 높여, 자신보다 다른 이들을 낫게 여기지 못하도록 눈을 가려버렸다.
그들은 선생님 소리 듣기를 즐기며 높은 자리에 앉기를 당연하게 여겼다(마 23:6, 7). 외양은 선하고 경건해 보였지만, 속은 여전히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했다. 그 결과, 공의와 긍휼과 믿음으로 속사람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의는 바알세불의 미혹으로 매도되었다(마 12:24). 결국 그들에게 지옥의 선고가 떨어졌고, 그 저주를 따라 수많은 육신적 이스라엘이 이미 멸망했는데, 지금도 멸망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멸망할 것이다(마 23:33~36).
이제 세상 끝날로 가보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에, 멸망의 아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그는 자신을 높여 하나님이라 주장하며 온갖 능력, 거짓 기적, 불의, 속임수로써 세상을 미혹할 것이다(살후 2:3~8). 그때, 온 세상은 전쟁과 기근과 재난으로 흉흉하고,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을 받을 것이다(마 24:1~6). 그때, 멸망의 아들은 자신을 돕던 이단의 괴수로부터 모든 권력을 이양받고, 그 음녀를 철저하게 멸망시켜 1인 천하를 확립할 것이다(계 17:12~18).
이렇듯, 참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의 검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시기까지, 자기 힘으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저주에서 벗어나 보려는 세력은 계속 힘을 얻을 것이다. 옛날에 바벨탑이 무너지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듯, 주님의 재림으로 이 세상의 모든 역사는 마무리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다. 옛날에는 온 인류가 죄로 흩어져야 했지만, 그날에는 온 인류가 은혜로 한자리에 모일 것이다.
‘오직 성경’대로 살아가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신 바가 이와 같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는 어떤 길로 걸으며 무엇을 피해야 할까? 답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구속의 경륜을 온전하게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롬 10:17).
따라서 구속의 언약, 즉 언약 신학에 굳게 뿌리를 내린 가르침으로 성경을 강론하는 교회에 출석해야만 한다. 또,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의롭다 함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구속의 언약이 세상에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사람과 상의하시지 않으셨다. 오직 당신의 긍휼히 여기심을 따라 일방적으로 수여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구원의 근거와 동인(動因)을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두는 칼빈주의 신학을 굳건히 붙드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이 굳건한 두 가지 토대 위에 죄, 회개, 그리스도, 십자가, 부활, 천국, 지옥의 교리를 빠짐없이 가르치는 교회에 나가야 한다.
피하기에 힘써야 할 것도 있다. 우리는 실제 생활에서 인간의 실존적 능력이 틈타는 것을 늘 경계해야 한다. 자기를 신뢰하는 부패한 마음이 지성을 작동시키면 철학이 그의 삶을 지배하게 되고, 감성을 움직이면 신비주의가 번성하게 된다. 따라서 칼빈주의 신학에 근거하지 않은 철학이나 신비주의에 바탕을 둔 문화나 가르침이 우리 삶에서 나타나면, 무서운 누룩이 스며들고 있음을 속히 깨달아야 한다. 누룩은 적은 덩이지만 전체를 다 못 쓰게 할 수 있다(갈 5:9). 우리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순전한 덩어리를 만들기에 힘쓰는 것만큼이나, 그 반죽에 조금의 누룩이라도 뿌려지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무서운 누룩을 제거하는 일을 게을리한 최종 결실이 로마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참으로 로마교(천주교)는, 철학과 신비주의를 완전하고도 철저하게 섭렵한 음녀의 여왕이라고 불리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로마교가 말하는 복음은 누룩에 의해 본질이 다 사라져버렸다.
그 외, 다른 여러 누룩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하는 집단도 많다. 철학의 덫에 걸린 기독교의 모습은 신복음주의, 신정통주의, 세대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자유주의가 대표적이고, 신비주의의 늪에 빠진 모습은 오순절 은사주의, 퀘이커, 극단적 경건주의, 영지주의가 대표적이다. 우리는 칼빈주의 신앙을 지키는 데 힘쓰는 만큼, 어떻게 철학과 신비주의가 틈을 타서 해를 끼쳐왔는지 이해하는 일에도 똑같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늑대는 온전한 울타리를 뛰어넘지 못한다. 그러나 울타리에 허술한 곳이 단 하나라도 있으면, 바로 그곳을 통해 울타리 이편저편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 전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여기에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야 한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엉뚱한 것을 좇고, 한편으로 온갖 누룩을 끌어안고 있다면 결과는 참담할 뿐이다. 그 모든 피해와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녀에게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걷도록 하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거기 기록된 모든 것들로 우리를 지켜주실 것이다.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2) 오직 성경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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