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기도 진단3」 잘못된 기도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김재호
▲ 여신에게 기도하는 방글라데시 사람
출처: (CC-BY) Hasan Iqbal Wamy (flickr)
예배와 기도에는 본성적이고 영적인 요소가 상당히 강하게 작용하는 편이다. 진리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이방 종교인들이 우상에게 열심히 예배하고 기도하는 모습만 봐도 그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예배와 기도를 어떻게 드리느냐의 문제는 참으로 중요하다. 주의해서 올바르게 드린다면, 하나님의 영광스러우심과 그 능력을 가장 분명하고 생생하게 체험하는 통로가 되지만, 자기 멋대로 드린다면 죄와 타락한 본성에서 말미암는 왜곡된 체험을 하는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진리를 따라 깨우침을 받은 마음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와 기도는 한 사람의 심령을 얼마든지 위험천만한 지경으로 몰아갈 수 있다. 성도는 하나님께 예배와 기도를 드리기 전에 자기를 진리에 비추어 돌아보고 점검하는 일을 꼭 해야 한다. 제단 위의 불이 아닌 다른 불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나답과 아비후의 결말이 어떠했는지를 기억해야 한다(레 10:1, 2).
1. 내적 느낌에 집중하는 기도
우리 시대는 내적 느낌에 몰입하는 기도를 좋게 여긴다. 특히, 자기를 비우고 ‘어떤 영’에 내맡긴 채, ‘영적인 느낌’으로만 기도하거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로 기도하는 관상(향심), 호흡, 촛불, 향불, 미궁, 방언 기도 등을 좋게 여기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이방 종교에서 권장하는 것이며, 성경은 이런 ‘기도’를 아주 분명하게 금지한다(마 6:7; 고전 14:7~9). 이런 이방 종교의 ‘기도’가 교회 안에 버젓이 자리잡게 된 것은 로마 교회의 역할이 컸다. 정치 권력을 탐하던 로마 교회가 문화에 깊이 뿌리내린 이방 종교 관습을 걸러내기보다는, 기독교적으로 탈바꿈하여 계속 통용되도록 하는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1
그러므로 이런 방식으로 기도하는 일은 스스로 신과 같이 되려는 이방 종교의 수련법을 따라 하면서 더러운 악령과 교감을 나누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런 잘못된 기도는 결국 한 영혼을 진리의 말씀에서 떠나게 하고, 신앙과 심령을 무속화(巫俗化) 하는 영적 재앙을 불러온다.
이 영적 재앙에 휩쓸리면, 성경이 증거하는 원리를 따라 상황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해하는 일이 점점 불필요해진다. 그냥 ‘내적인 느낌’이 오는 대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일이 잦아진다. 거기서 더 나아가면, 성경 자체에 근거하여 분석하고 사고하는 일을 ‘형식에 얽매여 죽은 문자를 붙드는 일’처럼 받아들이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이 말하는 내용 자체에 귀 기울이기보다는 자기가 받은 내적인 느낌에 집착하는 좋지 않은 습관이 생기게 된다. 사람을 만날 때도, 성경을 읽을 때도, 기도를 할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안에서 느껴지는 ‘어떤 느낌’이다.
이런 이들의 가장 큰 결점은 어떤 대상을 충분히 관찰하고 이해하여 그 실체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도 전에, 속에서 발동하는 그 어떤 감에 의해 모든 판단과 결정이 마무리지어져 있는 상황이 종종 연출된다는 것이다. 그 내적인 감(感)이 한번 발동하면, 실로 엄청난 일도 일단 저지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다.
