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전쟁 진단2」 그리스도인은 전쟁의 날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양승훈
▲ 존 마틴이 그린 <태양을 향해 그 자리에 계속 멈춰 있으라고 명령하는 여호수아(Joshua commanding the sun to stand still)>
「여호와시여, 일어나소서.
사람이 승리하지 못하게 하시고,
민족들이 주님 앞에서 심판받게 하소서.
여호와시여, 그들로 두려워하게 하시며,
민족들도 자신들은 사람일 뿐임을 알게 하소서.」
(시 9:19, 20)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이 없었던 시대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던 냉전 시대를 겪었지만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세계 곳곳에는 여전히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게다가 급변하는 국제 정세는 큰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은 상황을 연출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핵무기와 미사일을 앞세워 대한민국의 안보와 평화를 위협하는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입니다. 그들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뒤집어엎고 적화 통일을 달성하기 위해 항상 틈을 엿보며 수많은 공작과 도발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전쟁은 먼 나라 이야기에 불과한 사건이 아닙니다. 우리 생명과 신앙의 자유 문제와 직결되는 아주 중대하고 실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전쟁이 다가올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해야 할까요,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할까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질문 앞에서 머뭇거리며 혼란스러워합니다. 그러다가 대략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 노선을 취하게 됩니다.
그 세 가지 가운데 첫 번째 노선은 ‘행동주의’입니다. 이 노선은 그리스도인이 어떤 전쟁이든지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정부를 세우시고 권세를 위임하셨으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정부의 명령에 따라 전쟁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롬 13:1, 삼상 8:22).
실제로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왕과 지도자의 지휘 아래 약탈자에 맞서 싸우는 일을 허락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삼하 5:12, 삼상 23:1). 또한, 정부에 나라의 안위와 질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악인과 범법자를 처벌하는 칼의 권세를 허용해주셨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롬 13:4).
그래서 행동주의를 따르는 이들은 정부가 국가의 질서와 안전을 위협하고 사회적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을 물리력을 동원해 징벌하고 와해시키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정부의 전쟁 활동을 부정하고 거역하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또한, 정부의 권세와 힘이 무력화되면 무법천지 같은 상황이 찾아오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노선을 따를 경우, ‘그리스도인이 자기방어와 안보 목적이 아닌 악한 목적으로 일으키는 전쟁에도 참여해야만 한다.’라는 다소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두 번째 노선은 ‘평화주의’입니다. 이 노선은 ‘행동주의’와는 정반대로 주장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하는 일은 언제나 옳지 않은 일이라고 말합니다. 평화주의가 근거로 삼는 핵심 성경 구절은 “살인하지 말라(출 20:13).”라는 십계명의 여섯 번째 계명입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큰 죄라고 주장합니다. 살인은 모두 미워하는 마음이라는 죄악에서 나오므로,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원수를 미워하여 복수하고 살인하는 일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원리에 반대된다고 합니다(마 5:44; 신 32:35; 마 5:39~41).
하나님께서는 죄로 부패한 세상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전쟁을 적극적으로 승인하지 않으시며, 단지 허용하신 것이어서 전쟁 자체가 선이 될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전쟁은 살인 외에도 수많은 죄악을 짓게 하며, 또 다른 전쟁을 가져올 뿐 궁극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하므로 전쟁에 참여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자른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근거 구절로 제시합니다. “네 검을 그 집에 도로 꽂아라. 검을 쓰는 자들은 모두 검으로 망할 것이다(마 26:52).” 또한, “아무에게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에 힘써라. 할 수만 있으면,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롭게 지내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겨라. 기록되기를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겠다.’라고 주께서 말씀하신다(롬 12:17~19).”라는 구절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 노선도 앞선 노선과 같이, 다른 나라의 침략을 당할 때 아무런 대항도 하지 말아야 하며 악한 세력을 와해시키는 전쟁까지도 악하다고 해야만 하는 결점을 갖고 있습니다.
