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6)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라이프치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에는 루터가 세 번째 큰 논쟁을 벌인 장소인 라이프치히(Leipzig)로 떠나보겠습니다. 라이프치히는 제가 독일 탐방을 하면서 거의 마지막에 둘러본 도시입니다. 인접해 있는 체코에 잠시 들렀다가, 독일로 돌아오면서 찾은 도시가 바로 라이프치히입니다.
이동 거리가 많았기에 여러모로 지쳐 있었지만, 숙소를 찾지 못해 한참 돌아다닌 끝에 겨우 숙소를 발견하고 짐을 풀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짐을 풀어놓고 나자, 갑자기 예상치 못한 장애물 하나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냥 이대로 푹 쉬고 싶은 마음이 제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 달콤한 유혹을 떨쳐버리고 다시 밖으로 나오면서, 목적지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라이프치히는 루터 외에도 음악과 출판업으로 유명한 도시입니다. 특히, 바흐, 멘델스존, 바그너, 슈만 등이 활동한 이 도시는 음악의 도시로 명망이 높습니다. 하지만 제가 클래식 음악과는 담을 쌓고 살았던 관계로 그들과 관련 있는 장소는 찾아가 보지 않았습니다. 루터가 요한 에크(Johann Eck)와 열띤 논쟁을 벌인 신 시청사(Neues Rathaus), 그가 종신 서원(終身誓願)1과 설교를 했다는 성 토마스 교회(Thomaskirche) 단 두 곳만 둘러보았습니다. 물론, 성 토마스 교회에서는 오랫동안 음악 감독으로 활동한 바흐의 흔적도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두 곳 가운데 먼저 찾아간 성 토마스 교회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약 850년 전인, 1160년에 지은 예배당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붕괴하고 다시 짓기를 반복하다가, 15세기 말에 현재의 후기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습니다. 물론 중간중간 보수 공사를 하기도 했으며, 특히 2000년에는 바흐 서거 250주년을 맞이하여 대대적인 재단장을 하였습니다.
글 서두에서도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루터는 이 교회에서 평생 사제로 살겠다고 종신 서원을 했으며, 1539년에는 성령 강림절을 기념하는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그때 말고도 이곳에서 두 번 더 설교했다고 전해집니다). 루터가 슈토테른하임의 번개 사건을 겪은 것이 1505년이고, 에르푸르트의 성 마리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것이 1507년이니, 아마도 종신 서원은 그 중간 정도쯤에 했을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성 토마스 교회는 입장료 없이도 입장이 가능했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스테인드글라스로 표현한 세 사람의 모습이 곧바로 눈에 띄었습니다. 예배당 안쪽이 꽤 어두워서 사진이 많이 흔들려 좀 알아보기 어렵게 나왔지만, 이 세 사람은 바로 루터, 멜란히톤, 그리고 지혜공(智慧公) 프리드리히 3세입니다.
▲ 선명하게 나온 스테인드글라스의 모습
출처: (CC-BY-SA) Geisler Martin, wikipedia
루터의 손에 들려 있는 성경은 그가 교황과 로마 교회의 권위에 오직 성경으로 맞서는 가운데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출판한 것을 뜻하고, 멜란히톤이 들고 있는 두루마리는 그가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의미하는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들고 있는 큰 검은 하나님께서 주신 권력으로 외적인 압력으로부터 종교개혁을 잘 보호해주었다는 뜻인 듯합니다.
독일 종교개혁 3인방(?) 스테인드글라스를 지나 예배당 중앙 부분으로 걸어가자, 위의 사진에 나오는 커다란 제단이 나타났습니다. 제단은 성경에 기록된 몇몇 사건을 화려한 부조로 장식해놓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가지 못하게 막아놓아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못했고, 먼 발치에서 언뜻 바라보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탐방기를 쓰면서 성 토마스 교회의 최근 사진을 살펴보다가, 제단 위의 이 황금 부조가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 성 토마스 교회의 최근 모습
출처: (CC-BY-SA) Avi1111, wikipedia
위의 사진 한 가운데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제단 위의 부조가 사라지고, 나무로 만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형상(십자고상)이 그 자리에 대신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또한, 사진을 통해 본 성 토마스 교회는 제가 방문했을 때보다 더 밝고 깨끗해진 듯했습니다. 루터 교회라는 한계가 있어서 이런저런 로마 카톨릭의 잔재가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아무리 외적으로 청결하게 한다고 해도 말씀의 능력으로 내적인 부분이 먼저 깨끗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데, 오늘날 루터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고 걱정스러울 따름입니다.
또한, 사진 중간 아랫부분을 보시면 사각형 모양의 금속판과 그 주변으로 꽃이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의 무덤입니다.
