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20) 영원한 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 함께, 히브리서 9장 23절에서 28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찌니라.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 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아멘.
지난 주일에는 그리스도의 선지자 직분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5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 아버지께 영원한 희생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그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를 용서받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26절 중반쯤을 보면, 이 제사의 성격이 어떠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이 ‘단번에’라는 단어가 참 중요합니다. 이 단어는 28절에도 나옵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26절과 똑같습니다. 여러분, 왜 하나님께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셨겠습니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말고도 유다서에도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유 1:3)…」
이런 말씀은 천주교의 미사가 왜 끔찍한 죄악인가를 알려줍니다. 천주교의 미사는 하나님 말씀을 무시하고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끝없이 ‘반복’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없게 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끝에 나타나도록 하셨고, “단번에” 자기를 희생 제물로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매일 몇 번씩, 끝없이 반복합니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이 지닌 권능을 무효화하는 큰 죄를 짓는 이단입니다. 천주교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저리 비틀어 정통 기독교 신앙을 심각하게 왜곡합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이단인 것입니다.
WCC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WCC가 자유주의자들이 주최하는 대회라서 반대하는 게 아닙니다. WCC가 구속의 절대성,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신학과 신앙을 추구하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더구나, WCC는 로마 천주교와 아주 밀긴밀한 관계를 맺고 적극적으로 교류하고 있습니다. 로마 천주교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WCC에 참여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WCC는 절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안 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도 NCCK에 속한 대형 교단(통합, 순복음, 감리교, 성공회, 기독교장로회)들은 WCC를 버젓이 지지합니다. 특히, 통합 교단에 속한 명성 교회는 2013년에 열린 부산 WCC대회의 공동 주최자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성경적인 관점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언제나 “과연 이것이 성경적으로 옳은가, 그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해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 외엔 진리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여럿일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진리이고 저것도 진리라면, 대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시대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왜 너는 모든 것을 흑백 논리로 대하느냐? 왜 그렇게 독단적이고 배타적이냐? 왜 네 얘기만 중요하게 여기고 남의 말은 무시하느냐?”라고 합니다. 그럴 때, 쓸데없이 논쟁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선포하니까 그렇게 한다.”라고 하시면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자기 입맛에 맞게 곡해(曲解)하기 때문에, 아무리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줘도 대화가 되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대속이 오직 택자(擇者)만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많은 신자가 제한 속죄라고 불리는 이 교리의 중요성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또한,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은 세상 모든 사람을 한 명도 빠짐없이 다 구원할 만큼 그 효력이 충분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께서 택하신 사람에게만 그 효력이 적용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지 않으신 사람에게는 대속의 효력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은 누구에게나 활짝 열려 있으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받기를 원하는 사람을 거절하시거나, 그분의 힘이 부족하여 구원하지 못하시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문제는, 단 한 사람도 그 구원을 얻으려고 하나님 앞에 나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사람을 친히 구원으로 인도하십니다(요 6:44).
여러분은 왜 하나님을 믿습니까? 왜 여러분은 지금 이 예배당에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여러분을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택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도 여느 세상 사람들처럼 산과 들판, 수영장 등을 돌아다니면서 거룩한 주일을 더럽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만을 위해 대속 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그 사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 아버지께 올리신 기도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시고, 오직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6절)”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입니다. 절대로 모든 세상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즉 일방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거저 주어지는 은혜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를 위해 대제사장 직분을 감당하십니다.
이는 칼빈이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독창적으로 창작한 교리가 아니라,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는 교리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선택하시고 에서는 버리셨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묻는 이들도 꽤 많을 것입니다.
「주님, 왜 그 쌍둥이를 다 구원하지 않으시고 야곱만 구원하셨습니까? 더구나 야곱은 인간성도 좋지 않고, 이기적이며 교활한 사기꾼이 아닙니까? 싹수가 노랗지 않습니까? 차라리 에서처럼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남자다운 사람을 구원하시는 게 훨씬 더 낫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저 예배당 바깥에 있는 불신자들 중에는 우리보다 훨씬 더 정직하고, 도덕적이고, 좋은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사랑과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에게 “너는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죄와 사망에서 건지신 것입니다.
