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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김재호
안타깝게도, 현대 기독교인에게 ‘진노하시는 하나님’ 이야기는 이제 생소하다 못해 율법주의에 빠진 이들이나 믿는 잘못된 가르침과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래서인지 현대 기독교인이 믿는 하나님은 참으로 친절하고 여유가 넘치며, 재치와 관용으로 사람을 한없이 품어주는 따뜻한 분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진노를 모르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이에 반해 성경은,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고 너무도 명백하게 선언한다. 현대 기독교인에게 도무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처럼 다가오는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 충분히 양립할 수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그만큼 현대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음을 뜻한다.
1. 하나님의 진노는 공의롭다
왜 그토록 많은 이가, 성경이 명백하게 양립한다고 선언하는 이 두 가지 개념을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가 ‘공의롭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정말 밑도 끝도 없이 마구 화내는 분이 아니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런 분이시라면 하나님이란 존재는 즉시 폭군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폭군이 다스리는 세상에서 공의를 기대하기란 실로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주신다(롬 2:6~8).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행한 일의 불의한 정도에 맞게 진노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사실 그 자체보다는,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는 일이 왜 그리도 악하고 불의한가를 곰곰이 헤아려보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진노는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진노할 만하신 이유가 없다면 전혀 진노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진노하시는지 그 이유를 깊이 헤아려보고, 하나님과 마음을 함께 하는 자가 되기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하나님의 진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소리로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2. 사랑, 하나님 공의(公義)의 기준
하나님의 공의 기준은 ‘사랑’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의아해하며 심지어 반감까지 갖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현대 기독교인이 애타게 찾는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사랑’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이루는 근본 토대가 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한다.
다시 말해, 타락한 인간의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감정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세상에 계시하신 신적인 속성으로서의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과 일치하는 것은 ‘의롭다’고 여기시며, 그 사랑을 거스르는 것을 ‘악하다’고 판단하신다. 그리고 전자를 참으로 기뻐하시며 후자를 심히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오직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의 속성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라. 그분께서는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면서도 하나님과 동등이심을 취하려 하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워 종의 형상을 취하여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신을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빌 2:5~8, 바른 성경).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 아무 빚도 지지 마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였다. “간음하지 마라. 살인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탐내지 마라.”하신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더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이 말씀 가운데 다 포함되어 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롬 13:8~11, 바른 성경).」
위의 성경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하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을 기준으로 세우신 공의가 어떠한가’를 아주 잘 보여준다. 이 두 가지 가운데, 우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성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본래 하나님의 형상이신 줄 ‘아셨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이 향한 쪽은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참 역설적이게도, 예수님의 ‘마음’은 도리어 세상의 가장 낮은 곳을 향했다. 세상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성부 하나님과 똑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사랑하셔서, 당신의 모든 것을 ‘값없이’ 내어주기를 기뻐하신 것이다.
만일 예수님께서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먼저’ 생각하셨다면 과연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분명히 사람의 형상으로 세상에 오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그래야 하는가?’라고 하시면서 합리적으로 세상을 외면하셨을 것이다. 물론 그리하셔도 범죄한 사람은 전혀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예수님의 행동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지 밝히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 유익과 영광을 생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를 낮추어 상대방의 유익과 영광을 추구하는 일을 자기 영광으로 삼고 기뻐한다. 심지어 그 사랑이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기를 요구한다고 해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내어주기를 기뻐하는 절대적인 사랑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에는 ‘자기를 먼저’ 생각할 만한 일말의 여지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사랑임을 증거한다(요일 4:1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눅 14:26).”라고 하셨고, “나를 위하여―즉, 예수님을 사랑하여―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이다(마 10:39).”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에 더하여 우리가 중요하게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영원하신 분’이시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더해지거나 덜해지지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항상 한결같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그러한 사랑으로써 세상의 가장 귀하고 높은 곳부터 가장 천하고 낮은 곳까지 두루 살피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다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려준다. 그것은 왜 연인들이 한결같이 ‘영원히’ 사랑하며, 또 그 사랑이 ‘변치 않을 것을 본성적으로 약속하는가’이다. 굳이 가르쳐주지 않아도 기꺼이 그렇게 ‘스스로 약속’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은 누구나, 성삼위 하나님께서 영원하신 사랑으로 세상을 끝까지 사랑하실 것을 창세전에 ‘작정’하시고 그 마음이 변치 않을 것을 ‘약속’해주셨다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감지한다.
