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2) 오직 성경 -상-
김재호
오직 성경의 중요성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뜻을 어떻게 전달하실까? 기독교인이라면 당연히 “성경을 통해서”라고 답할 것이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이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성경’ 앞에 ‘오직’을 붙여, “오직 성경”이라고 하면 금세 엄청난 반발이 뒤따른다. 한 배를 타고 있었던 동료가 알고 보니 해적이었다는 소리로 시끌시끌하게 된다. ‘오직 성경.’ 대체 이 말이 무엇이기에 그토록 커다란 파문을 일으키는 것일까? 하나님께서는 ‘오직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실까? 아니면 ‘성경’과 더불어 ‘또 다른 무엇’을 통하여 말씀하실까?
이 두 가지 중 어느 쪽이 옳다고 여기느냐가, 결국 한 사람의 신앙에 관한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주제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 수 있는 방편의 범주를 결정하는 ‘정당한 권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이 옳다고 믿는 이에게 ‘또 다른 무엇’은 아무것도 보장할 수 없다. 이런 이에게 그 ‘무엇’이란 결국 보잘것없는 사람의 말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성경과 또 다른 무엇’이 옳다고 믿는 이에게, 성경에 없는 교훈을 말하지 말라고 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성경이 아닌 ‘저것을 통해’ 알려주셨다”는 답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 이 문제에 올바르게 대응하려면, 마땅히 모든 이들이 인정하는 ‘성경’이 이에 관하여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에 분명한 답이 나와 있다면, 다른 모든 대안과 의견들은 즉시 배제되어야 한다. 모두가 인정하듯이, 그 답은 사람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내신 권위 있는 대답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자신을 어떻게 정의하며 자신을 어떻게 사용하라고 하는가를 살펴봐야 한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경이 아닌 또 다른 어떤 기준을 문제 해결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는데, 이러한 접근은 명백한 결함을 안고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출발점으로 삼은 그 기준에 맞춰 성경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성경은 그 기준에 완전히 종속되어 버리고 만다. 마치 실정 법률들이 헌법 조항의 허용 범위 안에서만 정당한 집행 권한과 효력을 얻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상황이 함축하는 실제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 상황은 모두가 기꺼이 동의했던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자신의 의사를 전해오셨다”는 말을 아무런 의미 없는 말로 만들어버린다. 특정한 기준에 종속된 성경은 사람에게 자기주장을 직접 전달할 수 없다.
누군가 성경을 읽고 하나님의 뜻을 직접 발견하고 이해했다고 해보자. 그래도 아직은 온전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는다. 특정한 기준의 도움과 허용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그 뜻은 하나님의 뜻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결정된 것은 아직 하나도 없다. 반짝인다고 다 금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다는 말의 실제 의미는 결국 이런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말씀하셨지만, 그 뜻을 정확히 풀어 전달할 수 있는 선행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권한은 ‘오직’ 우리에게만 허락하셨다. 따라서 너희는 우리가 제시하는 이 기준을 하나님께서 내리신 것으로 여기고, ‘오직’ 이 기준에 맞추어 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성경은 오직 그들의 손에서 해석되고 가르쳐져야만 하며, 나머지 사람들은 그 해석을 ‘무조건’ 믿고 따라야 한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그 특별 계급이 아닌 나머지 사람에게는 사실상 성경이 필요 없게 된다. 어차피 읽어봐야 그 뜻이 맞을지 안 맞을지는 ‘모른다’. 성경 읽느니, 그 특별 계급으로부터 직접 배우고 하라는 것을 무조건 따라가면 그만이다. 성경을 읽고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일은 번거롭고 의미도 없다.
이렇듯 다른 기준을 출발점으로 세우고 성경에 접근하면, 결국 성경은 아무런 의미 없는 책이 되고 만다. 성경은 오직 그 특별 계급에만 의미가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이에 대해 무엇이라고 할까? 이것을 지지할까? 아니면 거절할까? 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성경은 거절 정도가 아니라 아예 정죄한다.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고 불리지 마라. 너희 선생은 한 분 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땅에서 아무도 너희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너희는 지도자라고 불리지 마라. 너희 지도자는 그리스도 한 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마 23:8~10)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들은 왜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하셨고, 또한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여라.’ 하셨으나, 너희는 말하기를 ‘누구든지 아버지나 어머니께 제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예물이 되었습니다.’라고 하기만 하면, 그의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이처럼 너희는 너희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무효로 만든다.” (마 15:3~6)
이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자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과연 이것들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행 17:11)
이렇듯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분의 뜻과 계획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기록되고 보존된 ‘공식 문서’에 해당한다. 따라서 ‘누구나’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며 무엇을 말씀하셨는지를 읽고 파악해낼 수 있다. 성경은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말하며 다른 무엇에 조금도 의지하지 않는다. 기록된 말씀의 뜻은 매우 자명하기 때문에, 특정한 사람들이 여기서는 이 뜻으로 저기서는 저 뜻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은 아주 체계적이기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진술할 수 있고, 이렇게 정리한 내용은 십중팔구 같다. 차이가 있는 경우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무엇을 더 중시했고, 그에 따르는 단점을 어떻게 보완하려고 했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강조점의 차이일 뿐, 본질적인 내용의 차이는 아니다.
