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3」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가?
김재호
그리스도인은 수많은 불신자와 마주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 만약 거룩하고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들을 무작정 피하기만 한다면,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밖으로 나가야만 할 것이다(고전 5:10).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불신자로 가득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비둘기처럼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마 10:16).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첩첩산중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한복판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1. 하나님과 전쟁 중인 세상
현대의 많은 이가 하나님과 이 세상이 영적으로 서로 반목(反目)하며 전쟁 중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로 살아간다. 심지어 이런 현상은 교회에서조차 점점 일반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그로 인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복을 주시는 ‘참 좋은 분’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기대하고 추측한다. 교회는 또 교회대로 그러한 세상의 기대에 부응하여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표어 아래, 세상에 매우 친밀하고 포근하게 다가서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교회가 세상에 소개해주는 하나님은 보통 고된 세상살이에 지치고 상한 마음을 어루만져주면서 넓은 가슴으로 품어 그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게 해주는, 참으로 인자한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래서 현대의 많은 이가 ‘좋은 말씀’을 듣고 마음에 위로를 얻으려고 열심히 교회를 다닌다. 그들은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얻을 것이라는 주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가장 사랑한다. 그렇게 세상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찾았으며, 교회도 참 능력 있게 세상에 복음을 전한 것 같은 광경이 연출된다.
그렇다면 세상과 교회, 둘 다 더 좋아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과 교회는 점점 더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세상에서는 본성상으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일을 개인의 권리로 여기는 일이 일반화되고 있고(동성애), 교회는 교회대로 온갖 사회적 추문을 일으키며 많은 이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은혜롭게’ 진행되지 않았던가?
그런데 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타난 것일까? 현대 세상과 교회는 오늘도 그 답을 찾아 이리저리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다. 그러나 답은 그렇게 먼 데 있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과 이 세상이 영적인 전쟁을 벌이는 중이라는 진리를 교회가 망각해버린 데 있다. 교회는 이 세상 사람에게, 그들이 현재 하나님에게 반란을 일으킨 반역자요 원수와도 같음을 밝히 알려주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죄를 지은 이 세상 사람은 하나같이 자기를 왕으로 세우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께 왕좌를 내어드리고, 겸손하게 그분을 경외하며 순종하는 일을 가장 싫어하고 미워한다. 그런 타락한 사람의 본성은 자기 왕국을 지켜줄 ‘조력자’ 역할을 해줄 든든한 수호신을 기대하며 찾게 마련이다. 이는 만신전(萬神殿, pantheon)으로 유명한 로마 역사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던 차에 때마침 현대 기독교가 ‘위로와 치유의 신’을 그들에게 소개해주니, 세상이 그 매력적인 신을 어떻게 거부하겠는가? 그래서 세상은 그 ‘위로와 치유의 신’을 여러 우상들과 함께 자기 만신전 안에 추가해놓고, 전에 해오던 대로 그 우상들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빈다.
그러니 고대 로마·그리스의 악습(동성애)이 다시 살아나 활개를 치는 것과 교회가 손가락질받는 것도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다. 즉, 교회가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대신 이 세상의 눈치를 살폈고, 결국 그로 인해 아론처럼 번드르르한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내고 그 앞에 경배하는 일에 앞장서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출 32:2~6).
그러므로 현대의 많은 이가 즐겨 듣는 이 ‘긍정 복음’을 가르치고 전하는 교회는 다 황금 송아지 앞에서 먹고 뛰놀던 ‘배교한 이스라엘’과 똑같게 봐야 한다. 그 거짓 복음이 가르쳐주는 하나님은 당신을 거스르는 세상 죄인에게 도무지 진노할 줄 모르시는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하나님’이다. 이래도 허허, 저래도 허허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그저 예뻐하고 귀여워해주실 뿐이다. 그 하나님은 인간의 선한 의도를 헤아리고 복 주시기에 여념이 없다. 이런 복음을 전하는 자는 천사라도 저주가 있을 지어다. 아멘(갈 1:8~10).
