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결혼 진단2」 그리스도인의 결혼과 자녀 양육
신요한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살기로 약속하고 나서, 그 일을 실행에 옮기는 것 정도를 결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세상 사람들에게는 딱히 결혼 상대자에 대한 제한선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심지어 상대가 동성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이 원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결혼 상대가 꼭 그리스도인이면서 이성이어야 한다는 제한선이 있습니다. 참 역설적이게도 결혼 상대에 별다른 제한선이 없어 보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돈과 안정된 생활이라는 전제 조건이 따로 존재합니다. 그들은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가 있어도 결혼하기를 꺼립니다.
한때는 하나님을 믿지 않더라도 결혼을 약속하는 남녀 사이에는 사랑이 가장 우선시 되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상대방을 얼마큼 사랑하는가, 힘든 일이 있더라도 같이 힘을 합해 잘 극복해 갈 수 있는가는 예전보다 중요성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대신, ‘이 사람이 내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이 사람 때문에 생기는 손해는 없는가?’가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결혼을 자기 유익과 욕구를 위한 수단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조차도 그렇게 행동합니다. 이처럼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인이나 세상 사람이나 가릴 것 없이, 모두 다 결혼의 참뜻과 진정한 목적을 상실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어쨌거나 사랑하는 상대를 만나 결혼을 약속하게 되면, 본격적인 결혼 준비 과정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예비부부가 해야 하는 일은 상당히 많습니다. 보통, 결혼 1년 앞서 예식장을 알아보고 예약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그 뒤로 결혼 박람회 같은 곳도 방문하여 관련 정보를 꼼꼼히 찾아보며 분주한 시간을 보냅니다.
제가 인터넷에서 결혼 준비 리스트를 한번 찾아보니, 정말로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하고 많은 것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렇게 결혼을 준비하는 일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러한 준비에 비해, 결혼을 향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과 계획이라는 가장 중요한 부분에 과연 얼마나 신경을 기울이며 준비하고 있는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든 것에 앞서 자기 신앙생활을 깊이 돌아봐야 합니다. 내 신앙생활에 부족한 부분은 무엇인가? 하나님보다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세속적인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역경에 직면할 때도 있을 텐데 그에 대한 각오는 되어 있는가? 우리는 그러한 부분을 살펴봐야 합니다. 결혼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습니다. 우리는 결혼을 통해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집니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준비 없이 결혼하는 일은 매우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결혼은 무엇일까를 항상 숙고하면서, 결혼 후에 부모로서 해야 할 일들까지 함께 바라봐야 합니다.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
요즘 젊은 부부 사이에서는 아이를 낳지 않는 부부가 꽤 많다고 합니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절반가량이 출산을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그들이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이유는 다양했지만, 그 중 대다수는 자기 삶을 즐기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아이를 낳지 않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결혼의 목적과 질서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리차드 백스터는 그의 저서 『하나님의 가정』에서, 결혼의 첫째 유익이 자녀를 낳아 그들과 더불어 창조주를 사랑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1 청교도 가정은 평균 일곱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보아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주신 유업이고, 태의 열매는 그분의 상급이다. 젊어서 낳은 자식들은 용사의 손에 들린 화살들과 같다. 화살통이 화살로 가득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는 성문에서 원수들과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시편 127편 3~5절 말씀을 따라 많은 자녀를 낳았습니다.2
그리고 청교도는 아이를 갖는 일이 단순히 남편과 아내에게만 속한 사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자녀를 낳는 일이, 신자가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일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보았습니다.3 곧,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설하고 그분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는 수단이 바로 출산이라고 확신했던 것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도, 하나님께서 결혼을 제정하신 목적이 정당한 방법으로 인류를 영속화하고 증가하게 하는 수단이 되게 하기 위함이며 교회를 모으기 위함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처럼 결혼한 남녀는 자녀 낳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지만 자녀를 낳는 것만으로 부모의 의무를 다 이행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결혼의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낳은 자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으로 올바르게 양육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녀 양육
16세기 말과 17세기에 걸쳐 잉글랜드 교회의 개혁을 위해 힘썼던 경건한 청교도들은, 자기 자녀에게 하나님 경외함을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청교도 목사 윌리엄 가우지는 자녀에게 경건 교육을 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그것이 부모의 의무에 속한다고 봤습니다. 이는 자녀가 부모의 소유가 아닌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경건 교육을 통해 부모와 자녀 사이는 더욱 돈독해질 것이며, 무엇보다도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울 것입니다.
