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삶과 그의 시대
(6) ‘대각성’의 싹이 트다 -상-
김재호
1. 회심,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게 한 불씨
솔로몬 스토다드가 뿌려놓은 위대한 신앙 유산과 더불어 그의 목회 기간 말년에 찾아온 노샘프턴의 방종은, 대각성의 불길이 타오르는 데 필요한 재료를 적절하게 제공해주었다. 에드워즈는 스토다드가 늘 그랬던 것처럼 방종하는 회중을 꾸짖고 책망하기에 힘썼고, 그중에서도 조금 더 혈기왕성한 젊은 사람들의 죄악을 개선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다.
그렇게 약 5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가자 노샘프턴의 젊은이들은 점점 젊음의 유흥을 즐기는 자리를 열지 않고, 그 대신 공예배에 참석하는 횟수를 늘려가기 시작했다.1 에드워즈를 향한 반발은 그렇게 올바른 권위에 대한 부드러운 존경과 순종으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그러던 중에 꽃다운 나이의 한 젊은이가 늑막염으로 심하게 앓다가, 이틀이 채 못되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일어났다. 에드워즈는 그 청년의 장례식 설교를 통해, 또래의 친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준 그 사건의 영적인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되새겨주었다. 에드워즈는 영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움 대신, 젊은 날의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좇는 일이 얼마나 어리석고 무분별한지 일깨워주기 위해 아주 강렬한 대비를 사용했다.
설교 초반에는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만한 청년의 아름다움을 일상적인 상황 묘사를 통해 상기하게 한 다음, 그런 아름다운 청년이 죽음의 자리에서는 어떻게 되는지를 무섭다 싶을 정도로 자세하게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젊음에 취해 희희낙락하며 살던 이들이 침통함 속에 숙연해질 즈음, 이러한 헛되고 어리석은 일을 속히 버리고 다가올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아가라고 권면함으로써 설교를 마무리 짓는다. 즉, 에드워즈는 그 자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비록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야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안전하고 걱정 없으나,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다는 내용의 ‘전도 설교’를 했던 것이다.2
물론, 이는 에드워즈의 평소 경건 생활이 짙게 반영되어 있는 설교였다.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인생 대부분을 덧없는 세상 기쁨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기쁨을 대비하여 묵상하면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그만큼 그의 설교는 살아있고 힘이 있어서 듣는 이, 특히 청년들의 심장과 폐부를 깊이 파고들 수 있었다.
이 전도 설교에 깊은 영향을 받아 젊은이 몇 명이 회심하자, 에드워즈는 그들에게 그러한 은혜를 주신 귀하고 아름다운 분을 다른 이에게 소개하며 권면하는 일에 힘쓰기를 요청하였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기가 사랑하는 이에 대해 친한 친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보내듯이, 진정 은혜를 받았다면 주변의 친한 친구들 역시도 그 은혜를 누릴 수 있도록 받은 은혜를 최대한 알려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가 권장했던 참된 회심에 기초한 복음 전도의 열심은, 유흥 문화가 한풀 꺾여 시들해진 빈자리를 빠른 속도로 차지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파티를 열기 가장 좋은 시간이었던 목요 성경 강해 이후의 저녁 시간에 이러한 ‘소규모 신앙 모임’이 열리기 시작했다. 더불어 에드워즈는 그러한 모임이 더 활성화되도록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그 결과, 다양한 나이와 성별로 구분되는 다수의 신앙 모임이 자발적으로 생겨났고, 그 열기도 매우 뜨거워서 젊은 여성보다 젊은 남성들이 이 모임에 더 앞장서는 일이 벌어졌다. 평상시에는 시큰둥했던 젊은 남성들이 이제는 발 벗고 나서서 거의 모든 친구를 그 모임에 데려올 정도였다. 이 소규모 신앙 모임에서는 함께 공부하고 서로 가르치며 권면하는 것 외에도 특별히 기도하는 일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는 그 당시 목회자들이 정기적인 기도야말로 각성의 열쇠라고 믿고 평소에 성도들을 그와 같이 지도했기 때문이었다.3
그렇게 에드워즈로부터 옮겨붙은 작은 불씨가 하나둘씩 한자리에 모이고, 그 불길이 잘 타오르게 하는 말씀과 기도와 교제도 넉넉히 제공되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불길에 찬물을 끼얹는 세상 유흥에 대한 관심과 열심이 이미 직격탄을 맞아 기세가 크게 꺾여 있는 상태였다. 그러니 그 부흥의 불길이 삽시간에 사방팔방으로 번져나가는 일이 일어난 것도 어찌 보면 참 당연했다.
