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자살 진단2」 우리는 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김재호
▲ 렘브란트가 그린 <은전 서른 닢을 돌려주는 가롯 유다>
평생 교회에 다니며 헌신·봉사한 사람이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그 사람이 천국에 있으리라고 여기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겠는가, 아니면 지옥에 갔으리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하겠는가?
본인이 어렸을 때만 해도 지옥에 갔으리라고 여기며, 유족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황망해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은 정반대이다. 대놓고 천국에 갔다고 말하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지만, 교회 대부분이 자살한 사람의 장례를 주관하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소망으로 유족을 위로하는 등, 여타 죽음과 자살을 똑같게 여기는 풍토가 빠르게 자리 잡고 있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간다고 가르쳤으며, 근래에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상황 변화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 것일까? 지금부터 그 점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 이유
전통적으로,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살을 중대한 범죄로 여겼기 때문이었다. 참으로 거듭난 사람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여기고 자기 뜻이 아닌, 그분의 뜻에 따라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가장 귀한 생명을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에 맡기지 않고, 자기 멋대로 끊어 버리는 행동은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정면으로 대항하고 거스르는 큰 죄가 된다. 또한, 사람의 생명을 끊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살인자의 심령이 그에게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와도 같다.
즉, 전통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자살은 원래부터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래서 자살은 이미 교부 시대 때부터 살인죄와 같은 맥락에서 다루어졌다. 또한, 신앙고백을 뒤엎는 행위이자 위선적인 신앙의 결과물처럼 여겨졌다.
이 전통적인 관점과 꼭맞는 성경 인물로는 가롯 유다가 있다. 그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악령을 쫓아내고, 복음을 증거하던 사도였다(막 6:7~1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심령에 은혜가 머물 자리가 없음을 보셨고, 그를 가리켜 마귀라고 하셨다(요 6:70, 71). 그의 마음에는 예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는 탐심이 굳게 자리 잡고 있었으며, 그 가시나무가 심령에 은혜가 뿌리내리고 결실하는 일을 끝내 훼방했다(마 13:22; 요 12:4~6).
표면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던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가 이르자, 은 30닢에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죄를 지었다(마 26:14~16). 양심이 그 죄를 정죄하고 책망하기 시작하자, 죄책감에 못 이겨 스스로 목을 매고 말았다(마 27:3~5).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의 생애를 가리켜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못한 인생이라고 하셨다(마 26:24, 25).
가롯 유다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는 악한 마음이 빚어내는 위선과 배교가 핵심을 이루며, 그 모든 것이 자살이라는 사건으로 귀결되는 모습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인의 자살을, 빛 비춤을 분명하게 받았음에도 끝까지 하나님을 거스르고 역행하는 죄, 곧 성령훼방죄와 연계하기도 한다(히 6:4~8). 다시 말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자살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살을 단순히 한 사람이 생을 마치는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업신여김을 받지 않으며 소멸하는 불이라는 사실을 친히 증거하신 것으로 받아들인다(갈 6:7; 히 12:29).
한편, 가롯 유다를 말할 때 꼭 함께 등장하게 되는 사람이 바로 베드로이다. 참 공교롭게도, 베드로도 가롯 유다처럼 예수님께 사탄이라는 말을 들었다(마 16:23).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은혜가 있음을 보셨고, 마귀의 세력이 이기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5~18).
연약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던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잡혀가시자, 살기 위해 그분을 저주하며 부인하는 큰 죄를 지었다(마 26:73, 74). 똑같이 양심이 그 죄를 강하게 정죄하고 책망했지만, 그는 가롯 유다처럼 나무로 달려가지 않고 심히 아파하며 통곡하는 길로 나아갔다(마 26:75).
그 뒤, 의기소침해져서 고향에 내려가 물고기나 잡아야겠다고 하기도 했지만, 가롯 유다와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요 21:3).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찾아오셔서 그 마음 안에 있는 주님을 향한 사랑을 일깨워주시며 사도의 직무를 잘 감당하게 해주셨다(요 21:15~19).
베드로의 생애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면, 심각한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 그 마음에 허락하신 참 사랑과 은혜가 핵심을 이루며, 그것이 베드로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끝까지 건져내고 보호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보호하심을 성도의 견인 교리와 연계하기도 한다. 그들은 누군가 사망의 올무에 걸려 파멸했는데도 하나님께서 영원히 그를 붙드신다고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붙드시는 성도는 올무에 걸려 멸망할 만한 일을 상당히 저지르더라도, 결국 그 잘못과 오류에서 벗어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즉, 지극히 실제적인 관점에서 성도의 견인 교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이처럼, 자살을 바라보는 교회의 전통적인 관점은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실제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에 기초해 있다. 이런저런 외적 요인과 잔재하는 타락한 본성의 힘이 마음 안에 심긴 그리스도의 은혜의 능력을 뛰어넘는 정도로까지는 역사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다.