만약 교회에 구원받은 사람들만 있고 죄가 조금도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면, 앞서 말한 내용은 단 하나의 예외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는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 심지어 참으로 구원받은 성도라도 미혹에 흔들릴 수 있다(마 24:24). 염소가 아니라 단지 성품이 아직 덜 다듬어진 양도 있고, 다리를 저는 양도 있다(고전 3:11~15).
그래서 하나님의 자명한 말씀이라고 해도, 사람이 오해하고 맥락을 놓치며, 심지어는 하나님 말씀의 근본을 위협할 수 있는 그릇된 가르침까지도 섞여 나올 수도 있다. 기드온은 참으로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본의 아니게 우상숭배의 올무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놓기도 했다(삿 8:27).
이렇듯 우리가 사는 곳은 천국이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항상 완전을 소망하며 살면서도, 이 땅에는 100%가 없다는 사실을 오해 없이 받아들여야만 한다. 또한, 우리의 부족함에도 하나님의 은혜와 보호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본질적인 측면에서는 완전하게 가르쳐질 수 있다고 믿어야만 한다.
14k나 18k나 24k나 다 귀금속이고 금의 한 종류다. 그러나 24k가 금의 고유한 특질을 가장 잘 나타낸다. 물론 24k도 100% 금은 아니다. 불순물은 미량이지만 남아있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불순물을 걸러내야 한다. 개혁주의 교회론의 제 1원리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반면, 도금한 구리반지도 있다. 겉으로 보면 반짝반짝하고 색깔도 누르스름한 것이 꼭 금 같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도금한 게 다 벗겨져 버린다. 그렇다면 어떤 교리적 진술이 24k에 가장 가까우며, 어떤 것이 겉만 번쩍번쩍한 도금 반지일까?
이 질문에 제대로 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고 폐기하려는 죄의 본질적인 특성과 명백한 하나님 말씀의 본래 의미를 최대한 대비시키면서, 양쪽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뿐이다. 우리가 각 금속이 가진 녹는 점의 차이를 이용해 금과 불순물을 분리해내듯, 하나님과 죄 사이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차이점을 일관되게 대비시키면, 본래 하나님의 말씀이 스스로 그 뜻을 드러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이고도 자명한 성경의 기록 목적과 존재 이유를 먼저 생각해봐야 한다. 또한, 그 이유와 목적을 왜곡하려 드는 요소들의 근원과 본질을 추적해가면서 계속 둘을 나란히 대비시켜야 한다.
구속 언약, 성경의 핵심 가르침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된 가장 근본적이고도 자명한 이유와 목적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에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더라도 쉽게 답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이다. 이것만큼 자명한 사실도 없다. 실제로 성경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못한 분을 어떻게 부르겠느냐? 듣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떻게 듣겠느냐? 보내심을 받지 않았으면 어떻게 전파하겠느냐? 기록된 것과 같으니,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다 복음에 순종한 것은 아니다. 이사야가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습니까?” 하였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롬 10:14~17)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들이 본보기가 되어 말세에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한 경고로 기록되었다. (고전 10:11)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으니, 성경은 능히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준비되게 하려는 것이다. (딤후 3:15~17)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이해하려고 할 때 반드시 가져야만 하는 중요한 전제는, 성경이 본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신 일로 채워져 있다.
이스라엘의 역사나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어떤 민족의 역사나 황당한 고대 설화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행하신 실제 구속의 역사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이야기도 나사렛 목수의 아들과 무식한 어부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이 땅 위에 실제로 펼쳐 보이신 구속의 이야기다.
마찬가지로 종말에 관한 예언은 중동의 이스라엘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전 우주적으로 행하실 구속사의 완성을 뜻한다. 이처럼 성경은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완성하실 구속의 사역, 즉 구속사의 맥락에서 접근해야 본래 의미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 있으며 불필요한 왜곡도 막을 수 있다.
만일 여기서 벗어난다면, 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 유대 중근동 지방의 셈 족(族) 설화가 우리 민족과 대체 무슨 상관인가? 술람미 여인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아가서는 우리의 연애를 위해 기록되었단 말인가? 그러나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접근하면, 그 이야기들은 우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의미가 있게 된다. 그 기록들은 단순한 셈 족의 역사가 아닌, 인류의 구원에 대한 모형이고 예표이며, 그 구원을 성취할 한 분과 그 시점을 분명하게 가리키게 된다. 마찬가지로 아가서도 우리를 구원하실 분의 사랑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며, 그 사랑이 성취되어 나타날 역사의 한 지점을 가리키게 된다.
