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5)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아우크스부르크)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 편에서는 루터가 두 번째 큰 논쟁을 벌인 독일 남부 도시,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보겠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라면, 아우크스부르크라는 도시 이름은 조금 낯설게 다가올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첫 번째 황제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떠올려본다면, 그 낯섦은 금세 사라질 것입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로마 제국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딴 도시로서, 제국의 군단 주둔지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할 것만 같았던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아우크스부르크 역시도 쇠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 1276년에 신성로마제국의 직할시가 되면서, 아우크스부르크는 예전의 명성을 되찾았습니다. 특히, 종교개혁을 전후로 굵직굵직한 제국의회가 이 도시에서 열릴 만큼, 아우크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중심 도시이자 종교개혁의 산실(産室)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그러한 아우크스부르크의 재도약은 신성로마제국이 역사 저편으로 사라지면서부터 다시 한풀 꺾였습니다. 현재, 아우크스부르크는 인구가 30만 명 정도 되는 중소 도시가 되었지만, 이 도시의 가치는 그렇게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제국의 중심 도시로 기능했던 만큼, 역사적으로 가치 있는 유적이 많기 때문입니다.
볼 것 많은 이 도시에서 우리가 찾아볼 장소는 루터가 로마 카톨릭 추기경인 카예탄(Cajetan)과 논쟁을 벌인 성 안나 교회(St. Anna Kirche)와 최초의 개신교 신앙고백서로 일컬어지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토대로 화의(和議)가 이루어진 성 울리히-아프라 교회(Basilika St. Ulrich und Afra)입니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성 안나 교회를 향해 걸어갔고, 교회는 이내 제 앞에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교회 이름 때문이었는지 문 앞에 서자, 바로 옆자리에 내리친 번개 때문에 죽음의 공포에 떨며 ‘성 안나’에게 도와달라고 했던 슈토테른하임의 루터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아마 루터는 그때 일이 자신을 이곳으로 이끌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참 감사하게도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듯한 크고 투박한 철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놀랍게도 입장료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 교회 벽에 나란히 걸려 있는 루터와 어떤 인물의 초상화
교회 안으로 들어서자, 루터의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나란히 걸려 있는 초상화의 주인공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루터와 나란히 초상화가 걸릴 정도라면 분명히 큰일을 한 사람일 텐데,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탐방기를 쓰면서 이 사람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다시 시도했습니다. 열심히 인터넷을 뒤져보았지만, 최종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과 똑같은 사진을 찾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그 사진에는 설명이 전혀 나와 있지 않았습니다.
객관적인 확인 작업이 실패로 돌아간 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루터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보호해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나 그의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아우크스부르크 논쟁이 일어났을 때 루터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 준 인물이 바로 지혜공으로 불린 프리드리히 3세였고, 그의 조카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훗날 루터교를 지키기 위해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맞서게 되는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이델베르크 논쟁을 마치고 비텐베르크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루터는 로마 교황청에서 날아온 소환장을 받았습니다. 그 소환장에는 로마의 이단 재판소에 출석하여 심문을 받으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습니다.
