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9)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아이슬레벤)
설형철
이 글이 무려 2년 넘게 연재(連載)한 마르틴 루터 유적지 탐방기의 마지막 편입니다. 저자의 게으름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연재가 꾸준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는데도, 계속 사랑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다음 편은 거르지 않고 최대한 꾸준하게 쓰려고 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도 같이 기도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이번에는 루터가 태어났고 삶을 마친 도시, 아이슬레벤(Eisleben)을 살펴보겠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루터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이 도시를 ‘독일의 베들레헴’이라고 부릅니다. 실제로, 아이슬레벤에는 루터와 관련된 장소가 다른 도시보다 훨씬 더 많습니다. 만약, 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온다면, “대체, 루터가 누구길래 가는 곳마다 ‘루터, 루터’ 하는 거야?”라고 투덜거릴 정도입니다.
▲ ‘루터의 도시 아이슬레벤(Lutherstadt Eisleben)’이라고 적힌 기차역 표지판의 모습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슬레벤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이 날도 여느 때처럼 한 번에 여러 도시를 둘러볼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역에서 내려서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루터가 태어난 ‘루터 생가(生家)’ 입니다. 한 20분 정도 꼬불꼬불한 길을 걸어가니, 생가 앞의 루터 흉상(胸像)이 저를 맞이해주었습니다.
▲ 루터 생가에 있는 루터 흉상
– 항상 거대한 루터 동상만 보다 작은 동상을 보니 조금 어색했습니다.
현재, 이 루터 생가는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의 자료를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독일 대중에게 개방된 최초의 박물관이기도 합니다(1693년). 1996년에는 루터 사가(死家)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 마르틴 루터 생가 현판
– 4월~10월까지는 10~18시, 11월~3월까지는 10~17시까지 운영한다고 나와 있습니다.
▲ 밖에서 찍은 모습
– 거대한 종이 하나 보이는데, 왜 그곳에 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공간
– 아이슬레벤에는 루터와 관련된 장소를 쉽게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판도 만들어 놓았습니다.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요? 박물관에 도착해보니, 아직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아마 문이 열려 있었어도, 재정적인 이유로 박물관 안쪽을 둘러보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여러 차례 도움을 주고 있는 종현 형제가 아니었다면, 여러분에게 박물관 안쪽 모습까지 소개해드리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 루터 시대 아이슬레벤의 모습을 보여주는 도시 모형(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소박한 당시의 부엌 모습
– 오른편에는 아기 루터가 잠들었을 법한 요람도 보입니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방에 있는 침대의 모습
– 누가 이 침대를 사용했을까요? 루터가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에 이곳에서 태어났지만, 1년 후인 1484년에 가족 모두가 만스펠트(Mansfeld)로 이사했기 때문입니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참 아쉽게도, 종현 형제가 보내준 사진 중에는 종교개혁 여행 책자에 나오는 루터의 친필 편지와 그를 상징하는 백조(白鳥)상1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생가 안쪽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어서 참 감사했습니다.
루터 생가를 뒤로하고, 루터가 유아세례를 받은 성 베드로-바울 교회로 이동했습니다. 너무도 가까워서 정말로 엎어지면 코 닿을 듯한 거리에 있었습니다.
▲ 성 베드로-바울 교회(St. Petri-Pauli Kirche)
▲ 성 베드로-바울 교회의 모습
너무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이 교회의 문도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르기로 하고, 다음 장소인 마켓 광장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마켓 광장으로 가는 길에 무언가 이색적인 모습이 제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어떤 건물 외벽에 루터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이 걸려 있었습니다.
▲ 벽 바깥쪽에 전시해놓은 그림의 모습
– 가장 오른쪽 그림은 루터와 그의 동료가 비텐베르크에서 교황의 교서와 책들을 불태우는 모습입니다.
그림도 그림이지만, 외벽은 그것보다도 더 낡아 보였습니다. 그동안, 독일 사람들이 박물관과 유적 관리를 잘하는 모습을 많이 봤는데, 이러한 허술한 관리 실태를 보면서 조금은 실망스러웠습니다.
▲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지글러, 아기 루터의 모습
▲ 소년 루터의 모습
– 소녀처럼 보일 정도로 앳된 모습입니다.
▲ 이 그림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꼭 소년, 소녀 공산당원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습니다.
