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이념 진단2」 이념에 사로잡힌 기독교의 폐해
김재호
▲ 세월호 특별법부터 동성애자 포용 등의 선전·선동 기사로 가득한
모 기독교 인터넷 신문 사이트 화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지, 사람의 지혜와 사상을 좇지 않는다. 오히려 죄에 물든 사람의 생각과 사상을 대항하고 사로잡아 성경 말씀에 복종하게 한다(고후 10:5). 만약 이 둘 사이의 관계가 뒤집힌다면 그 종교는 머리 되신 주님을 따르지 않게 되므로, 더는 기독교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종교에 심취한 이들의 결국은 영원한 멸망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에서는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기독교가 크게 융성하여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소중한 영혼을 노략질해 가는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사람의 지혜를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보다 낫게 여김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생각을 사로잡지 못하면, 사람은 결국 자기 생각을 따라 성경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가 목회자가 되면, 회중 가운데 상당수는 그 사람이 개발한 개똥철학과 시시한 처세술을 하나님 말씀처럼 귀하게 여기고 떠받드는 잘못된 길로 나아가게 된다. 물론, 이런 일은 한순간에 극적으로 일어나기보다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부분부터 아주 조금씩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마치 가랑비에 옷 젖듯, 자기 생각에 서서히 사로잡혀 하나님 말씀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대개 올바르게 사역을 감당했는데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는 상황에 처한 사역자를 통해 시작된다. 그들은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좋은 방법은 없는지 깊이 고심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맞추어진다. 그렇게 생긴 새로운 시각은 성경을 ‘새롭게’ 이해하는 능력과 교회를 ‘부흥하게 하는’ 묘책을 끊임없이 제공해준다. 그들은 기독교의 ‘새 지평’을 열어젖힐 장밋빛 꿈에 부풀어 오르며, 그 꿈을 이루기 위해 열성적으로 사역을 감당한다. 사람들의 비난이나 수많은 역경도 그들의 힘찬 발걸음을 막아서지 못한다.
어느새 썰렁했던 예배당은 자리가 부족해지고, 회중의 얼굴에는 따뜻한 웃음과 목회자를 향한 존경과 사랑이 깃든다. 사방에서 그 비법(?)을 배우려고 몰려오는 사람으로 북적이며, 심지어는 세속 언론에서조차 관심을 보이며 취재를 요청한다. 기자가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을 이룰 수 있었는지 묻자,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마음을 쏟기 시작한 것이 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위에서 말하는 내용은 근본주의의 폐쇄성에 반감을 품은 대중이 교회를 외면하기 시작하자, 빌리 그레이엄이라는 근본주의자가 행한 일이다. 그는 헤럴드 오켄가, 칼 헨리 등과 함께 대중 친화적인 복음주의, 즉 신복음주의라는 노선을 탄생시켰다. 그러자 수많은 이가 그들의 신선하고 새로운 접근법에 환호하며 열성적으로 그들을 좇기 시작했다. 교회는 다시 활기를 띠고 사람으로 북적이게 되는 듯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근본주의자는 점점 전도를 가로막는 걸림돌 취급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신복음주의의 대중친화 노선은 교회의 급속한 세속화와 부패를 불러왔으며, 일반 사람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교회에 나갈 이유를 잃어버리게 만들었다. 결국, 교회로 몰려왔던 이들 대부분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 버렸으며, 그나마 좀 거룩하고 경건해 보이는 천주교로 개종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또한, 이 이야기는 여의도에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를 개척했다고 하는 조 모 씨에게도 똑같이 해당한다. 원래 그는 죄, 거듭남, 천국, 지옥, 부활 등을 전하던 장로교 목사였다. 그러나 6·25 사변 이후, 극심한 곤핍에 시달리던 우리나라 사람에게 그런 가르침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 크다는 현실 앞에서 고민하던 조 모 씨는 복음이 가르치는 내용의 초점을 천국에서 누릴 영광이 아닌, 이 땅에서 누릴 물질적인 축복으로 살짝 바꾸었다.
그러자 수많은 이가 그가 가르치는 그 새로운 복음에 열광하며 여의도로 구름떼처럼 몰려들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모인다는 교회를 일군 목회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그의 엄청난 성공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한국 교회의 성장과 화합을 저해하는 저급한 분파주의자라는 꼬리표가 그들을 따라다녔다.