「95개 조 반박문」이 일으킨 반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을 인식한 로마 교회가 본격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루터는 프리드리히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로마로 가는 순간, 얀 후스처럼 화형을 당하게 될 것이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루터와 같은 평민이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선제후와 개인적인 이유로 만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이에 둘 사이를 연결해준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게오르크 슈팔라틴’입니다. 선제후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었던 그는 선제후를 돕는 보좌관이자 궁중 신부로 일했습니다. 즉, 슈팔라틴은 정치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선제후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1512년, 비텐베르크 대학 도서관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루터와 만났으며, 그의 개혁사상을 받아들이고 지지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슈팔라틴은 자기가 섬기는 선제후에게 루터의 사상을 소개해주었으며, 그로 인해 프리드리히도 루터의 사상을 받아들이고 그를 지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프리드리히와 루터가 평생 주고받은 말이 겨우 스무 마디를 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에 비해 루터와 슈팔라틴이 주고받은 편지는 무려 400여 통이 넘습니다. 그만큼 프리드리히와 루터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사회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훗날, 교황의 압박이 루터에게 물밀듯 밀려왔을 때 그를 보호해준 이들이 바로 독일 제후들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슈팔라틴 같은 사람이 없었다면 루터도 후스처럼 되는 일을 피하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루터도 슈팔라틴의 그러한 수고를 높이 평가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나의 노련한 참모, 슈팔라틴은 종교개혁의 역사책에 황금 펜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슈팔라틴을 통해 루터가 도움을 요청해온 사실을 알게 된 프리드리히는 일단 루터가 로마가 아닌 독일에서 심문받게 해달라는 쪽으로 협상을 진행했습니다. 사실, 프리드리히가 루터를 지지하고 보호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95개 조 반박문」은 교황뿐만 아니라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까지도 화나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과 황제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차기 황제를 선출하는 일에 행사할 큰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의 뜻대로 루터를 독일의 아우크스부르크로 소환하고, 심문은 학자인 카예탄 추기경이 로마 교황을 대신해 그곳으로 와서 진행하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게 된 루터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증언에 따르면 훗날의 보름스 회의(1521년) 때보다도 이때를 더 힘에 겨워했다고 합니다. 그는 그곳에서 혹시 화형을 당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떨었으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장염까지 걸려 육체적으로도 매우 힘들고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로 가는 길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1518년 10월 7일에 시작된 아우크스부르크 논쟁에서 루터와 카예탄은 약 세 번 정도 만났습니다. 루터는 처음 카예탄을 만났을 때 바닥에 엎드렸고(수도사로서 추기경에 대한 예의), 카예탄은 그를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첫 만남이 이루어지자, 카예탄은 마치 어린아이를 타이르듯 부드러운 말로 루터에게 「95개 조 반박문」을 통해 주장했던 내용을 철회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1343년에 발표된 클레멘트 6세의 우니게니투스 교서를 예로 들어 보이며 로마 교황에게 주어진 권위, 곧 그가 말하거나 해석한 것은 진리라는 로마 카톨릭의 교리를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믿음 없이 성례전만으로도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말해주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자기 주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성경에 근거하여 합리적으로 알려준다면 기꺼이 철회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아가 교황의 권위보다 공의회의 권위가 더 높다고 역설하면서, 교황도 실수할 수 있으며 오류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루터가 거기서 멈추지 않고 교황의 말이 성경보다 위에 있지 않다고 말하자, 카예탄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카예탄은 즉시 물러가라고 소리치면서 지금껏 주장한 모든 것을 취소하기 전에는 자기 앞에 나타날 생각도 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그 이후, 루터는 추기경이 자신을 해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해했고, 주변 친구들도 어서 그곳을 벗어나라고 조언했습니다. 결국, 루터는 야음을 틈타 아우크스부르크를 빠져나와 비텐베르크로 돌아왔습니다(어떤 책에서는 그의 스승 슈타우피츠가 그 도시를 무사히 떠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카예탄은 루터와 논쟁한 결과를 글로 써서 프리드리히에게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무례하게 도망친 그 수도사를 로마로 보내든지, 비텐베르크에서 추방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 요구는 프리드리히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루터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1518년 10월 31일에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카예탄과 논쟁한 결과를 정리하여 책으로 펴냈습니다. 프리드리히는 그 일로 인해 더욱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그 책을 통해 한 말을 살펴보면, 프리드리히가 겪었을 어려움이 어떠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 교서(우니게니투스 교서)를 부정한다 해서 못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부정한다면 우리는 이단입니다. 나는 이 교서를 저주하고 혐오합니다. 그 사도적 사절(카예탄)은 자신의 위엄을 벼락삼아 내게 으르렁거리면서 취소할 것을 요구했지요. 나는 교황이 성경을 남용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내가 교황의 성결성을 존경한다면 그리스도와 진리의 성결성은 흠모하는 바입니다. 나는 우리 세대에 일어난 이 로마 교회의 새로운 군주 체제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로마 주교의 교서에 복종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데는 반대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교서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면죄의 한 보물이라는 점은 반대합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교황과 관계없이 은혜를 가져오기 때문이죠. 그리스도의 공로는 죄를 없애고 또 공로를 늘립니다. 면죄는 공로를 없애고 죄를 남겨 놓습니다. 이 아첨꾼들은 교황을 성경 위에 올려놓고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사람이라고 우겨댑니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사라지고 교회에 남는 것은 인간의 말뿐입니다. 나는 로마 교회의 이름으로 바벨론을 세우려는 자들을 단호히 반대합니다.」
루터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습니다. 책을 펴낸 지 약 한 달 정도 지난 시점인 11월 28일, 그는 콘스탄츠와 바젤 공의회의 사크로상타(Sacrosancta) 교령2에 기초하여 공의회에서 자기 문제를 변론할 수 있게 해달라고 청원했습니다.
