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22)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빌립보서 2장 5절부터 8절까지 교독하겠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아멘.
오늘은 소요리문답 제27문,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란 무엇입니까? 하늘 영광을 가지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신 일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그분 자신을 말로 다 할 수 없이 무한히 낮추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한 나라의 왕이 자기 권력을 모두 다 내려놓고 평민이 된다면 어떻겠습니까? 왕으로서 누리던 모든 권세와 영화에서 멀어질 것입니다. 누구도 그 왕을 우러러보거나 머리를 조아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그 왕이 정말로 낮아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그런데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셨으니, 자기를 얼마나 낮추신 것이겠습니까?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닭이나 돼지의 형상을 입는다면 어떻겠습니까? 닭처럼 울면서 퍼덕거리고, 꿀꿀거리며 게걸스럽게 먹는 여러분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한숨이 저절로 나올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많이 낮아지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일은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가볍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면에서 성탄절 문화만큼 좋지 않은 것도 없습니다. 절기 문제도 있지만, 대부분 동네 친구 생일 축하하듯 하는 행태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건 좋은 일 아닌가요?”라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를 구원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신 일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편에서는 당신 자신을 가장 밑바닥까지 낮추셔야 했던 일입니다. 닭과 돼지가 여러분이 동물 된 일을 축하한다면서 자기들끼리 먹고 마신다면, 여러분은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생애는 그 전체가 자기를 완전히 낮추신 삶이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나실 때도 왕궁이나 호화로운 저택이 아닌, 가축이 사는 외양간에서 태어나 구유를 그분의 요람으로 삼으셨습니다. 이후, 30년 동안 가난한 목수로 지내며 화려한 옷과 보석과는 관계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왕처럼 대접을 받거나 강력한 군대를 거느린 적도 없으셨습니다. 누구도 그분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분은 “율법 아래” 복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바로 우리가 율법에 매여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하여 율법에 전적으로 복종하셨습니다.
정한 때가 되자, 예수님께서는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보내는 엄청난 비방과 멸시와 모함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는 위험분자다. 저자를 계속 놔뒀다가는 우리의 지위와 나라 전체가 위험해질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종교적, 정치적 누명을 씌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 때문에 극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까 고통을 겪으셨더라도 인간이 겪는 그대로는 아니었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가현설주의자들처럼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몸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보였을 뿐이며 전혀 고통을 겪지 않으셨다.”라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예수님께서 마치 영화를 찍듯이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는 연기를 실감 나게 하셨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형벌을 대신 받으시려고, 마취제 역할을 하는 쓸개 탄 포도주까지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성과 신성이라는 두 본성을 동시에 가진 채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신성만 갖고 계시고 인성은 없었다.”라거나, 반대로 “예수님께서 인성을 취하셨으니까 신성은 소멸했다.”라고 하면 이단입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는 두 본성을 한 인격 안에 함께 가지고 계십니다.
로마 군병이 형벌을 집행할 때 쓰는 채찍에는 납과 생선 가시가 달려 있습니다. 그래서 한 번 내리치면 살점이 마구 뜯기고 떨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보통 한 대가 아니라 수십 대를 내리쳤기 때문에, 나중에는 척추가 보일 정도가 되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똑같은 육체적 조건을 가지고 그런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육체적인 고통만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다룬 그림이나 영화를 보면, 거의 다 예수님께서 속옷을 입고 계시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 때는 속옷까지 모두 다 벗겼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혹독한 채찍을 맞으시고, 십자가에 매달려 물과 피를 흘리셨으며, 큰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여러분, 기회가 되면 멜 깁슨의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라는 영화를 꼭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많은 사람에게 ‘가학성’ 영화라는 혹평을 받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 중에서도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로마 카톨릭 신자인 멜 깁슨이 영화 곳곳에 천주교 신앙과 관련된 내용을 넣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보면 안 된다고 합니다. 후자의 주장은 전자의 주장보다 훨씬 더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로마 군병에게 고통을 당하셨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고증에 기초해 정확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의 고난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를 조금 더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도움을 줍니다. 그런 측면에서는 기독교 교육 자료로 삼을 만합니다. 분명히 이 영화에는 카톨릭의 잘못된 요소가 섞여 있긴 하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히 아는 부분에서는 유익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저주의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 사실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와 지옥의 고통도 다 맛보셨습니다. 우리 사도신경에는 나오지 않지만, 영문 사도신경을 보면 “지옥에 내려가셨으며(He descended into hell).”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신학자마다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 이 구절의 정확한 의미는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는 고통을 맛보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에 내려가는 고통이 얼마나 끔찍하겠습니까? 여러분이 겪을 수 있는 불행이나 고난을 모두 합치더라도, 예수님께서 맛보신 그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어떤 일을 당해도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내뱉지 않습니다. 그 일로 인해, 하나님을 멸시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부분은 어떨지 몰라도, 주님께서 자기를 위해 엄청난 고난을 받으셨다는 그 한 가지만큼은 깊이 알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에 참으로 무감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다 보니, ‘아, 그런가 보다.’ 하면서 무심하게 넘길 때가 많습니다. ‘그래, 예수님께서 날 위해 십자가를 지셨지. 그 이상 뭐 별 게 있나?’ 하며 덤덤하게 넘어가곤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우리의 생각을 한참 뛰어넘는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 ‘과연 찬송을 기쁘고 즐겁게만 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간혹 들곤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제발 피상적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과 기쁨과 감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위해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과 수치와 모멸과 배척을 기꺼이 받으셨습니다.