그러나 그의 긍정 철학은 한국 교회의 거룩함을 순식간에 집어삼켜 버리고 말았다. 이제 한국 사회는 교회를 자신보다 더 부패하고 문제가 많은 집단처럼 여긴다. 기독교 관련 이야기만 나오면 염증을 내면서 비난을 퍼부을 마음의 준비를 이미 마친 사람이 수두룩하게 생겨났다. 다시 말해, 조 모 씨는 우리 사회에 6·25 사변 직후보다도 더 춥고 매서운 칼바람을 몰고 온 것이다.
이런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지혜보다 못하게 여기는 죄악에서 비롯하는 재앙이며 하나님의 심판이고 진노이다. 미국과 한국 교회는 빨리 회개하고 그러한 죄악에서 돌이켜야 한다. 그러나 미국은 물론, 한국 교회도 이런 이들을 여전히 교계의 큰 어른으로 대접하며 그들을 칭송하기에 바쁜 실정이다. 심지어는 청교도·개혁주의를 따른다는 이들 중에서도 청교도·개혁주의의 새 지평을 열겠다면서, 이러한 신복음주의 목회 원리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이도 나타났다.
그러나 성도는 이런 이들의 가르침과 행동을 지극히 주의하며 멀리해야 한다. 회개하지 않는 한, 그들은 마귀가 교회를 이념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투입한 유인 부대 노릇이나 하다가 주님 앞에 서게 될 어리석은 자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돌아간 데마와 별로 다를 것이 없다. 이들이 자기 임무를 훌륭하게 잘 수행하면 할수록, 회중은 말씀에서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그러면 마귀는 말씀에서 멀어진 회중을 이념의 올무에 완전히 옭아맬 임무를 수행할 특공대를 교회 안으로 투입하기 시작한다.
2. 신앙의 근본 토대를 바꿈
사람이 자기 지혜를 하나님의 어리석은 것보다 낫게 여기면, 당장 눈앞에서는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사실, 그 ‘좋은 일’은 신앙의 근본 토대를 갉아먹어 기독교 전체에 재앙을 부르는 지극히 ‘나쁜 일’이다. 그런 ‘좋은 일’이 계속 일어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기독교라는 건물 전체가 흔들리며 여기저기서 붕괴할 조짐이 일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 말씀보다 사람의 지혜를 더 낫게 여기는 달콤한 거짓말에 넘어가기 시작했다면, 그때부터는 눈앞에 보이는 온갖 문제나 현상을 제쳐놓고 신앙의 근본 토대를 지키고 튼튼하게 보수하는 작업부터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근본적인 보수공사는 별로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땜질 식 처방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그래서 근본적인 보수공사를 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은 대개 이곳저곳을 땜질하는 데 다 소비되곤 한다. 그러나 땜질 식 처방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므로, 사람들은 점점 근본적인 대책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근본 토대를 보수하려는 올바른 길로 돌아오는 이도 꽤 생겨난다. 그러나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이들이 훨씬 더 많다. 마귀가 그러한 상황 변화에 발맞추어, 신앙의 근본 토대를 이념으로 바꾼 정말 완전히 획기적이고 참신한 새 기독교를 그들 앞에 내어놓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정통 기독교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사상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복종하는 구도를 이루는 반면, 이 획기적인 새 기독교에서는 오히려 예수님이 사람의 지혜와 사상에 절대복종해야만 한다. 즉, 자기 생각과 사상을 예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기는 가장 지독한 형태의 우상숭배이자, 빛의 천사로 가장한 적그리스도에게 속아 넘어가 버린 기독교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의 지혜를 낫게 여기는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사람 지혜의 ‘도움’을 받아서 성취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래서 이 상태에서는 신앙의 근본 토대를 수복(修復)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남아 있으며, 초기에 잘만 대응한다면 거짓말처럼 본래 모습을 회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신앙의 근본 토대가 이념으로 대체되면 그런 회복도 불가능해진다.
