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와 음모론
김재호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성급하게 어느 한 극단으로 치우치기 좋아하고, 마귀는 그런 사람의 심리를 악용하기를 즐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음모가 계획되고 실행되는지 말하는 것 자체를 악하고 위험한 일처럼 여기고, 다른 이들은 마치 세상만사가 음모로 통제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전자는 우리 실생활에 음모의 영향이 실제로 작용하는데도 마냥 태연히 있기만 하고, 후자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을 엄청나게 부풀려서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흐려놓는다. 물론, 마귀는 사람이 어느 길로 향하든지 대환영이다. 어느 쪽이든 자기 목적과 뜻을 쉽게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1. 음모의 기본 특성
이 주제에 올바르게 접근하려면, 우선 음모의 기본 성질을 알아둬야 한다. 그렇지 않은 채 무턱대고 음모에 접근하면, 타락한 우리 마음이 우리를 한쪽 끝으로 몰아가려고 할 때 그 일을 제어하기가 무척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음모는 우리 영혼을 해하려고 하는 세상의 다양한 시도로부터 우리를 거룩하게 지키고 보호하려고 알아두는 것이지, 스스로 해를 입고 뒤로 물러가기 위해서 알아두는 것이 아니다.
음모(陰謀)란 기본적으로 은밀히 진행되는 모종의 계획이나 사건을 말한다. 백주 대낮에 많은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면서 음모를 꾸미고 실행에 옮기는 이는 없다. 어떤 음모이든지 음모는 항상 사람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음모는 왜 항상 은밀하게 계획되고 실행에 옮겨지는 것일까? 왜 모두가 보는 앞에서 떳떳하게 뜻을 밝히고 행하려고 하지 못하는 것일까? 이는 그 계획과 목적이 사회적으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음모를 꾸미는 이들은 그들이 품은 뜻과 계획이 자기에게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리라는 사실을 이미 인식한 상태이다.
물론, 상황이 전반적으로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들은 대개 마음에 품었던 뜻을 포기하거나 전체적인 방향과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하게 된다. 그러나 그 뜻과 계획 가운데는 좀처럼 포기하거나 변경하기 어려운 것도 있다. 특히, 어떤 사람이나 단체의 정체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을 때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며, 그 정체성이 권력 기반 역할을 하고 있을 때는 더욱더 그렇게 된다.
그럴 때, 사람은 아주 적극적으로 음모를 꾸미게 된다. 진의를 감추고 누구나 받아들일 만한 명분을 앞세운다. 모든 진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겉모습만 보아서는 진정으로 하려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 어렵게 된다. 그러나 그가 품은 실제 뜻과 계획은 수면 아래에서 계속 실행되고 있다. 그래서 어느 시점이 되면, 진짜 뜻과 계획을 더는 감출 수 없게 되는 상황이 오게 된다. 그러나 그전까지는 대부분 심증은 가나 물증은 별로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이러한 음모의 기본 속성은 카이사르에게서 잘 나타난다. 카이사르는 황제가 온 나라를 다스리는 ‘제정(帝政) 로마’라는 그림을 일찍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다. 로마의 영토가 계속 넓어짐에 따라, 권력 분산과 상호 견제에 방점을 찍고 있는 공화정(共和政) 체제로는 나라를 제대로 다스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로마가 원래 왕정(王政)에서 출발하여 공화정으로 나아간 나라라는 데 있었다.1그런 ‘정체성’을 지닌 나라에서 통치 효율을 높이려고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하는 일이 무엇(반역)을 의미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서 카이사르는 원로원의 집중적인 견제와 반대를 아주 노련하게 피해 나가며 자기 이상을 아주 은밀하게 실현해나갔다. 우선, 민중을 위하는 정치를 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삼두정치라는 세력 구도를 형성한 다음, 그것을 발판 삼아 집정관에 당선됨으로써 정치 무대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
집정관 임기를 마친 다음에는, 그동안의 공적과 삼두정치 구도를 다시 한 번 활용하여 속주(屬州) 총독 자리에 올랐다. 그리하여 제정을 향한 분수령이 될 갈리아 원정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2
갈리아 지역은 원래 로마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위협하던 북방 이민족이 사는 땅이었다. 일반인이라면 엄두도 내기 힘든 원정이었지만, 카이사르에게는 천부적인 군사 재능이 있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는 그에게 큰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갈리아 전역은 순식간에 카이사르의 손에 넘어갔고, 그 소식을 들은 로마 시민은 그에게 열광했다.