노샘프턴을 통틀어 가장 놀기 좋아하고 입이 거칠며 경박하기로 유명했던 한 여자 청년이 회심하여 온 도시를 술렁이게 했다. 그리고 그 청년을 통해 술집과 파티를 전전하던 사람들에게도 복음과 경건의 영향력이 미치는 일이 일어났으며, 그러한 열기가 온 노샘프턴을 가득 채웠다.
이처럼 부흥의 열기는 단지 젊은 사람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모든 사회 계층과 연령대에 퍼져나가 두루두루 회심자를 배출하였다. 어린이, 노인, 배운 사람, 흑인 노예 등과 상관없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회개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 모든 일이 불과 1년에서 1년 반 사이에 일어났다는 사실은, 대각성의 불길이 얼마나 급작스럽고도 강렬하게 타오르며 번져갔는지를 잘 보여준다.4 한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작은 불꽃이 계속 타오르더니, 어느새 걷잡을 수 없이 큰 불길이 되어 온 도시와 사회 전체를 집어삼켰던 것이다.
「로이드 존스는 부흥을 각 사람의 회심 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이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확산하는 일로 보았습니다. 참된 기독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존재하는 그 동일한 생명이 빠르게 확산되고 흘러 넘치는 일을 부흥이라고 본 것입니다.
이처럼 회심 시에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성령이 많은 사람들에게 부어지는 것이기에, 부흥의 시대라고 해서 하나님이 일상적으로 하시는 사역과 본질적으로 다른 사역을 하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예외적으로,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범위로 그리스도의 영광이 크게 나타나는 것일 뿐이라고 로이드 존스는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한 진정한 열심이란 많은 사람이 회심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바라는 거룩한 열정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5
교회사를 살펴보면 마틴 루터, 존 칼빈, 조지 휫필드, 존 버니언, 찰스 스펄전 등과 같이 부흥의 불길을 일으킨 위대한 하나님의 종을 만나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위대한 불길은 예외 없이 어떤 한 개인이 전 인격적으로 돌이켜 예수님께로 나온 회심의 불꽃으로부터 말미암았고, 또 그로 인해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이 얼마나 기도에 힘쓴 사람이었는가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부흥의 불길은 한 사람의 참된 회심으로부터 시작하여서, 말씀과 기도로 유지되고 번져간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므로 부흥을 열망하는 참된 회심자들은 말씀과 기도로써 ‘받은’ 은혜를 따라, 택하심과 부르심을 더욱 굳게 하는 일에 힘을 다해야 한다. 그러면서 그 은혜를 주변 사람에게 전하는 일에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정해두신 때에 택하신 영혼들을 당신의 우리 안으로 불러들이시는 일에 우리를 사용해주실 것이다.
2. 진리를 수호함
참된 부흥이 참된 회심으로부터 말미암기에, 진정 부흥이 시작되면 참된 회심의 토대를 이루는 복음의 순수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한 문제로 부상하게 된다. 따라서 참된 부흥에는 복음의 진리를 거스르는 거짓 교훈과 힘껏 맞서 싸우는 일을 가져오는 특징이 있다.