마지막 그림 때문이었는지, 한 가지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이 그림이 북한에 걸려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인공이 루터인지 김일성인지 잘 분간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렇게 하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루터의 성장 과정과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곳을 지나가는 방문객 중에는 분명히 이 그림의 내용을 묻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좁은 길을 지나 탁 트인 광장으로 나오자, 저만치 루터 동상이 광장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 루터의 동상
– 그 날이 장날이었는지, 동상 주변에는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과 손님들이 꽤 많았습니다.
이 마르틴 루터 동상은 1863년에 루터 탄생 400주년을 기념하여, 루돌프 지머링(Rudolf Siemering) 교수가 제작한 것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왼손으로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교황의 칙서를 구겨 쥐고 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동상 네 면에는 루터의 생애가 어떠했는지를 말해주는 부조를 배치해 놓았습니다.
▲ 동상 앞쪽의 모습
– 천사가 루터교를 상징하는 장미 십자가 방패를 들고 악마를 무찌르는 모습입니다.
▲ 동상 왼쪽 모습
– 라이프치히에서 논쟁하는 루터와 에크의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 동상 오른쪽 모습
–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는 모습입니다.
▲ 동상 뒤쪽의 모습
– 루터 가족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표현했습니다.
독일에서 루터의 동상을 여럿 보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동상이 가장 자세하고 꼼꼼하게 루터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동상의 상태도 양호해서, 150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비해 상당히 깨끗하게 잘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마켓 광장의 동상을 꼼곰이 잘 살펴본 뒤, 루터가 죽기 전까지 머물렀던 ‘루터 사가(死家)’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 루터 사가(死家, Luthers Sterbehaus)
가는 날이 장날이랄까요? 안타깝게도 루터 사가는 공사 중이었습니다. 번번이 헛걸음을 치는 것 같아 다리에서 힘이 스르르 빠져나갔습니다. 문득, 얀 후스 생가 박물관을 방문했을 때가 떠올랐습니다. 그때도 박물관이 굳게 닫혀 있어서 담까지 넘었는데도, 결국 돌아서야만 했었습니다.
너무도 아쉬운 마음에 계속 이곳저곳을 기웃거렸습니다. 루터 사가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해서 많이 기대했었지만, 공사 중인 박물관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글을 쓰면서 종현 형제가 보내준 사진을 보니, 그때의 아쉬움이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 루터 사가의 내부 모습
– 독일어와 영어로 ‘루터의 마지막 여정’이라고 쓰여 있습니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루터는 소천하기 몇 년 전부터 만성 피로, 통풍, 우울증, 신경쇠약, 안구 염증, 부종 등 많은 질병을 앓았습니다. 오랜 수도사 생활과 그를 짓누르는 여러 종교적, 정치적 상황과 너무 잦은 설교는 그의 몸을 계속 갉아 먹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루터는 두 무리의 사람을 ‘화해’하게 하려고 아이슬레벤으로 가게 됩니다. 만스펠트 백작과 아이슬레벤 주민이 인근 광산의 이권을 놓고 오랫동안 다툼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루터의 이 ‘화해’ 여정에는 그의 두 아들(마틴, 파울)과 요나스 박사(유스투스 요나스)가 함께 했습니다. 추운 날씨와 심한 폭풍 때문에 어려움이 무척 많았지만, 루터 일행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1546년 1월 28일에 무사히 아이슬레벤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루터의 몸은 상당히 좋지 않았습니다. 만스펠트 백작이 제공한 마차를 타고 숙소로 가던 도중, 루터는 갑자기 심장마비 증세를 보였습니다. 응급처치를 받고 겨우 고비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몸을 추슬러야 했지만, 루터는 계속 설교하고 성찬을 집례하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습니다. 결국, 다시는 침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고 말았습니다.
▲ 루터가 숨을 거두기 전에 했던 말 가운데 하나
– “오 주님! 요나스 박사, 나는 너무 아프다네. 내 가슴 주위의 압박(통증)이 너무 극심하다네.
