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정부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교회와 정부 진단3」 교회와 정부가 상대방에 미치는 영향과 올바른 대처 방법
김재호
교회의 소명은 철저하게 영적이며, 정부의 소명은 철저하게 육신적이다. 이 말은, 교회는 죄로 죽은 사람의 영혼에 예수님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밝은 빛을 비추는 영적인 일을 감당하며, 정부는 일상생활을 이어가는 데 필요한 기초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육신적인 일을 감당한다는 뜻이다(고후 4:16; 롬 13:1~5). 예수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심으로써, 두 기관에 주어진 소명의 독립성을 아주 분명하게 하셨다(마 22:21).
그러나 이러한 독립성이 상대방이 자기 소명을 감당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딤전 2:1, 2). 각 기관은 자기 소명에 충실함으로써, 상대방이 자기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한결 수월하게 해줄 수 있다. 이 말은 뒤집어 말하면, 한쪽 기관이 자기 소명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할 때 생겨나는 폐해는 상대 기관이 직무를 수행하는 데 악영향을 끼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양 기관이 어떻게 상대 기관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또한 상대방의 실책(失策)이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때는 어떻게 대응해야 올바른 것일까? 지금부터 각 기관에 주어진 소명을 토대로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1. 각 기관이 자기 소명을 잘 감당할 때 일어나는 일
교회가 진정으로 영적인 일, 즉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여 세상에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아는 빛을 충만하게 비춰준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그 세상에는 거듭난 영혼을 소유한 사람, 곧 양심에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받은 사람의 수가 늘게 된다.
이들은 세상 사람 대부분이 자신에게 돌아올 ‘피해’, 즉 정부가 자신에게 휘두를 칼이 두려워서 악을 삼가는 것처럼 하지 않는다. 오직 장차 유업으로 받을 영원한 하나님 나라, 즉 천국을 바라보고 사모하면서 모든 일에 그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려고 악을 삼가며 선을 행한다.
얼핏 보면 이러한 차이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실제 결과를 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크고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깨달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 사람의 타락한 심령은 근본적으로 벌을 두려워하거나, 받게 될 보상을 바라보면서 다소 누그러진다.
그 누그러진 정도만큼만 악을 삼가고 선을 행할 수 있기에, 세상 사람들은 정부의 칼끝이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는 감춰두었던 추악한 민낯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게 된다. 정말로 아무런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선한 일에는 사람이 항상 부족한 것도 그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벌이 두렵다거나 돌아올 유익을 바라보면서 선을 행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무가치한 죄인을 대속해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일을 행한다. 그래서 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누가 보거나 보지 않거나, 작고 사소한 일이나 크고 공적인 일이나 가릴 것 없이, 항상 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한다(엡 6:6, 7).
여러분이 만약 정부를 이끌어가야 하는 입장이라면, 둘 중에 어떤 이가 더 많은 사회에서 일하고 싶은가? 당연히 거듭난 이가 많은 사회를 선호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많은 사회에서는 정부가 좋은 법과 제도를 마련하고 시행하는 일이 한결 수월해진다. 그러면 기존 정책을 평가하고 개선하는 일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쏟을 수 있는 여유도 생겨난다. 그뿐만 아니라, 정책의 사각지대에서도 올바르게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인해, 제도의 허점에서 말미암는 사회적 분쟁과 폐해도 상당히 줄어들게 된다.
한편, 정부가 자기 소명을 잘 감당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러면 국력이 융성해져서 안보와 치안이 확립되고, 문화가 꽃피워 국민의 생활 양식과 의식 수준이 공통분모를 갖기 시작한다. 또한 인구도 큰 폭으로 증가하며, 먹고 사는 일을 해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사용할 정도로 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
이런 사회에서는 교회의 사역이 물리적인 차원의 장벽에 걸리는 일이 크게 줄어든다. 전쟁과 도둑과 강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며, 성경을 가르치려고 우선 글자부터 가르치는 수고를 피할 수 있다. 풍토병으로 복음을 제대로 전해보기도 전에 하나님 나라로 부르심을 받는 일이 많이 줄어들며, 똑같이 복음을 증거해도 그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의 수가 대폭 늘어나게 된다.
이러한 건전한 형태의 상호 작용은 초대 교회와 로마 제국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로마 제국이 초대 교회를 박해하다가 국력이 크게 쇠하는 길로 들어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와 로마 제국 사이에 꼭 안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와 로마 제국은 좋은 영향도 주고받았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실용적으로 받아들이고 활용한 끝에 나타난 거대 제국이었으므로, 로마인의 가치관과 생활 양식에는 자연스럽게 그리스 문화가 깊이 뿌리내렸다. 그런데 그리스 문화에는 사실상 ‘인권’이라고 할 만한 부분이 없어서, 로마 제국 안에서는 지극히 잔혹하고 끔찍한 일들이 아무렇지 않게 ‘합리화’되곤 했다. 부모에게 자녀를 키울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 그들은 맘에 들지 않는 자식을 길거리에 내다 버려 죽음에 이르게 하거나, 노예로 팔아넘기는 일을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행했다.