다음은 가우지가 소개했던 경건 교육 방법입니다.4
1.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라.
2.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 주라.
3. 가족 예배, 교리문답 교육, 영적인 일들에 관한 대화를 통해 자녀들을 가르치라.
4. 가르칠 기회를 포착하라.
5. 자녀들이 기독교 교사들에게서 기독교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라.
6. 부모가 모범을 보여 자녀들에게 경건을 가르치라.
이 중, 많은 부모가 교리문답 교육을 생소하고 어렵게 여기면서, 그 일은 교회가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가정에서 해야 하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청교도는 일주일에 한두 시간씩 교리문답 교육을 통해 자녀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쳤습니다. 자녀에게 하나님 경외하기를 가르치고자 하는 부모는, 자녀가 어릴 때부터 교리문답 교육을 시작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자 조엘 비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리문답 교육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또 하나의 귀한 도구이자 방법이다. 이 문서들은 기본 교리와 핵심 어휘를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의하여 쉽게 암기할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에 자녀들이 마음에 간직하기가 매우 용이하다. 거기에 인용된 성경 구절은 그런 정의(定義)가 성경을 근거로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교리문답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물론 하나님의 법도에 따라 사는 법과 기도하는 법을 가르친다. 자녀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면 그들이 기독교 신앙과 실천의 기본 진리를 배울 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지식을 좀 더 깊이 쌓거나 강화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5
구(舊) 프린스턴의 위대한 신학자인 메이첸 박사는, 부모님에게서 기독교가 무엇이며 어떻게 현대의 대체물과 다른지 배웠다고 회상했습니다. 메이첸은 대단한 독서가였던 부모님의 모습을 항상 보고, 어머니의 훌륭한 신앙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그래서 아직 12살밖에 되지 않았을 때, 이미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완벽하게 암송할 정도로 양질의 성경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때를 회고하면서, 메이첸은 당시의 많은 신학생들보다도 더 나은 성경 지식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경건 교육을 바탕으로, 메이첸은 누구보다 견고한 신앙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의 진리를 부정하는 자유주의자들에 맞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에게 어릴 때부터 꾸준히 교리를 가르치고 지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청교도 부모는 임신과 출산,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거쳐 결혼과 그 이후에까지 자녀의 신앙생활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성경의 진리를 자기 가정에 적용하고, 자녀를 하나님께 인도하여 그분의 뜻을 행하게 가르치고 권면하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녀의 신앙 문제를 소홀히 여기며 하나님의 일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는 사람들을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자녀 양육이라는 의무도 영원의 빛에 비추어 생각했던 것입니다.
리차드 매더는 심판 날에 저주받은 이들이 자기 부모를 다음과 같이 원망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부모들이여, 우리가 (지옥에서) 고통을 당하는 것은 모두 당신들 때문입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일을 가르쳐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또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가르쳐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을 통해 원죄의 부패함과 죄책이 우리에게 전가되었지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우리를 성심껏 돌보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처럼 부주의하고 속된 부모를 만난 우리가 참으로 저주스럽습니다. 또한 이제 동정심과 긍휼을 베풀어 우리가 영원한 불행을 당하지 않도록 도와줄 수 없게 된 당신들도 저주스럽습니다.”6
가정의 무너진 권위
이 시대의 많은 부모가 자녀를 그저 오냐오냐하면서 키웁니다.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것이 부모의 사랑인 양 잘못 이해하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 부모의 권위는 많이 무너졌습니다. 이 시대는 전반적으로 권위가 많이 허물어진 시대입니다.