세 번째 노선은 ‘선별주의’, 즉 ‘정당한 전쟁론’입니다. 이 노선은 그리스도인이 정당한 전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별주의에서는 ‘전쟁의 목적’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전쟁의 목적이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는 약탈자와 침략자들에게 맞서 싸워 자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라면,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세상의 평화와 안전을 해치는 악한 세력을 징벌하는 전쟁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선별주의는 그 근거 구절로 다윗이 블레셋에게 약탈당한 그일라 주민을 구원하기 위한 벌인 전쟁(삼상 23:1~5)이나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벌인 전쟁(창 14:11~16) 등을 제시합니다. 또한, “도둑이 뚫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를 쳐 죽이면 피 흘린 죄가 없으나(출 22:2)”라는 말씀과 “통치자는 너의 유익을 위하여 일하는 하나님의 일꾼이다 · · · 그가 공연히 검을 가진 것이 아니니,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자이다(롬 13:4).”라는 말씀도 제시합니다.
즉, 선별주의는 전쟁을 무조건 허용하지도, 전쟁을 무조건 악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비록, 실제 전쟁터에서는 선악이 뒤섞여있고 나라의 이해관계와 얽혀 수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는다고 해도, 이 세상에는 악한 목적으로 질서와 평화를 파괴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악한 세력을 전쟁이라는 도구를 통해 파괴하셔서 그분의 공의를 세상에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선별주의자들은 우선 사안의 핵심을 잘 헤아려본 뒤, 전쟁이 큰 틀에서 하나님의 공의에 부합한다면 참여하게 됩니다. 이 경우, 전쟁터에서 사람을 죽이는 일은 통치자에게 악을 징벌하여 사회 질서를 선하게 유지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명령을 따르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나라가 ‘하나님의 법’에 반대되는 전쟁을 일으키려고 할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법에 반대된다면 통치자의 명령이라고 해도 복종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단 3:6; 16~18). 만일 나라가 광기 어린 악한 이념(마르크시즘, 나치즘 등)이나 탐욕에 경도되어 악한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리스도인은 나라의 명령보다도 하나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행 4:19). 다시 말해, 나라가 하나님의 법이 허용하는 ‘제한 범위’를 벗어나 권세를 멋대로 사용하는 일은 되려 하나님의 법도와 선의를 파괴하게 되므로,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그 일에 항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노선 가운데 성경의 가르침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한 노선은 바로 ‘선별주의’입니다. ‘행동주의’와 ‘평화주의’도 부분적으로는 올바른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그 주장을 다시 한 번 전체적으로 검토해보면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타납니다.
두 노선은 한쪽 측면만 지나치게 강조하여 사람을 잘못된 결론으로 인도하는 결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선별주의는 전쟁이 기본적으로 참혹한 재앙이자 비극이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분의 공의를 나타내시는 방편 가운데 하나라는 성경의 가르침을 균형 있게 잘 드러냅니다.
이처럼, 선별주의는 정당한 전쟁을 인정하기 때문에 인권과 사랑을 앞세워 무조건 전쟁에 반대하는 일을 옳지 않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 인권을 보호하고 세상에 사랑을 베푸는 일과 모순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평화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살인이 일어나는 것을 피하려고 무조건 전쟁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악한 세력이 그만큼 빠르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악한 일을 행하며 세계 평화와 안전을 위협해도 그들을 멸할 방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온 세상이 공멸(共滅)하는 최악의 상황이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평화주의에서 말하는 공의를 무시하는 인권과 사랑은 절대로 성경이 말하는 인권과 사랑이 아닙니다.
반대로 나라가 ‘지상 낙원’ 건설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일도 옳지 않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반대되는 일을 추진하면서 이 세상에 공의를 세우려고 한다는 말은 완벽한 모순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통치자가 아무리 ‘평등’과 같은 고상한 가치를 앞세운다고 해도 그런 전쟁에 참여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그런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수많은 사람을 하나님의 진노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큰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통치자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서지 않는 정당한 명령만 따라야 합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악한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북한이 일으킨 불의한 전쟁에 모두가 맞서 싸운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와 우방국이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함께 일어나 피를 흘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 그리스도인이 살인하면 안 된다는 이유로 참전하기를 거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오늘날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이라는 터전 안에서 자유와 번영을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모두 총살당하거나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서, 이 땅에서 교회가 자취를 감춰버리는 비극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들에게서 선량한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공의를 이행하는 일은 결코 하나님의 사랑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것이 그에게 죄가 된다(약 4:17).”라고 말씀하며, 또한 “죽음으로 끌려가는 자들을 건져 주며 피살될 자들을 구원하는 일에 주저하지 마라(잠 24:11).”라고 가르칩니다.
