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문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교황 방문 진단3」 개신교인은 교황 방문을 환영해야 하는가, 저주해야 하는가?
김재호
▲ 교황 방한으로 엄청난 인파가 몰린 광화문 광장
출처: (CC-BY-NC-ND) 문화체육관광부(mcstkorea, flickr)
얼마 전 교황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전국이 환영 열기로 뜨거웠다.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일반인은 물론이거니와 개신교 측에서도 심심치 않게 교황 방한을 호의적으로 대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중에서는 카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는 신학적 차이가 있으며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자를 기억하고 따라야 한다는 말 뒤에, 교황이 보여주는 선한 행보는 본받을 필요가 있다는 말을 덧붙이는 이도 있었다.1
그러나 시곗바늘을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인 50년 전으로만 돌려놓아도, 개신교 측의 이런 반응은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렇다면 상황이 왜 이렇게 급변한 것일까? 무엇이 상황을 이렇게 바꾸어놓은 것일까? 개신교인은 이런 급격한 변화에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가? 지금부터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선행(善行), 로마 카톨릭 교회가 가르치는 구원론의 핵심
로마 카톨릭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이 믿고 가르치는 바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2 그 말은 절반은 맞는 말이고, 나머지 절반은 틀린 말이다. 로마 카톨릭은 장구한 세월 동안 수없는 가르침을 더해왔다. 예를 들어,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선포한 교황 무오(無誤)의 교리를 종교개혁 이전의 카톨릭 교인에게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대부분 분명히 코웃음을 치면서 그런 게 대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교황 무오의 교리는 어느 한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교황을 비롯한 사제들이 일반 신자보다 더 우월하고, 일반 신자는 그들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잘못된 전통이 오랫동안 암묵적으로 통용되어 왔기에 후대에 그런 교리도 공인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성경은 그런 가르침을 전혀 지지하지 않는다(마 23:8~10; 7:13). 실제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계급구조는 성경이 아닌 로마 제국의 지배 체계와 신플라톤주의 철학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위해 기독교를 활용하기로 마음먹은 뒤로부터는, 교회 안으로 박해와 핍박이 아닌 이교 관습과 사상이 밀려들어 왔다. 출세를 원하는 이교도들이 교회로 대규모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약 300년 만에 180도로 달라진 마귀의 전략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들을 포용하는 쪽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이방 관습과 전통이 성경의 가르침을 밀어내고 대치해버린 적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교회가 믿고 가르친 바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이전부터 지금까지 기독교가 아닌 이방의 로마교를 믿고 가르치는 중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인은 원래 그리스도의 의(義)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의라는 누더기를 더 근사하게 여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거듭난 이는 자기 의를 저 멀리 내던져버리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이라는 완전한 의만을 의지한다. 생명이 없는 자연종교와 기독교의 근본적인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로마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의 의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신분이 죄인에서 의인(義人)으로 바뀐다는 가르침을 가장 싫어하고 배척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로마교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이 가르침을 향해 분명한 저주를 선포했다. 더구나 교황은 이제 무오한 존재가 되지 않았던가? 그런 존재가 어떻게 이 저주를 철회할 수 있겠는가? 이처럼 로마교는 자기 선행과 공로를 따라 스스로 의로워지는 길을 좋아하는 길로 영원히 걸어갈 수밖에 없다. 로마교가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선포한 저주를 직접 들어보자.
「만일 누가 죄인이 칭의의 은총을 얻기 위해 아무런 협조가 필요 없다는 의미에서 죄인은 오로지 신앙으로 의롭게 된다고 말한다면, 그는 파문(저주) 받아야 한다.3
만일 누가 인간이 받은 공의가 하나님 앞에서 선행을 통해서는 보존되거나 증진되지 않고 선행은 칭의의 열매와 표지에 불과하며 칭의의 증진의 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저주) 받아야 한다.4」
누군가는 이 대목에서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그래도 로마 카톨릭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과 그분께서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믿고 가르치지 않는가? 또한,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중보자라는 사실도 믿고 가르치지 않는가? 그러니 카톨릭을 이방 종교와 같이 취급하는 일은 지나친 일이다. 우리도 불완전하지 않은가? 그런 우리가 그들을 판단하고 정죄하면서 ‘너희는 잘못되었고 우리만 옳다.’라고 하는 것은 실로 교만이고 독선이며, 주님께서 보여주신 겸손함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어떤가? 참으로 그럴듯하지 않은가? 우리 시대 개신교는 이 감미로운 소리에 빠져 다들 손에서 무기를 내려놓고 서로를 어루만져주는 데 힘쓰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소리가 정말 어떤 이의 심령을 사로잡고 있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의를 믿고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 주장에는 ‘자기 의’가 밑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현대의 많은 이가 ‘자기 의’의 근본 의미를 오해한다. 자기 의란 엄청난 고행을 하면서, 그런 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이를 정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근본적으로 자기 의란, 하나님께서 나를 보실 때 좋게 받아들이실 만한 무엇이 나로부터 말미암았다고 여기는 마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거지를 불쌍히 여겨서 얼마간 자선을 베풀었다고 해보자. 그때,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이런 내 선행을 보고 나를 좋게 생각해주실 것이라고 여기면, 그는 자기 의에 빠져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착한’ 사람을 좋게 여기기는커녕 멸시하고 저주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살피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똑같은 자선을 베풀면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이라고 여기는 이도 있다. 그는 참된 진실함 속에서 자신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이 없다고 고백하면서, 예수님께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자기를 온전히 의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를 기뻐하시고 사랑하신다. 그들에게는 영원한 나라가 약속되어 있다(눅 17:7~10; 마 5:6).
