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인권 진단3」 복음, 인권의 참된 토대
김재호
1. 인권과 종교
국가인권위원회는 인권(人權, human rights)을 ‘인간이 인간답게 존재하기 위한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인간의 권리 및 지위와 자격’을 의미한다고 본다.1 이처럼 인권 개념은, 사람이라면 사람답게 살 권리가 태어날 때부터 그에게 주어져 있다는 ‘본성적이고 일반적인 인식’에 기초해 있다.
사람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기가 여타 짐승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본성적으로 자각하고 이해한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든가,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따위의 말을 별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렇다면 사람이 왜 그와 같은 권리를 지니고 태어나는 고귀한 존재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 앞에 서면, 더는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한다. 머뭇거리고 버벅거리다가 자연스럽게 하늘을 우러러보게 된다. 그러면서 사람을 그와 같은 존재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높이게 된다.
실제로 인권 개념이 역사 가운데서 본격적으로 부상할 때 그 개념을 떠받들어준 사상적 토대는, 하나님께서 그러한 권리를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셨다는 ‘천부인권(天賦人權)’ 사상이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가 본성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의 고귀함 속에는 일종의 ‘절대적인’ 속성이 내포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 속성이 사람을 ‘초월하는’ 신적 존재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아숭배 사상이 넘실대는 오늘날에조차 인권의 궁극적인 토대를 제공해주는 사상은 여전히 ‘천부인권’ 사상이다.
아주 안타까운 사건이지만, 이러한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하나 있었다. 2011. 5. 24자 서울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어떤 19살 소년이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께 지속해서 폭행을 당하며 자라오다가 앙심을 품고 아버지를 살해할 목적으로 흉기를 샀다. 그러나 그 학생은 차마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했고, 엉뚱하게도 아무 상관도 없는 여대생을 살해한 뒤 그 아파트에 불까지 질렀다. 그러나 오히려 그 소년은 법정에서 당당하게 자기 행동을 다음의 말로써 정당화했다.
“살인은 미안한 것도 잘못한 것도 아닙니다. 죽고 사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동물을 도축하는 것도 잘못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들은 법정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져들었고, 반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은 그 학생에게는 결국 18년 형이라는 중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재판장은 형을 선고하면서 다음의 말을 덧붙였다.
“형이 길어서 재판부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치료감호를 받고 복역하면서 피고인이 귀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갖고 있고,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걸 깨달아 줬으면 좋겠어요. 될 수 있으면 종교를 골라서 신앙생활을 하고, 건강하게 잘 보내세요.”2
이처럼, 모두가 사람으로서 존엄한 삶을 살아갈 권리를 고르게 받았다는 인권 개념은 모든 논리와 이성을 초월하여 작동하는 종교적이고 절대적인 성격이 있다. 따라서 종교를 완전히 부정하고서, 인권을 계속 존중하고 향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종교를 부정하고 압제하는 순간, 인권 역시도 함께 생명력을 잃어버린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던 공산 혁명이 얼마나 많은 고귀한 생명을 한낱 파리목숨처럼 가볍게 여기는 데 이르렀던가 말이다.
이처럼, 인권 개념은 그 근저에 이르면 이를수록 종교적인 성격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인권은 참된 종교의 빛 안에서 더욱 활발하게 작동하고 튼튼하게 유지된다. 우리는 인권에 이러한 종교적인 성질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그 사실을 간과한 채로 인권을 논하려는 실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2. 기독교와 참 종교
우리가 인권 개념이 종교의 빛 안에서 작동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을 정말 제대로 깨닫고 이해한다면, 그 즉시 몹시 어려운 문제가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떤 종교가 진정 참 종교인가? 우리는 어떤 종교가 참되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해, 세상은 아주 다양한 답을 내어놓는다. 그러나 세상이 내놓는 모든 답의 근본 취지와 방향은 거의 다 비슷비슷하다. 세상은 근본적으로 자기 마음의 휴식을 주는 정도와 더불어, 앞에서 언급한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고 장려하는 수준에 비추어 종교의 참됨을 평가한다.