노예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거의 물건과 같은 수준이어서, 주인의 여흥을 위해 소비되거나 이리저리 팔려 다니는 일도 흔했다. 그런 로마 사회에서 초대 교회가 보여준 계층을 넘나드는 진실한 형제 사랑은 야만적인 삶을 살던 로마인들의 양심을 깊이 찔렀고, 그 결과 로마 법체계 안에는 인권이라는 개념이 생겨나 서서히 자리 잡기 시작했다.1
그렇게 기존 사회 질서의 사각지대에서 인간 이하의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던 많은 사람이 복음으로 거듭난 이들의 선한 양심으로 말미암아 점차 사람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2 그리고 로마 법체계를 토대로 근대화가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노예 제도 폐지, 균등한 교육 기회 제공, 여성 참정권 허용과 같은 현대 사회의 변혁은 다 복음이 세상에 가져다준 좋은 선물과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편, 로마 제국이 사회 질서 확립을 위해 깔아놓은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은 고스란히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 사용되었다. 로마 제국의 문화적 토양이 그리스 문명이었으므로, 로마 제국 어디에서든지 그리스어로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복음이 수많은 민족의 언어장벽에 막히지 않고 빠르게 전해지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3
또한, 로마 제국의 강력한 안보·치안 유지 능력은 사도들이 자유롭게 사방팔방으로 복음을 전하며 제국 전역을 누빌 수 있게 해주었다. 사도 바울이 고작 몇 명으로 일행을 꾸려 광대한 지역을 누비는 모습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려는 유다 백성이 도적 떼라는 현실적인 장애물을 염려했던 모습과 사뭇 대비된다. 또한, 카이사르 때부터 운영하기 시작한 국가적인 우편 통신 체계는 사도들의 편지를 제국 곳곳의 교회에 실어 나르는 역할을 했다.4
만약,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그냥 동쪽으로 가도록 놔두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분명히 터키 변방 지역부터는 엄청난 물리적인 제약과 싸워야만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발걸음을 서쪽으로 향하게 섭리하셨고, 그 일은 바울이 사역을 마감할 즈음에 이미 로마 제국 전역에 복음이 상당히 편만하게 증거되는 선한 결과로 이어졌다.
물론, 초대 교회나 로마 제국이나 모두 상대방의 소명에 도움을 주려고 한 적은 전혀 없었다. 그 둘은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각자의 소명에만 충실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온 천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각 기관은 상대방이 자기 소명을 잘 감당한 선한 결실을 간접적으로 함께 누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정부는 상대방을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상대방의 일에 참견하거나 자신이 그 일까지 맡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오직 ‘말씀과 기도’의 일에 전념하며 정부가 자기 일을 잘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딤전 2:1, 2). 그리고 교인에게 민법과 형법에 나타난 사회 기초 질서와 규약을 잘 준수하고 세금을 잘 납부하여, 정부가 자기 직무를 감당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말라고 가르쳐야 한다(벧전 2:13, 14; 롬 13:6). 이런 부분에서 올바르게 행동하지 않으면, 결국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막는 거대한 물리적 장벽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한편, 정부도 교회가 자기 소명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신앙의 자유를 실제적으로 허용하고 보장해줘야 한다. 세계사를 살펴보면, 자기 칼끝을 교회로 향했던 정부 가운데 심판받아 무너지지 않은 정부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토록 강대했던 로마는 물론이거니와 백 년은 끄떡없을 것처럼 보였던 일제(日帝)가 한순간에 패망한 것, 현대사의 두 기둥 중 하나였던 소련이 순식간에 붕괴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일, 북한이 내로라하는 악성 거지 국가로 전락하여 전 세계의 근심거리가 된 것 등등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거세게 핍박한 대가를 받은 것이다.
이처럼 교회와 정부는 독립적인 기관이지만, 그 권세가 한 분 하나님에게서 말미암음을 꼭 기억해야 한다. 교회를 무시하는 정부나, 정부를 무시하는 교회는 하나님께 다 심판받는다.
그러므로 정말 자기 직무를 잘 감당하고 싶다면, 각자에게 주어진 고유한 직무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며 자기 영역을 함부로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일을 볼 수 있을 것이다.
