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기도 진단2」 기도하기가 쉽지 않은 이들에게
신요한
▲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그린 <선지자 엘리야가 천사에게 빵과 물을 받다(The Prophet Elijah Receives Bread and Water from an Angel)>
그리스도인의 영혼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숨을 쉽니다. 기도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숨 쉬지 않는 시체와 같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실로 위험한 상황에 놓여있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막상 기도를 해보면, 생각보다 기도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 육체가 숨 쉬는 것처럼 쉽고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조차 기도를 중노동이라고 했을 정도로 기도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왜 그렇게 기도가 힘들고 어려운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기도하는 자는 마음의 심약함과 스스로 느끼는 무가치함에서 비롯되는 의심과 불평불만에 맞서 장대한 전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말씀을 선포하거나 교회의 다른 의무를 행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말씀을 선포할 때 우리는 사실 능동적이기보다 수동적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가 행하신 일을 가르친다. 그래서 기도가 더욱 드물다.」1
그런데도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라고 명령합니다. 이는 참으로 어렵고 부담스러운 명령입니다. ‘아니, 루터처럼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도 힘겨워했는데, 우리가 어떻게 쉬지 않고 기도를 할까?’ 하는 생각도 들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인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이 명령에 순종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히, 오랫동안 쉬지 않고 집중해서 기도하는 일은 정말로 어렵습니다. 얼마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는 생각이 나기도 하며,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지냈던 일들이 마구 생각나기도 합니다. 한번은 잃어버렸던 물건의 위치가 갑자기 생각나서 그것을 찾으려고 기도를 중단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마음속에 있는 뜻을 표현할 만한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기도하다 말고 인터넷을 뒤져본 일도 있었습니다. 그 밖에도 텔레비전 소리,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 개 짖는 소리, 하필 그때 걸려온 친구의 전화, 추위, 더위, 배고픔, 피곤함으로 인해 중도 포기한 적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할 일은 왜 그렇게 많은지,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마련하기는커녕 성경 읽을 시간조차 부족할 때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기도회나 부흥회에 가보면, 이런 저와는 다르게 거의 4~5시간씩 쉬지 않고 기도하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어떤 분은 찬양과 기도를 반복하면서 밤을 지새우기도 합니다. 그다음 날이 되면, 그분들의 목은 아예 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쉬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이 참 대단해 보였습니다. 이런 분들이라면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도 충분히 따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왜 나는 저분들과 같이 기도를 오랫동안 쉬지 않고 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꼭 찾아왔습니다.
그분들처럼 기도하지 못하는 제게는, 기도회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너무 길었습니다. 더구나 못하는 기도라도 하려고 하면 왜 그렇게 옆 사람이 기도하는 내용이 잘 들려오는지, 어느새 그 기도를 계속 듣고만 있게 되곤 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옆 사람의 기도를 듣고 나면, 마치 제가 그렇게 기도한 것인 양 마음이 뿌듯해지기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배경으로 깔아놓는 반주 소리를 따라 마음속으로 계속 찬양을 드리다가 돌아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더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목이 다 쉬어 소리가 나지 않는데도 밤을 새워 열심히 기도하는 분들에게 배워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분들의 모습을 살펴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한 차이점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는 그분들에 비해 간절함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제게는 만사를 좀 쉽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창시절에 시험을 크게 망쳐도 별로 충격받지 않았습니다. ‘열심히 공부했다면 잘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아서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며,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습니다. 그렇게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만 하던 저였으니, 무언가를 위해 간절하게 기도하는 일만큼 생소하고 어려운 일도 없었습니다.
어쨌거나 저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간절함에 있다고 생각하며 “주님, 제게 간절함을 주시옵소서. 주님, 간절함을 허락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부러 슬픈 생각도 해보고, 남들처럼 큰소리로 “주여, 주여.” 하고 외치기도 했지만, 좀처럼 간절함은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저는 그분들이 기도의 열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의 힘 있고 역동적인 모습을 본받기 위해 다급한 어투로 기도하기도 하고,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 강조하기도 하면서 기도에 힘을 불어넣으려고 애썼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 불어넣는 열정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힘써 기도했다고 생각하고 시계를 확인해보면, 고작 10분 정도 흘러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다 별생각 없이 간 군대에서, 참으로 간절하고 열정적인 기도가 무엇인지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군 생활을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2년 정도 자고 오는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지만, 막상 입대해서 생활해보니 그게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힘든 날이 이어지자, 제 마음속에서는 간절함과 열심이 자연스럽게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도는 간절함 가운데 불타올랐고, 어느 순간 제가 전에 부러워했던 분들처럼 제법 기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간절함과 열정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차츰 군 생활에 적응하면서 나름의 자유를 누리게 되자 마음에는 여유가 찾아왔고, 기도생활도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저는 비로소 간절함과 열정이 기도의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제가 추구했던 기도의 간절함과 열정은 몸과 마음의 상태에 따라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부수적인 요소에 불과했습니다.