종교개혁 때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대각성의 때도 잘못된 교훈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일이 예외 없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번에도 그 싸움은 구원론에서 이루어졌다. 왜냐하면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부흥의 토대가 참된 회심에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이 자기 힘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력구원을 믿게 하려고 애쓴다(펠라기우스주의). 그러다 그게 잘 안 되면 하나님의 사랑과 사람의 능력이 협력하는 신인협력구원을 믿게 한다(반(伴, Semi)펠라기우스주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어떻게든 하나님께서 홀로 구원을 예정하시고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사람을 주권적으로 건져내며 이끄시는 독력(獨力)구원을 믿지 못하게 노력한다(칼빈주의). 그래서 사람이 조금이나마 독력구원 쪽으로 기운다 싶으면, 마귀는 그의 등을 힘껏 떠밀어서 사람의 의무와 책임 자체를 부정하는 기계적인 숙명론에 빠지게 하기도 한다(하이퍼 칼빈주의).
특별히 에드워즈가 살던 시대는, 인간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정서가 자연 과학이 이루어 낸 눈부신 성과를 등에 업고서 빠른 속도로 사람들의 마음을 파고들던 때였다. 그러므로 당대 지성인과 젊은이들은 계시에 대한 ‘믿음’보다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이성과 양심에 근거한 ‘자율적인 판단’에 ‘최종 권위’를 두는 쪽으로 기울기가 쉬웠다.
그러나 사람이 한 번 그러한 흐름에 휘말리면, 점점 인간의 자율성이 아무런 성경적인 근거도 없이 ‘그야말로 자율적’으로 강조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이 더 진행되면, 그러한 자율적인 판단을 기초로 성경의 명제적인 가르침을 비평하고 재해석하여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데 이르게 된다. 그것이야말로 성경의 ‘진정한’ 가르침을 발견하고 따르는 길이라고 ‘확신’하면서 말이다.
그러다 보면 결국 성경은 너무 오류가 많고 모순투성이라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책으로 전락하게 되고 만다. 성경은 인간의 종교 경험을 엮어놓은 것에 불과한 수많은 고대 종교 문서 모음집 가운데 하나라는 주장이 ‘자명하고 입증된 사실’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흐름이 한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종교 자체가 평가절하되는 무신론이 모든 영역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된다. 그리고 여기까지가 20세기 전까지 세계가 실제로 밟아온 길이었다.
그러나 무신론이 내포하고 있는 영적인 공허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결국 다시 종교를 찾게 되어 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지금 그러한 현상이 실제로 수면 위로 나타나는 것을 보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종교가 다시 사회적인 영향력을 회복하기 시작하면, 사회에서는 종교 갈등 문제가 중요한 사회문제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그리고 진리가 없는 이 세상이 그러한 갈등에 대처하는 데에는, 로마 제국이 사용했던 실용주의적 무신론 이상의 대안이 나오기 어렵다. 다시 말해, 인간 숭배의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발전에 실용적으로 도움을 주는 종교라면 다 허용하고 권장하여 공존하게끔 한다. 하지만 그러한 노선의 사회적 패권을 인정하지 않고 거스르는 종교에 대해서는 인류의 항구적 발전과 공존을 위협하고 미워하는 이들로 몰아서 가차 없이 사지(死地)로 내모는 것이다.
이처럼 마귀가 조장하는 인간의 낙관적 정서는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과 같은 실용주의적인 무신론 사회를 지향한다. 그 사회는 종교와 신을 거리낌 없이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권장하지만, 언제나 그 핵심에는 인간의 자기 숭배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사회는 누구에게나 있는 종교의 씨앗을 기꺼이 인정하고 그것이 싹 틔울 수 있게 여러모로 장려하지만, 그 종교의 씨앗이 자기 숭배가 아닌 살아계신 하나님을 찾는 방향으로 절대 향하지 못하도록 강력한 정치, 사회적인 수단을 통해 철저하게 가로막는다.