악령과 거짓 선지자는 바로 그 점을 활용하여 사람을 파멸로 인도한다. 광명의 천사 같은 ‘느낌’을 주는 형상, 화술, 묘한 분위기 등을 통해 마음을 사로잡은 뒤에, 성경과 정반대인 가르침을 주입하는 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이런 마귀의 속임수에 넘어간 이들은 하나님을 위하는 열심으로 그분을 거스르고 반역하는 길로 나아가 영원히 파멸하게 된다. 악령과 거짓 선지자들은 그런 일을 보는 재미와 낙(樂)으로 살아간다. 그 즐거움을 힘입어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를 비웃고 경멸하면서 마음속에 남은 일말의 꺼림칙함과 두려움까지 깨끗이 지워낸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기도’가 꿀을 발라놓은 마귀의 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기도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을 충분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온 마음을 쏟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먼저 온 마음을 쏟아낸 뒤 자꾸 뭔가를 느끼려는 기도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가운데 그분의 뜻을 찾고 구했다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꼭 응답하시리라는 ‘내적 확신’은 참으로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 확신은 이미 구한 하나님의 뜻을 더욱 간절하게 구하고 찾는 열심을 불러일으키며, 우리가 그토록 찾고 구했던 것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다 분명하게 이해하도록 도와준다(요 12:27~30).
즉, 올바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참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더욱 하나님의 약속과 진리, 그 자체에 집중하게 된다. 왜냐하면 기도를 통해 내적으로 경험하는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이 ‘어떠하다’는 것을 가리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점점 어떤 일이 하나님의 진리와 ‘어떤’ 관계인지 분명하게 이해하고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판단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이들의 사고와 행동은 모두에게 열려 있고 유연하여 쉽게 경직되거나 극단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어떤 일이 하나님의 진리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되면, 그다음에는 어떤 어려움이나 반대가 밀려와도 그에 대한 생각과 행동을 조금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어려움이 몰려올수록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모든 사정을 더욱 간절히 아뢰며,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약속해주신 일이 우리 가운데 속히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간구하게 된다. 마치, 히스기야가 산헤립의 편지를 하나님 앞에 펴놓고 그분의 구원하심을 간절히 구했던 것처럼 말이다(왕하 19:14~19).
성경이 가르치는 기도는 바로 이런 것이지, 모종의 내적 느낌에 몰입하고 마음을 비워 ‘영을 맑게’ 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실질적으로 무력화하는 이런 ‘기도’를 조금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역겨워하신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진노의 불길은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을 삼키기 위해 창세 전부터 예비되어 있다. 그러니 어서 돌이켜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사망의 늪에 빠져 멸망하게 되고 말 것이다.
2. 기도 만능주의
어떤 사람은 마땅히 해야 하는 일반적인 일을 무시한 채 기도에만 열을 올리기도 한다. 이런 이들은 종종 병이 들어도 병원에 가기를 거부하고 무조건 기도로만 나으려고 하며 고집을 부린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에 편만하게 베푸시는 일반 은혜와 섭리를 거부하고, 특별하게 신자를 돌보시는 비상한 은혜와 섭리만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기는 아주 비정상적인 신앙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일을 해서 필요한 식물을 얻으라고 명령하셨다는 사실을 동시에 가르친다(마 6:11; 창 3:19).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섭리를 믿는 믿음으로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한 뒤, 마땅히 일터로 나아가 열심히 일해야 한다. 그렇게 땀 흘려 얻은 결실을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주신 것으로 알고, 감사하며 만족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행 14:17).
물론, 하나님께서는 때로 신자를 골방에만 머물게 하고 까마귀를 통해 먹이고 입히는 것과 같은 특별한 일을 행하기도 하신다(왕상 17:3~7). 그때, 성도들은 ‘이건 정말 기도 만능주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오로지 기도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상황은 아주 특별한 것이며, 그렇게 길게 유지되지도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신자가 여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그 생애 대부분을 자기 손으로 일해서 먹고 살아가게 섭리하신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황 이해와 해결책을 무조건 무시하고,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리는 기도 만능주의는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 “나는 이것이 아니면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않겠어요.”라면서 생떼를 부리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철없는 생떼를 외면하신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일반적인 은혜와 섭리를 존중하고 순응하는 법을 배워가게 하신다.
또한, 이런 기도 만능주의에 심취한 이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자기 죄에 대한 실질적인 교정책을 마련해 실천하고, 내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적절한 사과와 보상을 해야 한다는 중요한 사실을 가볍게 여기게 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려고 나올 때, 피해를 준 사람이 생각나면 먼저 화해하고 오라고 가르친다(마 5:23, 24). 또한, 하나님 말씀에는 순종하지 않으면서 기도에만 열을 올리는 행태를 역겹고 가증하다고 선언한다(잠 28:9).