사람의 생각과 이념을 이루는 일에 감히 예수님을 ‘동원’하려는 적그리스도에게 속한 이들을 상대하는 유일한 방법은 최대한 그들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뿐이다(계 18:4~8).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신속하고 철저하게 그렇게 해야 한다(마 24:17, 18). 자유주의 신학을 좇던 에타 린네만이 자신의 최대 업적이었던 성경 비평학을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고 완전히 돌이킨 것처럼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한다. 뭉그적대거나 아쉬움 속에 뒤를 바라보면 함께 멸망한다(눅 17:32, 33). 적그리스도에게는 심판과 멸망이 창세 전부터 확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적그리스도의 종교는 대개 사람의 지혜를 하나님 말씀보다 더 낫게 여기는 교회의 부조리를 오랫동안 깊이 경험한 이들에게서 발흥한다. 그들은 그 부조리의 늪에서 헤매다가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맞는다. 그러는 중에 자신이 아끼고 사랑했던 이웃과 친지가 속절없이 파멸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러한 사실을 얼마나 감추고 덮고 미화하는지를 똑똑히 보게 된다. 결국 그들은 그런 부패한 교회에 강하게 맞서면서, 저들이 걸어간 길과는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야만 희망이 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과정에서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나 저지르고 만다. 교회에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몰고 온 저들이 하나님께 등을 돌린 자들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저들은 신앙의 근본 토대까지 바꾸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저들에게 무조건 맞서며 완전히 새로운 길로 나아가려고 하면, 결국 신앙의 근본 토대까지 바뀌게 되는 훨씬 더 크고 무서운 재앙과 파멸을 맞게 된다.
분노로 가득한 그들의 눈에는, 기독교가 반(反)유대주의가 아닌 진정한 유대주의인 영적 이스라엘이라는 사실이 도무지 들어오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사도들의 신학과 신앙으로 ‘되돌아간 것’이라는 사실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개혁이란 기독교의 근본으로 되돌아가면서 잘못된 악습과 계속 결별해 가는 것인데, 그들에게는 당장 눈앞의 잘못된 점만 크게 보인다. 그것이 왜 어떻게 잘못되었으며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하며, 또 어떻게 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지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옛 잘못이 교회 안에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데 초점을 두고 모든 것을 재구축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헌금, 구제, 교회와 정부 사이의 경계와 관계, 인권, 직분, 찬양, 전도 방식, 교회 연합, 천국과 지옥 등의 가르침이 성경이 가르치는 원래 내용과는 완전히 분리되어 버린다. 그리고 우는 사자처럼 주위를 돌던 마귀는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새끼를 덮치듯이 성경과 분리된 가르침에 달려들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는다. 그러면 어떻게 알고 오는지 각종 이념이 독수리떼처럼 몰려와서 숨이 끊어진 가르침을 차지하려고 각축을 벌인다.
그렇게 교회는 무기력하게 각종 이념의 온갖 생체 실험이 이루어지는 마루타 양성소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그러나 회중들은 그런 사실도 모른 채 열심히 교회에 다닌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섬긴다고 하나, 실제로는 각종 이념에 유용한 생체 실험 결과를 제공해주는 데 온몸과 마음을 바친다.
예수님과 함께 가슴에 노란 리본을 달고 붉은 깃발을 높이 치켜들고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함’을 외치며 시국 선언을 하고, 노숙자와 빈민들에게 밥을 퍼주고 그들의 어려움을 함께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구원’의 빛을 발견한다. 철학과 상담과 종교의식을 통해 심적인 어려움이 해소되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하는 것에서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을 깨우치고, 교회에 주어진 고귀한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을 한반도 통일에서 찾아낸다. 그렇게 그들은 예수님 대신 이념을 섬기다가 지옥의 영원한 어둠 속으로 하나 둘씩 사라져 버리고 만다.1
하나님께서는 이런 일을 저지르는 자들에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맹렬한 진노를 품고 계시며, 복수의 칼날을 벼르고 계신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와 잘못을 다룰 때는 지극히 주의하고 신중해야 하며, 항상 초점을 신앙의 근본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에 두고서 조심스럽게 개혁을 진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고 눈앞의 부패를 척결하는 데 몰입해 빠져들어 가면, 결국에는 신앙의 근본에서 이탈하여 소중한 영혼을 학살하는 이념의 개망나니로 전락하는 일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3. 이방 종교와 화합하고 참 신앙을 대적함
이념에 사로잡힌 기독교의 종착지는 이방 종교와 기독교 사이의 본래 경계를 허물고 서로 화평하고 친밀하게 지내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은 죄에 깊이 물들어 있다. 그러므로 신앙의 근본 토대를 이념으로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 이념 안에 내포된 죄를 따라 같은 죄 가운데 거하는 이방 종교와 친밀하게 지내게 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롬 1:22, 23).