이 제한 속죄의 교리를 부인하면, 결국에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는 만인구원론에 이르게 됩니다. 칼 바르트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이 대부분 이 만인구원론을 가르칩니다. 그리고 만인구원론은 지옥을 부정하는 사상과 강하게 연결됩니다.
모두가 구원받는다면 어떻게 지옥이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이들은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잠시 지옥에 보내셔서 죗값을 치르게 하시고, 나중에는 천국으로 불러주신다.”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지옥을 부정한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지옥은 성경이 말하는 지옥이 아닙니다. 성경은 죄인이 영원히 벌을 받는 장소가 지옥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은 “악인들은 영벌에 들어갈 것”이라고 말합니다(마 25:46). 저들의 주장처럼 죄인이 지옥에서 영원히 형벌을 받지 않는다면, ‘영벌(永罰)’이란 단어가 나오지 않아야 합니다. 대신, “잠시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쓰여져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악인이 일시적으로 심판받는 게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라면, 믿는 우리도 상당히 불안해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악인이 잠시 지옥에 있듯이, 우리도 잠시 천국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조금만 잘못 해도 바로 천국에서 쫓겨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식으로든 왜곡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어떤 철학과 이론, 유행하는 사상이 들어가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본래 의미 그대로 받아들여지게 해야 합니다. 거기에 무언가를 덧붙이거나 빼서 사람들이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하게 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강단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는지 아십니까?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들이게 하려고 하다가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이 받아들이고, 좋게 반응하게 하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렇게 해야 박수와 환호를 받고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설교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종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전령(傳令)입니다. 사극을 보면, 왕의 명령을 전하는 전령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전령 중에 “왕께서는 이렇게 전하라고 하셨지만, 내 생각에는 저렇게 말하라고 하신 것 같다.”라고 하는 이가 있습니까?
그런 정신 나간 전령이 있다면, 당장 그 자리에서 왕을 모독한 죄로 처형당하고 말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는다면, 그게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가 되겠습니까? 저는 오늘 아침에 기도하면서 이 문제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성경의 말씀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인데, 대체 왜 그렇게 많은 교회가 하나님 말씀을 자기 식대로 바꾸는 걸까? 하나님 말씀을 왜 그렇게 대할까?」
답은 간단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을 우습게 여겨서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존귀하게 여긴다면, 감히 그분의 말씀을 자기 입맛대로 바꾸는 일은 정말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교회연합운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오늘날의 교회연합운동이 잘못되었습니까? 말씀을 연합의 토대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교리적인 차이는 무시하자.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과거에는 그런 것 때문에 싸웠지만, 이제는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교리 때문에 서로 다투는 것을 싫어하신다. 그러니 우리 서로 화해하고 일치하자. 나누고 섬기면서 하나가 되자.」
천만의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기준으로 옳고 그른 것이 무엇인지 따져보는 일을 기뻐하십니다(행 17:11). 그 일을 절대로 꾸짖거나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가?’라고 열심히 묻고 따지며 싸워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반대하는 것은 우리도 반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서로 감정이 상해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어렵고 힘들다고 해서 대충 넘어가면 안 됩니다. “우리 이쯤에서 그만두고, 좋게 넘어가자. 적당히 덮자.”라는 게 바로 교회연합운동과 WCC의 정신입니다.