그 사이, 루터는 교황에게 파문(破門)당하는 것도, 비텐베르크에서 추방당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사람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양심에 어긋나는 것을 묵인하기보다 고난을 택하기로 뜻을 정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로 향하면서 두려움에 떨었었고, 교황의 대리자인 카예탄 앞에서 기꺼이 엎드렸던 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아마도 오랜 기간 그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던 ‘로마에 대항하는 일이 잘못된 것은 아닌가, 내가 지금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과 두려움이 두 번의 큰 논쟁을 거치면서, 전혀 그렇지 않다는 확신으로 바뀐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루터의 행동으로 인해, 프리드리히는 더 구석에 몰렸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일로 마음이 어렵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지혜공이라는 자신의 별명처럼 참 지혜롭게 처신했습니다. 자신에게 “믿는 제후로서 나의 임무는 무엇인가?”라고 질문을 던지면서 어지러운 마음을 다잡고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았습니다. 오랫동안 고심하며 생각한 끝에, 그는 1518년 12월 18일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루터를 변호하는 글을 로마 교황청에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성하(카예탄)께서 루터에게 아버지로서 취할 행동을 보이신 것으로 확신하지만, 그에게 취소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제시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의 가르침이 부당하고, 비그리스도적이며 이단적이라는 점이 지금까지 한 번도 드러나지 않은 것으로 여러 대학의 학자들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중략)…
그의 가르침이 비신앙적이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이해된다면 그것을 변호하지 않겠습니다. 제게 유일한 목적이 있다면 그리스도인다운 제후의 직분을 다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답변을 내리소서. 그를 로마로 보내거나 추방하는 문제는 그가 이단의 정죄를 받은 다음에라야 취할 행동인 것 같습니다. …(중략)…
어떤 점에서 그가 이단이라는 점이 지적되어야 마땅하며 그 전에는 정죄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함부로 잘못을 범하고 싶지도 않으며 거룩한 청사에 불순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에서는 최근에 그를 위해 청원을 올린 점을 아울러 말씀드립니다. 여기 그 사본을 동봉하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 가운데 서로 협력하게 하신 이 두 사람의 말과 행동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으로 그분의 무한하신 지혜와 능력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위해 기꺼이 어려움을 감수하기로 한 이들의 믿음에 놀라운 기적을 베푸시는 것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겉보기에 상황은 눈에 띄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믿음을 따라 종교개혁은 계속 전진하며 깊이를 더하고 굳건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들의 신앙도 더욱 온전해졌습니다.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믿음으로 모든 것을 이겨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고난 앞에서도 염려하고 근심하는 저의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저의 작은 믿음은 언제쯤 저들처럼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될까 생각하면서, 저도 어떤 상황에서든지 주님을 의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성 안나 교회 안에 볼 만한 것은 많이 있었지만, 정작 종교개혁과 관련 있는 것은 앞서 소개한 초상화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뭔가 좀 허전하고 이상해서 책을 다시 살펴보니, 아닌 게 아니라 이 교회 건물 2층에 루터 탄생 500주년(1983년)을 기념하여 루터 박물관을 개장했다고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랑하는 기억력은 나이가 들어 쇠퇴했는지,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보아도 박물관으로 향하는 길만 언뜻 기억날 뿐, 박물관을 관람했는지 관람했다면 무엇을 보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탐방하면서 찍은 사진을 아무리 찾아보아도, 이 박물관과 관련 있는 사진은 한 장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관련 내용을 전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 아쉬워하고 있던 도중, 참 감사하게도 인터넷에서 박물관 홈페이지를 찾았습니다! 박물관의 모습이 궁금하신 분들은 각주에 달아놓은 URL 주소3를 따라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시면 좋을 듯합니다.