카이사르는 그 원정을 이끌면서 항상 진한 빨간색 망토를 착용했는데, 이는 갈리아 사람들의 마음에 자기 존재를 각인하려는 지극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원정에 성공한 카이사르는 곧장 그곳을 자신의 든든한 정치 기반으로 만드는 일에 공을 들였다. 카이사르의 출중한 지도력은 참 오랫동안 골치를 썩였던 갈리아 지방을 한순간에 로마의 우등 속주로 바꾸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3
그렇게 갈수록 카이사르의 인기가 높아지고 세력이 강성해지자, 그의 생각을 뻔히 알고 있던 원로원은 큰 위협을 느꼈다. 이대로 놔두면 반드시 왕의 자리로 나아갈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원로원은 더는 카이사르가 권력 근처에 올 수 없게 하는 절차를 밟았다.
속주 총독 임기가 거의 끝날 무렵, 갈리아 총독으로서 지휘하고 있던 군단을 즉시 해산하고 로마에는 민간인 신분으로 홀로 귀환할 것을 결의했다. 또한, 집정관 출마를 생각하던 카이사르가 선거에 나오지 못하도록 대리인을 통한 후보자 등록을 막는 가운데, 후임 갈리아 총독을 미리 배정해 버렸다.4 즉, 자기 세력의 본거지를 기꺼이 내놓고 정적으로 우글거리는 로마에 비무장 상태로 혼자 돌아오면 왕이 될 마음이 없는 것으로 알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왕이 될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선포한 셈이었다.
한동안 카이사르는 미리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은 호민관을 통해 이러한 원로원의 조처가 실행되지 못하게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몇번이나 뜻이 막힌 원로원은 결국 ‘원로원 최종 권고’라는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원로원 최종 권고’란 타협이나 토론의 여지가 없는 절대적인 성격을 지니는 결의로서, 현대의 계엄 선포와 비슷한 조처이다. 즉 이 권고가 결의되면, 이 권고를 따르지 않는 이에게는 무조건 ‘국가의 적’으로 선포되어 반역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정식 재판이나 변론은 꿈도 꾸지 못하며, 오직 즉결 처분과 소탕만 남는다. 다시 말해,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체제 전복 음모가 국가 비상 상태를 선포할 정도로 현실화되었으며, 더는 뒤로 물러설 수 없다고 판단한 셈이었다.5
카이사르는 그 결의에 자기 휘하의 제13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하는 것으로 답했다. 순식간에 로마를 점거한 카이사르는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 체제를 옹호하던 폼페이우스 일파와 내전에 들어갔으나, 이미 선수를 얻어맞고 우왕좌왕하는 그들에게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두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 자리에 앉았다.6 사실상 황제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그렇게 카이사르가 계획하고 실행한 모든 일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나자, 사람들은 그동안 카이사르가 왜 그렇게 자기 출중함을 널리 알리는 행보를 보였는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단순히 동네방네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그런 방식으로 제정의 효율성과 원로원 체제의 무능력함을 계속 대비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히려고 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렇게 몰래 계획하고 실행한 카이사르의 뜻이 실현되자, 이제는 상황이 역전되어 공화주의자들이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공화주의를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공화주의자들은 몰래 카이사르를 암살할 계획을 꾸민 것이었다.