한국 교회는 보통 부활 주일 앞의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지킵니다. 요즘에는 한 주간이 아니라 아예 40일 전부터 사순절(四旬節)로 지킵니다. 수많은 신자가 이때만 예수님의 고난을 열심히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그 기간이 끝나면 예수님의 은혜는 금세 잊어버리고, 불신자와 전혀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삽니다.
이런 절기를 지키는 일은 헛되고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순절과 고난주간에만 금식하며 경건하게 산 그 사람에게 “그래, 네가 내 고난을 이해하는구나.”라고 하시겠습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헛된 절기 준수는 로마 카톨릭의 잔재(殘在)이자 미신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개신교, 즉 우리 개혁교회 신자들은 주님의 고난을 가장 영광스럽고 존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고난을 존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보십시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주님의 고난을 존귀하게 여기는 일은, 고난주간과 사순절을 지키는 게 아니라 신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항상 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처럼 자기를 낮추셨으니, 우리도 마땅히 주님을 위해 자기를 낮추고 부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그 마음속에서 악이 항상 꿈틀거립니다. 죄를 짓고 싶어하고, 자기 생각과 계획만 고집하기 좋아하며, 자기 정욕을 따라 좌충우돌하면서 살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인이어도 육신의 장막에 있는 동안에는 타락한 본성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힘써 낮추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철저하게 부인하고, 자기를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조금도 자기를 내세우면 안 됩니다. 이 은혜, 곧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를 안다면 마땅히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 더 철저하게 복종할 수 있을지 고심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주님께서 하신 것만큼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낮추셨으니, 우리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자신을 최대한 낮추어야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종의 형체를 취하고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고, 가장 귀하게 여기십시오. 이 일은 생각할수록 참 엄청난 일입니다. 우리보다 낮고 천한 존재가 우리를 위해 죽었다면, 그 희생에 감사하면서도 그걸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비교할 수 없이 높으신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비천한 죄악 덩어리인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게 얼마나 엄청난 희생입니까? 여러분, 절대로 “예수님께서 날 위해 돌아가셨어요.”라는 말을 습관처럼 가볍게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해 당신을 온전히 희생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신자들은 예수님을 자기 후원자나 지지자처럼 생각합니다. 많은 교회에서 예수님을 친구나 상담사 같은 존재로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대속주’이십니다. 참된 기독교는 죄인을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예수님을 알면, 오늘날 교회에서 가르치는 예수님을 거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속죄하지 않는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될 수 없습니다. 십자가 희생이 없이, 세속적인 축복과 위로와 성공만 약속하는 예수는 다른 예수입니다. 우리는 대속주이신 예수님을 철저하게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는 내용이 오늘 설교하는 소요리문답 제27문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낮아지신 일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은혜를 가볍게 여기면서 그리스도를 거역하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 앞에서 물로 씻거나 불로 태워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우리의 죄 때문에 대성통곡하더라도 그 죄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우리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은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속죄만 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붙들 때,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을 명확하게 아시고, 이 교리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완전히 안심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끝까지 보호하고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음으로 항상 바라보며, 그분의 낮아지심을 항상 명심하십시오. 또한, 하나님의 은혜, 특히 대속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 교만하지 마십시오. 구원의 확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면 겸손하지 못하고 교만해진다.”라고 합니다. 잘못된 말이긴 하지만, 그 말에는 한 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부분도 있습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불신자들을 깔보고 멸시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죄인들을 멸시하거나 정죄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옳고 그른 것을 분명하게 말해주면 됩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에 감사하면서, 이 구원의 복음을 왜곡하거나 부인하는 악한 일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지적하면 됩니다. 우리가 그 이상으로 나가면 안 됩니다.
혹시 다른 건 잊어버리더라도, 이 사실만큼은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이렇게 스스로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귀하게 여기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안식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로 불안해하지 말고, 그분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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