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자살 진단3」 자살에 대한 잘못된 관점과 그 결과, 올바른 자살 문제 해결에 대하여
박지훈
들어가며
옛 기독교 전통을 이어받은 한국 교회는 겉보기엔 보수적인 모습을 아직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통 신학의 부재, 세속주의, 윤리적 부패 등으로 인해 근본 토대가 흔들리고 있으며, 진보적인 신학 사조가 그 틈을 파고들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기독교 본연의 절대적 가치는 점점 사라지고, 유동성과 상대성에 기초한 현대적 가치가 계속 세력을 넓히고 있다.
자살을 바라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자살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가 여전히 지배적인 듯 보이지만, 전반적인 신학 사조 변화와 맞물려 온정적이고 진보적인 관점이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다. 또한, 교인 자살의 급증은 그러한 관점 확산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예전에는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졌던 “자살=지옥”이라는 공식은 이제 많은 사람들에게 비성경적이고 몰상식한 소리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이 ‘새로운 관점’은 세속 학문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것이기에, 전적으로 성경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고 지극히 모호하고 어중간하다. 물론, 이 어중간한 ‘중도적 관점’을 취하는 사람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자살을 줄이려는 그 나름의 선한 의도와 목적을 갖고 활동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벗어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은 성경과 교회사를 살펴보면 명백하게 알 수 있다. 더구나 이 문제는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 폐해가 더욱 심각하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본인은 이 글을 통해,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 확산이 교회와 성도에게 미칠 실질적인 악영향을 고찰하여 건전한 경각심을 일깨우고, 자살 문제에 대한 유일한 성경적 해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자살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중도적 관점
교회가 자살에 대해 취했던 본래 입장은 매우 단호했다. 생명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죄로 보고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다. 현대주의자들은 지금껏 교회가 “자살하면 지옥 간다.”라는 비성경적인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속였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정통 교회가 주장한 것은 “자살하면 지옥 간다”가 아니라, “거듭난 성도는 결코 자살할 수 없다”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교리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그러나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올바르게 이해하면 얼마든지 이 같은 결론에 이를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8장 4항에는 이와 관련해 생각해 볼 만한 대목이 있다. 그 조항은 “참 신자도 죄에 빠져 구원의 확신이 약해질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얼굴빛을 숨기셔서 그들을 어둠에 다니도록 허용하실 때가 있지만, 결국 성령님에 의해 적절한 때에 반드시 소생케 되며, 어떠한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분의 역사로 말미암아 버텨내게 된다.”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는 큰 절망(자살할 만한)에 빠진 참된 성도가 계획적으로든 충동적으로든 자살에 이르지 않도록 그를 보호해 주신다. 한편, 자살은 끝까지 하나님 의지하기를 포기하고 자기 안식처를 죽음으로 삼는 것이므로, 참 성도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이처럼 성도의 구원과 견인 교리가 의미하는 바를 올바르게 따라가 보면, 구원받은 사람이 자살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은 전혀 가능하지 않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자살한 인물들(가롯 유다, 사울 왕, 시므리, 아히도벨 등)이 결코 참된 성도가 아니었다는 사실도 자살에 대한 전통적인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해준다.
자살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은 명백하며, 정통 교회는 이런 풍성한 교리적 설명을 교인들에게 계속 제공했다. 그러나 교리적 기초가 약했던 한국 교회에서는 이 내용을 회중에게 온전하게 전달하기보다는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말로 교인을 을러대는 일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죄를 끊고 멀리하는 일에는 건전한 두려움과 함께, 죄에서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능력을 믿고 바라보는 일도 꼭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급한 불을 끄는 데만 급급하여 전자에 치우쳤던 것이다. 더구나 그러는 동안 번영신학, 기복주의, 은사주의 등의 세속적 신학의 영향으로 인해, 죄의 심각성을 깨닫고 오직 그리스도께만 소망을 두는 참 신앙은 거의 실종되어 버리고 말았다. 나아가 교리와 신학에 대한 혐오증이 팽배하여, 정통 교리를 철저하게 가르치려는 교회는 거의 씨가 마를 지경이 되고 말았다.
그 결과, 죄의 참담함과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견인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가 의미하는 바를 깊이 깨달은 참된 성도도 함께 멸종하다시피 되었다. 그런 영적 빈곤과 재앙을 맞은 가운데 한국 사회 전체에서 자살이 급격하게 증가하자, 교회 안에서도 자살하는 사람의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은 그런 상황에서 등장했다. 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신자라고 해도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자살할 수 있으며,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 구원받는다.”라는 위험한 주장을 편다. 자살도 모든 죄와 똑같으므로 자살이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끊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펴는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 자살을 죄로 보려는 이들은 온건한 편이다. 이 ‘중도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는 자살을 죄가 아닌, 질병이나 사회적 현상으로 여기는 이들도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주장의 근거를 대부분 성경이 아닌, 현대 심리학이나 사회 통계 자료에 둔다. 성경은 세속 학문에 기초한 그들의 주장을 보조하는 선에서만 활용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 구절을 지극히 자의적이고 편파적으로 인용하며, 그 구절조차도 잘못된 진보 신학의 틀을 사용하여 억지로 해석하기 때문에 본문이 말하지 않는 엉뚱한 의미를 덧입혀놓는 일이 상당히 빈번하게 일어난다.