음모의 주동자들은 카이사르 제거라는 대의명분에 힘을 실어줄 덕망 있는 인물을 찾아 다녔고, 결국 브루투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브루투스의 합류와 함께 카이사르 암살 계획은 곧장 실행에 옮겨졌고, 카이사르는 얄궂게도 폼페이우스 동상 앞에서 수십 차례 칼에 찔려 살해되고 말았다.7
카이사르의 경우 외에도, 태종이 될 이방원이 조선 건국을 위해 고려의 마지막 충신이자 선비인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암살한 일, 세조가 될 수양대군이 국왕 중심적 왕권 확립을 위해 문종의 유지를 받든 김종서를 철퇴로 때려죽인 일, 단종 복위 운동을 펼치며 자신을 암살하려던 사육신(死六臣)을 색출하여 처형한 일 등등, 역사 속에서 음모의 실례와 결과를 확인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책을 넘기면 어두운 음모의 그림자가 여기저기서 모습을 드러낸다. 자신이 품은 뜻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의 타락한 본성이 여기저기서 얼굴을 들이민다.
음모는 소설이나 만화책 속에서나 볼 법한 허구의 산물이 아니다. 타락한 사람의 마음과 그런 마음을 자극하는 마귀의 활동은, 우리가 상상하기조차 힘든 음모를 종종 현실이 되게 한다. 지금도 분명히 이 지구 어디에선가는 음모가 꾸며지고 실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음모를 지극히 실제적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여타 다른 악을 실제적으로 이해하고 멀리하는 것처럼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음모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앞으로도 역시 그러할 것이기 때문이다.
2. 음모와 하나님의 주권
음모는 실제 역사 속에서 일어나므로,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누군가 아무리 탁월한 음모를 꾸미고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궁극적인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앞서 말한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과 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제정 로마는 제국 전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하여 치안의 안정과 향상을 가져왔다. 그로 인해, 사도 바울은 도둑의 습격을 그렇게 크게 염려하지 않고 광범위한 지역으로 선교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거대한 제국을 하나로 모으는 구심점이 점점 황제 숭배가 되자, 로마 제국은 성도의 신앙을 연단하는 바벨론 풀무불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과 섭리 안에서’ 사람이 꾸미는 모든 음모를 당신의 뜻과 계획에 따라 선하게 사용하신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과 쿠데타가 창세 전부터 택하신 이방인을 대거 하나님 나라로 불러 모으시기 위해서 허용된 것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쿠데타 성공 이후에도 로마 시민 사이에서 자기 인기가 계속 유지되었던 이유도 자신이 그저 잘해서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장차 로마 제국 안에서 황제 숭배 풍조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일이 당신의 교회 안에 몰래 들어온 이단자들을 몰아내고 성도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은 아예 짐작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카이사르는 그러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해 예비된 도구였다. 일반인으로서는 엄두도 내기 어려운 갈리아 원정을 대성공으로 이끌고 쿠데타와 내전에서도 큰 승리를 거머쥐었으며, 로마 시민들의 열광적인 성원을 받은 것은 그가 계획을 잘 짜고 실행에 옮긴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음모 그 자체에는 별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이해해야 한다. 누군가 정말 기막힌 음모를 꾸미고 완벽하게 실행에 옮긴다고 해도, 어떻게 진행되고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품고 계신 구속 계획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는 방식을 완전히 다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알아야 하는 근본 원리는 아주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우리는 믿을만한 경로를 통해 음모의 소식이 들려온다고 해서, 그 소식을 무턱대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직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구속 계획의 근본 원리에 비추어, 음모의 신빙성부터 찬찬히 헤아려봐야 한다. 그 근본 원리가 허용하지 않는 음모는 사람이 아무리 힘을 쓰고 애를 쓴다고 해도 전혀 다른 결과를 내거나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바벨탑 사건처럼 말이다(창 11:8).