즉, 세상은 지금의 삶을 조금 ‘개선하고 조율’해주어서, 지금 하는 일을 더욱 훌륭하게 하면서도 덜 고생하게 ‘도와주는 종교’를 아주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으로 종교를 바라본다. 그리스도인은 진정 참 종교라면, 그 종교는 사람을 조금 개선하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반드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사람이 타락하고 부패한 정도가 만물보다도 더 심하고 고약하므로, 그러한 죄와 사망에서 사람을 온전히 건져낼 수 있는 새 생명이 없는 종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렇게 심각하게 타락한 죄인을 건져내어 새 생명에 이르게 할 수 있는 종교는 기독교가 유일하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기독교의 담대한 주장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참 다양하기는 하지만 대체로 일관된 반응을 보인다. 실로 어이없어하며 무시하거나 독선적인 광신자 취급을 하거나, 또는 조롱과 핍박으로 대응한다. 사실, 세상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얼마든지 예상이 가능한 것이다.
한 번 생각해보라! 바로 조금 전까지 사람의 존엄성을 지지하고 지탱해주는 것이 종교라고 했는데, 갑자기 사람은 전적으로 부패한 완전히 무능력한 존재이며, 꼭 다시 태어나야만 한다고 역설하는 종교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조금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인간 존엄성을 무시하고 거스르는 이러한 터무니 없는 주장에는 더 귀를 기울일 가치가 없다고 할 것이다.
이처럼 조금만 헤아려보면, 기독교는 세상이 도무지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을 하고 있음이 너무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심지어 기독교 역시도 그러한 사실을 인정한다(고전 1:21~24). 그러면서 기독교는 자기의 말이 정말 진실하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닫고 이해할 수 있게 되는 때는, 오직 그 사람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때라고 한다. 그전까지는 기독교의 진실성을 온전히 깨닫고 이해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따라서 기독교는 세상의 비웃음과 몰이해와 무시와 조롱과 박해가 항상 따라다닐 것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예상하면서도 그런 말을 담대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하시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 하나만 굳건히 믿고 의지함으로써 말이다.
그런데 참 놀라운 사실은, 그런 어리석고 무모하고 무식한 기독교의 주장이 지난 2,000여 년의 시간 동안 전 세계 방방곡곡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모두가 거절할 것만 같았던 그 어리석은 주장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하여, 사람을 참으로 사람답고 고귀하게 하는 일을 끊임없이 일으키면서 말이다.
그렇게 기독교는 세상 사람들의 놀라움과 반대를 함께 받으면서 전 세계로 끊임없이 퍼져나갔다. 언뜻 보면 사람의 존귀함을 공격하고 무너뜨릴 것이 확실해 보였던 바로 그 기독교가 정말로 사람을 가장 굳세게 하고 소망을 주는 참 종교라는 사실을 증명하면서 말이다. 심지어 세상이 감히 흉내 낼 수도 없고 생각하기조차 어려운 지극히 초월적이고 역설적인 방식을 사용하여 그 일을 해냈다(고전 2:9).
이처럼 기독교는 세상 사람의 생각처럼 사람을 회의와 좌절과 절망 속에 밀어 넣어 인간성 자체가 말살되게 하는 헛된 종교가 전혀 아니다. 반대로 세상 사람의 헛된 생각을 무너뜨리면서, 사람을 모든 죄와 사망의 어두운 그림자로부터 건져내는 진정한 참 종교가 바로 기독교이다.
3. 죄와 복음
그렇다면 기독교는 대체 왜 그러한 무모한 주장을 펼쳐야만 했을까? 그런 주장이 모든 이가 본성적으로 자각하고 이해하고 있는 사람의 존엄성과 권리를 정면으로 부인하고 거스르는 것처럼 보이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기독교가 그러한 무모한 행보를 보이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은 이러한 기독교의 해명에 대해 더욱더 큰 불만을 표시한다.
“우리도 인류의 죄 문제를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죄를 지은 강도, 살인자들을 법에 근거하여 잡아 가두고 그들에게 엄한 벌을 준다. 더하여 교육 및 교화 과정을 통해, 자기 잘못을 바로잡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세상의 노력에 대해 충분히 감사하고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롬 13:1~7). 그러나 우리는 그런 활동에는 분명한 한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적할 줄 알아야 한다. ‘죄’는 기본적으로 그 죄를 짓는 존재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생각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발정 난 수컷 강아지가 동네방네 쏘다니면서 여러 암컷 강아지와 교미한다고 해서, 그 강아지에게 죄를 묻는 행동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다. 그러나 어엿한 유부남이 여러 여인과 어울리며 불륜을 저지른다면, 배우자에 대한 신의를 저버린 죄를 그에게 물을 수 있다.