그러나 실상은 ‘긍정 복음’이 가르치는 것과 정반대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들의 모든 교만, 불의, 완악함을 꿰뚫어보시면서 심히 불쾌해 하시고 진노하시며 분을 발하고 계신다(시 7:11). 이 세상이 자기 숭배를 그치지 않는 이상, 그 진노와 저주의 불길은 영원히 사그라지지 않는다. 다 함께 다음의 성경 구절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진노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불경건함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는데,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안에 밝히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들에게 밝히 보여주셨다(롬 1:18, 19, 바른 성경)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 싫어하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림받은 마음에 내버려두셔서 합당하지 않은 일을 하게 하셨다. 그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 살인, 분쟁, 시기, 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수군거리는 자이고, 비방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무례한 자이며 교만한 자이고, 자랑하는 자이며 악을 꾸미는 자이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이며 우매한 자이고, 신의가 없는 자이며 무정한 자이고, 무자비한 자이다. 그들은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그런 일을 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다(롬 1:28~32, 바른 성경).」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본질상 죄인이요 반역자임과 그로 인해 임박한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을 삼키기 위해 그들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요 3:36). 하나님과 이 세상은 치열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도피 중인 수배자를 쫓는 경찰관처럼, 또 반정부 게릴라를 소탕하는 군인처럼 이 세상 사람의 뒤를 맹렬하게 쫓으시며 그들에게 돌격하신다(출 19:22).
하나님께서는 그 반역자들에게 영적인 문둥병을 내려 그들을 저주하신다. 그 결과, 이 세상 사람들은 코가 떨어져 나가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도 아픔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문둥병에 걸린 환자가 되었다. 그들은 그 저주가 빠른 속도로 자기 생명을 갉아먹고 있는데도 태연자약하게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에만 몰두한다(마 24:38). 이미 포위를 마친 군대가 돌격을 앞두고 최후통첩을 하고 있는데도, 그 말을 농담처럼 여기면서 여전히 자기를 ‘도와줄’ 애굽의 군대를 간절히 찾고 바란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어야만 하는 실제 사실이다.
“너희가 찾고 있는 그 조력자 수호신이란 없다. 그러니 쓸데없는 저항을 그만두고 빨리 투항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미’ 너희에게 임해있는 ‘그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너희를 ‘완전히’ 삼켜버릴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맺는 관계의 출발점을 언제나 여기에 두어야 한다. 괜히 세상 사람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에게 살갑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는 이 세상이 그들의 죄로 인해 멸망이 코앞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불을 붙이고 검을 주어 서로 싸우게 하려고 오셨지, 세상에 평화를 주기 위해 오시지 않으셨다(마 10:34~36).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과 친구 된 모든 이는 주님을 배반한 가룟 유다요, 예수님보다도 더 똑똑한 체하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마귀의 일꾼들로부터 우리 자신을 잘 지키고 보호해야 한다.
2. 세상의 반역자에게 돌아오기를 권하시는 하나님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을 향해 그토록 진노하고 계신다면, 왜 이 세상이 그 진노로 멸망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왜 당신의 원수들을 싹 다 쓸어내시지 않고 계시는 것일까? 성경은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셔서 세상이 멸망하기를 원치 않으시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이런 일을 하는 자를 판단하면서 같은 일을 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인애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고, 그분의 인애하심과 용납하심과 오래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는 것이냐? 다만 너의 고집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나타날 그 날에 너에게 임할 진노를 쌓고 있다(롬 2:3~5, 바른 성경).
약속의 주님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너희를 위하여 오래 참으시며,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벧후 3:9).」
우리가 한센씨 병을 앓아서 코와 입이 문드러진 채 모진 고생을 하면서 살아가는 이를 볼 때 마음이 짠해지듯이,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도 죄로 죽어가는 이 세상 사람들을 가여워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고 죽음으로 치닫는 그들을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신다(욘 4:11).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자기 죄로 멸망하는 일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돌이켜 사는 일을 기뻐하신다(겔 33:11).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질풍 같던 돌격을 잠시 늦추시고 죄인과는 늘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신다. 이는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불길이 죄인을 사르지 않게 하시려는 것이다(출 19:23, 24). 그러시고는 당신의 사자(使者)를 보내셔서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요구하신다. 그렇게 하기만 한다면 지난 일의 잘못은 조금도 묻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말이다.