실제로, 간음한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내가 주께만 죄를 지었다(시 51:4).”라고 고백하며 회개한 뒤, 밧세바에게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셨으니 너도 그렇게 알고 돌아가서 평안히 잘 살아가거라.”라고 하지 않았다. 자기 죄로 인해 홀로 남게 된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끝까지 책임져주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죄를 지어 어떤 피해를 주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한 뒤에 꼭 피해자에게 찾아가 사과하고 실질적인 피해 보상을 해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은 외면한 채 회개 기도만 하는 일을 실로 가증하게 여기신다.
물론, 상대방이 기억조차 못 하는 너무 사소한 일까지 일일이 사과하며 보상하려고 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러나 정도가 좀 크고 반복적인 경우에는 그 사실을 깨닫는 대로 상대방에게 가서 진실하게 사과하고 보상해주는 일을 꼭 해야 한다.
그와 함께, 자기에게 맞는 규범을 마련해 실천함으로써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게 하는 일도 중요하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치, 조나단 에드워즈가 결심문을 작성하고 진지하게 그 일을 실천했던 것과 같은 일도 해야 한다. 부흥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던 에드워즈는 자기 약점이 무엇이며 어떤 폐해를 일으키는지 깊이 숙고한 다음, 그 일을 방지하는 실질적인 규범을 만들고 실천하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성화는 기도만 하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그러한 실천적인 애씀이 뒤따라야 풍성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특히, 10~20대 청년들은 컴퓨터 게임이나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유혹 앞에 넘어지기 쉽다. 문제는 그런데도 컴퓨터나 텔레비전과 적절한 거리를 둔 채, 정말 꼭 필요한 부분만 제한적으로 사용하게 하는 실질적인 조처를 하지 않는 일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유혹 앞에 매번 넘어지는 자기에게 깊은 자괴감과 무력감을 느끼며 매일 회개하지만, 정작 다음날 해가 뜨면 또다시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지내는 어리석은 일을 계속 반복하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 마음이 새롭게 되었다면, 마귀가 그 좋은 마음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려고 시도하기 전에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예방 조처를 빨리 시행해놓고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이런 일은 부모님께 사실을 솔직하게 말씀 드리면서 함께 대책을 의논하는 게 가장 좋다.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도움을 구하면, 부모님께서는 방과 거실에서 컴퓨터와 텔레비전을 치우고, 전원을 끈 핸드폰을 며칠 정도 맡아두시는 등의 일을 기꺼이 해주실 것이다.
참되게 회개하고 난 직후에는, 정말 무슨 일이라고 거뜬히 행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날 갖고 노는 것만 같았던 그 컴퓨터, 스마트폰, 텔레비전이 정말 만만하게 보인다. 그래서 아무런 조처도 행하지 않은 채로, ‘아! 이제 이겼어. 컴퓨터, 텔레비전, 스마트폰을 바라보고 있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라고 하며 자신만만해 한다면, 그것은 타락한 사람의 본성에 또 속는 것이다.
그런 자신만만함 속에는 ‘예전에 누렸던 세속의 달콤함도 계속 누리고 싶다’는 달콤함 거짓말도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속임수에 넘어가면, 며칠 뒤에는 마우스와 리모컨과 스마트폰을 좀처럼 놓지 못하는 자기 모습과 또 마주하게 될 뿐이다.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참으로 힘입었다면, 그때부터는 그 은혜를 실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깊이 숙고하고 이전에 하던 일을 검토하고 보완하는 일을 꼭 해야 한다. 그런 실질적인 분투가 뒤따르지 않는 기도는 별 의미가 없다. 죄를 죽이기 위한 분투가 없는 신앙은 굳이 자라야 할 이유도, 더 간절히 은혜를 찾고 구해야 할 이유도 없는 죽은 신앙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 드렸다면,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어떻게 적용할지를 놓고 깊이 숙고한 뒤에 최선을 다해 실천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계속 골방에만 머무르려는 사람은 머지않아 신앙에 깊은 병이 들어,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지경에 이르게 되고 말 것이다.