실제로 에덴동산 중앙에는 그 약속의 보증으로 생명나무가 서 있었다. 물론 그 나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언약적 모형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보증이 되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는다(요 3:14~17).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당신의 영원한 사랑 가운데 작정하신 그 뜻에 영원히 충실하시다. 앞서 살펴본 성경 구절이 가르쳐주는 바와 같이, 바로 그 사랑이 모든 율법과 공의의 근본 토대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고 인정받는 길은 오직 하나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영원한 약속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써 자기를 철저하게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하면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돌보고 섬겨야 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런 행위를 인생 전체를 통틀어, 즉 모든 순간과 모든 행위에 대해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하여 그렇게 행해야 한다(막 12:30).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의로움을 진정 기쁘게 여기시며 선하다고 인정하시나, 다른 것들은 다 악하게 여기시고 진노하신다.
누군가는 이러한 하나님의 기준이 부당하다고 항변할 것이다. “누가 그와 같이 행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준은 전혀 부당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의 마음이 부패했기에 이러한 합당한 기준을 부당하게 여겨 싫어하고 배척하는 것이다. 그들이 부당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하나님의 기준은 실생활에서 여지없이 적용된다.
우리 배우자가 ‘영원히 변함없이 사랑할 것을 약속’한 뒤에, 정말 딱 한 번만 다른 이를 사랑했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 딱 한 번으로 인해 혼인 언약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또, 누군가 무엇을 ‘약속’하고서 평생 잘 지키다가, 정말 딱 한 번만 지키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 딱 한 번으로 약속은 깨지고 만다.
그처럼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시겠다고 ‘약속’해 주셨고 또 그 약속에 영원히 ‘충실’하시므로, 그 안에서 지음 받은 사람이 단 1초라도 그 약속 안에서 행하지 않는 일은 하나님께 불의한 일을 저지른 것과 같다. 그리고 그 불의한 일로 인해, 그에게 주어졌던 사랑은 그만큼 격렬한 진노로 바뀐다. 마치 배신당한 배우자가 상대방을 진정으로 사랑했던 만큼 상대방의 불의와 악함에 대해 격렬하게 진노하듯이 말이다. 성경은 이러한 사실을 가리켜 ‘질투하는 하나님(출 34:14)’이라고 참으로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완전한 사랑 속에서 나고 자라는 피조물이 그 사랑을 저버리고 짓밟는 악함을 절대로 용납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은 그 악함에 대한 들끓는 진노 가운데 그가 행한 그대로 갚아줄 것을 요구한다. 결국, 죄인은 자기 생명의 근원을 저버리고 함부로 모독한 대가로 자기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언약 안에서 이처럼 격렬하게 질투하시므로, 사람은 어떤 율법이든지 단 하나라도 어기면 전체를 다 어긴 것과 같은 진노를 받게 된다(약 2:10, 11). 또한,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속으로 죄를 짓거나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을 그저 좋게 여기기만 해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것과 똑같은 크기의 저주와 진노를 그에게 쏟아 부으신다(마 5:28).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진노는 그와 같다.
3. 구원과 하나님의 인내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분께서 약속해주신 언약의 속성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감히 하나님을 저버린 우리의 목숨이 아직 붙어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기적처럼 다가올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의 약속을 저버린 대가가 무엇인지 이리저리 곱씹고 있어야 할 것이다. 누구나 “차라리 내가 태어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하면서 자기 생일을 저주하며 혀를 깨물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참 멀쩡하게 잘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세상 사람들은 더욱 마음을 완악하게 하곤 한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죄에 진노하며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당당하게 인생을 즐기면서 즐겁고 자유롭게 살자!’
그러나 그런 생각이야말로,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의 손 아래로 빠져 들어가는 지름길이다(히 10:31).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시므로, 그 마음의 뜻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거나 없었던 일처럼 하실 수 없으시다(민 23:19). 죄를 지은 우리가 오늘 멀쩡히 살아 숨 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진노가 허상이기 때문이 전혀 아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는 조금도 줄어들거나 수그러들지 않았다. 하나님을 잊고 살아가는 이 세상이 계속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그 격렬한 분노를 오랫동안 참고 계시기 때문이다(롬 9:22).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당장 진멸해 마땅한 악한 죄인들을 이처럼 오랫동안 용납하시면서 노를 참고 계시는 것일까? 하나님의 택함 받은 성도들은 바로 이 대목에서 하나님의 마음 안에 있는 무한한 긍휼과 영원한 구속의 계획을 발견하고 이해하게 된다. 세상이 자기 죄로 멸망하지 않고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하나님께서 창세 전부터 우리를 영원히 사랑하시겠다는 그 약속을 오늘도 변함없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 것이다.