온갖 것이 참 신자 주위를 두르고 욱여싸도, 하나님께서는 그가 그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도록 그리스도 안에서 ‘실제로’ 역사하신다(고후 4:8~10; 롬 8:35~37). 그러므로 그런 역사하심이 나타나지 않고,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이들은 표면적인 신자요, 사생자(私生子)였다는 사실이 밝히 드러난 셈이 된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친 핵심적인 이유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크고 위대하신 분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손에서 성도를 빼앗을 자가 없다는 사실을 지극히 실제적으로 믿고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성도의 견인 교리 자체를 믿지 않고 공로 구원을 가르치며, 교회와 세상의 구분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중세 교회는 제외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2. 현대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
현대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살하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먹고 살기 어렵고, 걸핏하면 예수쟁이라는 비난과 멸시를 듣기 바빴던 시대에는 자살하는 교인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눈앞에 닥친 온갖 어려움을 신앙으로 싸워 이겨내는 일에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만한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양적 성장에 치중하고, 현세적 축복을 강조하기 시작한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부터 자살하는 교인의 수가 급증했다. ‘자기’에 초점을 맞춘 신앙이 큰 실패와 좌절과 마주할 때, 한순간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잃어버리는 일이 급격하게 늘어난 것이었다.
그렇게 자살하는 교인이 급격하게 늘고, 문화 사역으로 인해 ‘자기감정’을 보듬는 일을 신앙으로 여기는 일에 익숙해진 세대가 교회의 주류가 되자, 자살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도 점점 바뀌었다.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으로 여기는 대신, 우울증이라는 질병의 결과로 바라보는 관점이 우세해졌다. 더불어,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이들을 지극히 편협하고 교만한 바리새인, 사랑이 없는 냉혈한, 꽉 막힌 율법주의자로 여기는 이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것도 그럴 것이, 평소에 자기를 그토록 아껴주던 교우, 집사, 장로, 심지어 목사님까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왕왕 일어나는데, 어떻게 자살하면 지옥에 간다는 이들이 시대착오적인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의 마음과 정신 상태가 어떤지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함부로 정죄하고 판단하는 무뢰한처럼 보이지 않겠는가? 나아가, 남모르는 아픔과 고뇌를 잘 보듬어주지 못한 지난날을 반성하고, 앞으로는 그들과 더욱 함께해야겠다고 여기게 되지 않겠는가? 신앙이란 그런 게 아니겠냐고 되뇌면서 말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말하는 사람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싸우려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으며, 하나님께서는 택하신 자를 끝까지 붙들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입에서는 ‘행위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자기를 바라보지 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과 같은 말이 쏟아져 나올 것이다.
물론, 그 말과 교리에는 잘못된 부분이 전혀 없다. 사람은 참으로 무엇을 언제 어떻게 행한 것에 근거해 구원받지 않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해 오직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롬 1:17). 또한, 그 믿음도 사람의 뜻이나 혈통에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따라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그것을 도로 빼앗아 파멸에 이르게 할 존재는 전혀 없다(요 1:13; 엡 2:8; 롬 8:38~39). 성도는 항상 그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봄으로써, 죄와 사망을 떨쳐내고 일어나 의의 병기로 살아야 한다.
문제는 그들의 말이 아닌, 실천적 태도이다. 그들의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 아르미니우스주의에 대항하던 강경 칼빈주의자(hyper-calvinist)의 모습이 떠오른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주관하신다는 주권 교리는,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신다는 식의 무책임함과 게으름을 조장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오직 믿음’과 ‘성도의 견인’ 교리는 자살이라는 중대한 죄를 질병으로 무마하려는 어리석음을 조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권 교리가 믿음으로 맡겨진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끝까지 책임을 지게 하는 역할을 하듯, ‘오직 믿음’과 ‘성도의 견인’ 교리는 자살이라는 큰 죄를 책망하고 두려워하게 하여 있는 힘껏 멀리하게 한다. 정말로 자기를 바라보지 않고 그리스도만 바라보는 일은 죄와 그에 대한 책임을 더욱 깊고 무겁게 인식하게 한다. 행위가 아닌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사람은 온 마음을 다해 율법을 즐겨 행하게 된다(요 14:21).
즉,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말에 분노하며 하나님의 주권, 오직 믿음, 성도의 견인 교리를 입에 올리는 이들은, 입으로는 칼빈주의를 말하고 있을지 모르나 그 마음으로는 강경 칼빈주의를 좇는 것과 같다(마 15:8). 그 신앙의 최종 결과물은, 표면적인 신앙고백을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율법폐기주의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렇듯, 현대 교회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고 가르치지 않는 진짜 이유는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배교의 늪에 깊이 빠져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구원의 능력도, 사망의 어두운 골짜기에서 성도를 건지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지팡이와 막대기도 알지 못하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시 23:4).
모름지기 성도라면 그들이 하는 말은 들어도, 그들의 행동은 따라 하면 안 된다(마 23:2, 3). 그들을 따라가면, 극심한 좌절과 절망이 찾아올 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상황을 맞게 되기 때문이다.
