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7) 실패와 좋은 심령
김재호
▲ 크리스천을 재빨리 집 안으로 들여
마귀의 화살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선의(Good-Will)
「크리스천: “그런데 혹 처음 그 길을 걷는 사람이 길을 잃어버리게 할만한 구부러진 길이나 모퉁이들은 없습니까?”
선의: “물론 이 길에는 그런 것들이 많이 연결되어 있지만 그런 길들은 모두 구부러져 있고 폭이 넓습니다. 그러나 바른 길은 단지 하나뿐이며 그 길은 매우 좁고 또 곧게 뻗어 있는 길이므로 당신은 쉽사리 옳고 그른 길을 분간할 수 있을 것입니다.”」1
한 번 속이는 자에게 된통 당해본 이들은 올바른 길을 찾고, 그 길로만 걷는 일에 다른 이들보다 훨씬 더 큰 열심을 내게 마련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런 이들은 다시 길을 잃는 일을 심히 두려워하고 경계하게 된다. 그들은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악에 피 흘리기까지 대항하고, 진리를 위해서라면 타협을 모르는 용감한 자들이 되어간다. 이처럼 진리를 향한 마음의 소망이 간절하면 간절할수록, 거짓은 하나둘씩 점점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그의 마음이 향해 있는 진리는 늘 곧고 바르며 어렵고 딱딱하지만, 거짓은 늘 끝이 휘었고 속이며 쉽고 간편하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죄 사함 얻기를 갈망하는 이들의 마음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쉼 얻기를 사모하는 쪽으로 굳게 기울어져 있으므로, 그동안 걸었던 넓은 길로 다니기를 ‘본성적으로’ 꺼리게 된다. 여기에 멋모르고 속아서 사망의 문턱에까지 이르렀다가 겨우 구출된 경험이 더해졌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저 길을 걸으면 안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면서 꺼리는 정도가 아니라, 저 길로 가면 반드시 죽는다는 분명한 심령의 ‘지각’이 생겨난다.
이들의 ‘준비된’ 마음은 진리에 참으로 진지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이들은 그것이 왜 진리이며, 우리가 왜 이 좁은 길로 걸어야 하는지를 구태여 묻지 않는다. 이들의 심령에는 그러한 사실이 이미 너무도 깊게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러한 자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는데, 나는 그들도 인도해야 한다. 그들도 내 음성을 들을 것이고 한 목자 밑에서 한 떼가 될 것이다.” (요 10:16, 바른 성경)
“너희는 ‘아직 넉 달이 지나야 추수 때가 온다.’라고 말하지 않느냐? 보아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아라. 이미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다.” (요 4:35, 바른 성경)
사실, 이러한 이에게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은 다른 이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보다 훨씬 ‘수월하다’. 이런저런 설명이 많이 필요하지 않다. 더불어 이들에게는 일반적인 이들과는 조금은 다른 면면이 나타나게 마련이다. 이들에게는 성경의 가르침을 마치 자기 이야기를 하듯 생생하게 풀어내는 재주가 있다. 분명히 감정에 호소하는 것이 아님에도, 하는 말들이 이상하게 청중의 심령을 깊이 파고든다.
이런 현상은 이들의 머리가 비상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러한 실패를 겪는 동안에, 일반적인 사람이 진리를 인격적으로 체득하는 데 필요한 오랜 인내와 연단의 과정을 자기도 모르게 이미 거쳐왔기에 나타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다.
이들은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그 자리에 이르기까지, 일반인이 생각하기 힘든 수준의 쓰디쓴 실패와 좌절들을 ‘이미’ 수없이 맛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쓰디쓴 경험들은 드디어 이들의 귀에 들려오는 진리의 영광스러움을 한껏 반사해주는 거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들은 한낮의 태양 아래 환히 빛나고 있는 진리를 보고 마음 깊이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기뻐한다. 모든 것이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먼저’ 겪었던 고난과 실패가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아래 이들을 더 넓고도 깊은 곳까지 한달음에 이를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들은, 루터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진리 앞에서 천국 문이 열린 것 같았다고 말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진리를 온몸으로 깨닫고 흡수한다. 이들은 일시적으로 감정이 들뜨거나 자기 열정에 사로잡혀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의 근본 성향과 의지가 아주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변화된다.