또한, 죄는 근본적으로 ‘전부냐 아니냐(all or nothing)’의 문제이다. 죄가 있든지 결백하든지 둘 중의 하나만 성립하지, 죄가 있으면서도 결백하거나 결백하면서도 죄가 있을 수는 없다. 그래서 평소에 아무리 배우자에게 잘 해주었어도, 단 한 번 불륜을 저지르면 그 순간 그 모든 것들은 물거품이 된다. 평소에 아무리 어려운 이웃을 위한 구호 활동에 앞장섰어도, 공금을 횡령했다면 당연히 감옥에 가야 한다.
정상이 참작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람의 연약함과 처지를 고려해주는 ‘긍휼’의 차원에 속하는 문제이지, 죄 그 자체에 내포된 개념은 아니다. 죄는 짓는 순간, 죄를 지은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고 무너뜨리는 무서운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결국 죄를 지은 이의 모든 것, 즉 그 사람의 고귀한 생명을 대가로 요구하는 성질을 띠게 된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밤잠을 설쳐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정말 죄 문제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 보면, 세상이 얼마나 죄 문제를 대강 처리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세상은 죄 문제를 창조주 하나님과 관련하여 처리하려고 하지 않는다. 앞서 말한 것처럼 죄가 진정 우리 ‘정체성’과 관련된 문제라면, 마땅히 우리를 그러한 존재로 만들어주신 하나님과 관련하여 죄의 악함과 벌의 정도를 책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말로는 천부인권 사상을 이야기하나, 실제로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비롯한 인간중심의 기준을 가지고 죄의 악함과 벌의 강도를 책정해나간다. 또한, 진정 죄 문제가 처리되려면, 죄를 지은 이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앗아가는 형태의 법체계가 운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법체계를 운용한 나라는 역사상 단 하나도 없다. 오히려 법을 엄하게 가져가면 가져갈수록, 그 법을 지키지 못하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뒤집어엎는 일이 일어나곤 했다.
이처럼, 이 세상은 죄 문제를 근본적으로 처리할 만한 능력이 없다. 이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세상의 한계를 누구보다도 잘 아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앞서 언급했던 활동을 통해서 그럭저럭 죄가 억제되게끔 섭리해주신다.
그리하여 이 세상이 자기 죄를 따라 순식간에 멸망으로 치닫는 일을 막아주신다. 마치, 병원에서 시한부 말기 암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조금이나마 생명을 연장해주는 의료 시술을 시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시술을 받는 사이에 암을 이겨낼 만한 어떤 획기적인 반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환자는 결국 죽음을 맞는 일을 피해갈 수 없다. 이처럼 이 세상은 죄의 고통과 영향력을 잠시나마 덜어주는 것 이상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가 이 땅에 속하지 않았으며,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라고 하셨던 것이다(요 18:36; 마 22:21).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그런 이 세상에 획기적인 반전을 만들어내신다. 현대의 많은 이가 복음을 그저 나를 예뻐해 주고 무엇이든 다 받아주시는 마음씨 좋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정도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와 전혀 다르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 이 세상에 선포하신 복음의 본래 내용은 그렇게 달콤하지 않다.
오히려 복음은 사람을 진정으로 죄의 늪에서 건져내려고 하기에, 그동안 세상이 대강 털어내 준 죄의 고통스러운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자연인에게 복음은 본성을 거스르고 역행하는 어리석은 소식으로 다가오는 것이 지극히 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복음은 그런 반응에 개의치 않고, 세상이 사랑하는 달콤하고 쉬운 의의 기준을 거룩하신 하나님께 다시 맞추어 놓는다. 세상 사람에게 죄란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한 것’ 정도이지만, 복음을 믿는 이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성향 그 자체(롬 1:28)’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말로는 ‘천부인권’ 운운하면서 하는 행동들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 오히려 참된 그리스도인은 그런 일들에서 세상이 일면 하나님을 인정하고 높이는 듯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 지혜를 믿고 의지하는 일을 전혀 포기하지 않는 완악함을 발견한다.