우리의 불의를 향한 하나님의 격렬한 진노는 그와 같은 영원한 사랑 안에서 무한한 긍휼과 자비로 바뀐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긍휼을 따라 피조물이 본래 먼지와 같을 뿐임을 기억하시며(시 103:13, 14), 당신의 엄청난 진노를 그 먼지 같은 피조물이 절대로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충분히 헤아리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참된 긍휼 속에 우리의 죄를 따라 갚지 않으시고, 그 흉악한 죄과를 당신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주신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한 하나님의 긍휼과 변함없이 언약을 붙드시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당신의 생명보다도 더 사랑하신다. 그래서 기꺼이 당신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것이다. 그렇게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가 서로 만났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는 참된 긍휼 안에서 그리스도의 순종 하심을 따라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그리스도께로 나오면 하나님과 영원히 화목하게 된다. 또한,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러한 새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영원히 확증해준다.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바로 그 확증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항상 마음에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참된 긍휼의 마음으로써 말로 다할 수 없는 진노를 참으신다. 그러한 가운데 속히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 긍휼로써 오늘도 우주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사람들이 계속 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신다(행 17:25, 28).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참으로 가엾게 여기시며 그들을 진실로 선하게 대하신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죄인임에도 값없이 마음에 선하고 즐거운 것들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행 14:17). 그러므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할 말이 남아있을 수가 없다(롬 1:20). 그들에게 남은 것은, 그러한 긍휼마저도 우습게 여긴 극악한 죄를 향한 하나님의 끝없는 분노뿐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타락한 사람의 마음은 그러한 하나님의 참된 긍휼조차도 마음에 두기 싫어한다(롬 1:28). 하나님의 참된 사랑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었고, 또 죄를 지었음에도 참된 긍휼을 따라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꺼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결국 그분의 호의를 비웃고 만다(창 19:14). 오직 하나님의 택하심을 따라 강권함을 받는 비천한 심령만이 그 긍휼에 올바르게 반응한다(눅 14:16~24).
그러므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이 세상에는 마땅히 받았어야 했던 원래 진노보다도 훨씬 더 큰 하나님의 진노가 거대한 해일처럼 임할 것이다. 그 진노는 참된 긍휼과 은혜에 대하여 저질러진 극악무도한 죄악이므로 절대로 용서가 없다. 그래서 누구라도 그 진노를 맛보게 되면, 제발 자기 친지들만이라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온 힘을 다해 구하게 된다(눅 16:27, 28). 그만큼 그 진노는 어마어마하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일을 세상에 나타내심으로써, 당신께서 창세 전에 세상을 영원히 사랑하셔서 복 주시기로 작정하신 일이 참으로 마땅하며 정당하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확증해 보이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직 길이 참으시는 지금 이때, 속히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이다. 이때가 지나가면, 피조물이 절대로 견뎌낼 수 없다고 하나님께서 친히 인정하신 불 못에서 영원히 이를 갈며 지내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4. 성도의 마음에 심어진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참으로 알고 믿게 된 성도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대하시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며 살아가게 된다. 성도는 진정 온 마음과 생명과 뜻과 힘을 다해 죄악을 ‘미워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원한 사랑을 저버리고 떠난 세상의 악함에 매일 분노하시듯, 성도도 세상의 불경건함으로 인해 매일 마음이 상하고 진노가 끓어오른다(시 7:11).
그러나 하나님께서 영원한 ‘언약’을 오늘도 굳게 붙들고 계신 것처럼, 성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에 전해진 복된 ‘은혜의 언약’을 굳게 붙든다. 그로 인해, 성도의 마음에 끓어오르던 공의로운 진노는 세상을 향한 참된 긍휼로 바뀌어 넘쳐흐르게 된다. 성도는 그 긍휼을 마음에 품고서, 복음을 듣지 못해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져 가는 사람을 한 명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놓는다.