바흐는 1723년부터 죽을 때까지 이 교회의 음악 감독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이 교회에는 루터와 연관된 유적보다는 바흐와 연관 있는 유적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심지어 이 교회 반대편에는 바흐 박물관까지 따로 운영되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 성 토마스 교회 앞에 서 있는 바흐 동상
– 멘델스존이 1843년에 세웠다고 합니다
바흐는 신실하고 철저한 루터교 신자였습니다. 어떤 책에서는 그를 신학자로 부르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고 평가합니다. 그가 남긴 작품 중에는 <마태 수난곡>이 가장 유명합니다. 바흐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소재로 삼은 이 오라토리오를 통해, 기독교 신앙의 정수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음악적인 형태로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를 둘러본 뒤, 신 시청사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루터가 세 번째 큰 논쟁을 벌였던 장소인 신 시청사가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물론, 마르틴 루터와 요한 에크가 이 건물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1519년, 두 사람이 논쟁을 벌일 당시 이 자리에는 플라이스부르크(pleissburg)라는 성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은 1895년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의 신 시청사 건물이 들어섰습니다.
라이프치히 논쟁은 1519년 6월 말에서 7월에 이르는 동안 이루어졌습니다. 이 논쟁이 이루어지게 한 주인공은 잉골슈타트(Ingolstadt) 대학 총장이자, 당대 최고의 로마 카톨릭 신학자였던 요한 에크였습니다. 그는 신학적인 논쟁을 즐기던 논쟁가로서, 루터와 논쟁하기에 앞서 그의 동료였던 칼슈타트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면죄부와 로마 교황의 권위에 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왜 잉골슈타트 대학 총장이 굳이 라이프치히 대학까지 와서 논쟁을 벌였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에크의 정략적인 판단이 숨어 있었습니다. 당시 작센 지방에서는 선제후의 지원을 받는 비텐베르크 대학과 공작의 지원을 받는 라이프치히 대학이 서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면, 우리나라의 연·고대와 비슷한 관계였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었던 에크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자기편으로 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작센 공작 게오르크를 이 일에 끌어들여 논쟁할 장소를 비텐베르크 대학이나 잉골슈타트 대학이 아닌, 라이프치히 대학이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는 라이프치히 대학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칼슈타트를 통해 루터가 어느 정도 실력을 지녔는지 시험해본 뒤에, 루터와 최종 결판을 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앞선 아우크스부르크 논쟁으로 인해 ‘문제아’라는 낙인이 찍힌 루터를 공개 토론장으로 불러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냥 그렇게 무산될 것만 같았던 공개 토론은 게오르크 공작이 적극적으로 나서자 상황이 급격하게 바뀌었습니다. 루터가 라이프치히까지 무사히 올 수 있는 안전통행증이 발행되었고, 루터는 결국 플라이스부르크 성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루터와 에크는 주로 ‘권위’에 대해 논쟁을 벌였습니다. 둘이 논쟁한 이 ‘권위’ 문제는 오늘날에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를 가르는 핵심 문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논쟁에서 서로 주장한 내용을 대화 형식으로 조금 자세하게 소개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를 참고하시면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회가 왜 하나가 될 수 없는지를 쉽게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2
에크: 저는 한 가지 믿음, 한 분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며 로마의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인으로 모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주셨고, 이(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그의 후계자인 로마 감독들은 교회의 머리가 됩니다. 이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지요. 로마 카톨릭 교서에는 “거룩한 로마의 사도적 교회의 수위성의 출처는 사도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주님과 구주이시며, 이 교회는 다른 모든 교회와 양 떼인 신자들 모두보다 탁월한 권세를 누린다.” 그리고 “성직 제도는 신약 시대에, 곧 그리스도께서 교회 안에서 행사하시던 주교의 직분을 베드로에게 일임하신 직후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루터: 저는 그것들을 배격하는 바입니다. 그 거룩한 주교이자 순교자3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습니다. 에베소서 4장 15~16절4을 보시면,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십니다. 또한,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며, 1세기 기독교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습니다.
에크: 음, 당신의 말은 이단으로 정죄 받은 자, 위클리프의 주장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그는 이렇게 말했지요.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것 위에 있는 것으로 믿든지 안 믿든지 구원과 관계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또 다른 이단자인 얀 후스의 오류도 지지하고 있어요. 그는 “베드로는 과거에 거룩한 교회의 머리가 아니었으며 지금도 아니다.”라고 주장했었죠.