3. 정욕과 욕심에 치우친 기도
번영 복음과 긍정의 신학에 깊이 물든 현대 교인은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기도하는 일을 별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번영 복음을 한국 교회에 널리 퍼지게 한 여의도의 조 모 목사는 오래전에 『목사님, 우리는 폭스바겐을 원합니다』라는 책을 펴낼 정도로 물질 축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기도하게 했다.
그의 잘못된 사상에 휘말린 한국 교회 성도들은 앞다투어 구체적인 자기 소원을 놓고 적극적으로 기도하면서, 그 일이 현실로 나타나는 광경을 마음속으로 그리는 일을 참으로 열심히 했다. 예를 들면, 키 몇 cm 이상, 동그란 눈, 오뚝한 콧날, 늘씬한 몸매, 연 수입 얼마 이상, 혼수 규모 얼마 이상, 연 1회 이상 해외여행 가능, 시부모 안 모시는 배우자를 달라고 기도한 뒤, 그런 사람과 결혼하는 달콤한(?) 광경을 마음속에서 그리는 일을 수시로 했다. 그렇게 ‘자기’를 기쁘고 편하게 하는 멋진 사람을 만나 평생 행복하게 살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성경을 조금만 살펴보면 이런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가를 쉽게 이해하게 된다. 성경은 이삭과 리브가, 보아스와 룻의 결혼에 대해 자세하게 이야기하면서, 훌륭한 배우자 감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나라를 위해서라면 이 땅에 속한 것을 작게 여기고 큰 어려움도 기꺼이 감수할 마음을 품고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한국 교회 청년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러한 ‘지혜로운’ 배우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했다. 그와 함께, 자신이 그런 사람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기에 힘써야만 했다. 그런데 그럴 시간에 참으로 엉뚱한 것들을 온 힘을 다해 구하며 인생을 크게 낭비해버리고 만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한국 교회 성도들이 그토록 힘써 구한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빌 2:8). 그는 하나님께서 그 배설물로 자기를 치장하려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저주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았다(고전 1:29). 그의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영광을 받으셨지, 세상 성공이나 부귀, 영화, 학문, 명성, 권세 따위로 높임 받지 않으셨다.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서 밝히 빛나는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마음을 두었지, 예루살렘 성전의 화려함과 거대함에 마음이 들뜨지 않았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안락한 요소를 미련 없이 버렸다. 모세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애굽의 왕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주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했다(히 11:8~16; 24~26).
이처럼 정욕을 추구하는 기도에 깊이 빠진 이들에게는, 죄로 썩어 없어질 이 땅의 허탄함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질 생명의 면류관이 갖고 있는 영원한 영광스러움을 아는 영적인 지각이 없다. 그들은 성경에서 풍부하든지 비천하든지 자족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도, 좀체 자기 발걸음을 돌이키지 못한다(빌 4:11, 12). 자기 자신과 하나님의 얼굴에 ‘똥칠’을 하며,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을 알지 못하는 저주받은 길로 계속 나아갈 뿐이다. 더 심각한 것은 그러면서도 자기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는 지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딤후 3:6~9).
그러므로 기도할 때는 항상 이 일이 진정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우선 객관적으로 잘 헤아려봐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천국과 관련이 있는지, 불에 타 사라질 이 세상에 속한 일인지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그 일을 통해 내가 낮아지고 어려움을 겪더라도 예수님께서는 높임을 받으시는지 진지하게 시험해봐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살아가며 필요한 것을 구해야 한다. 또한, 모든 것을 족하게 여기며 항상 감사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은혜와 섭리 가운데 구하지 않은 것도 주시며, 이 세상이라는 광야를 부족함 없이 지나게 해주실 것이다(왕상 3:11~14; 신 8:4).
4. 마무리하며
잘못된 기도가 영혼에 미치는 악영향은 상당히 크고 강력하다. 잘못된 기도는 성경을 오해하게 하고 계명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 재앙을 부른다. 따라서 성도는 항상 기도하기에 앞서 성경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예수님과 사도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되새겨봐야 한다. 그렇게 하면 빛의 천사로 가장한 악령의 속임수에 넘어가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서 이탈하는 재앙을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각주
1 김대운, 「기독교 세속화의 시작은 언제부터인가?」, 바른믿음, 2016.10.9.
「기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기도 진단3」 잘못된 기도의 늪에 빠진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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