이렇듯 성경을 이해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 구속사적인 전제라면, 구속사 자체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약속의 책이다. 구약(舊約), 즉 옛 언약이 장차 오실 구원자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성취될 그 날을 소망했던 것이라면, 신약(新約), 즉 새 언약은 그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구속이 완성될 그 날을 소망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필자가 지금 없는 내용을 막 꾸며내며 사람을 미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 성경이 정말 그렇게 말하고 있는지 아닌지 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할 것이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고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 (창 3:15)
모세가 놋 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아놓으니, 뱀에 물린 자마다 놋 뱀을 쳐다보면 살았다. (민 2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할 것이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4, 15)
그 성읍의 거리 가운데로 흐르고, 강 양쪽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 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열매를 맺으며, 그 나뭇잎들은 만국 백성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었다. (계 22:2)
위의 구절들은 구속사적인 맥락을 따라, 구속의 언약이 어떻게 세상에 주어졌으며 반복하여 예표된 뒤에, 그 약속이 어떻게 성취되었고 완성될 것인가를 간단히 제시한 것이다. 성경의 초반부에,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자비로운 구원의 약속을 주신다. 그 약속은 뱀의 간계로 인해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에 상함을 받고, 여자의 후손으로 인해 뱀의 머리가 상하는 일을 통해 성취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을 통해 세상에 처음으로 주신 구원의 약속이었다. 그리고 아담은 우리와 똑같이, 그 은혜를 따라 믿음으로 장차 오실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구원받았다.
이 위대한 약속은 유월절의 출애굽 사건을 통해 더욱 분명하게 예고된다. 이집트로부터 백성을 이끌어내는 모세는 구속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언약적인 모형이고 예표였다. 모세의 인도를 따라 죽음의 천사들로부터 건짐 받고 이집트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약속의 땅으로 나아갈 때,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말았다. 그 길이 너무도 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괜히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며, 구원의 약속을 믿고 소망하는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구속 언약을 저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가는 일에 대한 하나님의 엄중한 진노와 경고를 의미한다. 겨우 피한 줄로만 알았던 죄와 사망이 다시 그들을 삼켜버릴 것을 뜻한다. 불뱀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죽었고 또 죽어가는 중에 모세에게 나아가 회개하자, 하나님께서는 장대에 놋 뱀을 달게 하시고 물린 자마다 그것을 바라보게 하셨다. 이 놋 뱀은 에덴동산의 언약과 명확하게 일직선 상에 놓여있다. 뱀의 머리, 즉 죄와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실 여자의 후손을 믿는 믿음으로 회개하고 다시 나아오라는 뜻이다. 그러면 죽지 않고 산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당신의 십자가에 연결하신다. 이는 예고된 언약의 성취를 뜻한다.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에 상함을 받았을 때,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해를 당하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을 때, 죄와 사망을 세상에 가져온 장본인인 사탄의 머리는 깨어졌다. 또한, 이 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의미가 있었다. 이는 당시 유대인들의 상태가,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여 죽어가던 바로 그 상태라는 뜻이다. 그들은 배교한 상태로, 구속의 약속을 저버리고 멸시하고 있었다. 회개치 않으면 다 멸망한다.
예수님께서는 그 말씀을 당시 사람들에게 하셨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고 계신다. 그러나 구속 언약의 성취를 직접 지켜본 이스라엘 대다수는 결국 광야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그들은 약속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도 마귀의 편에 서서 자신들의 구속주를 배척하고 모욕을 주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에도 회개하고 주님을 믿은 소수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광야에서 넘어진 1세대들이 혈통적 유대인이라면, 그 뿌리로부터 접붙임을 받아 영광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이면적 유대인인 우리는 2세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세대도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많은 이가 엎드러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강을 건너기 전에 발람의 계략으로 큰 배교가 일어나 2만 4천 명이 염병으로 죽었다. 그러니 항상 깨어 주의해야 한다. 매사에 거룩한 열매를 맺고 끝까지 믿음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서지 못하면, 광야에서 넘어진 1세대처럼 우리도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된다. 우리 주위에 즐비한 이단들과 배교자들을 보며 정신을 차리고, 우리 영혼을 은혜로우신 주님께 늘 의탁해야 한다.
이제 요한계시록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든 죄와 악은 지옥에 던져지고 멸망하며, 새로운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영원한 평강을 누리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약속된 이 나라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소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만왕의 왕께서는 오늘도 이 구속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하시기 때문이다.
에덴 동산의 생명나무는, 사람들이 이날을 바라보며 살라고 세상에 두신 예표였다. 그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동산을 거닐던 아담과 하와처럼, 주님을 직접 대면하며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새로운 언약은 없어질 양과 염소의 피로 보증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보증되었다. 옛 언약의 백성들은 폐하여질 모형 안에서도 그날을 환영하며 기다렸다. 그러니 그 일이 성취된 것을 본 우리들은 얼마나 이날을 더 크게 기뻐하며 기대해야겠는가? 그날이 이르면 양과 염소가 영원히 갈라질 것이다. 다시는 고통과 슬픔과 저주와 사망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을 것이다.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2) 오직 성경 – 하에서 이어집니다.
부드럽지 않은 단단한 음식도 씹어 삼켜보자
(2) 오직 성경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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