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성품과 인간관계 진단2」 목회자와 성도, 성도와 성도 사이는 어떠해야 하는가?
신요한
▲ 서레이 홀에서 수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하는 찰스 스펄전 목사
성도가 나누는 교제의 본질
신앙생활에서 성도의 교제는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참된 성도의 교제를 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대부분은 성도의 교제 및 관계의 진정한 의미를 잘 모릅니다. 교회에서 성도의 교제에 대해 잘 가르쳐주지 않기도 하지만, 교인들 역시 으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성경의 가르침 듣기를 게을리하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세상 사람이 친구와 어울려 친하게 지내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되고 있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께 속하여서 그분의 소유가 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에 참여한 자로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모든 축복에 참여하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롬 5:1-9; 고후 5:17).
또한, 그는 항상 마음 가운데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가게 됩니다.1
이처럼 성도의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이 서로 사귀며 교통하는 지극히 아름답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은혜와 사랑으로 다른 성도를 대하고 돌보아주어야 합니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의 교제
목회자는 참으로 중요한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목회자는 성도에게 지극히 귀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줌과 함께, 그 말씀대로 실천하면서 하나님을 어떻게 경외하는가에 관한 모범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또한 그 일을 성심성의껏 감당하면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성도를 진실하게 사랑하고 그들이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매우 특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관계를 신랑과 신부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 에드워즈는 신실한 목회자와 그리스도께 속한 성도가 올바른 목회 사역 안에서 연합하는 일은, 마치 신랑이 신부와 결혼하는 것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이는 목회자와 성도는 한 언약 아래 연합되어 있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2
에드워즈는 그 말을 하고 난 뒤, 목회자와 성도가 마치 부부처럼 서로 기쁨으로 상대방을 섬기면서 서로 돕고 유익을 주며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는 가운데 새로운 영적인 자녀를 낳는다고 말합니다. 이처럼 에드워즈는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 존경, 순결함을 바탕으로 연합된 관계로 생각했습니다.3
참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를 특별하고 귀중하게 여겼던 에드워즈는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이라는 유명한 설교를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설교는 에드워즈가 모든 것을 다해 섬긴 교회를 회중과의 분쟁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떠나게 됐을 때 했던 고별 설교입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런 상황에서도 여전히 목회자와 교인의 관계가 지상의 그 어떤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4
그러나 오늘날에는 에드워즈가 가졌던 이런 생각과 태도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목회자나 교인이나 서로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려고 합니다. 깊게 알려고 하지 않는 것은 목회자나 교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목회자의 심방마저도 불편하게 여기는 교인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서로 간에 관심이 전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여타 세상 사람과 교제하는 것과 똑같이, 서로 부담스럽지 않은 범위 안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지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은 그와 같이 적당하게 거리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현명하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리스도인이 목회자와 성도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처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참으로 크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 된 우리는 목회자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여행을 하는 중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는 거리가 멀고 길도 험합니다. 그래도 꼭 그곳에 가야만 합니다. 다행히도 우리 손에는 나침반과 지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 참 막막합니다. 그때, 나침반과 지도를 잘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동행하면서, 길을 안내해준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목회자는 바로 성경이라는 나침반과 지도를 가지고, 우리가 올바르고 안전한 길로 걸어갈 수 있도록 안내해주는 고마운 사람입니다. 목회자의 설교가 근본 교리와 어긋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목회자의 말씀 선포를 신뢰하면서 그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그 설교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고 보호해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저는 종교개혁자 존 칼빈을 무척 좋아하고 존경합니다. 칼빈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많이 배웠고, 그가 저술한 『기독교 강요』를 통해 신앙의 토대를 쌓았습니다. 하지만 칼빈이 전한 하나님 말씀보다 제가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배 시간에 선포되는 우리 교회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우리 목사님의 설교가 칼빈의 설교보다 더 위대하기에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문제는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객관적인 측면에서는 칼빈의 설교가 더 좋을 수 있습니다. 칼빈은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요 설교자로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사용하신 교회 역사에 길이 남을 사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섬기고 있는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으로 양육을 받아 장성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물론, 그 과정 가운데 칼빈과 같은 여러 경건의 선배가 남겨준 책도 선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오늘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시대나 통용될 수 있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책을 볼 때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 책에 쓰여있는 그 모든 진리는 바로 현재 소속되어 있는 교회를 더욱 사랑하고 아끼는 일에 사용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책들은 오늘날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에 더 잘 적용하는 데 쓰여야 합니다.