2. 각 기관이 자기 소명을 등한히 할 때 일어나는 일과 올바른 대처 방법
각 기관이 자기 소명을 잘 감당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은 잘 감당했을 때 일어나는 일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다. 타락한 교회는 세상에 거짓말과 위장에 능한 위선자를 내어놓으며, 악한 정부는 사람이 일상생활을 제대로 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을 조성한다.
사회에 위선자가 늘어나면 좋은 법과 제도가 점점 무력화되기 시작하며, 일상생활의 어려움이 가중되면 타락한 사람은 강도·살인·마약·강간·사기 등을 통해서라도 눈앞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하게 된다. 또한, 정부는 점점 교회 전체를 사회악의 근원으로 여겨 여러모로 활동을 제재하기 시작하며, 사람들은 눈앞의 먹고 사는 문제에 매여 교회가 전하는 복음을 쉽게 외면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각 기관이 자기 소명을 자꾸 방해하는 걸림돌을 제거하려고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고유 영역에 침범해 들어가는 일이 쉽게 일어나게 된다. 그러다 결국 상대방의 일까지 자신의 것으로 삼거나, 자기 권세 아래 매어두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즉, 이런 일의 최종 결과는 교회가 정부를 자기 수족처럼 부리는 교회 국가나, 교회가 정부의 통치 정책 확립에 앞장서는 국가 교회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교회 국가 또는 국가 교회는 주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주님의 ‘명백한’ 교훈을 거스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세상 자체를 하나님 나라로 만들겠다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뜻을 함축하므로, 그 열매가 결코 달콤할 수 없다(요 18:36). 영혼의 구원이라는 교회 본연의 일도, 기초 사회 질서 확립이라는 정부 본연의 일도 다 어중간하게 되어 버린다.
즉, 교회는 교회대로 세속화되고, 정부는 정부대로 종교적 권위로 시민들의 일상생활을 옭아매는 악한 정책을 펴기 쉬운 환경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런 일은 고스란히 교회의 타락과 국력 약화라는 결과로 다시 이어진다.
그러므로 교회와 정부는 상황이 그렇게까지 안 좋아지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서로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 교회는 그럴수록 말씀과 기도에 더 전념해야 하고, 정부는 사회 질서를 흐트러뜨리는 이들에게 더욱 엄격하게 벌을 줘야 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한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그런 부분이 있다면 빨리 상대방에게 넘겨주고 그 일에서 손을 떼야 한다.
그러나 정상적인 상황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데, 하물며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는 일이 본격적으로 일어나는 중에 각자 자기 실수를 인식하고 상황을 되돌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할 수 있기는 하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므로 그런 형국이 조성되기 시작했다면, 참 신앙을 소유한 이들은 교회 국가 또는 국가 교회가 겨누는 칼날 앞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이름만 의뢰하며 진리를 증거할 굳은 결심을 해야 한다.
실제 역사 속에서 그렇게 행동한 이들로는 종교개혁자와 청교도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한 로마 카톨릭의 권세와 국가가 교회를 제도화하여 정치에 활용하는 영국 국왕의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앞에서도 ‘오직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용감하게 행동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왕과 제후에게 십자군 원정을 독촉하여 그 일을 현실로 이끌어내며, 자신을 거스르는 왕을 눈밭에서 3일 동안 서서 용서를 빌게 하는 등, 중세 시대 내내 국가 권력을 실질적으로 자기 손에 쥐고 흔들었다.
왕과 제후는 당연히 교황의 정치적 간섭과 요구에 넌덜머리가 났지만, 함부로 대들었다가 파문이라도 당하는 날에는 합법적인 토벌권(討伐權)이 주변 왕과 제후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거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그런 상황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세 시대 내내 교회의 손아귀에 국가 권력이 있었으므로, ‘오직 성경’에 따라 행동하며 교황에 맞선 종교개혁자와 그 선조들은 국가 권력의 칼날 앞에 서게 될 수밖에 없었다. 종교재판소의 고문, 사법 기관에서 집행하는 화형, 군대를 동원한 토벌 작전의 그림자가 늘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며 말씀에 순종하기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 그들이 흘리는 순교의 피가 땅에서 마를 날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사회는 다시 조금씩 교회와 국가의 분리, 곧 신앙의 자유를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한편, 영국 국교회는 모두가 잘 아는 것처럼 헨리 8세가 왕권을 정식으로 물려받을 왕자를 얻기 위해 새 장가를 가려고 만든 교회이다. 그런 교회가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하는 개신교회가 된 것은, 그 당시 영국에 종교개혁의 영향이 상당했기 때문이었다. 헨리 8세는 로마 카톨릭의 권세에서 벗어나려고 그런 상황을 순전히 전략적으로 활용했던 것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로 인해 영국에서는 국왕이 교회의 수장(首長)으로서 교회의 모든 일을 제도적으로 관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국가 교회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 국교회는 근본적으로 모든 영국 국민을 다 포용할 수 있는, 지극히 중도적이고 넓은 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개혁 신학이 가르치는 바를 타협 없이 온전하게 실천하려는 이들이 또다시 국가가 휘두르는 매서운 칼날 앞에 서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결국, ‘오직 성경’대로 행해야 한다고 하며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청산하라고 고집한 이들은 감옥에 갇혀 죄수가 되고, 생명과 재산을 빼앗겼으며, 경찰이 설교와 집회를 하지 못하게 하는 상황을 맞았다.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신학과 신앙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으며, 많은 시행착오와 함께 교회와 국가를 온전하게 분리하는 길로 꾸준히 나아갔다.