성 안나 교회를 나와, 다음 장소인 성 울리히-아프라 교회로 걸음을 옮겼습니다. 한창 울리히-아프라를 향해 걷고 있었을 때, 많이 익숙한 글자가 적힌 이정표 하나가 제 눈길을 사로잡았습니다.
‘마르틴 루터 광장’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그곳에 뭔가 루터와 관련 있는 게 있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와 함께 제 발걸음은 성 울리히-아프라 교회가 아닌 광장을 향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 과연 무엇이 있을까?’ 하는 기대감은 자꾸만 제 발걸음을 재촉하였습니다.
기대 속에 도착한 루터 광장은 제 예상과 많이 달랐습니다. 작고 초라해 보이는 공간과 루터도 아닌, 이름 모를 어떤 사람의 조그마한 동상 하나가 전부였습니다. 정말 이름만 ‘마르틴 루터 광장’이었을 뿐, 루터와 관련 있는 것은 아무리 찾아봐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럽 탐방 초반부에 이런 일이 꽤 있었습니다. 생애 처음 가보는 곳, 게다가 우리 신앙의 선배가 남겨놓은 흔적을 되짚어본다는 설렘 때문인지 큰 기대를 했다가 정말 크게 실망했던 일이 종종 벌어졌습니다. 마르틴 루터 광장에 대한 실망감은 그때의 기억을 떠오르게 했습니다.
앞으로는 어디를 찾아갈 때는 기대를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좀 작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덧 성 울리히-아프라 교회 앞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교회 규모가 조금 전에 방문했던 성 안나 교회보다 3~4배 정도 더 크게 보였습니다. 교회 위치도 성 안나 교회는 작은 골목인데 반해, 이 교회는 큰 도로 옆이어서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 울리히-아프라 교회의 구조는 아주 특이합니다. 위 사진을 자세히 보시면, 교회 건물이 하나가 아닌 여러 개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으실 것입니다. 그중에 앞쪽의 작은 금색 십자가가 있는 작은 건물이 울리히 루터 교회(루터교)이고, 뒤쪽의 큰 십자가를 세워놓은 조금 더 큰 건물이 울리히-아프라 성당(로마 카톨릭)입니다.