3. 자살하는 교인 문제에 대한 올바른 대응 방법
사실, 하나님께 진정으로 모든 일을 맡기고 의뢰하게 하는 목양이 이루어지는 교회에서는 자살하는 교인이 나올 일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자살은 단순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려는 교만이 그 삶과 인격 전부를 집어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누룩과 같은 교만이 좀 우쭐대거나 잘난 체하는 정도에서 활동하다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인격 전체를 사로잡아 파멸로 몰아넣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살이라는 죄에는 신앙의 연약함으로 여기면서 용납하고 기다려줄 만한 여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교인 가운데 누군가 자살했다면, 교회는 절대로 그 사람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유족을 천국 소망으로 위로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그냥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 보낸 아픔을 일반적인 수준에서 어루만져주고, 장례는 가족이 주관하게 해야 한다.1 만약, 유족이 모든 것을 충분히 이해하면서 친족 전도 차원에서 말씀을 전하는 자리를 마련했다면, 목회자는 자살한 교인에 대한 이야기는 조금도 하지 말고 오직 복음과 구원에 관한 말씀을 선포해주기만 해야 한다.
사실, 이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일이 터졌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보다는, 애초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예방하는 것이다. 일이 터지고 난 다음에는 유족을 올바른 길로 이끄는 것밖에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무서운 재앙과 심판이 교회를 휩쓸고 지나가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자기감정만 보듬고 띄우는 감상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잘못된 신앙 행태를 몰아내야 한다.
『4차원의 영성』이나 『잘 되는 나』와 같은 책을 근절하고, 성가대의 멋진 찬양을 감상하는 대신 회중 모두가 한마음으로 찬양하며, CCM과 영성 기도 대신 시편 찬송과 주님께서 가르치신 내용으로 찬송하고 기도해야 한다. 또한, 매사에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가르칠까?’ ‘주님께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을 기뻐하실까?’를 깊이 생각하며, 기도로 주님께 모든 것을 아뢰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것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실제로’ 맡기는 법을 꾸준히 배워가야 한다.
내 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나타나는 그 강력한 의지에 말씀과 기도의 굴레를 씌워 날뛰지 못하게 하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끝까지 침착하게 찾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 의지가 야곱처럼 주님의 역사하심을 끈질기게 간구하는 선한 방향으로 작용하게끔 평소에 부지런히 성화에 힘써야 한다.
그런 목양과 훈련을 받으며 자란 성도는 자살할 만한 상황에 밀어 넣으면 넣을수록, 더욱 주님만 의뢰하게 된다. 그래서 오히려 전보다도 왕성해진 영적 생명력을 자랑하는 사람이 된다(고후 1:8~10). 교회가 할 일은 온갖 좌절과 실패와 핍박이 몰려와도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능히 이겨나가도록 성도를 훈련하는 것이지, 자기를 사랑하다가 끝내 파선에 이른 사람을 끝까지 포용하고 보듬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을 하다 주님 앞에 서게 될 이들이 받을 책망이 얼마나 클지 깊이 생각해보라. 모르긴 해도, 그들 중 상당수가 “너는 누구인데 나를 주님이라고 하느냐?”라는 가장 절망적인 말을 듣게 될 것이다(마 7:23).
4. 마무리하며
자살은 질병으로 말미암는 결과나 단순한 생의 마감이 아니다. 그것은 삶 전체를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거스르는 쪽에 놓기로 결정하는 최악의 교만을 실행하는 심각한 배교 행위이다. 그런 악한 죄를 지은 사람을 하나님의 권속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믿음과 하나님의 능력을 모독하는 일과 같다.
그런 일을 조장하는 감상적이고 자아 중심적인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는 그런 죄를 심히 두려워하고 멀리해야 한다. 그 죄에 빠진 교회에는 자살하는 교인이라는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과 재앙이 끊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각주
1 이 글에서는 교회가 장례를 주관하는 일이 성경적이지 않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종부성사가 문화적인 변형을 거쳐 교회 안에 남아 있는 것이라는 사실은 구체적으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자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자살 진단2」 우리는 왜 자살한 사람이 지옥에 갔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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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누나가 자살 한지 2년 9개월 약 67일 정도 남았습니다. 미국시간 쌔애틀 올림피아 10월 5일 목요일 사망 자택에서 혼자 있을때 2살? 아기와 4살정도??되는 아기 남겨두고 우울증?? 정신건강 의학과 약 임의로 끊고 수면제 과다 사망 저는 너무 아직까지 너무나 괴롭습니다. 3주기 되면 또 대성통곡 할 거 같아 두려워요 샤론 크리스 미란 옥 미워 죽겠어요 너무 보고싶고요
단편적인 상황만 놓고 이렇다 저렇다 답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혹시, 이 문제로 신앙 상담을 받기 원하신다면, puritan9000@naver.com 으로 사건의 배경(교회 출석, 성장 과정, 사건 경과 등)을 자세히 써서 보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리폼드 가디언 대표이자 제네바 개혁교회 담임 목회자이신 오인용 목사님과 개혁주의적인 바탕 위에서 심도 깊게 논의한 뒤에 답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