더 심각한 문제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적극적으로 자살 방지 활동을 벌이는 사람 대부분이 이 ‘중도적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연구소와 상담소 등을 운영하며 각종 프로그램, 행사, 강연, 출판 활동 등을 통해 열심히 자살을 방지하려고 하는 가운데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을 퍼뜨린다.
물론, 그들은 자살하려는 사람을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하며, 단기적으로는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이, 교인들이 신앙으로 어려움을 끝까지 버텨내기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쪽을 택하는 이유는, 교회가 중도적 관점에 근거하여 이런저런 자살 예방 활동을 벌이지 않아서가 아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인 자살 방지 활동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를 풍성하게 가르쳐 깨달아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영광스러운 구원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알게 되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이 가져올 악영향
중도적 관점을 가진 사람도 절대로 자살을 미화하거나 권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진심으로 자살을 막으려고 하며, 절망에 빠진 사람을 동정하는 마음도 많이 갖고 있다. 또한, 표면적으로나마 기독교 신앙을 갖고 있기에 한 생명을 죽음에서 건져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다는 자긍심도 갖고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잘못된 신학과 사상에서 나왔다는 점이 문제이다. 노골적으로 성경을 반대하지는 않지만, 교묘하게 성경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들은 스스로 속고 속이는 가장 위험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사람의 열심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은 구체적으로 어떤 악영향을 가져오게 될까? 그들의 주장을 분석해보면 그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첫째,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이 약해질 것이다.
자살에 대한 전통적 관점과 중도적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는 출발점을 ‘하나님에 두느냐, 사람에 두느냐’이다. 전통적 관점은 자살을 죄와 하나님의 저주라는 측면으로 보게 하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상기하며 건전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또한, 자살하려고 하는 사람이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을 거야.”라는 식의 망상을 할 수 없게 한다.
그러나 중도적 관점은 자살을 주로 사회, 정신적 측면으로 보게 하기 때문에, 자살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부조리한 사회에 대한 분노와 항거의 표현이나 정신 질환의 결과와 같은 그림을 그리게 된다. 스스로 살인을 저지르는 흉악한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롭고 엄중한 심판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나 죄와 하나님 심판의 심각성을 망각하는 것만큼 위험천만한 일은 없다. 위대한 강해 설교자 로이드 존스의 지적대로, 현대 기독교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그 시작을 하나님의 진노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1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죄를 그냥 덮고 넘어가실 수 없다. 사악한 죄에 대해 불같이 진노하시며 반드시 생명을 그 대가로 치르게 하신다. 그러나 현대 기독교는 하나님의 이 성품을 지독히도 싫어하고 대적하며, 절대로 회중에게 있는 그대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
자살에 대한 중도적 입장도 이 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으므로, 그 영향력이 커질수록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이 더욱 약해지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러나 공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진노는 타락한 사람들에게 지극히 중요하고 실질적인 문제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믿어야 할 유일한 이유가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앞에 실제로 서보지 않는 한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않는다. 그러므로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인식을 약화시키는 중도적 관점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문을 막고 서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도 못 가게 하는 자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마 23:13).
둘째,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참 신앙이 퇴보할 것이다.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을 연구하면서 몇몇 책과 신문 기사를 살펴보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해결책들이란 죄다 “공동체에 소속감을 가져라, 신앙 상담을 받아라, 목회자를 찾아가라, 신앙과 심지를 굳건히 하라.”라는 등의 부차적인 것뿐이었다. “죄인임을 인정하고 모든 죄와 고통을 그리스도께 맡기라.”라는 궁극적인 해결책은 단 한 번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런 현상은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무시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사실, 한국 기독교가 죄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무덤덤하게 반응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벌써 몇십 년 전부터 사람들의 간증에는 자기 죄의 심각성과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를 깨달아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의뢰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대신, “내 잘못으로 예수님을 아프시게 했다.”라는 식의 감상적인 내용이 자주 나온다.
또한, 강단에서도 하나님의 거룩한 진노와 심판에 관한 말씀 선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 안에 빠른 속도로 퍼져가는 중도적 관점은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고 믿는 참된 신앙을 더욱 쇠퇴하게 할 것이다. 이대로라면 머지않아 교회는 세상에서 살던 그대로 행하며 그저 입으로만 ‘주님, 주님’하는 자들로 가득하게 될 것이다(마 7:21).
셋째, 교인의 자살이 더 늘어날 것이다.
자살에 대한 중도적 관점과 참 신앙은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리스도께 온전히 의지하지 않는 자는 절대로 참된 안식을 누릴 수 없다. 그러므로 중도적 관점에 따라 자살을 막아보려는 사람들은 집채 만한 파도를 맨몸으로 막아보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물론, 중도적 관점에 기초해 있는 여러 인간적인 수단이 잠깐은 긍정적인 효과를 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예정된 파국이 찾아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죄와 타락한 마음이라는 자살의 근본 원인을 듣기 좋은 달콤한 위로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 중도적 관점에 따라 시행하는 모든 자살 방지 활동은 아무런 소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사람이 자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생명을 살리겠다는 명목으로 퍼뜨린 잘못된 신학이 오히려 사람의 생명과 소망을 빼앗고 파괴할 날을 부르는 것이다.