바로 그 변화에 힘입어서, 진리가 가르쳐주는 좁은 길을 절대로 벗어나지 않으려고 하는 정서적 열정이 강렬하게 발휘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칼빈도, 낙스도, 버니언도, 휫필드도, 뉴턴도 모두 다 오랫동안 거짓의 어둠 속에서 방황하며 실패하고 고생했던 이들이었다. 심지어 이들 중에는 사경을 헤매던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올바른 길을 찾게 된 뒤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른 이들보다 더욱 강력하고 풍성하게 전하는 하나님의 위대한 종으로 쓰임 받았다.
혹시, 속이는 자에게 홀딱 속아 넘어가서 자신의 젊은 시절을 그냥 무익하게 허비해버린 것만 같은 이가 있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올바른 길을 찾으려고 분투하는 이가 있는가? 누군가 당신을 좀 잘 가르쳐주고 도와주었으면 하는 갈망에 여전히 잠 못 이루는 이가 있는가? 다시는 영적 사기꾼에게 속아 넓은 길로 가고 싶지 않으며, 또 어떻게든지 그러한 일을 피하고자 하는 한결같은 마음의 소원을 가진 자가 있는가? 주님께서 고단한 내 심령에 주시는 쉼을 얻기까지 주님을 찾는 일을 절대로 쉬지 않으리라는 굳은 의지가 살아 숨 쉬는 이가 있는가?
진정 그렇다면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하나님께서는 적절한 때에 당신을 그리스도의 넓은 품 안으로 인도해주실 것이다. 절대로 진리를 향한 지금의 발걸음을 멈추거나, 지금의 답답하고 절망스러운 상황에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라.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당신 같은 이들이 진리를 찾고 구하는 지금의 일을 계속하라고 독려해주신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보아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고 그들을 오래 버려두시겠느냐?’” (눅 18:6, 7, 바른 성경)
“내가 그 삼분의 일을 불에 던져 은을 제련하듯이 연단하며 금을 정제하듯이 시험하겠다. 그들이 내 이름을 부를 것이고, 나는 그들에게 응답할 것이니, 나는 그들을 ‘내 백성’이라 부르고, 그들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것이다.” (슥 13:9, 바른 성경)
“예루살렘아, 네 성벽 위에 내가 파수꾼을 세웠으니, 그들이 낮이나 밤이나 온종일 잠잠하지 아니할 것이다. 여호와를 기억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우시고 세상의 찬송이 되게 하실 때까지 너희는 그분께서 쉬지 못하시게 하여라.” (사 62:6, 7, 바른 성경)
아무리 시대가 어둡고 속이는 자가 많다고 해도, 진리에 목마른 사람과 그들에게 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주는 하나님의 사람은 ‘항상’ 존재한다. 복음이 전해진 곳이라면 어디에나 그런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당신이 진정으로 진리를 찾아 갈구하며 죄로 인한 고통과 비참함에서 벗어나기를 참되게 갈망하고 있다면, 머지않아 그 소원은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죄로 인한 참상을 깊이 맛본 만큼,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안식도 깊이 맛보게 될 것이다.
그러니 올바른 것을 배우고 그리스도께 나아가기를 힘쓰며, 좁은 길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그 영적인 진지함을 계속 꾸준히 유지하라. 절대 그것을 포기하지 말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적당한 때에, 그 암흑에서 당신을 건져낼 자를 보내주실 것이다. 그때가 오면 당신을 참으로 환영하고 기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주님의 우리 안에 먼저 머물고 있던 동료 양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진정 죄 사함을 얻으려다 많은 실패를 겪은 이들을 이와 같이 위로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롬 8:28, 바른 성경)
모든 성도가 당신의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소망하면서 주님께 기도하고 있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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