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7) 꺼져가는 불길을 살리려는 에드워즈
김재호
1. 중도주의자 에드워즈
대각성이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일어난 조셉 홀리의 자살 사건은 성도들에게 큰 충격과 혼란을 안겨주었다. 수많은 사람을 영생으로 인도했던 죄에 대한 각성이 도리어 절망과 자멸이라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어두운 결실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에드워즈는 사탄이 얼마나 강력하고 큰 권세를 가진 존재인가를 성도들에게 상기하도록 했다. 그러면서 평소에 그렇게 강력한 사탄의 활동을 억제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으로써, 손톱만큼이라도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라고 권면했다. 즉, 에드워즈는 이 두렵고 충격적인 일이 최근에 베푸신 큰 은혜로 인해 우쭐대며 자고(自高)하는 일을 막고, 오직 하나님만을 높이며 더욱 그분을 의지하게 하려는 주권적인 섭리라고 설명했던 것이다.1
에드워즈는 그렇게 대각성의 불길을 계속 키워가려고 했고 또 그렇게 되리라고 낙관했지만, 현실은 그와는 조금 다르게 진행되었다. 그 사건을 기점으로 신앙을 향한 열기가 한풀 꺾이고,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다른 것들에 분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각성이 한창일 때는 모든 사람의 일상적인 대화 주제가 신앙에 관한 것이었다. 더불어 모두가 진지하게 회심과 성화를 추구한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홀리의 자살 사건이 있은 지 2년 뒤에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하루는 예배당 대들보가 갑자기 내려앉아서, 많은 사람이 거기 깔리는 큰 재난이 일어났다. 수많은 이가 목숨을 잃게 될 것이라는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사망자는 단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 그로 인해, 많은 이가 하나님의 경고와 보호하심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롭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사건의 영적인 영향력이 2~3년 전의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노샘프턴의 영적인 열기는 그렇게 눈에 보일 정도로 사그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사회적 지위를 향한 경쟁과 시기로 인한 고질적인 분열과 다툼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편, 술집을 드나들며 방탕과 음란을 즐기던 청년 문화는 대각성 기간에 부활한 10인조 행정조직의 순시, 감독으로 인해 다시 고개를 들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러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는 내적인 원동력 부족으로 인해, 인위적인 경건의 열심과 죄에 대한 지나친 과민함이 나타났다. 그리고 이런 양상은 힘없이 사그라지는 대각성의 모습을 잘 대변해주었다.2
이미 노샘프턴에서는 솔로몬 스토다드의 목회 말년에 감독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방종이 일시적으로 증가했던 일이 있었다. 그때 에드워즈는 그동안 연구하고 묵상하면서 체험하고 검증했던 내용을 신학적으로 명료하고도 꼼꼼하게 정리한 다음, 그 가르침이 듣는 이의 심장과 폐부를 깊이 파고들게 적용하는 것으로 대응했었다. 그로 말미암아 노샘프턴 사람들은 영적인 잠에서 깨어나 하나님을 열심히 찾고 구하게 되었다.