오, 나는 아이슬레벤에 남을 것 같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이처럼, 루터는 자기가 태어나고 세례받은 아이슬레벤에서 숨을 거둘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극심한 통증을 겪다가 치료를 받으면 잠시 낫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때뿐이었습니다. 고통은 계속되었고, 루터는 이렇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 영원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 당신께서는 저에게 당신의 사랑스러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셨으며, 저는 그분을 고백하였고 만인에게 선포하였습니다. 나는 –불경한 자들이 매도하고 박해하는– 그분을 나의 유일한 구원자요 구속주로서 사랑하고 높여드리며, 내 영혼을 주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기도한 뒤에, “당신의 손 안에 내 영혼을 올려드립니다.”라고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분을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3:16)라고 고백했습니다.
▲ 루터가 숨을 거두기 직전의 모습을 그린 그림(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William Pape(1859~1920): <Luther’s last confession(1905년)>
유스투스 요나스는 루터의 임종이 가까웠음을 느끼고, 루터에게 이렇게 물어보았습니다.
「사랑하는 목사님, 당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 우리 구주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계십니까?」
이에 루터는 또렷한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오, 그렇습니다!」
그 뒤, 루터는 조용하게 의식을 잃었습니다. 그의 호흡도 계속 조금씩 약해졌습니다. 결국, 1546년 2월 18일 화요일 새벽 2시경, 루터는 그토록 만나고 싶어했던 주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 루터의 얼굴과 손을 본뜬 모형
– 루터 사가 내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루터 사가 뒤쪽에는 루터가 마지막으로 설교한 성 안드레아스 교회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 성 안드레아스 교회(St. Andreaskirche)
루터는 바로 이곳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무려 4차례나 설교했고, 성찬을 2차례 집례했습니다. 그는 소천하기 4일 전인 2월 14일에, 이 교회에서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목회자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마지막으로 오랫동안 짊어진 사역의 짐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이후, 루터는 마태복음 11장 28절2로 설교하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한 그 말씀을 다 설교하지 못한 채, 건강 문제 때문에 강대상에서 내려와야만 했습니다. 루터의 장례식도 이 성 안드레아스 교회에서 치러졌습니다. 그때 집례를 맡은 요하네스 부겐하겐의 설교를 일부분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 지금 나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버지 마르틴 루터 박사를 축복하며 장례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요. 나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는 한마디도 할 수가 없습니다. 누가 당신들을 위로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로 당신들을 향하게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설교로 더욱 여러분들을 슬프게 하고 울게 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지극히 고귀하고 존경받을 만한 마르틴 루터 박사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서 데려가셨습니다…….」
루터는 죽기 전까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했습니다. 그런 그의 삶을 살펴보면서 저 자신이 너무도 부끄러웠습니다. 저도 루터처럼, 제게 맡겨진 이 탐방기를 열심히 써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루터 사가는 공사 중이었는데, 성 안드레아스 교회의 문은 닫혀 있었습니다. 루터 사가 앞에서는 다리가 풀리는 듯했지만, 이곳에서는 몸에 있던 힘이 다 빠져나가는 듯했습니다. 루터 사가와 교회를 함께 둘러보려고 시간을 넉넉하게 빼놓았는데, 둘 다 못 둘러보게 되어서 시간이 꽤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멀리 갈 정도는 아니어서, 근처에 공원이 있으면 거기서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습니다.
▲ 성 안드레아스 교회 근처 벽에 쓰여 있는 루터의 글귀
몇 걸음 걷자 제 앞에 커다란 벽이 나타났습니다. 그 벽에는 짧은 글이 아닌, 긴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어, 이게 뭐지?’ 하고 살펴보았는데, 가장 아랫부분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라고 적힌 부분이 눈에 띄었습니다. 독일어라서 곧장 우리말로 옮길 수는 없었습니다. 나중에 무슨 말인지 찬찬히 살펴봐야겠다 생각하면서 일단 사진만 찍어 두었습니다.