세상 사람은 입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만, 실제 마음은 그분에게서 멀 뿐이다(마 15:8). 더구나 세상 사람은 그러한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감지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복음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상태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가를 전 인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복음은 그러한 전 인격적인 파산과 직면한 다음에야 비로소 달콤하게 다가온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서는 일말의 희망도 발견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이에게 기꺼이 찾아가신다. 그리고 그의 눈을 들어 갈보리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신다.
‘마땅히’ 내게 내려졌어야 하는 바로 ‘그 사망의 형벌’이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신 내려졌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의 천사가 나를 그냥 넘어가는 일이 ‘이미’ 일어났다. 그래서 죄와 사망이 우리를 주관할 수 없으며, 동쪽이 서쪽에서 먼 것처럼 모든 죄과가 내게서 완전히 멀리 옮겨졌다(시 103:12).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진정으로 자유롭게 했다(요 8:32)고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참 자유를 얻은 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죄를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신가를 보면서 놀라게 된다. 동시에 그러한 세상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나름의 선한 결실(천부인권 등)을 꾸준히 산출하게끔 섭리해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 찬송할 수 있게 된다(벧후 3:9; 행 14:17).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대하시는 것과 같은 오래 참음과 참된 긍휼로써 세상을 대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진실하게 ‘아끼고 사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이 맺는 그 나름의 선한 결실이 더욱 흥왕하고 견고하게 하는 역할도 감당하게 된다(마 5:13~16).
이처럼 이 세상이 흐릿한 안갯속을 더듬으면서 그저 막연하게 모든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할 때, 복음은 진정 사람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준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함 가운데, 모든 이에게 주어진 인권을 보장하고 향상하는 데 기꺼이 헌신하게 된다. 그러나 죄에 사로잡힌 세상은 그러한 복음을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소리로 여기며 거부한다. 그리고 그러한 현상은 이 세상이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깊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4. 기독교와 참된 인권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지 못하는 현실을 참으로 가슴 아파하며, 그들이 사람으로서 누려야 할 최소한의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데 깊은 관심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것들을 제공해주기 위해 칼과 창을 손에 들고 나가 싸우지 않는다. 오히려 주어진 사회적 상황 안에서 신분 질서를 초월한 참된 사랑을 발휘하여 그런 일을 온건하게 감당해간다.
실제로 고대 그리스∙로마에서는 부모에게 자녀를 키울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장애 아동 같은 경우, 길거리에 비참하게 버려져 숨을 거두거나 친부모의 손에 의해 짧은 생을 마치는 비극이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곤 했다. 심지어 멀쩡한 아들에게조차 그러한 비극이 찾아오곤 했다. 그렇게 부모 손에 목숨을 잃고 노예처럼 팔아 넘겨지는 일이 그들에게 닥쳐도, 고대 사회는 그들의 부모에게 조금의 책임도 묻지 않았다.3
노예와 여자들의 사회적 지위와 처우도 매우 열악해서, 그들은 언제라도 처분이 가능한 재산이나 소모품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B.C. 73년에 스파르타쿠스가 노예 반란을 일으키자 순식간에 수만 명의 노예가 가담할 정도로 사회적인 불만이 가득 쌓여있었다.4
그런 어두운 사회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신분을 초월한 진실한 인간애는, 당시 사회가 지닌 야만성을 또렷하게 드러내 주었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준 진실한 인간애는 긴 시간에 걸쳐 로마법 체계 속에 하나씩 담겨갔다.5 그리고 현대법이 로마법에 지고 있는 빚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나마 기독교의 덕으로 이만큼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이 아니다.