3. 복음과 구원,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을 보존하시는 근본 이유
타락한 세상이 오늘도 유지되는 궁극적인 이유는 복음과 구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당신의 백성을 모두 다 구원하시기까지 이 세상을 멸망하지 않도록 붙드신다. 그때까지는 심고 거둠,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계속 유지된다(창 8:22). 사람들은 먹고 마시며 시집가고 장가가기를 그치지 않을 것이다(마 24:37~39). 하나님께서는 ‘그런 세상’에 복음을 들려주셔서, 택하신 사람이 구원받게 하신다. 노아의 홍수 이후로부터 주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시기까지 세상의 이러한 상태는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은 이 세상에 외적인 사회·환경적 변화나 영향이 전혀 없었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은 하나님께로 돌아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로 인해 이미 많은 변화를 겪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음모가 계속 꾸며지고 실행에 옮겨질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외적 변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적인 형태를 조금도 바꾸지 못한다. 왜냐하면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하시는 손길이 그러한 변화를 막아서기 때문이다.
실제로 근대 이후부터 이 세상에서는 신분 제도가 하나둘씩 모습을 감추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존귀하며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를 지닌다는 인권 사상은 이제 거의 모든 세계에서 상식처럼 통용된다. 그러나 표면적인 신분 제도는 사라졌을지언정, 실제적인 신분 질서는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돈 앞에서 여전히 머리를 숙여야 하며, 법의 칼날은 권세 있는 자들 앞에서 무뎌지게 마련이다. 계급 타파와 인민해방을 목놓아 부르짖던 사회주의 국가에서 출현한 ‘붉은 귀족’ 계층은 실제적인 신분 질서가 얼마나 사라지기 어려운지 잘 보여준다.
이처럼 세상은 앞으로도 숱한 외적 변화를 겪겠지만,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그 나물에 그 밥’인 상황이 계속 이어질 것이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기까지, 이 땅 위에서 참된 변화라고 할 만한 변화는 단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세속 정부를 존중하라고 하는 대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롬 13:1~7). 사회의 형태와 겉모습이 아무리 많이 바뀐다고 해도, 세속 정부의 근본 역할은 변하거나 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정부를 통해 인생의 기초 질서와 조건을 어지럽히는 이들을 징벌하심으로써, 이 세상이 죄에 함몰되어 급속히 멸망으로 치닫지 않게 막으신다. 그러한 하나님의 선한 섭리하심이 없다면, 성도가 죄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얻기도 전에 세상이 먼저 멸망을 자초해버리고 말 것이다.
물론, 세속 정부가 완전하지는 않다. 정부 관료가 기초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선한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그들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마귀는 죄에 물든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악용하는 데 선수이다. 그러므로 정부가 검을 멋대로 휘둘러 오히려 기초 사회 질서를 유린하는 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성도에게 위정자를 위해서 기도하라고 가르치는 이유도 거기 있다. 그들이 자기 본분을 더 잘 행하여서, 성도가 자기 본분을 더 잘 감당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이 만들어지도록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이다(딤전 2:2).
그러므로 악한 정부야말로 하나님의 가장 격렬한 진노이자 저주이며, 세상 마지막 때가 어떠할지를 미리 보여주는 살아있는 표본과 같다(살후 2:6, 7). 하나님께서는 땅끝까지 복음이 전해지는 일과 함께, 이 세상에는 가장 악한 형태의 정부가 나타나게 하실 것이다. 이전까지와는 정말로 확연히 다른 ‘생지옥’ 같은 세상, 즉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 출현하게 될 것이다.
그날에는 광기 어린 짓으로 취급받던 일들이 공공의 선처럼 여겨지며, 사람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일들이 별다른 제한 없이 합법적으로 행해질 것이다. 모두가 그 정부의 최고 권력자를 하나님처럼 떠받들고 숭배함을 국가의 기본 정체성으로 삼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참 그리스도인을 국가 안전과 사회 질서 유지에 해를 끼치는 위험분자로 몰아갈 것이다.
자연 질서도 명백한 파열음을 내면서, 정말로 모든 것이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 줄 것이다(살후 2:1~12; 눅 21:25, 26).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죄에 눈이 멀어 그 모든 징조를 가볍게 무시할 것이며, 정말 느닷없이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살전 5:2, 3).