예기치 못한 사탄의 반격에 대해, 에드워즈는 그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맞섰다. 에드워즈에게는 간절히 회심을 추구하다가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또한 혹시 자기기만에 스스로 속은 것은 아닌가 괴로워하면서도 끈질기게 성경을 상고하고 자기를 검증하며 보냈던 청년 시절이 있었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자기 모습을 반추(反芻)하면서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의 정서와 영적인 열심, 그리고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정서적 고양 사이의 차이점에 관해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에드워즈가 세상에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가 무엇인지, 또 에드워즈가 근본적으로 어떤 사람이었는지가 밝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에드워즈가 정서적인 변화와 고양을 강조했던 것은 열광주의자처럼 지성을 무시하고 폐기하기 위해서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그는 성령의 역사가 본질적으로 초자연적인 역사이므로, 진정 그러한 역사에 힘입어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은 ‘반드시’ 관념 수준의 지식을 초월하여 정서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인격적인 지식’을 갖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많은 이가 ‘관념 수준의 지식’과 ‘신사적인 삶’ 정도에 머무르려고 할 때, 에드워즈는 그것을 넘어서는 정서적인 측면의 변화에 방점을 두고 영적인 정서를 고양하기 위해 무던히 애썼던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참된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을 아는 양질의 ‘지식’을 제공하기에 성경을 거스르지 않는다고 하면서, 열광주의에 대한 경계선을 확고하게 그어주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이처럼 모든 것을 신앙 안에서 통합적으로 대하는 에드워즈가 하는 말과 행동을 유심히 잘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인지 밝히 드러난다. 끝까지 물고 늘어져보면, 에드워즈는 항상 한가운데 서 있다. 이쪽을 많이 강조한다고 해서, 저쪽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양면이 항상 동등하게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은 단지 어떤 일의 우선순위와 효율성에 따라, 무엇을 먼저 말하고 무엇을 나중에 말하려고 할 뿐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가운데 그가 지향하는 바의 방점과 겉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이 보이는 어떤 단면을 가지고 섣부르게 그 사람의 전체 모습을 판단하는 것만큼 망신당하기 딱 좋은 일도 없다. 에드워즈에게는 정서의 중요성만큼이나 지성도 중요했다. 에드워즈는 근본적으로 신학자였지만, 동시에 당대의 일류 철학자와 철학적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뛰어난 최고의 철학자이기도 했다. 이런 중도주의자는 근본적으로 어떤 사회나 사람이 특정한 부분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다른 쪽을 부정하려고 하는 딱 그만큼만, 반대편 사실의 중요성과 정당성을 옹호하는 모습을 보이곤 한다.
따라서 정서에 대한 강조가 큰 부작용을 가져오자, 에드워즈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지성의 중요성과 역할을 강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정서적이고 영적인 고양의 극대화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그가 궁극적으로 소망한 바는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 계속 늘어나서, 결국 이 땅에 그리스도의 나라(천년왕국)가 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비상한 영적 경험이나 정서적인 고양이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 반대하지 않았다.3
그러나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한’이라는 전제 조건에서 잘 나타나듯이, 에드워즈는 그러한 현상과 정서적 작용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방향과 결과를 항상 ‘지성적으로’ 주목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과학자가 어떤 현상의 근본 요인과 속성에 주목하면서 그 현상 전체를 이성적으로 포괄하여 설명해내듯이, 에드워즈는 어떤 비상한 영적 현상과 정서적 고양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곳이 어디인지를 그 근본 요인과 속성을 따라가면서 계속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일부 심약한 이들이 에드워즈의 강조점을 오해해서(분명, 그럴 만한 점이 있었지만) 큰 피해를 겪기도 했지만, 에드워즈는 원래 처음부터 ‘지성’에서 출발하라고 가르쳤었다. 또한, 초월적인 성령의 역사에 이르면 그 관념적인 지식을 버리라고 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관념적인 수준을 넘어서서, 전 인격적으로 그 진리가 가르치는 바를 ‘즐거워하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계속 찾고 구하라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에드워즈는 참 신앙에서 그러한 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단순히 관념적이기만 한 신앙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참 신앙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정서적인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부지런히 사역을 감당해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에드워즈의 발걸음은 거기서 멈춰있지 않았다. 