그렇게 문제의 핵심을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닫자, 자연스럽게 그동안 해온 기도 생활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잘 생각해보니, 제 기도 생활은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원하는 바를 이루어 주신다’로 귀결되고 있었습니다. ‘간절함과 열정’은 제 소원을 이루어지게 하는 열쇠와 같았습니다.
또한, 잘 생각해보니 저는 제대로 된 기도 응답을 받아본 적도 없었고, 심지어 응답을 별로 바라지도 않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할지 대답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를 기다리곤 했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실망하는 일이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대한 실망이 쌓이면서 기도 응답에 대한 기대도 점점 사라졌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기도 응답을 받아본 일이 없어서, 간절함이나 열정 같은 요소에 더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잘못된 부분을 깨닫자, 비로소 성경이 제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기도에 대한 제 생각이 근본적으로 틀렸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었습니다. 성경은 기도의 본질을 우리의 간절함이나 문제 해결, 소원 성취 등에 두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과 생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그 뜻과 생각이 어떠한가를 아는 지식을 따라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 R. C. 스프로울은 주기도문을 해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 가르침, 성품 등 전인격이 그의 비범한 기도생활과 관련 있음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제자들은 기도하는 법에 대해 알고자 했으나, 예수님은 먼저 잘못된 기도에 대해 가르치셨다. 예수님이 금하신 기도의 첫 번째 유형은 위선적인 기도이다… 위선은 교회생활과 죽어가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일에 파괴적 결과를 초래한다. 따라서 세상 앞에서 우리의 경건을 과시하지 말라고 주님이 경고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비난하신 두 번째 기도는 이방인처럼 드리는 기도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마 6:7)”. 여기서 예수님이 하시려는 말씀은 기도를 일종의 주문처럼 여기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방인이 드리는 기도의 형태로 그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정해진 구절을 계속해서 암송한다. 이런 상황에서 기도는 자기가 처한 환경이나 상황이 바뀌기 바라는 소망을 담은 주문처럼 취급된다…
제자들에게 위선적인 기도와 이방인처럼 드리는 기도에 대해 경고하신 후 예수님은 이어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라고 말씀하셨다… 기도할 때 우리는 먼저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이 누구이며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는 우리가 누구인지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설명하기 전에 “이것을 기도해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 6:8)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의도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원리를 가르쳐 제자들이 따라할 수 있도록 기도의 본보기를 알려주시는 것이었다.」2
이처럼 성경은 어떻게 하나님께 기도해야 하는지,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뜻과 소원을 아뢰기에 앞서,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했습니다.
또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도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잘 깨달아 알고, 그대로 행동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며 기록된 그대로 행동했다면, 비록 우리가 원하는 대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신 것이며, 우리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무작정 기도만 하려고 했으니, 기도가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기도하려고 하면 할수록 외적인 요소에만 집중하게 되고, 본질과는 계속 멀어질 뿐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부러워했던 이들의 삶도 별로 특별하지 않았었습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울부짖고 찬양하며, 누군가는 ‘방언’이라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열렬하게 기도했지만, 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되려고 애쓰는 이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부분 힘들면 투덜대고, 뒤에서 험담하며 음해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정말 세상 사람과 똑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면서 살아갔습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기도량만 있었을 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라는 말씀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는 지혜는 없었습니다.