과거에는 목사님의 말이라면 무조건 다 옳다고 여기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때는 지금처럼 대중매체나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관계로, 다른 가르침을 들어볼 기회가 별로 없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목회자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자기를 겸손히 낮출 줄 아셨던 분들이셨기에 그리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옛 어르신들에게서 종종 나타나던 맹목적인 목회자 신뢰와 추종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올바른 목회자라고 해도, 결점이나 오류가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회자 존중이 목회자 숭배로 변질되지 않게 주의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간절하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과연 그 말씀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해야 합니다(행 17:11). 그리하여 목회자의 권위 존중과 맹목적 추종 경계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다 잡아내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 교회에서 그렇게 행동하는 이를 찾아보기는 매우 힘듭니다.
어떤 이가 교회에 새로 나옵니다. 처음에 그 사람은 목사님의 설교를 잘 듣고 열심히 교육을 받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잘 자라는 것 같고, 모든 일이 은혜롭고 평안한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표정이나 행동이 사뭇 달라집니다. 그의 입에서는 불평과 회의로 가득 찬 말이 심심치 않게 흘러나옵니다.
그런 이는 교회에서 읽으라는 책을 좀 읽고 공부도 좀 하면서, 자신이 모든 것을 다 깨우쳤다는 착각에 점점 빠져듭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예전과는 달리 좀 아닌 것 같고, 감동도 없으며, 새로운 것도 없고 너무 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의를 기울여 살펴보면, 실제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목사님의 설교는 그 사람이 처음 왔을 때나 시간이 조금 흐른 지금이나 별 신학적 차이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 설교는 세부적인 측면에서 계속 발전하고 교정되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의 높아진 마음입니다. 머리만 커지고 마음과 몸은 처음 올 때 그대로인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그 교만함으로 인해 결국 자기 영혼에 큰 해를 입히고 맙니다. 그런 이는 처음 성경을 배울 때 목사님의 설교를 꿀처럼 달게 듣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지식 몇 가지가 머리에 들어옴과 함께,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왜 우리 목사님은 칼빈이나 에드워즈, 로이드 존스처럼 설교하지 못할까? 혹시 우리 목사님이 경건의 모양만 갖춘 영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인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마음에 품습니다.
그다음에는 목사님의 건전한 권위를 무시하고, 자기가 익힌 몇 가지 단편적인 지식으로 모든 것을 아우르려는 무모한 일을 저지를 정도로 영적 상태가 악화됩니다. 결국 그런 사람은 자기의 철없음과 인격의 부패함을 모두에게 드러낸 뒤에, 교회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리고 맙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모두 이와 비슷한 경우를 한두 번쯤은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겸손한 자세로 죽을 때까지 배워가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작 1, 2년의 양육을 통해 신앙의 모든 것을 체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도를 평생 건전한 목양 가운데 머물게 하시고, 그 속에서 자기의 죄성과 분투하면서 오래 참는 법을 익히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인내를 따라 신앙의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게 하십니다.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인의 덕목은 첫째도 겸손, 둘째도 겸손, 셋째도 겸손입니다.
그러나 이 덕목이 없어진 지 오래인 이들이 교회에는 참 많습니다. 아니, 처음부터 가지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기가 어렵고 급할 때, 자기를 낮추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일어섬을 보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오직 주님의 은혜에 자기를 겸손히 의뢰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일은 오직 거듭난 이들만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이들이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신앙이 자라고 성숙해졌다면,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유익을 위해 힘쓰기를 기뻐했을 것입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교회를 통해 당신의 거룩한 구속의 사역을 감당하십니다. 그런데 스스로 서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목사님의 설교조차 지루해하고 좋아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이 얼마나 큰 모순입니까?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가 그를 삼키기 전에, 빨리 자신이 어디에서 넘어졌는지 곰곰이 자기를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참된 겸손함 가운데 서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성도가 주님의 인도 하심을 잘 좇아 살도록 기도하고, 성도 역시도 목회자가 자기 사역을 올바르게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목회자 없는 성도가 있을 수 없고, 성도 없는 목회자 역시 있을 수 없습니다. 목회자와 성도는 주님의 일을 함께 감당해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에드워즈의 말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은 자기 직분에 신실하며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목사님을 여러분에게 보내며 맡기신 그 큰 사명에 있어서 목사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한다면, 여러분과 여러분의 목사님이 서로에게 기쁨의 면류관이 될 때, 그리스도와 목사님과 여러분이 모두 함께 영광스런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서 만나 순전하고 끝없고 결코 쇠하지 않는 기쁨으로 서로를 기뻐할 때가 올 것입니다.」5
이처럼 목회자와 성도의 관계는 무척 중요하고 소중합니다. 목회자는 성도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고, 성도 역시 그리해야 합니다.
성도와 성도 사이의 교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났고 하나님을 안다(요일 4:7).」
이어서 성도와 성도의 교제에 관해 살펴보겠습니다. 다음의 말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본 적이 있는 말일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얘기하곤 합니다.
“기도할게.”