시간이 꽤 지나고 탐방기를 쓰면서 구글 번역기로 이 글을 번역해 보았지만,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사촌 누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 글에는 신학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서 그런지, 조금 매끄럽게 번역되지 않은 부분이 있었습니다. 결국, 한 신학 교수님에게 번역을 부탁했습니다. 참 감사하게도, 그 교수님께서는 잘 번역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글의 출처까지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모든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이시여,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일치와 능력의 영을 주소서. 비록 우리가 같이 가장 탁월한 일치로 행한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선을 행하고 또한 견디기에는 여전히 우리 모든 손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분열하고 불일치하고자 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기겠습니까? 마귀는 이 해에 경건하지도 선하지도 않았으며, 앞으로도 또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과 평화의 끈 안에서 영적인 하나 됨을 지켜가도록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고 사려 깊게 하소서. [아멘]」
위의 글은 『방문자들을 위한 교훈(Unterricht der Visitatoren)』이라는 글의 끝부분인데, 전문은 바이마르판 루터 전집(WA) 26권의 195~240쪽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그 벽을 지나 5분 남짓 걷자, 작지만 예쁜 공원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잠깐 휴식을 취하기에는 딱 알맞아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치고 낙심한 저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잠시 쉬려고 긴 의자에 앉았는데, 또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글과 비슷해서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마지막 부분에 ‘마르틴 루터’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곧장 사진기의 촬영 단추를 눌러 글귀를 담은 다음, 잠시 쉬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윗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상의 현자들은 불평들과 분파들에 종속되어 있는 교회의 외적인 모습에 화를 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교회를 순수하고, 거룩하며, 모든 결점에서 벗어나 있는 하나님의 비둘기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가 그러한 모습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세상 앞에서 교회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찢겨지고, 긁히며, 멸시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며, 조롱당합니다.」
위의 글은 『탁상담화』의 3709번째 글로, 안토니 라우터바흐가 1538년 1월 17일에 그 대화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한 10분쯤 쉬었을까요? 다음 일정이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공원 벤치에 마냥 앉아있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자 아까 둘러보지 못한 성 베드로-바울 교회가 퍼뜩 생각났습니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그 교회를 향해 걸어갔습니다. 감사하게도, 그사이에 교회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던 외부와는 다르게, 예배당 안쪽은 아주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었습니다. 새 단장을 준비하고 있는 듯, 여기저기에 공구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점심시간도 아닌데 다들 어디로 갔는지, 꼭 저만 덩그러니 홀로 남아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예배당 벽에는 독일의 종교개혁을 이끈 루터와 멜란히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문이 닫혀 있어서 둘러보지 못한 성 안드레아스 교회 안에는, 이 두 사람의 흉상이 나란히 서 있다고 합니다. 왠지 루터는 혼자 있는 모습보다 멜란히톤과 함께 있는 모습이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독일 사람들도 저처럼 멜란히톤 없는 루터 모습에 뭔가 허전함을 느낄까요? 제 생각으로는 누구나 ‘독일 종교개혁’하면, 두 사람을 함께 떠올릴 것 같습니다.
공사 중인 어수선한 상황 때문이었을까요? 왠지 오래 머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을 죽 둘러보고 나와서 아이슬레벤 기차역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역으로 걸어가면서 오늘 여정을 돌아보니, 참 짧은 시간에 여러 곳을 둘러보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기대했던 두 곳은 방문하지 못했지만, 그 대신 하나님께서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주셔서 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루터 탐방기 마지막 편을 그가 태어나고 숨을 거둔 곳에서 마무리하게 되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루터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사실만 생각해도 큰 위로가 되는 것 같습니다. 끝으로, 루터가 죽음 이후에 찾아올 영광스러운 미래를 생각하며 말한 내용을 전해드리면서 루터 탐방기를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육신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무덤을 두드리며 ‘일어나라, 일어나라, 마르틴 루터여, 일어나라!’라고 말씀하실 때까지 무덤에 누워 잠을 잡니다. 그때 우리는 평온하고 기분 좋은 잠에서 단번에 일어나 영원히 주 그리스도와 함께 살 것이며 행복할 것입니다(탁상담화 중에서)」
각주
1 얀 후스는 순교하면서 “지금은 너희가 나를 거위구이로 만들지만, 100년 뒤에는 너희가 태울 수 없는 백조가 등장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체코어로 자기 이름이 거위인 것에 빗대어, 자기는 죽어도 그가 믿은 진리까지 없앨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100년 뒤에, 후스가 말한 그 백조에 해당하는 루터가 세상에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백조상이 루터를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2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모두 내게 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쉬게 할 것이다. (바른 성경)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4. C. E. Stowe, 『The Last Days and Death of Luther(루터의 말년과 죽음)』, 황갑수 역, 진리의 깃발 142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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