로마 카톨릭이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인정하고, 또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모두 믿고 가르친다고 해도 그들을 불완전함의 범주에 들일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트리엔트 공의회의 저주와 카톨릭이 가지고 있는 온갖 공로 및 보속(補贖) 개념이 잘 말해주듯이, 그들이 진정으로 믿고 가르치는 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가 아니라 자기 의이기 때문이다.
로마교는 예수님의 공로 1/3, 성인(聖人)의 공로 1/3, 내 공로 1/3이 합력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시게 한다고 믿고 가르친다. 사람에 따라 이 지분 비율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들이 예수님의 의를 성인의 공로나 내 공로와 똑같은 종류의 의로 여긴다는 사실까지 달라지지는 않는다. 즉, 로마 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유일무이한 공로와 의가 아니다. 그 의는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수많은 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이런 로마 카톨릭에 대해 ‘부족함’이나 ‘다른 측면’이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과 행동 가운데는 자기 의를 사랑하는 로마교의 신앙과 그들의 신앙이 근본적으로 같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말 그리스도의 의만 의뢰하는 이들은 자기 의의 가치를 털끝만큼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 결과, 카톨릭의 신앙은 자기 신앙과 ‘전혀 다른’ 신앙이라고 말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교의 신앙을 불완전함의 범주에 넣는 이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신앙의 초점을 그리스도의 의에 맞추지 않고, 서로를 어루만져주고 존중해주며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를 비방하지 않는 따뜻하고 친절한 ‘선행’에 맞춘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아서 선행을 결실하는 것이 아니라(Justification by Faith),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선함으로써 하나님께 인정받으려고 하는 또 다른 형태의 자기 의를 따르고 있는 것이다(Justification by Sanctification).
이들이야말로 로마교가 말하는 바로 그 ‘하나의 정상(지옥)을 향해 수많은 길로 나아가는 중인 동료’이다.5 로마교나 이들이나 자기 의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완전한 의를 저버리기는 매한가지이다.
우리는 이런 이들을 그들이 사랑하는 친구(로마교)의 품으로 떠나 보내야 한다. 우리 울타리 안에서는 ‘오직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사랑하는 이들이 마음껏 주님을 높일 수 있게 해야 한다. 개신교회는 종교개혁의 ‘다섯 솔라(Five Solae)’ 위에 세워진 영적인 기관이지, 자기 의를 포기할 수 없는 무오한 교황이 사는 영적인 사막이 아니기 때문이다.
2. 선행을 통한 무차별적 통합, 로마 카톨릭의 세계 지배 전략의 핵심
로마 카톨릭이 믿는 구원 교리의 핵심이 선행에 있다면, 로마교 체제의 핵심은 로마 교회의 수위권(首位權)에 있다. 만약, 로마 교회가 수많은 교회 가운데 하나이며, 교황이나 사제도 수많은 성직자 가운데 한 명에 불과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곧바로 로마교 체제는 붕괴하기 시작할 것이다. 로마 교회는 죽으나 사나 그들과 교황의 수위권을 주장해야만 한다. 또, 모든 교회가 그들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요구해야만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로마 카톨릭은 사실상 대놓고 그런 요구를 해왔다. 그 요구를 거부하는 이에게는 파문과 지옥의 저주를 내렸다. 또한, 로마 카톨릭은 태생이 국가 교회이므로, 국가 권력을 활용하여 그런 이를 색출하여 종교 재판소에 세운 뒤에 고문하고 불태워 죽이는 일도 마다치 않았다. 로마교는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을 계속 자기 권세 아래 붙들어두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그러나 근대 세계가 태동한 뒤로부터 사람들은 카톨릭의 그러한 사고방식과 권위적인 요구에 염증을 내기 시작했다. 하나 둘씩 로마교에 등을 돌리고 무신론으로 향했고, 그로 인해 로마 카톨릭의 권위와 권세는 완전히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세속 권력자들도 나이 든 세대를 포용하기 위해 로마교를 전략적으로 이용했을 뿐, 더는 이용가치가 없다고 생각되면 언제라도 총칼을 들이댈 준비를 해놓고 있었다.