에드워즈는 회중에게서 보이는 정서적인 변화를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 속성을 헤아린 다음, 다시 그 내용을 성경과 맞추어보는 ‘지성적인 작업’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 왔기에 그는 성령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로 인한 참된 정서적인 변화와 일시적이고 자연적이며 감정적인 흥분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차이점을 명료하게 구분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탄의 훼방으로 인해 성도들에게 그러한 ‘지식’이 필요한 시점이 되자, 에드워즈는 그 내용을 풀어 교인에게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우리의 눈이 온전히 열려 우리의 실수들을 보게 된 후에는 점점 더 반대편 극단으로 가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마귀는 시계추를 있어야 할 위치보다 훨씬 더 멀리 끌어갔습니다. 마귀가 시계추를 가능한 한 가장 먼 곳으로 가져가서 시계추가 자체 무게 때문에 되돌아오기 시작할 때, 마귀는 아마도 있는 힘을 다해 시계추를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안식을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우리로 하여금 적절한 중도에서 정착하는 것을 방해할 것입니다.」4
우리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조차도 당신의 일에 유익하게 사용하시려고 세상에 남겨두시고, 그들의 악행을 선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시는 절대 주권자시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의 자기 의와 로마 제국의 패권주의와 악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이루는 도구 및 복음이 온 세상에 퍼져가게 하는 통로로써 쓰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사가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있음을 굳게 믿고, 성급하게 한쪽으로 치우치는 일을 항상 주의해야 한다.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경외하는 이는 본성적으로 잘 치우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악에 대해 불평하거나 보복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기를 간구하면서 기꺼이 하나님의 주권에 모든 것을 맡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성전에 가득한 상인들의 짐승과 돈 궤 앞에서 거룩한 분노를 뿜어내면서, 그것들을 거칠게 몰아내는 일에도 역시 주저함이 없다. 진정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이는, 하나님께서 일체의 치우침 없이 공의와 자비를 세상에 온전하게 나타내시는 것을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의 일부분과 단편적인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성급하게 결론에 이르는 일을 늘 주의해야 한다. 마귀는 항상 그 빈틈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2. 사랑과 그 열매
대각성의 불길이 점차 사그라지는 그때, 에드워즈는 회중에게 세 편의 연속설교를 하였다. 첫 번째 연속 설교는 마태복음 25장 1~12절의 열 처녀 비유를 강론한 것으로써, 현재 상황에 대한 에드워즈의 경고를 담고 있다. 에드워즈는 주님께서 오신 다음에야 비로소 지혜 없는 자가 누구인지 밝혀질 것이며, 따라서 참 신앙을 표면적으로 흉내 내는 정도에 그치는 이들이 지금 교회 안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신적이며 영적인 빛 (A Divine and Supernatural Light)』의 핵심 내용을 다시 한 번 반복한다.
꿀을 직접 먹고 나서 꿀의 달콤함을 사랑하는 사람과 꿀을 연구하고 나서 꿀의 달콤함에 관해 말하는 사람의 차이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지닌 위대함과 탁월함을 깊이 깨닫고 탄복하는 사람’과 ‘단순히 멸망을 피하려는 차원에서 천국에 가려는 도피성(逃避性) 열심을 내는 사람’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경외하기에 신앙의 고된 의미를 기꺼이 감당해 가려는 ‘의지와 성향’이 그 마음 안에 든든히 뿌리내리고 있다. 하지만 후자는 그저 당면한 문제와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기에, ‘도피성 열심과 은밀한 죄로 향하는 잘못된 성향’이 그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5
에드워즈는 이미 『신적이며 영적인 빛』을 통해 참 신앙이 단순히 관념적인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님을 아주 잘 설명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참된 신앙적 정서란 단순히 정서가 고양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성령의 감화를 통해 ‘의지와 성향’이 근본적으로 변화하는 문제임을 말하기 시작한다. 이는 특정 주제의 핵심과 근본 요인을 계속 명료하게 하면서, 그 ‘전제’를 토대로 삼아 상하좌우로 뻗어 가며 모든 현상을 통합해가는 전형적인 에드워즈의 사고방식을 유감없이 잘 보여준다.