그러한 최악의 세상이 도래한다고 해도, 사람의 인격성까지 무너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장 악랄한 죄악이 온 세상에 관영하려면, 그 죄악을 성립하게 하는 기초 토대에는 조금의 변화도 있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 사람을 칼로 해쳤을 때, 우리는 ‘살의’를 갖고 칼을 휘두른 그 사람의 인격에 살인죄를 적용하며 책임을 묻지, 범행에 사용된 칼에 죄를 묻지는 않는다. 사람의 인격성이 무너지면,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인지할 수 있는 근본 토대도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은 선악을 인지할 수도 없는 존재에게 죄를 묻고 진노하는 실로 황당무계한 신처럼 되고 만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아무리 악으로 치닫고 천지가 개벽할 만한 일이 지하에서 수없이 꾸며지고 실제로 실행된다고 해도, 사람의 인격성 그 자체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 때는 사람의 인격이 어느 정도까지 죄로 치달을 수 있는지가 나타나는 시기이지, 사람의 기계화가 일어나고 기계의 인간화가 실현되는 시기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시면서부터 인격과 비인격 사이의 경계를 아주 분명하게 구분하셨으므로, 그 경계가 지워지거나 지위가 역전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와 같은 기본 전제와 토대 위에서, 사방에서 들려오는 음모의 소식을 헤아려봐야 한다. 복음과 구원, 세속 정부의 기본 질서 유지 기능, 인격의 불변성을 기본 축으로 삼고, 누군가 진행하고 있다는 음모의 소식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
만약, 이 세 가지 요소를 거스르거나 무시하는 음모라면 그냥 무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음모가 실제로 계획되어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고 해도, 결국 이 요소에 막혀 붕괴하게 될 참으로 하찮은 시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4. 음모론의 해악과 허탄함
그렇다면 앞서 말한 기준으로 음모의 소식을 공정하게 평가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사실, 성적표는 그리 좋지 못하다. 음모의 소식 대부분은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그들만의 추측 위에 그들만의 확신을 계속 더해가는 지극히 기형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음모의 소식을 만들어내고 유포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 실패를 감추고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이도 많다. 예를 들면, 자기 계획은 원래대로라면 성공할 수밖에 없었는데, 어떤 비밀단체가 몰래 시행 중인 어떤 계획 때문에 실패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또한, 특정 이념에 따라 억지로 짜 맞추어진 흉흉한 음모의 소식은 해당 이념을 사람들 마음속에 심어주려는 의식화 교육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음모론’은 한결같이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인정하는 인생의 기초 질서와 조건들을 ‘허상’으로 만드는 속성이 있다. ‘진실’은 항상 음모의 그늘에 가려져 있으며, 역사는 항상 그 음모(그리스도가 아닌)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음모론에 깊이 빠진 이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사고방식과 가치 체계를 이야기하면,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풋내기 취급을 받기가 십상이다.
그들은 자신이 ‘진실’을 알고 깨달은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종말의 날까지 계속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이 역사의 중심축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 엄청난 음모 대부분은 결국 실패로 돌아갈 허망한 것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역사의 중심축으로 삼은 음모를 무력화하는 일은,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그토록 평가절하했던 ‘각 나라 정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지기까지’ 인생 기초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을 벌하는 역할을 각 나라 정부에 맡기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질서를 유지하시는 가운데 ‘모든 민족과 방언’ 속에서 택하신 자를 구원으로 이끄신다.
그러한 기초 질서가 정말로 어떤 음모에 의해 무너졌다면, 그것은 역사의 시곗바늘이 바벨탑 시대로 돌아갔으며 구원의 문이 닫혔고 심판이 시작될 것을 의미하게 된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 ‘자기 이름을 내고 온 인류에게서 하나님처럼 경배받는 일’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까지는, 정부와 인류 통합과 관련한 모든 계획과 시도는 부분적이고 상대적인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국제기구가 좀 좋지 않은 일을 도모하더라도 의혹의 눈초리를 필요 이상으로 보낼 필요는 없다. 그런 일은 음모론의 해악에 스스로 몸을 던지는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복음이 여전히 전해져야 하는 상황에서는 온갖 통합 계획의 실현 범위는 경제, 군사, 외교, 안보상의 비교적 느슨한 통합만 이룬 옛 로마 제국 수준을 넘어서지는 못한다.