건물을 이렇게 세운 이유는, 1555년에 이루어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和議)를 기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건물을 보자마자 로마 카톨릭이 개신교를 상대로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인 “우리는 큰 집이고, 개신교는 작은 집이다.”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화의가 이루어지던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으리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에 반해, 뒤쪽의 성당 문은 마치 보란 듯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문 너머로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미 성당을 여러 군데 가보았는데, 갈 때마다 항상 고약한 향냄새와 더러운 우상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많은 압박을 받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최대한 성당 방문은 자제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터라, 제 발걸음은 좀처럼 성당을 향해 옮겨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날 일정은 그렇게 건물 주변만 둘러보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말았습니다.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최초의 개신교 신앙고백서로 인정받을 뿐만 아니라, 훗날 이를 토대로 개신교가 정식으로 인정되는 화의가 이루어지기도 해서 역사적인 중요성이 큰 고백서입니다. 하지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절대로 우호적인 분위기 가운데 편안하게 작성하고 발표한 신앙고백서는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1521년에 보름스 회의(앞으로 소개할)에서 파문을 당했지만, 종교개혁의 불길은 그에 굴하지 않고 독일 지역을 넘어 유럽 전체로 계속 퍼져 나갔습니다. 종교개혁을 반대하고 로마 카톨릭을 지지했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어서, 그 상황을 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1526년에 슈파이어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는 어떤 지역의 백성이 믿어야 할 종교는 제후의 신앙에 따르기로 한다는 법령이 통과되기까지 했습니다. 즉, 어떤 제후가 신교(개신교)를 믿기로 한다면, 그 지역 사람들도 자유롭게 신교를 믿고 생활할 수 있도록 보장해주겠다는 법이 통과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카를 5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를 열었습니다. 1529년 3월에 열린 이 의회의 목적은 점점 세력을 더해가는 루터교 제후의 힘을 꺾고, 종교개혁의 불길을 잡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이 의회에서는 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결정한 사항을 폐기하고, 다음 제국의회가 열릴 때까지 유일한 합법적 신앙인 로마 카톨릭에 모두 복귀하고 남아 있어야 한다는 내용을 결의했습니다. 그러자 독일의 여러 제후와 도시 대표가 연합하여, 어떻게 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에서 결정한 사항이 바뀔 수 있느냐고 항의하는 문서를 황제에게 제출했습니다. 바로 이때부터 개신교도에게는 ‘프로테스탄트(항의하는 자들)’라는 이름이 따라붙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항의로 인해, 1530년에 열린 제국의회가 바로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입니다.
카를 5세는 제국의회를 열기에 앞서, 개신교도에게 자기 신앙을 논증하라고 했습니다. 이에 멜란히톤은 루터와 그의 친구들이 평소에 정리해두었던 교리와 신앙조항을 종합하여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해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제출된 개신교 신앙고백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슈트라스부르크를 중심으로 한 독일 남서부 도시 4개가 함께 제출한 「4개 도시 신앙고백서 (Confession Tetrapolitan)」,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작성한 「믿음의 이유 (Fidei ratio)」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크고 대표성이 있는 신앙고백서가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인 관계로, 사람들은 편의상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부릅니다.
1530년 6월 25일, 작센 선제후의 궁내관이 황제와 제후 앞에서 독일어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낭독했습니다. 그런데 그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주인공인 멜란히톤은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때, 그는 자기 방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방에서 혼자 울고 있었까요? 정확한 이유는 멜란히톤 본인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훗날 그가 보여준 행보와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아마도 그는 양쪽이 서로 싸우고 화해하지 않는 것에 지친 듯합니다.
멜란히톤을 연구한 많은 사람은 멜란히톤에게서 에라스뮈스5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어떤 책에서는 그를 ‘에라스뮈스의 색채가 짙었던 사람’이라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즉,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반대하고 싶지도, 로마 카톨릭 교회를 무너뜨리기도 원치 않았던 것입니다.
멜란히톤은 개신교 입장에 서서 로마 카톨릭 교도를 달래어 서로 화해하게 하려고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러한 노력이 허사가 될 줄 예견했던 것이었을까요?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일이 이 조심스럽고 내성적인 신학자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었다는 것입니다.
보름스 회의에서 파문을 당한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 참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 200Km 떨어진 코부르크 성에 머물며 멜란히톤과 편지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그는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받아보고 흡족해했으며, 자신은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하면서 멜란히톤을 높이 치켜세웠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에 나타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21항까지는 삼위일체 하나님, 죄, 의, 교회, 성례, 회개, 믿음 등 비교적 논쟁거리가 적은 일반적인 교리를 다룹니다. 그리고 22~28항까지는 평신도에게 잔을 주는 일, 사제의 결혼, 미사의 세속화 문제, 수도사 서약, 교권 문제 등과 같은 다소 논쟁적인 주제와 관련하여 루터교의 교리적 입장을 서술합니다.