죄와 하나님의 진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이 핵심을 잃어버린 교회가 죄로 멸망하는 영혼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적인 방편으로 잠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은 사람들은 그 힘으로 더욱 세상 것을 탐닉하고 죄에 깊이 빠져들어 갈 것이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결국 죄에 매몰되어 자살을 감행할 사람이 훨씬 더 많으리라는 사실은,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마치면서
어떤 이들은 이 글을 읽으면서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누가 못하겠는가?” 혹은 “자살 방지를 위해 노력하는 선한 사람들을 매도하지 말라.”라는 등의 비판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핵심은 자살 방지를 위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참 신앙의 회복이라는 것이다. 즉, 자살하는 교인이 계속 증가하는 문제는 현대 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해서 발생하는 재앙이자,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 글은 자살에 대해 중도적 관점을 가진 사람들의 노력 자체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노력이 기초하고 있는 토대가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했을 따름이다. 즉, 잘못된 토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그 노력을 따라 퍼져가는 폐해를 성경적으로 분석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 대한 반론과 비판을 제기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분명한 성경적 근거를 함께 제시해야 올바를 것이다.
또한, 자살 문제에 대해 중도적 관점에서 주장을 펴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경고해두고 싶다. 죄의 문제는 결코 세상의 학문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설명할 수 없다. 물론, 자살한 사람과 유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은 매우 안타깝지만, 그렇다고 해서 죄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타협할 수는 없다.
성경에는 죄를 온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은 없지만, 죄를 향한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와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는 내용은 너무도 많다. 즉, 그리스도인이 자살 문제와 관련하여 가져야 할 올바른 관점은 전통적인 관점밖에 없다. 인간 중심적이고 비성경적인 원인에 주목하며 그리스도를 제쳐놓은 채로 온갖 해결책을 제시하는 일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큰 죄악이다.
어찌어찌해서 자살이 좀 줄어들게 되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진다면 그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 대가와 그분의 진노하심이 계속 쌓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더는 그분의 길이 참으심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자살한 사람들의 피를 당신의 손에서 찾으시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돌이켜 회개하라.
마지막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이들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깊이 생각하기를 바란다. 엘리야는 극심한 고통과 낙망 가운데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기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위로하며 쉬게 하시려고 시원한 로뎀 나무 그늘과 빵과 물을 예비해두셨다(왕상 19:4~8).
자살을 생각하며 계획하는 사람은 그 시간에 만유의 주님이시요, 만주의 주님이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라. 믿음이 없는 자는 제풀에 좌절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지 말고, 주님을 바라보고 의뢰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간구하라. 인자와 긍휼이 끝이 없으신 주님께서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다(마 12:20, 21). 주님께서는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주시고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시는 자애로운 분이시다(눅 11:9~13). 그분을 바라보라. 그리하면 누구든지 생명을 얻을 것이다(요 3:14~16).
마귀의 유혹과 충동을 따르는 것은 한순간이나, 지옥에서 그와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은 죄의 형벌을 받는 것은 영원하다. 그분의 타오르는 진노의 깊이와 무게를 헤아려보라. 이 땅에서 아무리 크고 어려운 문제가 당신을 짓누른다고 해도, 지옥의 암흑과 고통이 짓누르는 것과 비교하면 새털처럼 가볍다.
스스로 생명을 끊는 죄는 살인죄 가운데서도 가장 악하며, 유일하신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죽게 하신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멸시하는 가장 무서운 죄악이다. 자살은 절대로 현재의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아니다. 그러니 최악의 상황과 절망 가운데 있다고 해도 죽음을 택하지 말라. 오히려 그 모든 무기력함과 절망을 힘입어 죄의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지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맡겨라.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보혈을 흘리심으로 예정하신 모든 백성의 죄를 이미 다 대속하셨음을 믿고 바라보라. 그러면 살 소망을 얻게 될 것이다.
본인은 이번 글을 쓰면서 급격히 늘고 있는 교인의 자살과 암세포처럼 빠르게 퍼져나가는 비성경적인 관점, 그리고 한국 교회가 참된 신학과 복음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가 얼마나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으며, 또 얼마나 위험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심을 사모하는 참된 성도들이여, 다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긍휼히 여겨주시기를 간구하도록 하자. 교회가 다시 일어나 진리와 복음의 나팔을 분명하게 불게 해달라고 힘써 기도하자. 눈에 보이는 비관적인 상황 때문에 낙심하거나 시험에 들지 말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약속을 바라보도록 하자. 참된 교회와 진리는 결국 바로 설 것이며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낼 것이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각주
1 마틴 로이드 존스, 『로마서 강해 제1권』, 서문강 옮김, 기독교문서선교회, 2012, p. 18.
「자살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자살 진단3」 자살에 대한 잘못된 관점과 그 결과, 올바른 자살 문제 해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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