WCC는 그런 방식으로 거룩한 교회 안으로 거짓된 만인구원론, 종교다원주의, 자유주의 신학을 들여오고 퍼뜨립니다. 그래서 WCC에 참여하는 자들은 이단자이자 배교자이며 적그리스도의 하수인인 것입니다. 참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그들과 손을 잡거나 함께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겠습니까? 성도는 이러한 뱀의 교활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면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듣는 말들을 성경에 비추어봐야 합니다. 왜 우리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한 사탄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말씀을 왜곡하는 사람들이 사방천지에 얼마나 많이 널려있습니까? 그들은 연합과 일치라는 그럴싸한 가면을 쓰고서 교회 안을 버젓이 돌아다닙니다. 얼마나 많은 교인이 그들이 말하는 ‘넓고 편한 길’에 열광합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이 ‘좁고 협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 7:14). 다시 말해, 그 길은 가기 무척 어렵습니다. 우리는 본성상 편안하고 넓은 길을 좋아하지, 좁고 험한 길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길이 잘 포장되고 정돈된 고속도로나 산책로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 길은 모난 돌부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와 있는 울퉁불퉁한 길입니다. 그 길에 있는 수많은 오해와 고난과 핍박과 환난이 사람들을 걸려 넘어지게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길로 걸어가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을 결코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구약 성경을 살펴보면,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이스라엘 백성을 대신해서 지성소로 들어가 속죄 의식을 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정에 따라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피로 성소를 거룩하게 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대제사장이 하나님께서 정한 대로 그 일을 하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문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계시는 지성소 안으로는 대제사장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려고 들어가면, 그 사람도 역시 죽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의 예복에는 방울을 여러 개 달아 놓아 직무를 수행할 때 소리가 나도록 했습니다(출 28:33~35). 그리고 그 허리에 줄을 묶어 길게 늘어뜨렸습니다.
혹시라도 대제사장이 잘못해서 죽을 경우, 그 시신을 밖에서 끌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사람의 생각과 예측을 한참 뛰어넘습니다. 그 거룩하심은 사람의 눈과 손으로 보고 만지며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제국의 장군이었던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을 진행하던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주전 63년에 예루살렘도 점령했습니다. 그때, 그는 유대인이 대체 어떻게 생긴 신을 섬기는지 궁금해했습니다. 다신교 국가였던 로마 제국에는 수많은 신과 그 형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폼페이우스는 예루살렘을 점령하자마자, 가장 먼저 성전을 찾아갔습니다. 신의 형상이 어디 있나 살펴보면서 성소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칼을 휘둘러 그 휘장을 쳐낸 뒤, 지성소 안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는 그가 기대했던 화려한 형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장군은 “도대체 유대인들은 뭘 섬기는지를 모르겠구나.” 하면서 곧장 말머리를 돌려 성전을 나왔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의 성전에 무엇이 있었느냐는 질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망각하여 우리 생각과 손에 쉽게 보이고 잡히는 우상을 만들어 섬기는 길로 빠지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구약 성경의 그 규정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제사장으로 오셔서 하신 일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잘 알려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구약 시대의 수많은 대제사장들이 맡았던 직무를 완성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26절은 이 사실을 잘 설명해줍니다.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보십시오.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지 않습니까? 대제사장 직분은 예수님을 통해 종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대제사장이 존재할 필요가 사라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자, 즉 택하신 백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대제사장의 직무를 온전히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 신약의 성도들은 이 사실을 확실하게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희생 제물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십니다. 이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 기도하시며 대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십니다.
그러니 성도들은 안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 지구나 우주보다도 더 견고하고 안전합니다. 이 지구나 우주는 언젠가는 소멸하겠지만, 성도의 구원은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영원히 요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처럼 희생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성전을 재건하고 대제사장을 세우려고 합니다. 이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는데도 말입니다. 이런 유대인들의 행동이 바로 ‘멸망의 가증한 것’이며, 마지막 때가 왔다는 아주 뚜렷한 증거입니다(마 24:15). 오늘 본문 말씀 25절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찌니.」
수많은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야만” 했습니다. 게다가 죽음으로 인해 그마저도 영원히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 바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24절에 그 사실이 잘 나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이처럼,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예루살렘, 즉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단번에 드리신 십자가의 희생 제사는 영원히 효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니 대제사장을 세울 필요도, 희생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 히브리서가 왜 쓰였는지 아십니까?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극심한 핍박과 오해 때문에 유대교로 되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것을 보고 매우 놀라서 그들을 권면하려고 히브리서를 썼던 것입니다. 그는 뒤로 물러나는 유대인 신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완전한 대제사장으로서 구약 율법을 완성하셨고,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너희들을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런데 왜 너희들은 옛 유대교로 돌아가서 헛되이 짐승을 잡는 희생 제사를 드리려고 하느냐?」
여러분께서 히브리서 전체, 특히 오늘 본문 말씀을 자세히 읽어보시면, 구약 율법(의식법)이 예수님을 통해 다 이루어져서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으실 겁니다. 예수님의 대제사장 직분은 어느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문선명도, 박태선도, 이만희도 예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이단 교주들은 스스로 메시아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완성하지 못하신 구원 사역을 이루려고 왔다고 주장하지만, 모두 사기꾼이며 사탄의 하수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원 사역을 완전히 이루셨기 때문에, 예수님 외에 다른 대제사장이나 구원자를 바랄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주 확고하게 믿어야 합니다.