또한, 그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은 당신께서 마련하여 ‘거저’ 주시겠다고 아들을 통해 보증하시면서 그렇게 하셨다. 그뿐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대항하여 농성 중인 성에 식량과 물을 비롯한 생필품 공급을 끊지 않으실뿐더러 풍성하게 공급해주시기까지 하신다. 그리고 저들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하기만을 바라시면서 오랫동안 참고 기다려주신다. 그러나 성안 사람들은 항복을 권하는 사절들을 때리고 능욕하며 죽이기에 바쁘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갚지 않으시고 조용히 참고 기다리시며, 인자와 긍휼을 그들에게 꾸준히 베풀어주신다.
하나님과 이 세상이 근본적으로 원수관계이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향해 격렬한 진노와 저주를 발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이 인자와 긍휼도 꼭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요나는 하나님께 큰 책망을 들었다(욘 4:4). 심지어 계시록에는 이 인자와 긍휼을 버리고 열심히 사역하는 에베소 교회를 향해, 계속 그리하면 더는 사역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 실로 두려운 경고의 말씀도 기록되어 있다(계 2:1~6).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바울이 복음과 원수 된 자기 동족을 애달파하며 ‘진실하게’ 그들을 아끼고 사랑했던 것처럼 세상 사람들을 한껏 마음에 품어야 한다(롬 9:1~3). 아브라함과 롯처럼 멸망할 세상(소돔)의 죄에 대해 마음 아파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내어줄 용기와 끈기를 마음 깊이 품어야 한다(창 18:20~33; 벧후 2:7, 8).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면 10리를 동행해주며, 겉옷을 빼앗아가면 속옷까지도 기꺼이 내어주면서까지 그들을 ‘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벧전 3:9; 마 5:40~48). 그런 사랑 외에는 반역에 찌든 세상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려세울 수 있는 길이 없다.
물론, 사람에게는 이러한 일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없다. 사람이 어떻게 원수 된 자를 거짓 없이 사랑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그래서 배교한 현대 교회가 하나님과 세상이 서로 원수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주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얘기를 꺼냈다가는, 무서운 미움과 증오를 품고 죽일 듯이 돌격해오는 세상을 참된 긍휼과 인자로 맞아주어야 할 터이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처음부터 친근하게 다가서서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리도 자기 동료를 사랑할 줄 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랑은 그러한 인간적인 사랑이 아니다. 교회가 세상에 선포하고 본을 보여주어야 할 사랑은, 바울처럼 자기를 원수로 대하며 맹렬히 돌격하는 이들에게 돌아갈 책임까지도 기꺼이 대신 치러줄 용의를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참 사랑이다.
우리에게는 진정 그러한 사랑이 있는가? 그러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모든 수고는 실로 헛될 뿐이다. 그러한 사랑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도 멸망의 늪에서 건져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사랑을 마음에 품고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눅 23:34).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세상에 복음을 널리 전해야 한다. 또한, 그 과정에서 우리에게 찾아오는 모든 어려움과 핍박을 묵묵히 감내하고 불평하지 말아야 한다. 아비의 허물을 덮어줄 줄 모르고 경박하게 날뛰며 동네방네를 돌아다닌 함에게 돌아온 것이 무시무시한 저주였음을 명심해야 한다(창 9:20~25).
3.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할 세상
세상 사람이 그러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받아들이고 주님께로 나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을 무시하고 모욕하며 능멸하는 곳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와 함께 결사항전의 의지를 활활 불태우며 주먹을 불끈 쥔다.
성경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께서 다시 비유들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을 위하여 결혼 잔치를 베푼 어떤 왕과 같다. 그가 자기 종들을 보내어 결혼 잔치에 초대받은 자들을 불러오게 하였으나 그들이 오려고 하지 않았다. 그가 다시 다른 종들을 보내며 말하기를 ‘초대받은 자들에게 가서 말하기를 내가 잔치를 다 준비하였는데, 내 황소와 살진 짐승을 잡아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으니, 결혼 잔치에 오라고 하여라.’ 하였으나, 그들은 이마저 무시하고 어떤 이는 자기 밭으로 갔고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갔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그 왕의 종들을 잡아서 모욕하고 죽여 버렸다.