또한, 하나님께서 그 긍휼 가운데 불의한 자와 선한 자에게 똑같이 햇빛을 주시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을 고르게 선대 하면서 온갖 좋은 것을 그들에게 베풀어준다(마 5:43~48). 가능한 모든 사람과 화목하게 지내면서 말이다(롬 12:17~21).
그러나 한편으로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임할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조금도 가감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복음을 거스르는 이들과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다. 진정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을 온전하게 알고 있는 이들은, 죄를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을 여러 단계를 거쳐 점점 더 분명하게 공적으로 드러내면서 그들과 확연하게 분리된다(마 18:15~17). 심지어는 발에 묻은 먼지조차도 떨어내며 그들의 옷조차도 멀리한다(행 13:51; 유 1:23).
예수님께서는 그런 이들에게 당시 최고 수준의 욕설인 ‘독사의 자식’이라는 말도 마다치 않으셨다(마 12:34). 이처럼, 성도는 자기의 거룩함을 굳게 지키면서,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을 멸시하는 이에게 임할 진노와 저주를 숨김없이 확증해주는 삶을 살아간다. 물론, 그들은 그러한 진노 가운데에서도 그들을 향한 참된 긍휼을 잊지 않는다(합 3:2).
성도는 죄인들에게 그러한 책망과 경고를 통해, 그들의 육은 멸하고 영으로 살림을 받을 수 있는 기회, 즉 돌이켜 회개하고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려고 하는 선한 의도에서 그리하고 있기 때문이다(고전 5:5).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닮은 성도는 절대로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를 꺾거나 끄지 않는다(마 12:20). 그러므로 그 모든 진노와 저주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돌이켜 구원받을 수 있다. 문은 닫혀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활짝 열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사랑하는 이들은 그 마지막 기회마저도 스스로 거절한다. 예수님께서 긍휼과 경고로써 돌이키고 회개할 마지막 기회를 주셨으나, 결국 자기 죄악을 따라 행하기를 더 좋아했던 가룟 유다처럼 말이다(마 26:24, 25, 50). 그런 이들은 훗날 자기 죗값이 자기 머리 위에 돌아갈 때야 비로소 그 모든 것이 진실임을 알고 날뛰게 된다.
그러나 날뛸 뿐이지, 죄로 이미 완전하게 가려진 그들의 눈은 그리스도의 긍휼을 여전히 바라보지 못한다. 죄 때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면서도 계속 자기만 바라보다가 결국 스스로 멸망하고 만다(마 27:1~5).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에 의지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죄인이 감히 그 은혜를 조롱하면서 대적하는 일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신다.
지금이라도 돌이키면 살 수 있다는 보편적인 긍휼을 충분히 보여주시면서 돌아오라고 진실하게 초청하시기는 하나, 주권적인 은혜로 베드로를 붙들어주셨던 것과 같은 일을 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보편적인 긍휼을 받고 있으면서도 고집하며 계속 자기만 바라보는 죄인은, 꺼져가는 심지를 스스로 꺼버리고 마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게 된다.
참 역설적이게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에서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유기)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일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이 분명하게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이러한 진노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점점 더 많이 보게 된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히 6:4~6), 사망에 이르는 죄(요일 5:16), 회개할 기회를 잃게 하는 망령된 행위(히 12:15~17), 돼지가 도로 더러운 구덩이에 눕는 일(벧후 2:20~22), 성령을 훼방하는 죄(마 12:31, 32) 등으로 표현한다.
이런 죄를 짓는 이들의 공통점은 ‘죽어도 회개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다. 이들의 양심은 불로 지져진 피부가 감각을 완전하게 상실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께서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그들을 책망하시는 것을 조금도 깨닫지 못한다(딤전 4:1, 2; 요 16:8). 오히려 마음을 전보다도 더 완악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세게 거스르고 대적하며, 심지어 그 복음을 순전하게 따르고 지키는 성도들을 모욕하고 핍박하는 주동자 역할까지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저들의 완악함에 대노하셔서, 저들이 자기 죄로 넘어질 때 붙들어주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신다. 그렇게 저들이 넘어져 일어나지 못하는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교만함과 당신의 공의로우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다.
복음을 믿고 따르는 우리가 ‘이단’에 속한 자를 단지 한두 번만 권하고 멀리해야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딛 3:10, 11). 하나님의 보편적인 긍휼은 그들에게 아직 남아있을지 모르나, 그들의 머리 위에는 이미 영원한 진노가 드리웠기 때문이다(요 3:18, 19).