나아가 그 사회는 그러한 일을 통해 사회적 안정과 통합을 가져오는 지도자를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신격화하여 숭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우상 숭배가 그 사회의 정체성이자 버팀목이 되어줄 것이다. 이처럼 마귀는 자기를 쏙 빼닮은 세상이 활짝 꽃피우기까지 밤낮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그러한 마귀의 원대한 계획 가운데, 자연 이성과 양심에 기초한 ‘자율적 판단’으로 성경의 권위를 대신하려고 꾀하던 초기 단계에서 에드워즈는 그와 맞붙어 싸웠다. 그러므로 싸움의 핵심은 인간 자율성과 구원의 연관 관계에 맞추어졌고, 이는 곧 인간의 전적인 무능력 교리와 예정 교리를 향한 마귀의 집중적인 공격과 그 진리를 수호하기 위한 반격이 치열하게 오갈 것을 뜻했다.
에드워즈가 일찍 세상을 떠난 청년의 장례식 설교를 한창 하고 있을 무렵, 동부 매사추세츠 출신의 어떤 목회자 지망생이 공석이 된 스프링필드의 강단을 메우고 있었다. 로버트 브레크라는 이름을 가진 그 지망생은 본래 한창 번영하던 지역이었던 코네티컷 윈햄 지방에 부임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도시는 훗날 예일 대학의 학장을 지낼 토머스 클랩이 목회를 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클랩은 브레크와 오랫동안 면담한 뒤에, 그가 아르미니우스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목회자로 세울 수 없다고 정식으로 공표하였다. 그 때문에 브레크는 여전히 목회자 지망생 신분인 채로 코네티컷 경계를 넘어 다른 지역(매사추세츠 스프링필드)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734년 여름이 되자, 스프링필드 주민들은 브레크를 담임 목회자로 청빙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스프링필드가 속해 있는 서부 매사추세츠 햄프셔 지역을 관할하는 햄프셔 목회자 협의회는 곧장 이 문제에 개입하여 그 청빙을 제지하였다.6
이는 서부 매사추세츠 지역이 솔로몬 스토다드 때에 목회자 협의회를 통한 장로회 방식으로 교회 정치 노선을 정했기에 가능했던 일로서, 회중주의를 따르는 동부 지역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목회자 협의회를 주관하던 윌리엄스 가문은 토머스 클랩과 다른 목회자의 증언에 따라, 브레크가 복음을 듣지 못한 이교도들이 지옥에 간다는 사실을 부인했던 점을 문제 삼았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브레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문제에 대해서만 책임을 물으신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나 신앙 없이 사랑의 힘 그 자체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한 토머스 첩의 말을 인용했다는 것이었다. 즉, 협의회는 구원 문제에 대해 사람의 능력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따르는 사람을 한 지역의 목회자로 세울 수 없음을 내세웠던 셈이었다.
이에 대해 브레크는 자신은 아르미니우스주의자가 아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지지하며, 또 문제가 되는 발언들은 아직 묵상 중인 개인적인 생각에 불과하다고 답변했다. 그러고는 자기 연고지인 동부 매사추세츠 지역으로 돌아가서, 부친의 유력한 친구들에게 자신이 믿는 교리와 인격의 건전성에 대한 공인을 받아왔다.
그리하여 브레크의 임직 문제는 양쪽 매사추세츠 지역에 걸친 거대한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서부 지역에서는 아르미니우스주의로부터 교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정서가 크게 대두되었고, 동부 지역에서는 회중주의 입장에서 볼 때 독재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장로회적 교회 정치 형태가 도마에 올랐다.7
그리 머지않은 때에 일어났던 티모시 커틀러 학장의 ‘배교’ 사건과 날로 강해지는 인간 능력에 대한 낙관적인 정서는, 사람들 가운데 이러다가 자칫 아르미니우스주의 이단이 이 땅 전역을 휩쓸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불러일으켰다. 덕분에 사람들은 무엇이 진정 참된 복음의 방식인지 진지하게 알고자 했고, 에드워즈는 그에 맞추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에 관한 내용을 두 차례에 걸쳐 회중에게 강론하였다.8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 일로 인해 많은 비난과 반대를 겪어야만 했다. 이미 사회적으로 비화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하는 처사, 또는 그 문제를 본인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행동, 혹은 개인적인 명성을 더 얻으려 꾀하는 이기적인 행보는 아니었느냐는 것이었다.