따라서 에드워즈가 ‘의지와 성향’을 강조하기 시작했다고 해서, 앞서 말한 지성과 정서의 중요성과 역할을 배제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는 그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다는 사실을 전제해놓고, 성령님의 감화에서 ‘의지와 성향의 변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말했던 것뿐이다. 즉, 참된 신앙 정서는 반드시 의지에 영향을 끼쳐서 ‘지속적으로 삶이 변화’하게 역사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발걸음은 훗날 『신앙과 정서 (The Religious Affections)』와 『의지의 자유 (Freedom of the Will)』라는 결실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계속된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그 모든 일에 끝까지 힘쓰게 했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설교한 작품이 바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사랑과 그 열매 (Charity and Its Fruits)』라는 작품이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의 마음에 관하여 숙고해봅니다. 거기 하늘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은 사랑이 왕 노릇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의 근원적인 자리(좌소, 座所)요, 원주체(原主體)입니다. 하나님 안에는 신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다른 이로부터 사랑을 받는 주체와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자체로 사랑이 본래부터 거하는 사랑의 처소입니다. ……(중략)……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은 제일 먼저 하나님의 독생자를 향하여 무한하고 필연적으로 흘러갑니다. 그 사랑은 혼합된 것이 없이 무한하고, 그 무한하고도 충만한 모든 사랑을 받기에 너무나 합당하신 그분에게 흘러 부어집니다. 이 무한한 사랑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향하여 끝없이 행사됩니다. 샘이 그분을 향하여 흘러나오는 물줄기를 뿜어낼 뿐만이 아닙니다. 샘 전체가 이분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 될 뿐 아니라, 사랑의 무한하신 주체도 되십니다. ……(중략)……
그리고 이 사랑은 이상과 같은 행사들에만 국한되지 아니합니다. 그 사랑은 피조물 된 하늘의 모든 거민을 향하여도 헤아릴 수 없는 시내를 이루어 흘러갑니다. 하늘에 있는 모든 성도들과 모든 천사들에게 흘러갑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은 그들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흘러가고, 그 머리로 말미암아 모든 지체들에게 흘러갑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지체들은 창세 전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중략)……
그 하늘의 영광 중에 다른 존재들보다 낮은 지위에 있는 자들은 더 영광스러운 존재들을 넘보며 시기함으로 자기 행복을 감소시키는 고통을 전혀 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복된 사회의 모든 지체들은 서로 다른 지체들의 행복을 즐거워합니다. 모든 자들 안에 존재하는 자비의 사랑이 완벽하기 때문입니다. 각자는 진지할 뿐 아니라 모두에게 완전한 선을 행합니다. 진지하고 강한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의 부요함을 보면 감격하고 즐거워합니다. 그 사랑이 완전하다면, 사랑 받는 자가 더욱 부요해질수록 그 사랑을 베푸는 그 자신이 더 기쁘고 즐거워집니다. 사랑하는 자의 형통은 그 사랑의 양식(糧食)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더 잘될수록 그 사랑은 더욱 풍성하게 베풀어집니다.」6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깨닫고 탄복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기로 온전히 ‘뜻을 세운’ 사람은 절대로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6). 그리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전 13:7). 조롱과 채찍질과 결박과 투옥을 당하며, 돌로 맞고 톱으로 켜지고 검에 죽임을 당하고, 떠돌며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받으면서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면서 다니게 된다고 해도 그들의 뜻을 꺾지 못한다. 그들은 장차 임할 영원한 그리스도의 나라, 곧 영원한 사랑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그 모든 것들을 기꺼이 감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히 11:13~16, 36~38).
그러므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자기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며 인내하는 대신(자기부인), 하나님의 사랑에 호소하면서 자기 문제 해결과 안위를 꿈꾸는 현대 기독교의 달콤하고 감상적인 속삭임(자아실현)은 새빨간 거짓말에 불과하다. 그러한 사랑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참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사랑에는 자기를 사랑하는 타락한 사람의 ‘의지와 성향’을 하나님께로 돌려놓을 능력이 전혀 없다. 그러한 거짓 사랑에 속지 말자. 나무는 그 열매로 알 수 있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도록 하자(마 12:33).