또한, 현대인의 주요 화젯거리인 복지도 원래는 그리스도인이 보여준 자선(Charity)에서 유래한 개념이다. 당시 사회가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이를 그저 골칫거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은 그런 이를 진실한 사랑으로 귀하게 여기며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 예를 들어, A.D. 3세기경에 일어난 박해 때 로렌티우스는, 로마 황제가 군사를 보내어 교회의 보물을 내놓으라고 하자 늙고 병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여기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 있습니다.’라고 답했다고 한다.6
심지어 복지의 중요성에 눈뜬 현대 사회에서조차도 이러한 종교적 신념에 따른 자선의 중요성과 가치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났다. 아무리 복지 체계를 잘 갖춘다고 해도, 그 모든 것을 나라가 다 감당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많은 무리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의 복지 정책은 나라가 구축하는 사회 안전망과 민간단체가 행하는 자선을 융합한 개념이 가장 환영받는다. 따라서 종교 단체가 자발적으로 벌이는 자선 활동은 여전히 한 나라의 복지 정책을 떠받드는 중요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기독교가 교육, 문화를 통해 인권 향상에 이바지한 바도 많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대 사본 가운데 가장 많이 남아있는 문헌은 무엇일까? 바로 성경이다. 신약 성경 원어인 그리스어로 기록된 신약 성경 사본은 무려, 5,644개나 된다. 그다음으로 많은 문헌이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인데, 그 수가 고작 650개밖에 안 된다.7
청교도는 자기 자녀가 하나님 말씀을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아이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학교를 세워 학문을 증진했다. 후대에 세속화되기는 했지만, 우리가 이름만 들으면 다 아는 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의 대학이 본래는 다 그런 목적으로 세워진 학교였다. 칼빈 역시도 제네바 아카데미를 세워 경건과 학문의 조화를 꾀했다.
그뿐이 아니다. 놀랍게도 기독교는 정치의 영역에서 인권을 향상하고 증진하는 일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우리는 흔히 ‘노예 해방’하면 에이브러햄 링컨을 떠올린다. 하지만 노예 해방을 이 세상에 가져온 인물은 사실 링컨이 아니다. 링컨은 기본적으로 노예 해방에 앞장선 사람이라기보다는, 철저한 연방주의자의 입장에서 노예 해방 문제를 정치적인 셈법으로 접근하고 활용한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그래서 링컨은 미 연방의 존속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노예 제도를 얼마든지 용인해줄 용의를 여러 차례 내비쳤다. 그러나 어떻게든 연방을 계속 유지하려는 그의 모든 노력이 결국 허사가 되고, 또 이미 국제적인 쟁점으로 떠오른 노예 제도에 대한 입장이 모호하다는 이유로 유럽의 원조도 지지부진하자, 북부에 명문과 실리를 제공하면서 남부를 압박하려고 꺼내 든 정치적인 승부수가 바로 노예 해방이었다.8
이처럼 링컨이 철저하게 정치적인 걸음으로 노예의 인권 문제에 다가섰지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노예 해방’에 투신한 사람이 있었다. 온갖 비난과 조롱과 위협을 무릅쓰고 끝까지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갔던 사람은 바로 윌리엄 윌버포스라는 그리스도인이었다.
필립 도드리지의 저서를 읽고 회심한 윌버포스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하던 그 엄청난 일에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엄청난 반대와 핍박을 평생 감수해야만 했다. 그토록 많았던 인기, 재산, 명예 등이 다 사라졌고 수많은 정치적 동지와 친구가 그에게 등을 돌렸다. 성난 시민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몇 차례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지만, 윌버포스는 끝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결국, 죽기 3일 전에 노예 제도가 폐지된다는 승리의 기쁜 소식을 듣고서 윌버포스는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다.9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 제도가 지구 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춘 것은 20세기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10
그러니 복음 안에서 온 인류를 가슴에 품고 전심전력한 윌버포스가 아니었다면, 어쩌면 우리는 오늘도 시장에 나가 흑인 노예를 팔고 사는 광경을 전혀 낯설어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납치해오는 무역선이 항구를 드나드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면서 말이다.
이처럼 기독교가 인권 향상에 끼친 선한 영향은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렵다. 기독교는 그 누구도 사회적 약자의 인권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기의 소유를 내어 기꺼이 그들을 돌보았다. 주님의 말씀처럼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게 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이 진정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일에 많은 열심을 내었다. 기독교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 세상에 진정 사람다운 삶이 무엇이며 인권이 무엇인가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참 감사하게도,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은 인권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세상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이미 많은 측면에서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지 않게 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물론 그래도 많은 부족함이 있기에, 사람들의 입에서는 늘 살기 어렵고 힘들다는 말이 떠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고 한들 조선 시대 노비만 하겠는가? 로마 귀족의 여흥을 위해 피 흘리며 죽어간 검투사가 느꼈던 비애만큼만 하겠는가? 화장실도 없는 선창에 갇혀 화물 취급을 받으며, 온갖 질병과 고통 중에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면서 대서양을 넘어야 했던 흑인들만 하겠는가?