그러자 왕이 분노하여 자기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자들을 죽이고 그들의 성읍을 불태우고, 그가 자기 종들에게 말하기를 ‘결혼 잔치는 준비되었으나 초대받은 자들은 자격이 없으니, 너희가 네거리에 가서 누구든지 만나는 대로 결혼 잔치에 초대하여라.’ 하였다. 그 종들이 거리들로 나가서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결혼 잔치가 손님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마 22:1~10, 바른 성경).」
세상 사람이 그 은혜의 초청에 화답하여 스스로 문을 열고 주님께로 나오는 경우는 단 하나도 없다. 세상은 하나님의 긍휼이 풍성하면 할수록 한층 더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다. 그리고 그 귀한 구원의 날들을 오로지 자기 무장을 더욱 공고하게 하는 데 사용할 뿐이다.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그 헛된 저항을 그치게 하지 않으시면, 세상은 그렇게 자기가 이길 수 있다고 끝까지 믿어 의심치 않게 되는 길로 나아간다(눅 14:23). 그리고 그 방자함이 극에 달하면 오히려 먼저 성문을 열고 나와서,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하고 계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 감히 덤벼들면서 이렇게 외친다.
“하나님 따위는 없다. 우리는 계속 이렇게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갈 것이다. 최후 심판이 대체 어디 있으며 종말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있으면 어디 한번 우리에게 당장 불벼락을 쏟아봐라.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켰다는 그 엄청난 유황불은 뒀다가 대체 무엇에 쓰려고 그러느냐? 우리에게 공갈치지 마라. 우리는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만큼 어리석지 않다.”
베드로후서에도 기록되어 있는 이러한 오만방자함(벧후 3:3, 4)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멸망할 짐승의 비명과도 같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 양쪽을 모두 올바르게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세상 사람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 역시도 올바르게 이해하려고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풍성한 인자와 긍휼을 짓밟는 세상의 오만방자함을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행한 그대로 갚아주신다. 참고 계시던 그 무시무시한 진노를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그들 머리 위에 전부 다 쏟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의적으로 복음을 멸시하고 대적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서는 단호하게 돌아서야 한다(행 13:45~51). 왜냐하면 이제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의 불길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멸시받는 상황과 마주하면 그런 상황을 주도한 사람들과는 온 힘을 다해 멀어져야 한다. 그들이 불쌍하다고 머뭇거리면서 자꾸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그때는 겉옷도 가지러 가지 말고 즉시 돌아서야 한다(마 24:15~18). 자꾸만 지체하는 롯을 천사가 얼마나 재촉했던가(창 19:15)? 하나님께서는 계시록의 말씀을 통해 성도에게 복음을 멸시하고 대항하는 바벨론에서 속히 나오라고 하고 계신다(계 18:4, 5).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격렬한 진노의 불길을 그들에게 쏟아붓기로 이미 작정하셨으므로, 그 무시무시한 불에 성도가 살라지는 것을 조금도 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때는 그들과 가능한 관계를 끊고 최대한 멀어진 다음, 그들과 가장 반대되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기에 힘써야 한다. 그러나 멀어진 그들을 여전히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눅 23:28~34). 그리하면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멸망할 저들 중에서도 상당수를 건져내는 실로 기적 같은 일도 보게 될 것이다(롬 11:14). 루터와 칼빈이 종교개혁을 말살하려고 기세등등하게 달려들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를 영원한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선한 일에 쓰임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바울도 마찬가지였고 말이다.
4.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그렇게 살아갈 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에게 그러한 모습을 훌륭하게 잘 보여준다면, 이 세상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우리가 진정으로 그 일을 잘 감당했다면, 세상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리를 진실하게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다. 이는 불법으로 점거한 왕좌를 끝까지 내놓기 싫어함에서 비롯되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겉으로 표출하는 일에 상당히 주저하고 신중을 기하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보여주는 거짓 없는 인자와 긍휼 앞에서 양심이 찔림을 받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멈칫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은 뒤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리스도인을 비난하고, 힘을 모아 그리스도인에게 이런저런 불이익도 안겨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불의가 양심에 의해 어느 정도 스스로 제어되므로, 그래도 큰 사고 없이 비교적 원만하고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양심에 화인(火印) 맞은 이도 꽤 있게 마련이다. 마귀의 열렬한 추종자이자 충실한 일꾼인 그들은 그리스도인을 향한 극렬한 반감을 별 여과 없이 표출하면서 살아간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을 가장 힘들게 하는 주역(主役)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이 정치, 문화, 사회, 경제의 주도권을 손에 쥐면 쥘수록, 그리스도인의 고충은 눈에 띄게 늘어난다.