3. 구속 사역의 역사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는 구속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실제 역사 가운데 성취되어 나타난 사건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러한 구속의 사역을 실제 역사 가운데서 어떻게 이루셨고, 또 그 사역을 어떻게 마감하실지를 전체적으로 아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일은 분명히 우리 주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 가운데 대각성이 차지하는 위치가 매우 특별하고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 대각성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보여주신 많은 구속(救贖)의 사건과 근본 성격은 똑같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럽고 귀중한 사건에 속했다.
에드워즈는 최근의 침체 원인에는 아직 회심하지 않은 이들이 좋지 못한 결실을 내고 있다는 측면 외에도, 교인들이 아직 덜 성숙하여서 그러는 측면도 있다고 여겼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구속의 사역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는가에 관한 전반적인 시야가 제대로 트이지 않아서, 교인들이 지나치게 좁게 생각하며 판단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드워즈는 대각성이 구속 역사에서 차지하는 큰 비중과 역할을 교인들이 충분히 이해하게 되기를 바라면서, 또 한 편의 연속 설교를 진행해갔다.
에드워즈는 이 연속 설교에서, 우선 구약과 신약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 왔는가를 펼쳐 보였다. 사탄은 항상 강한 권세와 능력으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여 파멸에 이르게 하려고 기를 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영광과 지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은 항상 허사로 돌아가고, 도리어 자멸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모세, 다윗, 엘리야의 이야기는 모두 다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와 사탄의 패망을 보여준다.
에드워즈는 그러한 구속 역사의 전개 유형을 교회사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핍박을 당하셨으나, 결국 예루살렘의 대적자들을 뿔뿔이 흩어버리셨다. 초대 교회를 맹렬하게 핍박하던 이교도의 나라 로마 제국은, 결국 그리스도께 굴복하고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그토록 기세등등하던 적그리스도, 곧 교황은 종교개혁의 치명타를 맞고 심하게 비틀거리고 있다. 그 사이 그녀를 대적하여 멸망하게 할 기독교 국가와 학교가 이 땅에 많이 나타났으며, 그로 인해 참된 경건과 학문이 현재 전 세계적으로 부흥하고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가 주목한 바와 같이, 그 모든 일의 근본 요인은 최근의 대각성처럼 복음을 듣고 영혼이 깊은 죽음의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노샘프턴 교인들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 사역이 분명하게 벌어지는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에드워즈는 우리에게서 일어난 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 성경 말씀에서 확증하는 것과 같이 계속 힘을 얻어서, 결국 마귀의 모든 훼방과 간계를 다 무너뜨리고 끝내 승리할 것이라고 회중에게 말했다.
다시 말해, 에드워즈는 회중에게 이렇게 말한 셈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대각성을 통해 구속 역사를 한 걸음 더 전진시키셨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분명하고 풍성하게 나타내 보이셨다. 성경은 그러한 진보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함을 계속 정복해가서 끝내는 온 세상이 여호와의 영광으로 충만한 곳이 될 것이라고 증거한다. 그러니 그런 위대한 사실을 바라보면서 지금의 어려움과 침체를 이겨내라.”
우리 마음을 울리는 웅장한 승리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재림 이전에 이 땅에서 모든 악이 정벌 되는 일을 핵심으로 하는 에드워즈의 후천년적 종말론은 사실 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조금 어렵다. 성경은 성도에게 근본적으로 예수님 재림 이후에 임할 약속의 땅, 곧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경건과 거룩함으로 살아가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나라가 임할 때, 이 세상은 불경건이 극에 달했던 노아의 날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실도 함께 가르쳐준다(벧후 3:14; 마 24:37~39).