27절에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심판은 누가 행하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문선명이나 박태선이나 이만희가 심판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권한이나 능력 자체가 없습니다. 삼중직을 가지신 예수님께서만 심판주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이 말씀 한 구절만으로도 불교, 힌두교, 뉴에이지에서 말하는 윤회를 반박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절대로 반복해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났다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으면, ‘심판’을 받게 될 뿐입니다. 절대로 개, 돼지, 소, 바퀴벌레 따위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윤회가 얼마나 미련한 사상입니까? 그런데도 할리우드의 유명한 연예인들이 윤회 사상에 상당히 깊이 빠져 있습니다. 확실히 동양인보다도 서양인이 윤회 사상에 매력을 느낍니다. 그들에게는 이런 사상이 상당히 신비하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 번 죽은 다음에는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성경의 진실한 가르침은 더는 듣기 싫어하는 듯합니다.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를 제외한 온갖 이상한 종교와 영적 경험을 추구하면서 사교(邪敎) 집단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 즉 그분을 자신의 대제사장으로 모시지 않는 자에게는 지옥의 심판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이는 너무도 분명한 사실이라 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변의 아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천국에 갔을까, 지옥에 갔을까?’에 대해 깊이 생각해봐야 합니다. ‘그 사람이 재산을 얼마나 남겨 놓았을까? 그 사람 통장에는 돈이 얼마나 남아있을까? 그 사람 집은 얼마짜리일까? 가방끈이 얼마나 길었던 사람이었을까?’ 여러분은 세상 사람처럼 이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 안에는 천국을 우습게 여기는 가르침이 알게 모르게 퍼져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도덕적으로 사는 게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천국 가는 게 기독교 신앙의 전부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하는 어떤 일이 아무리 귀하다고 해도, 천국에 가는 것보다 귀하지는 않습니다. 그 일이 아무리 급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해도, 천국에 가는 것보다 더 급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 만약 천국 가는 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아니라면, 우리가 대체 무엇 때문에 힘들게 신앙생활을 합니까? 남에게 고상하게 보이려고 그렇게 합니까? 그렇게 살면 누가 알아주기라도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소망은, 자기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담대히 서는 것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께 인정을 받고, 영원한 천국을 유업으로 받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이 없는 기독교는 세상의 다른 이방 종교와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천국 가는 게 신앙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이 아닐 수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유일한 대제사장이 되심을 믿고, 오직 그분께만 소망을 두셔야 합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1년에 한 번씩 그들을 대신하여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우리 대제사장님이 저곳에서 속죄 의식을 잘 마치시면, 내가 1년 동안 지었던 모든 죄가 다 용서받겠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속죄의식과 성회가 무사히 잘 끝났을 때, 그들이 죄 사함의 감격을 누리며 얼마나 기쁘게 자기 집으로 돌아갔겠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바라보며 크게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완전한 구원 사역 덕분에 정죄나 양심의 가책, 율법의 억압이 더는 우리와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참된 평화와 안식과 위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보다 더 안전한 자리에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 죄 문제를 해결하신 유일한 대제사장으로서 확고히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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