물론, 그전에 알렉산더처럼 전 포괄적인 통합을 시도하는 이도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하려는 통합제국은 얼마 가지 못해 내부적인 요인으로 스스로 붕괴하고 쪼개질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힘과 능력은 하나님의 능력을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종류의 ‘음모론’은 사람의 인격성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짙다. 역사의 중심축을 ‘하나님의 구속 계획’이 아닌 ‘사람의 음모’로 잘못 설정한 이들은, 사람을 이해할 때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기가 훨씬 더 쉬운 것이다. 구속 계획은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세 가지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서 사람의 인격성을 멋대로 무시하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하는 행동에 속한다.
많은 음모론자가 현재 온 인류를 통제할 수 있는 생체 칩이 이미 개발되었거나 개발 중이며, 그것을 모두에게 이식하기 위한 법을 만들려고 온갖 음모가 실행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러한 계획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과 육으로 지으셨다는 지극히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사람은 흙으로만 이루어진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사람을 물리·화학적 요소로 완전히 통제하는 일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론, 물리·화학적 요인으로 사람의 인격과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 않다면 왜 ‘화학적 거세’를 당한 성범죄자가 이제는 성적 욕구 자체가 사라졌다고 말하는 모습이 화면에 나오겠는가? 그러나 이러한 물리·화학적 영향은 ‘일정 수준’을 넘어가기 시작하면 상황이 확연하게 달라진다.
사람이 ‘정말로’ 약물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같은 효과를 얻어내기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약의 세기와 양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그러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약이 아예 효과를 내지 못하거나 몸이 약의 부담을 견뎌내지 못하고 무너져버리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정말로’ 의지를 갖고 약 사용량을 줄여나가면, 나중에는 놀랄 정도까지 약 사용량을 줄일 수 있다.
따라서 음모론에서 말하는 ‘빅 브라더’가 정말로 온 인류를 통제하려고 사람들의 몸에 생체 칩을 이식하려는 계획을 실행 중이라면, 그는 얼마 가지 못해 예상을 뛰어넘는 거센 저항과 반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어찌어찌 온 인류에게 그 문제의 생체 칩을 이식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자기 전 인격을 통제하려고 하는 물리·화학적 작용을 ‘외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몸이 먼저 무너져 내리며 죽음에 이르거나, 정신이 아예 통제 불가 상태로 치닫는 이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만약, 그 ‘빅 브라더’가 그런 저항과 어려움을 완전히 극복해내지 못하고 그냥 부분적인 영향을 주는 수준에서 만족한다면, 결국 그 시대나 우리 시대나 별로 다를 게 없게 된다. 물론, 정도의 세기나 정교함의 측면에서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차이가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하나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음모론 대부분은 허탄하고 조잡하며 황당무계한 경향이 짙다. 그러나 그 모든 폐해 가운데서 가장 큰 문제점은,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깔아뭉갬으로써 자신을 ‘우월하고 깨어 있는’ 사람으로 여기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음모론은 근본적으로 교만함을 조장하는 악한 속성을 갖고 있다. 진정으로 깨어 있고 똑똑한 사람은 자신의 우둔함과 무가치함을 잘 안다. 항상 자기를 낮추고 부단히 노력하면서 하나님의 손에 모든 일을 의탁하고 기다릴 줄 안다. 따라서 음모론은 그리스도인이 가까이하기에는 너무도 저급하고 천박한 마귀의 궤계이자 미혹이며, 최악의 선전·선동이라고 봐야 마땅할 것이다.
