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9) 부흥의 불길 지킴이 에드워즈
김재호
1.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
1740년에 휫필드와 테넌트가 일으킨 거대한 각성의 불길은 활활 타올라 삽시간에 뉴잉글랜드 전역을 집어삼켰다. 그동안 죄로 죽었거나 잠들어 있던 영혼들이 깨어나 앞을 다투어 천국으로 몰려들었고, 신실한 목회자들은 그 허기진 영혼을 진리로 먹이고 입히느라 눈코 뜰새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1
그러나 에드워즈는 6년 전 힘차게 타올랐던 부흥의 불길이 인간적인 허약함과 그 틈을 파고든 마귀의 궤계로 인해 힘없이 주저앉는 일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동안 에드워즈는 사그라지는 불길을 다시 살려내려고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별 다른 결실을 보지는 못했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이번 부흥은 다른 누구보다도 더 특별하고 소중하게 다가왔을 게 분명했다. 에드워즈는 부흥의 불길이 다시 활활 타오르자 그 불길이 꺼지지 않고 퍼져가게 하는 데 온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그 일환으로 휠록, 포머로이, 파슨스 같은 젊은 설교자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설교하라고 했다. 더불어 엄청난 연구와 절제로 인해 건강이 늘 별로였음에도 직접 순회 설교를 하고 다녔다.2 아마도 에드워즈는 휫필드의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사역 방식이 부흥의 불길을 퍼뜨리는 데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보고 난 뒤에, 그의 방식 중 좋은 점을 차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처럼 목회자에서부터 목회자 후보생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흥의 불길을 진작하고 사방으로 퍼뜨리는 일에 힘쓰던 가운데, 조셉 미첨이라는 목회자가 엔필드 지역에 들르게 되었다. 그는 인접한 서필드 지역은 부흥의 열기로 뜨거운 데 반해, 엔필드는 냉랭하게 가라앉아 있는 상황에 대해 큰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리하여 미첨은 서필드와 엔필드를 오가면서 주중 예배를 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1741년 7월 8일에 서필드에서 설교를 마친 미첨과 휠록은 곧장 엔필드로 이동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그날 집회의 강연자였던 조나단 에드워즈와 합류했다. 에드워즈가 강단에 올라가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선포하자, 불경건한 엔필드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섭고 떨리는 하나님의 진노 앞에 크게 울부짖으면서 덜덜 떨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설교는 끝맺어지지 못한 채, 기도와 개인적 권면으로 중간에 마무리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차츰 그런 어마어마한 진노에서 자기를 건져주신 분을 기뻐하며 찬송하게 되었고, 결국 모두가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3
▲ 엔필드에 있는 에드워즈 설교 기념비
출처: (CC-BY-SA) ReformedArsenal, Wikipedia
본래 기질이 극도로 내향적이며 철저했고 섬세했던 에드워즈는 휫필드처럼 장엄한 웅변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그런 요소가 진리 자체에 주목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유형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그날, 오로지 예배당 뒤편의 시계추만 바라보는 자세로 사전에 꼼꼼하게 준비해온 설교 원고를 따라 차분하게 설교를 진행해나갔다.
그러나 그가 준비해 온 설교 내용은 일반인이 생각도 못할 정도의 깊이와 무게가 있었고, 모든 표현과 사상이 철저하게 성경의 가르침에 기초해있었다. 에드워즈가 그 모든 내용을 특유의 빈틈없는 논리로 엮어서 청중들이 지금 얼마나 영적으로 위험천만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차례대로 설명하자, 청중들은 자기 발 밑에 지옥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은 비참한 현실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설교의 후반부를 들을 정도의 여유조차도 남아있지 않았다. 설교가 한창 진행 중인 상황임에도,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온몸으로 맛본 그들은 그저 크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들었던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여러분 각자에게 모두 해당됩니다. 그 비참한 세계, 그 유황불이 타고 있는 불 못이 여러분 발 밑에 펼쳐져 있습니다. 지옥이 입을 크게 벌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서 있을 곳도 없고 붙잡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지옥 사이에는 허공만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뜻뿐입니다. ……(중략)……
어떤 사람이 거미나 혐오스러운 벌레를 불 위에서 쥐고 있는 것처럼, 지옥 불구덩이 위에서 여러분을 붙잡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킨 여러분을 싫어하십니다.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불처럼 타오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옥 불 속에 넣기 합당한 존재로 간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정결한 눈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을 참지 못하십니다. 가장 혐오스러운 독사가 우리 눈에 비치는 것보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눈에 천 배나 더 혐오스럽게 보입니다. 어떤 패역무도한 반역자가 자신의 왕에게 한 것보다도 여러분은 하나님께 무한히 더 큰 죄를 지었습니다. ……(중략)……