루터: 저는 보헤미아 형제들의 주장은 반대하는 바입니다. 특히 그들의 분열은 인정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하늘로부터 받은 권리가 있다고 해도 교회로부터 빠져나가지는 말았어야 했습니다. 최고의 신성한 권리는 바로 통일과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논쟁은 점심시간이 되어 잠시 중단되었는데, 그때 루터는 대학 도서관으로 달려가 후스를 이단으로 정죄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논쟁이 다시 시작되자, 루터는 후스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기 시작했습니다.
루터: (공의회에서) 얀 후스가 했던 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보편적 교회로서는 그렇게 쉽게 정죄할 수 없는, 분명히 기독교적이고 복음적인 내용들이 많더군요. 특별히 “구원받기 위해 로마 교회가 다른 모든 것보다 앞서는 것으로 반드시 믿을 필요는 없다”에 대해서 얘기해 봅시다. 그것이 위클리프의 주장이든지 후스의 것이든지 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이 조항의 내용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그리스 사람들(초대 교인) 가운데는 구원받은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신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로마 교황이나 교회 회의의 소관이 아닙니다. 저는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성경 이상의 것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법에 따라 성경이 정하지 않았거나 분명한 계시가 아닌 것은 아무것도 믿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회법 학자의 말마따나, 만일 한 개인의 견해가 보다 나은 권위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면 로마 교황이나 어느 교회 회의보다 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후스의 이러한 주장을 정죄하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네요. 어쩌면 이 기록은 나중에 삽입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에크: 그건, 후스파에서조차 그 출처를 의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루터: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공의회에서는 후스의 이 조항들이 모두 이단적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어요. 대신, 독실한 사람에게는 “더러는 이단적이요, 더러는 오류를 범하며, 더러는 신성모독이요, 더러는 주제넘으며, 더러는 선동적이요, 더러는 귀에 거슬린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구별해서 그 내용을 똑바로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에크: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분명히 기독교적이요 복음적이란 얘기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당신이 만약 후스의 조항들을 변호한다면 당신이야말로 독실한 사람들에게 이단적이요, 오류를 범하며, 신성모독적이요, 주제넘고, 선동적이며 귀에 거슬리는 사람이겠지요.
루터: 저를 오해하고 계시는데, 저의 주장은 교회 회의는 잘못을 저지른 적이 있으며, 때에 따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 어떤 교회도 새로운 신조를 만들 권위가 없습니다. 본래 권위를 지니지 않은 것을 교회 회의에서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교회 회의마다 서로 엇갈리는 결정을 내려왔습니다. 최근에 있었던 라테라노 회의 때만 해도 교회 회의의 권위가 교황의 그것보다 높다는 콘스탄츠와 바젤 회의의 주장을 번복했습니다. 소박한 한 성도가 성경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우리는 성경이 없는 교황이나 교회 회의보다 그 성도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면죄에 대한 교황의 교서 문제만 해도 나는 교회나 교황이 신조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위해서는 교황과 교회 회의들을 배척해야 합니다.
에크: 그러나 교황과 교회 회의의 박사들과 대학들의 해석보다 각자의 성경 해석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보헤미아에서 온 누룩입니다. 당신은 이것을 성경 본문의 진정한 뜻으로 주장하지만, 만일 교황이나 교회 회의에서 “그렇지 않습니다. 그 형제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저는 형제의 말을 믿지 않고 교회 회의의 결정을 따를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이단이 되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단들마다 성경에 호소하고 자신들의 해석이 맞다고 하면서, 당신처럼 교황과 교회 회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펴왔습니다. 교회 회의에 참석한 자들이 사람이기에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구역질 나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오. 콘스탄츠의 거룩한 공의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의견 일치에도 겁도 없이 위클리프와 후스를 가장 기독교적이라느니 복음적이라느니 말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당신이 정말 콘스탄츠 회의를 배격하고, 합법적으로 소집된 교회 회의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계속 우긴다면 저는 당신을 이방인과 세리로 여기겠습니다.
루터: 절 그리스도인으로 보시지 않는다면 내 논리와 권위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터키인이나 불신자를 대하듯이 말입니다.
…(중략)…
에크: 다음은 연옥에 대해서 얘기해봅시다. 마카비후서 12장 45절에는 이렇게 나와 있소.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구절이 바로 연옥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루터: 마카비서는 외경일 뿐, 구약의 정경도 아니고 전혀 권위가 없습니다. 그리고 교황의 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도 역시 권위가 없습니다.
에크: 만약 당신이 계속 이런 식으로 교황의 수위권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견해가 좀 더 쉽게 좁혀 들었을 것이요. 정말로 당신밖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까? 당신 말고는 모든 교회가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루터: 하나님께서는 나귀의 입을 빌려서도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민수기 22:21~30). 저는 기독교 신학자이기에 진리라면 그것을 밝힐 뿐만 아니라 피와 죽음으로 지킬 의무가 있습니다. 저는 자유롭게 진리를 믿고 싶고, 교회 회의나 대학, 교황 할 것 없이 어느 누구의 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어느 로마 카톨릭 신자의 주장이든지 이단의 주장이든지, 그리고 교회 회의의 인준을 받은 것이든지, 징계를 받은 것이든 간에 제게 참된 것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저는 당당히 거기에 동의할 것입니다.