예를 들면, 불교는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라는 유심론(唯心論) 철학에 기초하여 고통과 번뇌와 부정함 등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요동함이 없는, 아주 막연한 궁극적 경지에 이르기를 추구한다. 그리고 유심론 철학과 궤를 같이하는 이념의 사육장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는 기독교의 믿음을 ‘자기 의지적 결정과 깨달음’으로 이해하고, 성경의 천국과 지옥을 마음속의 이상향(理想鄕)을 상징적으로 풀어낸 표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거짓 종교에 깊이 심취한 이들은 서로를 쉽게 알아본다. 외적인 모양과 형식과 표현은 다를지 모르나, 실제적인 부분에 들어가면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 막 입문한 사람이 상대방에 반감을 갖고 대항하려고 할 때, 그들은 좀 더 멀리 바라보라고 타이르며 제지하게 된다. 그렇게 마귀는 자기에게 속한 이들이 서로 싸우다가 망하지 않도록 둘 사이를 잘 중재해준다(마 12:25, 26).
그렇게 시간이 계속 흘러가면 결국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되며, 집회에 서로 초대하고 자연스레 각종 사업과 사역도 함께하게 된다. 나아가 우상의 얼굴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발견하고, 서로의 신앙과 직제를 일치하게 하려는 작업까지도 차근차근 실행에 옮기려고 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과 성령의 조명 하심을 따라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 사이에서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다툼과 충돌이 일어난다(마 10:34~36). 이념을 근본 토대로 삼은 거짓 종교에 깊이 심취한 이들과 진정으로 거듭난 이들은 서로가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같은 용어를 사용하며 신앙에 관해 말하나, 실제 의미는 정반대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한다. 그래서 그들은 상대방이 그리스도가 아닌 적그리스도에게 속했다고 주장하며 격분하게 된다.
이들은 만약 상대방의 신앙을 인정하면, 자기 신앙은 뿌리부터 흔들려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이해한다. 그래서 아직 잘 모르는 이들이 어쩌다가 상대방에게 호의적인 생각과 태도를 품기라도 하면, 심한 질책과 꾸중과 압박과 제재가 가해진다. 참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고 표현한다(마 23:13~36).
그러나 적그리스도의 종교에 심취한 이들은 앞에서는 평화, 뒤로는 저주를 말하는 양면 전술을 주로 사용한다(막 12:13~17). 그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참 신앙을 가진 이를 말살하려고 열을 올리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다(마 27:1~26).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죄에서 건져주신 예수님께서 계시는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어려움을 정정당당하고 정직하게 헤쳐나간다(히 11:15, 16, 35~38).
이 둘의 격렬한 대립 속에서 무엇이 참 신앙이며 무엇이 진정한 생명인지가 밝히 드러나지만, 그 일로 인해 회개하고 돌이키는 이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어쩌다가 바울처럼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이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는 일이 있기는 해도, 대부분은 더 맹렬하게 참 신앙을 대적하는 길로 나아간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요 16:2~4). 그리고 마귀는 그렇게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어 있는 자기 자식들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원대한 계획과 뜻이 참으로 잘 이루어졌다고 평가할 것이다.
4. 마무리하며
이처럼 마귀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땅에서 교회를 제거하고, 온 땅을 자기 소유로 삼아 영원히 하나님처럼 경배를 받는 것이다. 마귀는 그 일을 위해 우선 자기 지혜를 더 낫게 여기는 첩자를 교회에 침투시키며, 그 첩자를 통해 쿠데타를 모의하고 실행에 옮긴다. 또한, 쿠데타가 성공한 사육장에서는 그리스도인과 싸울 지옥의 전사와 이방 종교와 협력할 지옥의 외교 사절을 길러낸다.
그러나 마귀가 아무리 그렇게 꾀를 내고 날뛰어도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반석 위에 세워진 주님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는다(마 16:18). 무너지는 것은 오직 말씀에 믿음을 결합하지 않는 자들이 모이는 모임뿐이다(히 4:1~11). 진정한 성도는 이념의 수용소와 사육장으로 전락한 곳에서도 택함 받은 사람들을 이끌고 살아 돌아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님의 교회를 잘 지키고 보호할 사명을 성도에게 맡기셨다. 그러므로 성도는 교회가 이념에 낚여 적그리스도를 섬기는 사육장이 되지 않도록 마귀와 힘써 싸워야 한다. 주님께서는 그렇게 주님을 따르는 교회를 눈동자처럼 지키고 보호해주실 것이다.
각주
1 이런 일들의 신학적인 평가와 실제 사례를 보고 싶다면 밴드 오브 퓨리탄스 카페에 들어가서, 각종 칼럼과 신문 기사 모음을 살펴보기를 바란다.
「이념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이념 진단2」 이념에 사로잡힌 기독교의 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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