우리는 그나마 이 정도라도 사람답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무한히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환경을 물려주기 위해 헌신한 모든 이들, 특히 믿음의 선배에게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피땀 어린 수고와 노력이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어쩌면 탈북민과 같은 극단적인 선택을 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우리는 자유롭게 교회에 갈 수 있고, 자유롭게 복음을 전할 수 있으며, 또 자유롭게 학문을 연구하고 자기 진로를 정할 수 있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이 나라를 참으로 사랑하고 굳게 지킬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인권의 개념이 자꾸만 자아중심적이고 자아실현적인 방향으로 치우치고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현상을 아주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계몽주의와 실존주의가 낳은 이 자아실현적인 인권 개념으로 인해, 사람이 얼마나 무질서하고 짐승처럼 사는 삶을 오히려 존귀하게 여기게 된 이들이 얼마나 늘었는지 모른다. 예전 같으면 차마 입에 담기조차 어려웠던 행동이 오늘날에는 아무렇지 않게 ‘인권’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 동성애, 학생인권법, 낙태, 여성 해방, 반정부시위 등등의 죄악이 바로 인권의 이름으로 합리화되고 있다.
한번 양심적으로 자문해보라.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아니면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가? 학생이 공부에 전념하면서 선생님께는 공손한 것이 사람다운가, 아니면 임신할 권리를 주장하면서 경찰에 선생님을 고발하는 것이 사람다운가?
원치 않은 생명이라고 해서 세상의 빛도 못 본 채로 사그라지게 하는 것이 과연 사람에게 어울리는 행동인가? 양성평등을 주장하면서 이 사회를 불필요한 성 대결의 구도로 몰아가는 행동이 과연 적절한가? 사회 절대다수가 인정하는 사회 질서를 내 맘에 안 든다고 우선 뒤집어엎고 보려는 단체 행동이 과연 지각 있는 사람이 할 만한 행동인가?
진정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러한 죄를 인권 향상으로 여기는 악을 행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일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삶을 더욱 짐승 같게 할 뿐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인권에 관심을 두는 이유는 복음 안에서 저들이 사람답게 살게 하고자 하려는 선한 마음 때문이지, 자기를 절대 기준으로 짐승처럼 살아가는 무책임한 삶을 조장하려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5. 마무리하며
진정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사랑하고, 그들이 사람답게 살 권리가 있음을 기꺼이 인정하고 보호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존중과 보호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범위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자아실현이나 자아도취를 포용하고 인정해주는 데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이야말로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지 못하는 올무임을 알고, 그런 잘못된 시류와 맞붙어 싸워야 한다. 우리가 복음의 테두리 안에서 그와 같이 참된 인권 향상과 수호에 힘쓸 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이 덜 고생하고 극한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서도 복음을 듣고 하나님을 경배할 수 있게 섭리해주실 것이다.
「인권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인권 진단3」 복음, 인권의 참된 토대
각주
1 국가인권위 역, 『사회복지와 인권』, 인간과 복지, p. 14. (https://ko.wikipedia.org/wiki/인권 에서 재인용.)
2 이민영, 「“미안한 일도 잘못한 일도 아니다” 반성없는 19세 살인범」, 서울신문. 2011. 05. 24.
3 필립 샤프, 『교회사전집2: 니케아 이전의 기독교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2)』, 이길상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p. 346.
4 함규진, 「스파르타쿠스」, 네이버캐스트.
5 앞의 책, p. 369.
6 존 폭스, 『기독교 순교사화 (Foxe’s Book of Martyrs)』, 양은순 옮김, 생명의말씀사, 2011, p. 29.
7 마크 가브리엘, 『예수와 무함마드 (Jesus and Muhammad)』, 이용중 옮김, 지식과사랑사, 2009, p.296(부록 A).
8 함규진, 「미국을 만든 결정들(2)」, 네이버캐스트.
9 함규진, 「윌리엄 윌버포스」, 네이버캐스트.
10 캐서린 스위프트, 『존 뉴턴 (John Newton)』, 김은홍 옮김, 기독신문사, 2005, p.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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