이 라이프치히 논쟁은 이런 식으로 거의 3주 넘게 이루어졌으며, 작센의 게오르크 공작이 개입하여 말리지 않았다면 그 이후로도 계속되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이 논쟁으로 인해 1520년 6월에 이단으로 정죄 되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에크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승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상을 살펴보면, 오히려 루터가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우선, 이 논쟁을 지켜본 수많은 라이프치히 대학생들이 루터의 주장에 동의하고 그를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 논쟁에 관한 소식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진리에 대한 큰 관심이 일어났습니다. 특히, 그가 논쟁 중에 말한 ‘교회에 대한 교황의 수위권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제정된 것이 아니며, 1세기 기독교에는 그것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말은 일반 대중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사제들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수도사들끼리의 말다툼이겠거니.’라고 생각했던 일반 대중은 이 논쟁을 계기로 루터의 말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루터는 이 논쟁을 계기로 종교개혁의 출발점이자 핵심 원리인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분명하게 정립하고 밝히게 되었습니다. “공의회도 실수할 수 있고, 실제로 오류를 범했습니다. 무오한 것은 성경입니다.”라는 그의 말은 신앙 문제에 대해 성경 외의 다른 권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천명한 것과 같았습니다.
신 시청사 주위를 돌면서 루터가 이곳에서 논쟁한 것을 기념하는 표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앞선 두 번의 논쟁이 일어난 장소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뭔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터라 다소 당황스러웠습니다. 독일 정부에 당장 탄원서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습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숙소로 돌아오던 중에, 반가운 얼굴이 그려져 있는 명판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던 대로, 루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약 세 번 정도 설교했는데, 이곳에 올 때마다 자기 이름과 비슷한 ‘로터’라는 인쇄업자의 집에 묵었습니다. 이 명판은 바로 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명판을 보자, 조금 전의 아쉬움이 덜해지면서 반가움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이내 뭔가 좀 부조리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오직 성경이라는 중요한 종교개혁의 원리가 태어난 장소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루터가 머물렀던 집에는 그 일을 기념하는 명판이 있다?’
뭔가 당황스럽고 앞뒤가 뒤바뀐 것만 같은 찝찝한 그 기분은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점검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 역시 유적지를 찾아보는 일에만 급급하다 보니, 어느새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으며 그 일이 지금의 내 신앙과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곱씹어보는 본질적인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앞뒤가 뒤바뀐 듯한 명패는 본말이 뒤바뀐 채 이루어지고 있는 제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의 결점을 알려주며, 저를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로터의 집’이라는 명패가 걸린 이 건물은 어떤 공사를 진행하는 중이었습니다. 그 명패를 보고 제 부족함을 깨달아서였을까요? 이곳저곳을 고치고 있는 이 집이 꼭 제 모습처럼 느껴졌습니다. ‘아, 나도 이 건물처럼 온전해지기 위해 많은 곳을 고치고 다듬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일어났습니다.
숙소에서 나설 때부터 많이 지쳐 있었던 터라 돌아오는 발걸음은 상당히 무거웠습니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참으로 가볍고 즐거웠습니다. 다시 힘써야 할 신앙의 본질을 생각하니 마음이 새로워지고, 그 모든 것을 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참으로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루터와 관련한 여러 논쟁과 회의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결정적인 ‘보름스 회의’가 열렸던, 보름스로 떠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천주교에서 시행하는 서원 가운데 하나. 카톨릭 교회법을 충족하는 수도사나 수녀가 평생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서원하는 약속을 말합니다.
2 이 대화는 롤라드 베인턴, 『마르틴 루터의 생애 (Here I stand)』, 이종태 옮김, 생명의 말씀사, 1982년 판에서 주로 인용하여, 적절하게 재구성한 것입니다.
3 3세기의 카르타고 주교인 키프리아누스를 말합니다.
4 오히려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함으로 모든 일에 그분에게까지 자라나야 한다. 그분은 머리시니, 곧 그리스도이시다. 온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아 함께 연결되고 결합된다. 각 지체가 자기의 분량대로 역사함을 따라 몸이 자라나며, 사랑으로 자신을 세워 간다(바른 성경).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6.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익투스, 2012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8. 강일구, 『바흐, 신학을 작곡하다』, 도서출판 동연,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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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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