하나님의 진노는 지옥에 있는 저주받은 많은 사람들에게 타오르듯이 여러분에 대해서도 타오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가느다란 실에 매달려 있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 타오르면서 매순간 그 실을 끊어 태워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중보자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으며, 여러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붙잡을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진노의 불길을 피할 곳도 전혀 없으며, 하나님께서 한 순간만이라도 여러분을 붙잡도록 할 만한 것을 한 적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습니다.」4
이처럼 에드워즈는 휫필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했으나,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의 수고 모두에 인(印)을 쳐주셨다. 청중들은 ‘말씀을 통해’ 당신의 실존과 거룩한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려워하며 떨었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의 은혜만 전심으로 높이고 찬양해야 하는 실로 무가치한 자라는 사실을 심령 깊은 곳에서부터 자연스럽게 깨닫고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요즘에는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처럼 ‘스스로 개발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려는 자아도취에 취한 이들이 참 많다. 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제3계명을 어기고 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 거짓 선지자의 그럴 듯한 소리를 주의하고 멀리하도록 하자. 그러면서 기록된 말씀이 증거하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과 위엄을 우리에게도 분명하게 나타내주시기를 참으로 소망하고 간구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 앞에 펼쳐 보여주시면, 우리의 신앙은 고질적인 무기력함과 퇴보를 단숨에 떨쳐내고 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랑하는 온전한 신앙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2. 비상(非常)한 체험
체험 없는 신앙을 과연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다. 진정 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어느 정도의 건전한 체험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체험은 한 사람의 신앙을 굳건하게 해주며, 신앙이 헛된 공상이나 사변으로 치우치지 않게 붙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그러나 체험 자체의 강도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다. 누구는 거의 바울처럼 천국을 거니는 듯한 영적 경험을 하기도 하며, 누구는 그리스도의 위대하심 앞에서 한없이 자기를 낮추면서 한없이 온유하고 차분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또 누군가는 다른 이에게 말하기 민망할 정도로 강도가 약하거나 지극히 평범한 체험만 하고 천국에 갈 수도 있다.
이처럼 체험 그 자체에는 별 의미가 없다. 산을 옮기고 바다를 가를 수 있을 것만 같은 엄청난 경험을 했다고 해도, 그것이 그저 일회성 사건(이벤트)에 불과하다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나간 옛 시간(왕년)을 추억하며 사는 것이 신앙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므로 체험 자체에 목매는 신앙은 분명히 잘못된 신앙이다. 신앙적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통해 오늘의 삶과 인격에서 얼마나 참된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가?’이다. 체험은 항상 그런 맥락에서 이해되고 평가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러한 맥락을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올바른 신학적 지식과 판단력은 참된 체험이 건전하게 활동할 수 있는 토대요 바탕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각성의 불길이 처음 일어난 1735년에, 조나단 에드워즈의 아내 사라 에드워즈는 아주 비상하고도 강렬한 영적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그 체험의 강도는 1739년에 가장 강렬했고, 그녀는 대각성의 불길이 다시 타오른 1741~42년에 다시 한 번 영적으로 강하게 고양되기 시작했다.
신체적, 기질적으로 다소 허약하고 내향적이었던 사라 에드워즈는 선천적으로 우울함을 지닌 사람이었으며, 때로는 그런 감정에 거의 짓눌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태생적인 약점을 은혜로 잘 다스리고 이겨나갔으며, 그로 인해 전반적으로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5
그러나 그녀는 신앙적인 영역에서 어떤 모자람이나 결점이 발견될 때면 타고난 우울함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쉬웠다. 그럴 때면 그 우울함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면서 더욱 은혜를 갈망하는 일이 반복되곤 했다. 그녀의 그러한 연약함과 간절함은 영적인 예민함과 감수성을 한층 더 높이 끌어올려주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런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녀의 영혼에 당신의 영광을 밝히 나타내주시자, 사라 에드워즈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기쁨과 황홀함을 맛보게 되었다. 그 기쁨과 황홀함이 어찌나 크고 강렬했던지, 그녀는 온 몸의 맥이 풀리고 몸이 크게 떨리기도 했으며, 그 자리에서 펄쩍펄쩍 뛰거나 심지어는 정신까지 잃기도 했다.6