5. 음모론과 실체가 있는 음모
음모론의 기본 속성이 그러하므로, 그리스도인은 음모론을 가능한 한 멀리하여 그 탁하고 교만한 소용돌이에 말려 들어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눅 8:17, 18).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음모의 소리에 무조건 귀를 닫고 배척하는 일도 별로 바람직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물밑에서 진행하는 음모의 기본 성격상, 분명한 실체가 있는 음모라고 해도 그러한 잡음이 충분히 끼어들 수 있기 때문이다. 많은 이가 음모의 소식을 자기 합리화나 신념 강화에 사용하고 짜맞추기식 판타지 소설에 가까운 이야기를 지어내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고 해도, 음모론에 등장하는 음모가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사실일 가능성이 낮은 수많은 소리들 속에서 숨어 있는 진실을 찾아내고 확인하는 작업은 아주 고되고 어렵다. 그 작업은 정말 많은 노력과 시간, 그리고 상당한 균형 감각을 필요로 한다. 더구나 일의 난이도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유익조차도 그렇게 크지 않다. 오히려 이런 일에 섣부르게 달려들었다가는 도리어 신앙에 해만 입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음모론에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결코 지혜롭지 않다. 그런 열정과 능력이 있다면, 차라리 그 시간에 성경 본문을 연구하는 편이 백번 낫다. 그리스도인이 숨어있는 진실을 파헤치기 위해 산소 호흡기를 메고 더러운 흙탕물 속으로 뛰어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수면 위에 어느 정도 모습이 비치는 것들만 선별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멀리하는 편이 훨씬 더 좋다. 실체가 있는 음모라면, 그냥 내버려 둬도 그 실체가 수면 위로 계속 올라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영역에 들어오는 음모로는 프리메이슨과 관련한 것들이 있다. 물론, 프리메이슨 이야기도 음모론의 범주에 들기 때문에, 어느 정도 짜맞추기식 소설과 같은 부분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프리메이슨은 이미 역사와 실생활 속에서 실제적인 영향을 꽤 많이 끼쳐서 어렴풋한 윤곽이 어느 정도 드러나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Die Zauberflöte)>가 프리메이슨의 이상을 노래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은, 누가 억지로 짜 맞추고 꾸며낸 것이 아니다. 프리메이슨은 이성(理性)의 힘으로 모든 난관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신적 완성에 이르기를 꿈꾸는 실제적인 종교 집단이다. 그들은 기독교가 지배하던 사회에서 그러한 자기 이상을 드러내놓고 표현하지 못했으나, 물밑에서는 그런 세상을 이루기 위해 계속 머리를 맞대고 힘을 모았다.
그 결과, 그들의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적이고 다원주의적인 관용·통합 정신은 미합중국의 설립과 프랑스 대혁명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그들의 이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사회 지도 계층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도 무한 관용과 포용으로 이 세상에서 모든 민족적 특성과 종교적 구분을 지워내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사용한다는 조잡한 비밀 신호와 상징 몇 가지를 가져다 놓고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이런 사실은 그들이 지닌 정체성과 실제 역사가 함께 맞물려 돌아가면서 이미 분명하게 확인된 것에 해당한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부분까지 천편일률적으로 ‘저급하고 허황한 음모론’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프리메이슨이 실체가 있는 고대 종교 신봉 집단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그들과 관련 있는 활동을 가능한 한 폭넓게 멀리하려는 자세를 취해야 한다. 우리가 우범 지대를 멀리하여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것처럼, 그들의 활동이 강하게 의심되는 분야는 가장 넓은 측면에서 멀리하고 경계하여 영혼에 괜한 해를 받지 않도록 미리 조심해야 한다.
그렇게 주의를 기울이고 경계해야 하는 분야 중에 가장 조심해야 하는 분야는 문화·예술이다. 물론, 프리메이슨이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가장 힘을 쏟는 분야는 정치·경제 분야이다. 그러나 이 분야는 인생 기초 질서를 유지하시는 하나님 일반 섭리의 영향을 가장 강력하게 받는다. 더구나 이 분야에서는 타락한 사람의 본성이 가장 거리낌 없이 철저하게 나타나기도 해서, 누군가 이 분야에서 자기 뜻을 펼치려고 하면 우선 엄청난 경쟁을 통과해야 한다.