특별히 사회적인 야심과 함께, 에드워즈에 대한 사적인 혐오까지 품고 있었던 친(親) 아르미니우스주의자인 이즈리얼 윌리엄스가 그런 비난의 중심에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스토다드 시대의 원로들이 아직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던 시기였으므로, 그러한 그의 반대와 비난은 흔히 있을 법한 사소한 잡음이나 소란 정도로 취급되었다.9
물론, 에드워즈는 반대자들이 말하는 것과 같은 목적으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전혀 아니었다. 에드워즈는 단지 구원받고자 하는 이들의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짓의 장애물을 제거함으로써, 사람들이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하려는 지극히 목회적인 이유로 그와 같이 행동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드워즈의 그러한 행동이 올바른 것이었음을 나타내 보여주셨다.
『비록 당시 강단에서 이런 논쟁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했고, 다른 지역에 있는 많은 사람이 이것을 비웃기도 했지만 이곳에서는 그것이 시의적절한 말씀임이 증명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에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 아주 주목할 만한 하늘의 축복이 분명하게 임했습니다. 우리 주민들은 두려워하고 의심하면서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논쟁의 핵심에 대해 전체적으로 만족스럽게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용납되는 길을 더욱 간절하게 추구했고, 복음의 방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복음의 방식이 참되고 유일한 방식임이 그들에게 분명해졌습니다. 그런 다음 12월 후반에 하나님의 영이 비상하게 임하여 우리 가운데 놀랍게 역사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갑자기 한 사람 한 사람씩 5~6명이 구원받을 만한 참된 회심을 했으며, 이 가운데 어떤 사람은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회심했습니다.』10
우리가 진정 회심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도 구원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행 26:29). 그러므로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그와 같은 일을 훼방하는 거짓 가르침을 대적하여 파하고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하는 일에도 힘쓰게 된다(고후 10:3~5).
그러나 그런 일을 힘써 하면 할수록, 부당한 반대와 비난과 조소는 더욱 심해진다. 바울이 그러한 일을 겪었고 루터도 그러했으며 버니언도 마찬가지였고 스펄전도 그러했다. 그러나 지혜는 그 결실로써 증명되듯이, 우리의 그 모든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은 바로 구원받은 영혼이 증명해줄 것이다(눅 7:35; 고전 9:1).
그러므로 우리는 실용적으로 종교에 접근하려는 이 시대 사람에게, 기독교는 무슨 유익을 줄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진리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잘 일깨워줘야 한다. 물론, 그러면 엄청난 비난과 핍박이 쏟아질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인류 평화와 발전을 좀 먹는 암 덩어리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회에는 발도 못 붙이게 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악한 말과 대우는 로마 제국이 초대 교회를 향해 취했던 행동과 정확히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일에 겁먹지 말고 담대하게 진리를 전하고 가르쳐야 한다. 결국, 무너진 것은 로마 제국이었지 교회가 아니었음을 마음에 새기면서 말이다.
각주
1 조지 M. 마즈던, 『조나단 에드워즈 평전 (Jonathan Edwards: A Life)』,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6, pp. 230, 232.
2 위의 책, pp. 224, 235.
3 위의 책, pp. 235~237.
4 위의 책, pp. 241~243.
5 마틴 로이드 존스, 『마틴 로이드 존스의 부흥 (Revival)』, 정상윤 옮김, 복 있는 사람, 2010, p. 14.
6 위의 책, p. 265.
7 위의 책, pp. 267~270.
8 위의 책, pp. 267, 268.
9 위의 책, pp. 274, 275.
10 조나단 에드워즈, 『놀라운 부흥과 회심 이야기 (A Faithful Narrative)』,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1, p.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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