이 신앙고백서의 가장 중요한 항목으로는 제4항을 꼽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는 오랫동안 잊힌 기독교 진리, 즉 루터가 다시 발견한 ‘칭의’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4항 의인에 관하여 –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인간의 업적과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고,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논쟁적인 부분을 다루는 항목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미사와 관련한 내용입니다. 멜란히톤이 로마 카톨릭의 전통적인 교리를 조심스럽게 대하며 화해를 도모하는 모습이 이 대목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24항 미사에 관하여 – 우리들의 교회는 미사를 폐기했다고 그릇되게 비난을 받고 있다. 사실은 미사가 우리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으며 최고의 존경을 받으면서 거행되고 있다. 대부분의 관습적인 의식들도 보존되고 있으며, 다만 라틴어로 된 노래 부분들만이 여기저기 독일어로 옮겨졌을 뿐이다. 그것은 민중을 가르치기 위하여 첨부한 것이다. 미사가 부끄러울 정도로 속화했고 또한 돈벌이를 위하여 이용되어 왔다는 것이 오랫동안 선량한 사람들의 공공연하고 매우 슬픈 불평이 되어 왔음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이런 악폐(惡弊)가 모든 교회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고, 어떠한 사람들에 의하여 미사가 단순히 수입과 급료만을 위하여 거행되며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교회 법규에 어긋나게 미사를 행하는지가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만찬을 적합하지 않게 취급하는 사람들을 엄히 경고하여 말하기를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고전 11: 27)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제들이 이러한 죄에 대하여 경고했을 때 보통미사(사제에 의하여 개인적으로 매일 행해지는 미사)는 어느 것이나 돈벌이를 위해서밖에 거행되지 않음으로 우리 가운데서는 폐기되고 말았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서에는, 개혁이 완전히 이루어진 후대의 시각에서 보면 다소 아쉬운 부분이 있습니다. 혹자는 이 고백서에 루터가 아우크스부르크 논쟁을 통해 강력하게 옹호한 성경의 권위 문제와 모든 성도가 다른 제사장(사제)의 중재를 거치지 않고 오직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께 직접 나아갈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 사상과 관련한 내용은 일언반구도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곤 합니다.
한편,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는 아무런 성과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카를 5세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로마 카톨릭 신학자에게 보내어, 그 내용을 반박하는 문서를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멜란히톤은 그 반박문을 다시 반박하는 문서를 작성하여 황제에게 보내지만, 그것도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멜란히톤은 1531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변증하는 변증서를 집필했는데, 그 분량이 처음 쓴 신앙고백서보다 7배나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멜란히톤의 바람과는 다르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결국 신·구교 사이의 격렬한 싸움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싸움은 각자 믿는 바가 무엇이며, 서로가 어디에 서 있는지 더욱 분명하게 해주었습니다.
울리히 루터 교회와 울리히-아프라 성당을 뒤로하고 다시 아우크스부르크 기차역으로 향했습니다. 비록 아우크스부르크에서 머물렀던 시간은 짧았지만, 의미 있는 두 장소를 방문할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루터가 세 번째 큰 논쟁을 벌인 장소인 라이프치히로 가보겠습니다.
각주
1 어떤 책에서는 루터와 카예탄이 이 교회에서 만났다고 하지만, 다른 책에서는 이곳에 루터만 머물렀을 뿐이고 루터와 카예탄이 만난 장소는 야콥 푸거(Jakob Fugger) 가문 저택의 정원이었다고 말합니다.
2 성령 안에서 합법적으로 열린 공의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권세 위임을 받았으므로, 교황도 공의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3 http://www.st-anna-augsburg.de/lutherstiege
4 1518년 10월 7일부터 20일까지 마르틴 루터가 이곳, 성 안나 교회에서 교황의 대리자인 카예탄과 만나 논쟁을 벌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5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유명한 인문주의자이자 로마 카톨릭 사제. 로마 카톨릭의 부패와 변질을 비판하면서도 종교개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 끝까지 남아 있었다. 그래서 이도 저도 아닌 중립주의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6. 김용주, 『루터 혼돈의 숲에서 길을 찾다』, 익투스, 2012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8.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5)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아우크스부르크)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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