이러한 그녀의 영적 체험은 근본적으로 말씀이 가르치는 하나님의 신적 속성을 비상하게 깨닫고 자각함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무익하기만 한 현대의 많은 강렬한 체험처럼 밑도 끝도 없이 기분이 확 달아올라서 그러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사라 에드워즈는 이 비상한 체험을 했을 때 자기의 무기력함과 다시 한 번 싸우는 중이었다. 그녀는 자기 부족함과 허물로 인해 하나님께서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를 간절히 찾고 구하면서 하나님을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친밀하게 자신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래서 홀로 조용히 그 내용을 묵상하던 중에, 하나님을 지극히 인격적인 분으로 인식하게 되는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신적 속성을 밝히 나타내 보여주시자 사라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고 영광스러우시며, 또한 자신은 그에 비해 얼마나 무가치하고 쓸모 없는지를 분명하게 자각하게 되었다.7
그녀는 그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하심, 진노, 지옥의 무시무시함, 그런 진노를 받기에 합당한 사람의 타락한 마음,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컬은 불경건함의 깊이, 구속 사역의 영광에 대한 압도적인 깨달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나타난 공의와 사랑의 조화, 그리스도의 충만하심, 하나님 언약의 확실성, 하나님의 자존성과 주권성 등등,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분명하고도 생생하게 인식하게 되었다.8
위에서 언급한 내용은 성경이 너무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내용이지만, 죄 중에 태어나는 사람은 본래 그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 의미를 깨닫는 데는 ‘성령의 조명’ 하심이 꼭 필요하다. 성령님께서 사라 에드워즈의 영혼에 밝은 빛을 비추어주시자, 그녀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로 그 내용을 아주 비상하게 체득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로 인해 그 가르침을 이해하고 소화해내는 깊이가 전보다 한층 더 깊고 넓어진 것이었다.
「또 다음 일들이 위에서 말한 깨달음에 뒤따랐습니다. 즉, 하나님의 위엄에 경외를 느끼고 그분의 위대하심을 비상하게 깨닫게 되어서 종종 육체가 완전히 탈진된다든지, 무한히 순수하고 밝은 불꽃 같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깨달음 때문에 영혼과 육체가 압도당한다든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눈길에 대한 깨달음이 때로 육체의 힘을 앗아가 버린다든지, 하나님의 진노가 한없이 무시무시하다는 비상한 깨달음이 마음에 수시로 강하게 비쳐져서 이 진노를 받을 위험성이 있는 죄인들의 말할 수 없는 비참에 대한 깨달음으로 압도된다든지, 때로 모든 가증스러운 것의 하수구요 독사들의 둥우리인 인간 마음의 지극히 오염된 모습이나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영원한 지옥의 무서움이 눈에 함께 들어온다든지, 그것도 하나님의 최소한의 동정도 받지 못하는 가운데 아무리 최선의 의무를 다했다 할지라도 여전히 비참을 당해 마땅하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이해된다든지 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중략)……
자기 백성과 언약하신 신(神)으로서의 하나님의 충족성과 신실하심이 때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 3:14)는 말씀 속에 나타나 온몸의 기력이 고갈될 정도였습니다. 영광스럽고, 그 길을 찾을 수 없으며, 창조와 섭리 양면에서 하시는 일에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깨달음(그것은 온 영혼을 삼키며 온몸의 맥이 빠져 버리게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행복하심은 무한히 변치 않으신다는 생각 때문에 영혼이 누리는 달콤한 기쁨,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시며(self-sufficient), 누구를 의지하지 않으시며, 모든 것을 통제하시며, 절대적이고 통제할 수 없는 능력과 주권으로 자기 뜻을 이루신다는 생각에 그는 기쁨이 넘쳤습니다.」9
참된 영적 경험이란 이와 같다. 단순히 열광적으로 기뻐하다가, 집에 가서는 내가 왜 기뻐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체험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순간적으로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피를 흘리고 계신 환상을 보았다거나, 이빨 몇 개가 금으로 변했다거나, 어떤 병이 나았다거나,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거나, 혀 꼬부라진 말이 줄줄 쏟아져 나오는 등의 체험도 마찬가지다.
진정한 영적 체험이란 성경의 가르침 자체가 그 영혼 안에서 새롭고 분명하게 되는 일을 말한다. 그러한 체험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전인격적으로 이해하고 자각하는 일이 뒤따른다. 그것이 없는 수많은 기이한 체험은 도리어 참 신앙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러니 그런 잘못된 체험은 멀리하고, 건전한 체험은 신중하게 추구하도록 하자. 그리하면 우리 신앙은 뿌리깊은 나무처럼 온갖 세속의 풍랑에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320, 322.
2 위의 책, pp. 322~326.
3 위의 책, 327, 328.
4 조나단 에드워즈,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죄인 (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0, pp. 37, 41~43.
5 조나단 에드워즈, 『균형 잡힌 부흥론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Revival)』, 양낙흥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1, pp. 119~124.
6 위의 책, pp. 123~126.
7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 359.
8 앞의 책, pp. 126~127.
9 위의 책, pp. 125~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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