그러므로 성도는 이 세상이 침체와 회복을 반복하면서 결국에는 복음으로 모든 것이 개선되고 좋아질 것이라는 웅대한 희망에 기대어 오늘의 어려움을 이겨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시대와 환경에 상관없이, 심지어 구원받을 자가 단 한 명도 없어 보이는 실로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남겨두신 7천 명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사실을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야 한다. 즉, 모든 소망을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에만 두고, 결국 심판받아 멸망하게 될 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신앙의 의무를 매일 성실하게 감당하려고 해야 한다(롬 11:3~5).
이처럼 에드워즈는 성도가 구속 역사를 전체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성과 중요성을 잘 인식하기는 했으나, 아쉽게도 그가 제시했던 구속 역사의 최종 전망에는 조금 오류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에드워즈가 살던 때가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참된 복음의 회복과 부흥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던 시기였음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후천년적인 전망을 영혼 구령의 열심으로 충만한 이들이 많이 나타나는 일에 선하게 사용해 주셨음도 함께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구속 역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요한 성경적 세계관, 즉 기독교 세계관의 기본 틀이다. 그러므로 구속 역사의 전체 조망에 오류가 끼어들면, 현재 일어나는 현상과 사물의 의의도 그만큼 왜곡된다. 구약의 선지자가 예고한 하나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과 부활을 통해 ‘이미(already)’ 이 땅에 실제로 임했다(눅 17:20, 21). 믿는 자는 누구나 그 나라에 들어간다(마 11:11, 12).
‘그러나 아직(but yet)’ 그 절정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영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상태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근본적인 변화가 없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말해도 좇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눅 17:22~24). 모든 신약의 성도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에 모든 시선을 고정하고, 그 일을 함께 바라보며 소망했던 사도들이 가르쳤고 또 본을 보여준 바를 따라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전 4:6; 벧후 1:19). 그러한 ‘전제’ 안에서 성도는 모든 것을 각자가 받은 은사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면 된다. 심지어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같은 지극히 사소한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고전 10:31).
「그가 가장 열망했던 것은 ‘교회의 희년(The Church’s Years of Jubilee)’이었다. 이 시기에 대해 교인들에게 설명하면서 그는, 자신이 성경의 가르침을 확신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 분명하고 능력 있는 복음 설교와 함께 성령의 비상한 부으심이 있어서 지금은 세상에서 조롱당하고 있는 거룩한 신앙의 교리들이 되살아나게 하시고, 많은 무리가 이단과 가톨릭과, 다른 거짓된 종교에서 돌아오게 하시며, 또한 많은 사람이 자신들의 죄와 더러움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허다한 무리를 그리스도의 안전한 집으로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했다.」7
에드워즈의 이 약속은 사사로운 호언장담이 아니다. 이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해 있는 확실한 약속이며, 에드워즈는 목회자로서 단지 그 약속을 회중에게 선포해주었을 뿐이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택하심을 받은 참된 교회와 가정 가운데는 이러한 영광스러운 부흥이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이다. 신약의 교회는 그렇게 세워졌고 그렇게 세워져 가고 있으며, 그렇게 세워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영광스러운 약속을 바라보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기에 힘쓰도록 하자(딤후 4:2). 베드로처럼 다가오는 파도에 겁을 내며 물에 빠져가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으로 세상과 싸워 이기는 자가 되자(마 14:28~32).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는 모든 이에게 언약의 축복으로 항상 함께 해주실 것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252~254.
2 위의 책, pp. 277~279, 미주. p. 774.
3 위의 책, p. 315.
4 조나단 에드워즈, 『균형 잡힌 부흥론 (Some thoughts concerning the Revival)』, 양낙흥 옮김, 부흥과개혁사, p. 420.
5 앞의 책, pp. 284, 285.
6 조나단 에드워즈, 『사랑: 고린도전서13장 (Charity and Its Fruits)』, 서문강 옮김, 청교도신앙사, 2013, pp. 401, 402, 405.
7 앞의 책, pp. 298, 299.
(※ 한 주간 1 명, 총 401이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