저는 그 사실을 깨닫고, 지금껏 걸어왔던 길과는 다른 길로 나아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는 것을 좇고, 열심 있는 모습만 흉내 내며 기도에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보이길 원했던 제 자신과 결별하기로 했습니다. 기도하기에 앞서 성경을 펼쳐 놓고 다윗, 요셉, 바울과 같은 인물의 생애와 가르침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우려고 힘을 쏟았습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예상치 못했던 난관이 나타났습니다. 성경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이들의 삶과 가르침을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이 너무나도 다양했던 것입니다. 다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저는 성경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라는 사실을 믿었기에 이들 가운데는 성경이 말한 본래 의미를 말한 해석도 분명히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공부해간 끝에, 저는 그 많은 관점과 해석들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평가하는 교리라는 잣대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리를 공부할수록 점점 더 성경의 본래 의미와 가르침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배워가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를 들으신다는 말의 참뜻, 곧 타락한 우리가 전능하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무언가를 아뢸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자 특권인지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교리를 통해 기도의 본래 의미를 알게 되자, 기도가 잘 안 될 때 ‘나는 믿음이 없는 것인가, 왜 저들처럼 열정적으로 기도하지 못하지?’하며 낙심하는 일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여전히 기도를 잘하지 못하는 제 자신 때문에 마음이 답답하고 어려워질 때면, 성령님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 연약함을 도우신다는 사실에 큰 위로를 받기 때문입니다(롬 8:26). 또한, 주님께서도 그런 부족함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이 어려운 제 마음에 큰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입니다(롬 8:34). 그래서 저는 낙심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다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기도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기도 했습니다.
「기도는 인간과 하나님이 교제로,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는 통로이자,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그분의 약속에 대해 간구함으로써… 자신이 믿는 것이 헛된 것이 아님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바람과 기쁨, 탄식, 즉 우리 마음의 모든 생각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3
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말씀 안에서 구하는 기도를 통해 체험합니다. 그 체험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며, 그분의 뜻대로 구하는 기도에 응답하신다는 사실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기도의 응답이 더디거나 오지 않더라도 불평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욱 주님의 뜻을 찾고, 혹시 욕심으로 잘못 구하지는 않았는지 살펴보며 더욱 거룩해지려고 하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이 자라가는 가운데, 주님께서 거룩한 소망에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확신은 점점 더 굳건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분의 뜻을 찾고 구하며, 주님과 교제하는 일을 즐거워하게 됩니다. 항상 매사에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하려는 거룩한 소망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한편, 그렇게 기도하며 주님과 동행하지 않고, 어리석은 우리 자신을 믿을 때 어떤 불행한 일이 닥칠지를 알게 되어 두려워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칼빈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어디를 가든지 기뻐해야 할 일들이 사방에 가득히 있다고 할지라도 기도해야 할 필요성이 없는 순간이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과 함께해야만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많은 죄들에 대해 알고 있는데 과연 언제까지 우리의 죄과의 형벌에 대해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는가? 우리가 급히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만큼 시험이 우리에게 휴전이라도 제의할 때가 있다는 것인가?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와 그의 영광에 대한 열심이 중단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우리를 사로잡음으로써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동일한 기회가 언제나 우리에게 머물러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하라는 명령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결코 헛된 일이 아니다.」4
이처럼 제 기도생활에 필요했던 것은 간절함도 열정도 아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습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며, 그들을 위해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소식을 들은 날부터 너희를 위해 기도하고 간구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우리는 너희가 모든 영적인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고, 너희가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일에 그분을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으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고(골 1:9, 1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시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엡 1:17)」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기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레이엄 골즈워디는 기도에 지식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기도 생활에 나타나는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 염려하기 전에, 기도의 신학, 기독론이 기도에 의미하는 바, 성령으로 기도한다는 것의 의미 등을 생각하는 것이 훨씬 낫다. 건전한 실천에는 건전한 이론적 기초, 즉 성경에 계시된 신학적 원리들이 필요하다.」5
기도하기가 너무 어렵고, 그저 막막하기만 하신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무작정 기도하려고 하지 마시고, 저와 같이 말씀을 묵상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분을 찾는 즐거움 가운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각주
1 조엘 비키 외 1명, 『고전에서 배우는 기도 특강(Taking Hold of God)』, 이혜림 옮김, 예수전도단, 2014, p. 23.
2 R. C. 스프로울, 『어떻게 기도할까?(The Prayer of the Lord)』, 이은이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3, pp. 14~31.
3 조엘 비키 외 1명, 앞의 책, p. 48.
4 존 칼빈, 『기독교 강요 3(하)』,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7, pp. 183, 184.
5 그레엄 골즈워디, 『기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Prayer and the Knowledge of God)』, 정옥배 옮김, IVP, p.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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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진단2」 기도하기가 쉽지 않은 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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