물론, 이 모든 개혁 작업이 어느 한순간에 뚝딱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로마 카톨릭 교회가 자기 본 모습을 드러내는 데 몇백 년의 세월이 필요했듯이,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이 교회와 국가의 온전한 분리로 이어지기까지는 실로 많은 시간과 중간 과정이 필요했다.
또한 모든 개혁 작업이 다 그러하듯이, 종교개혁자와 청교도도 부분적으로 교회와 국가의 분리와는 상반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오직 성경’ 안에 분명하게 내포된 정교분리(政敎分離)라는 진리는 그러한 사람의 어리석음과 한계와 박해를 모두 이겨내고, 결국 다시 이 세상에 꽃을 피워내고야 말았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자와 청교도의 허물을 다룰 때는 그런 사실을 꼭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현대 세계는 로마 카톨릭이 압제하는 중세에서 벗어나 근대 세계로 나아간 일을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특히 칼빈이 제네바에서 보여준 그 균형 있고 끈기 있는 개혁 작업이 없었다면, 중세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일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근대주의를 꽃피울 인문주의는 로마 카톨릭의 궤변과 압력에 적절하게 몸을 낮추고 타협하거나, 반대로 종교적 권위 자체를 거부하고 기존 사회 질서를 뒤집는 극단적인 방향으로 나아갔을 가능성이 아주 큰 불안정한 사조(思潮)였다. 전자는 중세의 지속을 의미하고, 후자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나타나는 광기와 허망함이 사회 전반을 뒤엎을 것을 뜻한다. 그리고 실제 역사 속에서도 그런 결과를 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세상이 로마 카톨릭과 완전하게 결별하게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교만해진 세상이 허무함과 광기로 치달아 자멸하는 일을 상당히 견제하며 늦추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근대와 근대 이후 사회가 자랑하는 모든 결과물들은 발아하지 못하고 죽은 씨앗처럼 되었거나, 열매 맺기 전에 꺾인 나무줄기처럼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세상이 지금처럼 하나님 말씀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면, 지금껏 자랑한 그 모든 결과물 역시도 ‘왕년의 추억’처럼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정부가 진리를 역행하는 길로 나아갈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며 기록된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칼과 창을 손에 들고 상대방을 향한 투쟁에 돌입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권세를 바라보며 올바르게 행하고 모든 결과를 그분의 손에 의탁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거듭난 이들이 양 기관에 많아지기 시작할 것이며, 그런 흐름이 계속 유지되면 각 기관이 다시 자기 소명에 충실할 수 있는 여건이 점점 조성될 것이다. 그러면 사회 질서와 체계를 개편하고 정비할 날도 점점 가까워질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칼과 창을 손에 들고 거리로 몰려나가면, 결국 창과 칼에 의해 짓밟히는 날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마 26:52). 그리고 각 기관이 각자 자기 소명에만 충실할 수 있는 날도 계속 멀어져 갈 것이다.
3. 마무리하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이 땅 위에’ 세우셨고, 이 세상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절대로 자신이 광야를 다 지난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 되며, 정부는 자신이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릴 권세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양 기관은 모두 하나님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주어진 자기 일에만 충실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각 기관이 맺은 선한 결실을 상대방도 누릴 수 있도록 섭리해주실 것이다.
그러니 섣부르게 상대방의 일에 나서지 말도록 하자. 그렇게 하지 않고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면 당장 눈앞에서는 좋은 일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국에는 더 쓴 열매를 거두게 되는 상황에 몰리게 될 것이다.
각주
1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2: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이길상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p. 369.
2 더 구체적인 내용은 본인이 쓴 「복음, 인권의 참된 토대」를 참고하도록 하자.
3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 1: 사도적 기독교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1)』, 이길상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p. 86.
4 시오노 나나미 『로마인 이야기 10: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ロ―マ人の物語 X)』, 김석희 옮김, 한길사, 2004, pp. 9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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