영혼을 약탈하는 이단과 거짓말을 늘어놓는 미혹자에게 대항하여 진리를 수호하는 일이 합당한 것처럼 나라의 안위를 파괴하고 사회 혼란을 조장하는 악한 세력과 맞서 싸워 나라를 지키는 일도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 일은 하나님의 사랑과 조금도 충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뻔히 보면서도 침묵하며 저항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악한 일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오류를 잘 분별하면서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계속 평화와 생명 존중을 부르짖지만, 그 소망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이 세상에 참된 평화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세상은 평화에 대한 기대와는 정반대로 흘러갈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사람들이 “무정하며, 화해하지 않으며, 비방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으리라(딤후 3:3).”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마지막 날에는 “민족이 민족을 대적하여 일어나고,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날 것이며, 곳곳에 기근들과 지진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해산 고통의 시작이다(마 24:7~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은 끝으로 가면 갈수록 더 빈번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날이 다가온다고 해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변에는 온통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으로 가득하더라도, 우리는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일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주권적으로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섭리를 더욱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고 계속 존재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딤전 2:4).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전쟁을 비롯한 수많은 재앙이 일어나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을 바라보며 그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우리가 저지른 악한 일을 회개해야 합니다.
비록, 사방에 사망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을 칠지라도,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십자가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세상에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고전 15:57).”라고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과 몸을 능히 지옥에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 · ·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많은 참새들보다 더 귀중하다(마 10:28, 3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세상이 크게 요동할수록 영원한 평강을 누리게 될 하나님 나라를 더욱 소망하십시오. 그 나라가 임하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다시는 나라가 나라를 향하여 칼을 들지 않을 것이고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않게 될 것”입니다(사 2:4). 전쟁으로 눈물짓고 아파하는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이나 우는 것이나 아픈 것이 없는 그 날”을 바라보며, 이 세상과 나라를 위해 더욱 기도합시다(계 21:4).
또한, 오늘도 핵과 미사일, 생화학무기를 앞세워 나라의 안위를 위협하며, 교활한 선전선동술로 공산주의 사상 전파 및 체제 전복을 기도하는 북한의 악한 정권이 속히 무너지기를 기도합시다. 그리하여 저 극악무도한 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징벌을 받고, 교회가 평안한 가운데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여호와시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여, 복수하시는 하나님이시여, 빛을 비추소서. 땅의 재판장이여, 일어나셔서 교만한 자에게 합당한 형벌을 주소서. 여호와시여, 악인들이 언제까지, 악인들이 언제까지 승전가를 불러야 하겠습니까?(시 94:1~3)”라고 기도한 시편 저자처럼 우리도 하나님께 기도합시다.
불의한 전쟁이 일어나 우리 생명을 위협하고 악한 세력이 겁 없이 하나님의 규례를 거스르는 일을 보게 되어 우리 눈에서 시냇물 같은 눈물이 흐르게 된다고 하더라도 낙심하지 마십시오(시 119:136). 우리에게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마귀와 악한 사람들이 잠시 날뛸 수는 있겠지만, 그들은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그들은 영원한 불 못에 떨어질 것이지만, 교회는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것입니다.
「이것들을 증언하신 분께서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내가 속히 오겠다.”라고 하시니, 아멘, 주 예수님이시여, 오시옵소서(계 22:20).」
참고도서
– 노르만 L. 가이슬러, 『기독교 윤리학』, 위거찬 옮김, 2011, 기독교문서선교회(CLC)
「전쟁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전쟁 진단2」 그리스도인은 전쟁의 날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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