어찌어찌 경쟁을 이겨낸다고 해도, 하나님의 일반 섭리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려고 하면 얼마 가지 못해 스스로 무너지게 된다. ‘사람의 자유와 책임’이라는 일반적인 가치를 훼손한 사회주의 체제와 ‘사유 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경제 체제는 그 사실을 아주 잘 보여준다. 이 두 체제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생 기초 질서를 함부로 무시하는 길로 나아갔다가, 겨우 100년도 못 되어 나라를 거덜 내는 참혹한 결과를 내고 말았다.
프리메이슨은 정치·경제 분야에서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저항과 실패를 이미 겪었고, 앞으로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그런 어려움을 계속 겪고 극복하다 보면, 대중의 지지를 얻고 그들의 이상에 맞게 대중의 사고를 꾸준히 변화시키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즉, 프리메이슨에게 대중 정서와 생각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문화·예술 인사를 발굴하고 육성하며 후원하는 일이 점점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우리나라 대중 정서와 문화는 ‘서태지’라는 한 사람으로 인해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서태지가 나타나기 전까지 우리나라 대중 정서와 문화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희노애락(喜怒愛樂)과 서정성을 표현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서태지가 대중 문화계에 홀연히 나타나 엄청난 성공을 거두고 난 뒤로부터는, 과격한 개성 실현, 기성 체계와 권위에 대한 도전과 파괴,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문화, 옳고 그름 대신 다름을 무조건적으로 앞세우는 풍토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다룰 때, 서태지를 비롯한 어떤 유명 연예인이 정말 프리메이슨이냐 아니냐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서태지의 대활약을 통해, 우리나라의 대중 정서와 사고방식이 프리메이슨의 이상향을 지향하는 쪽으로 실제로 상당히 나아갔다는 점이다.
물론 그가 보여준 수많은 기행, 베일에 싸인 그의 삶, 이런저런 사건·사고와 거짓말, 고대 종교의 상징과 가르침을 문화 상품화한 대형 연예 기획사의 설립, 사해동포주의적인 사회사업을 하는 인물의 출현 등이 그와 어지럽게 얽혀 있는 것을 고려하면, 그가 프리메이슨일 가능성은 상당하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는 문화·예술 분야에서 이러한 가치관을 갖고 활동하는 인사가 실재하며, 그들의 활동이 대중 정서와 사고방식에 실제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한 문화·예술 세계를 추구하는 이들의 작품을 가능한 대로 멀리하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 일은 성도가 매일의 삶 속에서 악을 멀리하고 자기를 경건하고 거룩하게 지키는 일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활동은 실제 역사 속에서 이미 충분히 확인되었으며, 그들의 가치 체계가 오늘날 우리 삶에 실제로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6. 마무리하며
음모는 근본적으로 완전히 허황한 일로도, 완전히 실제적인 일로도 취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음모의 소식을 다룰 때는 항상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균형을 잘 유지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구속 역사 전반을 기준으로 삼아 소설과 사실을 잘 구분하고, 참고할 만한 부분은 실질적인 악을 멀리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마귀는 자기 목적 달성을 위해 사람들을 부추겨 음모를 꾸미게 하고 실행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이다.
각주
최용섭, 「마르쿠스 브루투스」, 네이버캐스트, 2013.02.13.
김정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이버캐스트, 2009. 11.12.
같은 글.
김성남, 「로마 내전 (2)」, 네이버캐스트, 2011. 09. 23.
김정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이버캐스트, 2009. 11.12.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4: 율리우스 카이사르 (원제: ロ―マ人の物語 4)』, 김석희 옮김, 한길사, 2004, pp. 520~523.
김정미,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이버캐스트, 2009. 11.12.
최용섭, 「마르쿠스 브루투스」, 네이버캐스트, 2013.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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