그러므로 복음이 제대로 전해지면 전해질수록,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진노와 은혜의 대비는 계속 더 선명해진다. 성령을 거역하면서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이단’들과 하나님께서 은혜로 남겨두신 ‘교회’ 사이에는 격렬한 영적 전투가 끊이지 않는다. 그로 인해, 세상은 복음이 전해지기 전보다 훨씬 더 소란스럽고 시끄러워진다(마 10:34).
마귀의 충성스러운 선봉대인 이단이 자기 어머니인 타락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 교회와 복음을 향해 온갖 악의, 중상, 비방, 모략, 핍박을 거대한 파도처럼 쏟아낸다. 교회도 그 모든 악에 대해 하나님의 진노와 자비를 정직하게 선포하면서 담대하게 맞선다.
그 속에서 저들은 잡혀 죽기 위한 짐승처럼 이성을 잃고 길길이 날뛰나, 우리는 거짓 없는 긍휼로써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뻔한’ 저들의 상태를 보며 깊이 탄식한다(유 1:10; 마 26:24). 그와 함께, 교회 안으로 가만히 들어온 이단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열심으로 공의로운 저주를 선포한다. 그리고 저들이 거룩한 곳에 가만히 들여온 온갖 더러운 것들을 완전히 부수고 깨끗하게 쓸어내 버린다(유 1:4; 요 2:13~17).
더하여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와 긍휼의 대비는, 세상에 복음이 전해짐에 따라 점점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나타나게 된다. 복음이 온 세상에 편만하게 증거되는 가운데, 성도가 온 세상에서 보편적으로 미움을 받는 날이 올 것이다(마 24:9, 14).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세상의 완악함이 전 지구적으로 계속 증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하나님께서는 더욱 찾지 않은 자에게 나타내신 바 되며, 자기 백성에게는 계속 손만 벌리신다(롬 10:21, 22). 마지막으로 갈수록 복음이 분명하게 증거되지 않은 곳에서는 하나님의 긍휼이 더욱 풍성하게 나타나나, 이미 복음이 분명하게 전해진 곳에서는 자기 죄를 사랑하는 완악함이 더욱 거세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 직전에는, 과연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악함이 전 세계적인 대세를 이루게 된다(눅 18:8). 이러한 일을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조명해 보면, 출애굽 1세대가 광야에서 전부 멸절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때가 정말 코앞에 이르면, 하나님께서 친히 남겨두신 그루터기 외에는 모두 다 쓰러질 것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교회에서부터 가장 먼저 시작되어 알곡과 가라지를 완전하게 분리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넘어질까 주의하면서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께 맡겨야 한다(벧전 4:17~19).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가 머물고 있는 바벨론과 분리되기를 힘써야 한다(계 18:4). 종의 자식을 바벨론으로 내쫓고, 참된 긍휼 가운데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기를 힘써야 한다(갈 4:30; 롬 10:13~15).
5. 마무리하며
하나님의 진노와 사랑이란 이러하다. ‘하나님의 사랑’만 찾는 현대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도 크게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으로 나타내셨다. 그러므로 누군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했다면, 당신의 유일한 아들을 십자가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게 하신 ‘하나님의 진노’를 모를 수는 없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깨닫고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진노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되며, 하나님의 진노를 온전하게 깨닫고 이해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참된 자유와 소망을 얻게 된다.
이러한 표지가 그 심령 안에 깊이 뿌리내린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왜냐하면 그 표지는, 그가 인간의 상상이 그려낸 허상이 아닌, 성경이 세상에 선포한 바로 그 하나님을 성령님의 역사를 따라 진정 인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표지가 없는 이는, 자기가 어디서 떨어졌는가 깊이 돌아보면서 회개하여야 한다. 그리고 거기 머물러 있지 말고 참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은 양 극단에 치우치게 되고 만다. 회개함 없이 ‘하나님의 사랑’만 붙들고 자기를 위로하려고 하거나, 에베소 교회처럼 처음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의 공의’만 붙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저 감상적으로 희희낙락하면서 살거나, 반대로 멸망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그리스도에게로 나올 수 없게 만드는 참으로 어이없는 일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극단에 치우치지 말라고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러니 모두 그 계시를 따라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아가도록 하자.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찾는 이를 기뻐하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가 서로 논의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더라도 눈같이 희어질 것이고, 진홍같이 붉더라도 양털같이 될 것이다.” (사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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