그런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 상황을 인식한 로마 교회는 부랴부랴 바티칸에서 공의회를 열었다. 그 공의회를 통해 로마 카톨릭은 달라진 시대상과 사고방식에 유연하게 대응하기로 했다. 먼저 로마교는 로마 교회와 교황의 수위권을 대놓고 요구하면서 복종하라고 강압하는 일을 자제하기로 했다.
대신, 선행과 평화를 적극적으로 강조하면서 먼저 모범을 보이는 행보를 보여주기로 했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해묵은 쟁점 사안부터 사과의 말과 함께 대화하자고 먼저 청하기 시작했다. 동방 정교회를 비롯한 많은 개신교 교파가 상대방의 주장을 경청하며 존중해주는 로마 교회의 모습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로마 교회는 전 세계 교회를 대상으로 전 방위적인 대화, 협력, 연합 공세에 나섰다. 심지어 그런 연합 행보는 이방 종교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와 함께, 구제를 강조하며 고아와 난민을 돌보는 따뜻한 모습을 전 세계적으로 많이 보여주었다.
로마 카톨릭이 그런 방향 전환을 하고 있을 때, 이 세상은 계몽주의의 끝 모를 냉혹함과 비인간성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그때 나타난 로마교의 따뜻한 모습은 사람들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다가왔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점점 로마교를 우러러보고 존경하기 시작했다. 그런 훈풍에 힘입어서 로마교는 현재 종교개혁 이후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많은 이가 이제는 로마 카톨릭이 달라졌다고 평가하면서, 로마교를 우러러보는 대열로 속속 합류하는 중에 있다. 그러나 로마교는 자신들의 한결같은 주장처럼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그들은 늘 해오던 대로 모두에게 자기 우월성과 권위를 인정하며 따르라고 하고 있다. 다만, 현대 세계가 그 요구에 ‘굴복’하는 것이 아닌 ‘순응’하고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예전에는 로마교의 그런 요구를 거부하고 대항하는 일이 인류의 권익과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선한 투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현재는 로마교에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면 ‘편협’하고 옹졸한 사람처럼 비친다. 나아가 사회의 큰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는 패륜아요,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을 위협하고 시기하는 위험 인물로 여겨진다.
이처럼 로마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서 그토록 오랫동안 열망해온 큰 권위와 위세를 다시 손에 넣는 데 결국 성공했다. 오늘날 세상은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 주목하면서, 어떻게든지 그것을 활용하려고 애를 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이념, 종교 등의 모든 영역에서 카톨릭의 위세는 날로 더해져서, 이제는 누구도 천주교를 얕잡아보지 못한다.
한때, 로마교에는 사방이 꽉 막힌 낡은 종교라는 꼬리표가 달려 있었다. 오늘 폐기될지 내일 폐기될지 알 수 없는 흑암의 세월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깊은 수렁에서 로마교를 건져내어 빛나는 왕좌에 다시 앉힌 일등공신이 바로 ‘선행’이다. 로마교는 큰 위기 앞에서, 하나님은 싫어하되 위로와 소망은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소망과 자신들의 선행 구원이 일맥상통한다는 사실을 정말 기가 막히게 읽어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선행’이라는 구명보트를 타고서 가라앉는 침몰선에서 초호화 유람선으로 재빨리 옮겨 탔다. 그런 다음, 그 화려한 유람선을 타고 세계를 누비면서 자기들의 오랜 염원이었던 ‘권위 회복과 확립’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결국 잡아내고야 말았다. 우리는 지금 ‘신(新) 중세시대’라고 부를 만큼 교황의 권세가 강력해진 새 시대가 막이 오르는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시대가 정말 로마 교회가 그려놓은 청사진대로 이루어진다면, 그 시대는 분명히 중세 시대보다도 더 지독하고 암울한 시대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로마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통해 구원 교리의 초점을 더욱 선행에 맞추면서, 교회라는 개념 자체를 온 세상으로까지 확장해버렸기 때문이다.6
로마 카톨릭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로마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제도와 조직 자체에 교회론의 초점을 두었다. 그래서 로마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의회가 끝난 뒤로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로마 교회는 자기 제도와 조직의 유일성과 우월함은 계속 고수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의회 이후에도 로마 교회는 자신이 아닌 그 어떤 제도나 모임도 완전하고 참된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로마 교회와 가깝게 연합하는 정도에 따라 사실상의 교회처럼 기능하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유의해야 한다.7 다시 말해, 로마 교회는 자기들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교도권(敎導權)을 온 세상에 확장하여 행사할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서 가만히 때를 기다리는 중에 있는 것이다.