부모의 권위뿐만 아니라 선생님의 권위, 경찰의 권위, 어르신들의 권위, 심지어 대통령의 권위까지도 무너졌습니다. 학교에서는 체벌이 금지되었습니다. 선생님은 학생을 매로 다스릴 수 없고, 그저 생활기록부에 벌점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 학생에게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권위 있는 존재로 비칠 리가 없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학교 선생님은 학원 선생님보다 존중 받지 못하며, 학교는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곳이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경찰의 권위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이 공권력을 행사하는 경찰 앞에서 더 당당해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오랫동안 권위에 억압받아와서 그런지는 몰라도, 권위를 가진 사람들을 꼴 보기 싫어합니다. 오죽하면 자신이 해야 할 본분을 망각한 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호 아래 온갖 남 좋은 일만 한 대통령을 서민 대통령이라 칭하며 존경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에 비해, 온갖 역경 속에서도 꿋꿋이 우리나라의 초석을 닦고 일으켜 세운 분들을 존경하는 이들은 적습니다. 권위 자체를 싫어하는 이들이 그분들을 싸잡아 독재자라고 헐뜯음으로써, 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최근에는 ‘프랜디(Friendy)’라는 신조어까지 생겨났습니다. 프랜디는 ‘친구(Friend)’와 ‘아빠(Daddy)’의 합성어로서, 아이와 잘 놀아주고 정서적인 교감을 나누면서, 아이의 눈높이에 맞추어 놀이와 교육을 병행하려는 아버지를 일컫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가 한 집안의 권위를 상징하던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그런 친구 같은 아버지 아래서 자란 아이들은, 부모가 권위를 갖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합니다. 부모를 자신과 동등한 친구 같은 존재로 여기면서, 그저 자신을 편하게 해주고 즐겁게만 해주는 존재처럼 여깁니다. 이처럼 권위를 상실한 부모가 무슨 수로 아이의 잘못을 책망하며 훈계할 수 있겠습니까? 그 아이들은 그런 훈계를 무시할 것이며, 속으로 더 큰 반항심을 키워 갈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권위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물론, 권위를 말하기 전에, 올바른 권위에 요구되는 책임과 의무 역시도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모든 권위의 중심에 두고서, 그 말씀에 따라 자기 기준과 뜻과 생각을 세워가야 합니다. 친구같이 부드럽고 친근한 권위를 찾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목회자들을 통해 우리에게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러한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를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며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의 풍조에 무릎 꿇은 요즘의 목회자와 교회는 마땅히 갖고 있어야 할 권위를 많이 상실해 버렸습니다. 요즘 시대의 청년은, 그리스도인은 직장이나 학교에서나 어디든 타협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더라도, 속으로 ‘목사님은 사회생활을 안 해 봐서 저렇게 쉽게 이야기하시지.’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의 권위를 따라 자기 삶을 비추어 조정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인내함으로써 선한 열매를 맺겠다는 생각은 그들에게 그저 고리타분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청교도는 권위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목회자와 부모를 아무렇지 않게 무시하는 요즘 시대와는 달리, 가정은 작은 교회이며 아버지는 그 교회의 목회자로 여겼습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권위가 많이 무너지고 있는 지금 시대에, 우리는 청교도가 남겨준 발자취를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높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의 책임과 역할을 훌륭하게 감당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이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칼빈은, 부모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보이셨던 것 이상의 열정과 관심을 품고 자녀를 가르치게 하실 목적으로 그들에게 아버지라는 권위 있는 이름을 선사하셨다고 말하였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는 어떠한 아버지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육신의 아버지를 사람에게 주셨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에게만 존재하는 영광을 육신의 부모에게도 나누어 주셨습니다. 따라서 부모에 대한 반항은 곧 하나님을 향한 전쟁 선포와 다름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부모에게 당신의 권한을 위임하셨고, 또한 부모에게 하나님과 동일한 지위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부모가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같은 인격과 위엄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인식해야 합니다. 칼빈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부모님을 공경할 때면,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고 또한, 우리가 마땅히 그분께 드려야 하는 봉사를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셈이라는 것을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로서 간주해야 합니다. 또한, 그와는 반대로 만약 우리가 부모님을 멸시하고 그들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을 우습게 여긴다면 분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런 행동에 의해서 공격을 받으시게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이 자기들의 부모님을 멸시할 정도로 타락할 때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세상으로부터 뽑아내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괴물이요, 온 세상을 오염시키는 전염병과도 같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분께서는 자기 부모들에게 맞서 스스로를 높이는 자들에 대한 징벌을 지체하지 않으실 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만약 자녀들이 자기들의 부모에게 순종하려는 마음을 지니지 않을 때면,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자연의 모든 질서를 폐지하려는 일에 완전히 빠져 있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에, 너무도 극악하고 가증스러운 죄악임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8
훈계의 필요성
“우리는 모두 양 같이 방황하여 각기 제 길로 갔으나” (사 53:6)
우리가 우리 자녀에 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사실은, 그들 역시도 태어날 때부터 이미 악에 치우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악에 치우쳐 있는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그냥 내버려둔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요? 다음의 성경 구절이 그 답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어린이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있다……” (잠 22:15)
“……자기 생각대로 하도록 버려둔 아이는 그 어머니를 부끄럽게 한다.” (잠 29:15)
올바른 권위를 사용하여 자녀를 훈계하는 일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권위를 중시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는 정당한 권위 행사를 인정하고 훈계와 책망을 감사함으로 달게 받아야 합니다. 부모는 그러한 본연의 책임을 잘 감당하기 위해, 마땅히 자녀를 훈계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자녀에게 읽어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부모가 사사롭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위임 받은 권위로써 자기를 책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야 합니다.