그러나 이들조차도 그리스도인을 세상에서 깨끗하게 몰아낼 엄두는 쉽게 내지 못한다. 이들에게 일말의 양심이 아직 남아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러다가 그리스도인과 그럭저럭 어울려 지내는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까 두려워서 그러는 것뿐이다. 쉽게 말해, 역풍이 불까 봐 두려운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믿음과 신앙 정체성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기를 주저할 필요가 전혀 없다. 하나님께서는 양심에 화인 맞은 자조차도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도록 선하신 섭리로 이 세상을 다스려가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거짓말을 믿고 사라를 아내로 삼으려고 했던 아비멜렉이, 자기 양심에 따라 하나님께 자기 무고함을 아뢰었던 일을 기억하도록 하자(창 20:4, 5).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과 다가올 심판을 있는 그대로 세상에 나타내는 일을 잘 감당한다면, 몇몇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충분히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다. 물론, 고되고 힘든 것은 피할 수 없지만 말이다. 세상 사람 대부분은 우리를 싫고 짜증 나며 가능한 멀리하고 싶은 사람으로 여길 테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싹 사라져야 한다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더불어 그들 중 일부는 내심 ‘저 유별난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도 꽤 있다고 여기며 찬탄할 것이다.
실제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하신 손양원 목사님께서는 어릴 적에 신앙이 없는 만둣가게 주인 아래서 장사를 하며 학업을 이어가려고 하신 적이 있었다. 그때 그 주인은 주일에도 어린 손 목사님을 거리로 내보내며 만두를 팔게 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손 목사님(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지만)께서는 차리리 굶거나 공부를 못하는 한이 있어도,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신앙을 굳게 고수하셨다.
손 목사님께서는 그것 때문에 온갖 야유와 조롱과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하셨다. 하지만 그렇게 자기 신앙을 꿋꿋이 지키시는 한편, 주인에게 더욱 깍듯이 하려고 노력하셨다. 남들보다 훨씬 더 일찍 일어나서 집 안 청소도 깨끗하게 해놓으면서 거리에 나가 열심히 만두를 파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주인은 그 어린 손 목사님을 내쫓고 말았다. “너는 다 좋은데 단 한 가지 예수 믿는 게 나쁘다.”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1 참으로 신앙에 따라 살려는 뜻을 굽히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세상살이라는 게 대부분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있다. 소수의 양심이 화인 맞은 자가 있다면, 그 반대편에는 소수의 남겨두신 이도 있다는 것이다(요 10:16). 우리는 예수님과 유대인에게 동시에 칭찬을 들은 백부장과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상달 된 고넬료를 잊지 말아야 한다(마 8:10; 행 10:4, 5).
이처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은혜 아래 보호하심을 받아, 아직 탐욕에 연단된 심령에는 이르지 않은 이가 있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우리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내쫓는 반면, 이런 이들은 우리를 영접하고 보호하며 우리의 필요를 공급해주기에 주저함이 없다. 그리고 이런 이들은 세상을 살 만큼 산 어른보다는 주로 아직 나이가 어린 아이들 중에 존재한다(그러므로 가정에서 자녀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신앙 교육을 하는 일은 아주 바람직하고 좋은 일이다).
이런 이들은 우리가 보여주는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에 상당히 민감하고 진실하게 반응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늘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곤 한다(마 5:14~16; 벧전 3:1, 2). 그리고 교회를 섬기면서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된 세상살이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이런 남겨두신 소수의 귀한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리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주님께서 이 세상을 대하고 계신 그대로 세상을 대하기에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에 남겨두시고, 세상으로 보내시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5. 마무리하며
그리스도인과 이 세상 사람은 서로 원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자기 원수를 사랑할 줄 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때를 잊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원수 되었을 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그 사랑에 깊이 감사하며 남은 생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과 일평생 원수로 살아가다 결국에는 멸망에 이르고 만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멸망해가는 세상 사람들을 진정으로 가엾게 여기면서 복음을 전해주기에 힘쓰도록 하자. 그리고 그 귀중한 복음을 대적하는 이들과는 최대한 멀어지도록 하자.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남겨두신 이를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가 서로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실 것이다.
각주
1 손동희,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 아가페출판사, 2011, pp. 37, 38.
「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성품과 인간관계 진단 3」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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