저는 이 말이 무책임하게 들릴 때가 간혹 있습니다. 아니, 사실은 제가 입바른 말처럼 종종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렇게 들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어떤 문제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큼 중요하고 효과적인 일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다른 이를 위해 마땅히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성도에게 기도에 힘쓸 것을 강조합니다.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여라(살전 5:25).」
또한, 야고보 사도는 “너희 가운데 고난당하는 자가 있으면 기도하고, 즐거워하는 자가 있으면 찬송하여라(약 5:13).”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기도해준다고 하는 것이 대체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라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런 때에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기도만’ 하고 난 뒤에,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 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가능한 대로 그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기도와 더불어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빌립보 교인은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 그의 필요를 생각하여 한두 번 쓸 것을 보냈습니다(빌 4:16). 또한,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필요를 돕던 에바브로디도는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빌 3:25-30). 로이드 존스는 요한일서 강해 설교에서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에게 실제적 사랑을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은 단지 편지를 쓰거나 아름다운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이 되어 실제적 행실과 행위로 사랑을 드러내어 그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6
우리 주위에는 진심으로 다른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들 중에는 가진 것이 나사렛 예수의 이름밖에 없어서, 기도 외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는 이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말을 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기도해주시는 분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께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에게 은혜와 사랑으로 늘 풍성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디, 여러분은 저처럼 기도한다는 말을 무책임하게 사용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귀한 기도와 어울리는 실제적인 행실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존 칼빈은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성도의 공동체는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을 동시에, 공평과 필요에 따라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 가운데서 서로 나누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사가 각 개인에게 어떻게 주어졌든지, 설혹 하나님의 경륜에 따라 특별히 어떤 자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나누는 자들이 된다(롬 12:4-8; 고전 12:12,26). 한 몸의 지체가 일종의 공동체로서 서로를 나누듯이, 그러면서도 각자의 특별한 은사와 독립된 사역을 수행하듯이 성도들은 서로 모여 한 몸으로 지어져 간다. 이것이 공교회요,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다(엡 1:22-23).」7
성도의 교제는 간단하거나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도저히 엄두도 못 낼 만큼 복잡하거나 어렵지도 않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을 이룬 성도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선한 의도가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고, 또 우리의 부족함으로 인해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상황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두려워서 성도와 교제하기를 주저하며,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지내려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런 분에게 감히 다음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그렇게 멀찌감치 물러나 있기만 하시려는 것입니까? 그렇게 계속 지켜만 보시면서, 자신과 딱 맞는 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런 이가 나타나면 “때가 왔구나!” 하면서, 그들하고만 어울려 다니려고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러면 안됩니다! 돌이켜 다시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참 의미를 깨우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가려는 그 길에는 파당을 짓는 일과 시기와 분쟁과 모함이 가득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한몸이 된 모든 성도를 다 사랑해야 합니다. 어떤 이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데도 우리와는 성향과 기질이 좀 맞지 않는다고 그를 배척하거나 멀리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께서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요일 4:7).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니,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요일 4:19-20).」
물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지체끼리 마냥 좋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감정이 상하기도 하며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닌 지 얼마 지나면, “교회도 별수 없구나.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지.”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람들을 보되, 그들의 현 모습은 보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조명과 가르침 안에서 그들을 봐야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을 향한 나의 태도는 바뀐다. 이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감정을 고무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형제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내가 그를 형제로 대해야 함을 의미한다. 나는 마치 그가 사랑스러운 품성을 지닌 듯이 그를 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바를 그에게 행해야 한다. 나는 죄를 보아서는 안 되며, 그 이면에 있는 마음과 영혼을 보아야 한다.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한다. 내가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연금술처럼 작용해 형제에 대해 내가 지녔던 감정들마저도 하나의 도전으로 여길 것이며, 지금까지 사랑의 표현이라고 여겨왔던 그에 대한 감상들도 분별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우리는 그와 같은 특별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다.」8
어떻습니까? 우리는 다른 성도와 거룩한 교제를 나누고 있습니까?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저 역시도 그리 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완벽할 수 없습니다. 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앞서 말한 사람들이 염려하던 대로 상처를 주고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를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다른 성도를 대하려고 힘쓰십시오.
하나님께 간구하고 또 간구하십시오. 이것은 혼자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사랑으로 함께하려고 애쓰십시오. 그렇게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면서 주님이 계시는 저 천국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각주
1 가스펠서브 기획편집, 『라이프성경사전』, 생명의말씀사, 2006, p. 107.
2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 성도들의 영혼지킴이』,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132-137.
3 위의 책, pp. 136-156.
4 조나단 에드워즈, 『심판 날 다시 만날, 분쟁하는 목사와 교인들 (A Farewell Sermon)』,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5, pp. 46-47.
5 앞의 책, p. 177.
6 마틴 로이드 존스, 『하나님의 사랑 (The Love of God: Studies in 1 John)』, 김태곤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0, pp. 243-244.
7 존 칼빈,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양낙흥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8, p. 151.
8 앞의 책, p. 250.
「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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