더불어 자녀에게 죄에 대해 엄히 경고하는 성경 말씀을 읽어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또한, 부모는 자녀가 죄를 지었을 때 곧바로 훈계해야 합니다. 회초리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매를 들더라도, 사랑과 신중함과 온유함으로 하고 감정적인 매질을 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자녀는 하나님의 공의를 두려워하기보다, 부모의 감정 상태를 더 두려워하면서 살피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도가 지나치지 않게 절제하는 가운데 자기 자녀를 훈계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가 그 훈계를 통해 어리석음을 깨닫고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9
경건의 본이 되어야 하는 부모
무엇보다도 부모가 먼저 성경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말이나 행동으로부터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특히, 부모의 좋은 점보다는 나쁜 점을 더 빨리 습득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여 가르친 내용과 실제 행실이 일치가 안 되면, 이는 하나님을 모욕한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녀 앞에서 매사 경건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죄를 지었을 때는 신속하고 솔직하게 죄를 뉘우쳐야 합니다. 그래야 부모로서 자녀에게 계속 경건의 좋은 모범으로 남을 수 있습니다. 비록 죄를 지었음에도 속히 회개하고 솔직히 죄를 고백하며, 우리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에게 겸손히 용서를 구하는 경건한 태도는 자녀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줍니다. 참된 경건은 죄에서 돌이켜 하나님과의 관계는 물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도 진지한 관심을 기울입니다.10
경건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마음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11 부모는 자녀에게 그러한 신앙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가장 훌륭한 본을 따라, 부모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성경, 교회, 예배, 기도, 찬양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야 하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그러므로 부모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필수적이며, 단지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공허한 사색이 아니라 올바르게 깨닫고 마음속 깊이 뿌리내려 풍성한 열매를 계속 맺는, 살아있는 지식을 꼭 갖추어야 합니다.12 물론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결혼 전부터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따라 실제로 경건한 삶을 살기에 꾸준히 힘써야 합니다.
마무리하며
가족 모두가 하나님만 바라보고 찬양하는 일은 매우 복된 일입니다. 한 가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그런 어려움도 하나님을 바라볼 때 오는 기쁨과 위로와 비길 수 없습니다. 실제 현실은 온갖 어려움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런 상황 속에서 믿음으로 낳은 자녀가 여러분을 더 어렵고 힘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키우려고 말씀을 가르치고 올바른 본을 보여도, 아이가 경건하지 않게 자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정은 그 모든 어려움을 은혜로 극복해가야 합니다. 불신자 가정과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주신 귀중한 소명을 잘 감당하려는 목표 아래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면서 연합하고 합력해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끝까지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와 복이 넘치는 가정에서, 평안함 가운데 모두가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렇게 믿음 위에 세워진 가정으로 인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더욱 굳건하게 세워져 가며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밝게 비추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포기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거두게 될 것이다.” (갈 6:9)
각주
1 리차드 백스터, 『하나님의 가정 (The Godly Home)』, 복 있는 사람, 2012, p. 72.
2 조엘 비키,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자녀 양육 (Parenting by God’s promises: how to raise children in the covenant of grace)』, 지평서원, 2012, p. 253.
3 조엘 비키, 『칼빈주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삶 (Living for God’s Glory: An Introduction to Calvinism)』, 지평서원, 2010, p. 526.
4 앞의 책, p. 277.
5 위의 책, p. 131.
6 위의 책, p. 264.
7 정준모, 『교육신학자 존 칼빈』, 한들출판사, 2009, p. 164.
8 존 칼빈, 『에베소서 설교』, 도서출판 솔로몬, 2011, p. 415.
9 에드워드 로렌스, 『경건한 부모 밑에서도 악한 자녀가 나올 수 있습니다 (Parent’s concerns for their unsaved children)』, 미션월드라이브러리, 2003, pp. 82, 83.
10 조엘 비키, 『하나님의 약속을 따르는 자녀 양육 (Parenting by God’s promises: how to raise children in the covenant of grace)』, 지평서원, 2012, p. 282.
11 존 칼빈, 『기독교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 1권』, 기독교문사, 2006, p. 115.
12 위의 책, p. 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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