중세 시대는 그나마 이원론에 깊이 물든 로마 교회가 온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래서 로마 교회는 세속 권력자에게 자꾸 감 놔라 배 놔라 하면서 간섭하고 겁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쥐락펴락했다. 그러나 이 신 중세시대의 로마 교회는 다르다. 그들은 확장된 교회론을 따라 온 세상 일에 직접 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온 세상을 복종하게 하는 일이 그들의 신성한 의무와도 같아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이 세상의 영구한 발전과 평화, 분열과 싸움의 종식 등의 거대한 명분을 앞세울 것이다. 그러면서 그 일을 위해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온 세상이 똘똘 뭉치는 일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계속 역설해나갈 것이다. 로마 교회는 그런 방식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 발아래 하나씩 굴복시켜나갈 것이다.
이처럼 로마 교회의 권력욕과 지배욕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제시한 하나님의 이름과 선행의 힘으로 온 제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지속적인 안정과 번영을 이룬다는 그 오래된 청사진을 무려 1,70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실행해오고 있다.
이 신 중세시대의 막이 정말 본격적으로 오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만을 믿고 의지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이 사회 안에서도 좀처럼 발붙일 곳을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때는 예수님을 믿으려면 정말 자기 모든 것을 다 걸어야 할 것이다. 지금도 정교일치 사회인 이슬람 국가에서 기독교를 믿으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로마 교회는 참된 그리스도인을 선행과 평화와 공동 번영의 이름으로 단죄하고 씨를 말리려고 할 것이다.
로마 교회는 태생 자체가 온 세상을 자기 발아래 두고 통합해나가야만 하는 권력 투쟁 기관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개신교인만큼은 이 사실을 몰라서는 안 된다. 로마교가 겁을 주는 방식을 사용하든 광명의 천사처럼 나타나는 방식을 사용하든, 그들의 최종 목표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겁을 주는 것은 세상의 선행이 부족하기 때문이며,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는 것도 세상의 부족한 선행을 도와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든 온 세상을 자기 발아래 두려고 할 것이며 절대로 그 일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는 가장 큰 원동력은 선행이 차지할 것이다.
3. 마무리하며
개신교인은 교황 방문을 환영해야 하는가, 저주해야 하는가? 답은 명백하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믿는 개신교인이라면, 주저 없이 교황 방문을 저주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이들을 가장 독한 말로 저주하셨다(마 12:34). 교황은 참된 복음의 영원한 원수이며, 그가 꿈꾸는 세상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멸절(滅絶)한 세상이다.
교황의 인자하고 친근한 미소에 속지 말라. 그 미소야말로 가장 끔찍하고 악독한 반인륜적인 범죄이며 역사상 가장 거대한 사기 행각이다. 그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어주지는 못할망정, 강아지처럼 그에게 달려가 굽신거리는 일을 저지르지 말라. 하나님께서 그 모든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라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라.
각주
1 「국내 신학대 교수들, 교황 방한 어떻게 보나: 종교개혁자 신앙적 가르침 계승해야」, 2014. 7. 17. 국민일보, 침신대 이형원 교수.
2 조남민 목사, 「믿는 자들이여, 현대 에큐메니칼 운동 추진의 근원을 올바로 알고 주님의 일을 하자 (1)」 2013. 8.5. 교회와신앙.
3 트리엔트 공의회 법규 9, 고든 루이스, 브루스 데머리스트, 『통합 신학 (Integrative Theology)』, 김귀탁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1, p. 283에서 재인용.
4 트리엔트 공의회 법규 24, 위의 책 p. 284에서 재인용.
5 마틴 로이드 존스, 『권위 (Authority)』, 김성수 옮김, 생명의말씀사, 2002, pp. 7~9.
6 마이클 호튼, 『언약적 관점에서 본 개혁주의 조직 신학 (The Christain Faith)』,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pp. 743~746.
7 위의 책, pp. 744, 745.
「교황 방문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교황 방문 진단3」 개신교인은 교황 방문을 환영해야 하는가, 저주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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