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성령 진단2」 성령 세례와 성령 충만
김재호
▲ 성령님의 능력으로 온갖 어려움을 이겨내며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 복음을 전했던 조지 휫필드 목사님
출처: (CC-BY-SA) Thomas Gun (wikipedia)
20세기 들어, ‘성령 세례’라는 말이 신자들의 입에 심심치 않게 오르내렸다. 오순절-은사주의 인사들이 하늘에서 임하는 ‘능력의 세례’가 있다고 가르치면서부터, 교회 안에는 ‘성령으로 세례’ 받기를 간절히 바라고 추구하는 이들이 대폭 늘어났다. 동시에, 많은 신자들이 ‘능력의 세례’를 받지 못한 이들을 냉랭하고 형식적인 신앙인으로, 심지어 구원받지 못했거나 성령을 훼방하는 사람으로까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개혁주의 진영에서는 대체로 이런 가르침이 배격되었으나 꼭 그랬던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하나님의 주권과 열매를 강조하기는 했지만, 신자에게 ‘능력의 세례’가 하늘로부터 반복해서 부어진다는 오순절-은사주의 진영의 핵심 주장에 완전히 뜻을 같이했다.
그렇다면 20세기 후반을 떠들썩하게 했고, 많은 이들의 입에 여전히 오르내리는 ‘성령 세례’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모든 성도에게 친숙한 용어인 ‘성령 충만’과는 어떤 관계일까? 지금부터 그 부분을 살펴보도록 하자.
1. 성령 세례란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성령의 세례’는 오순절-은사주의 진영에서 말하는 ‘능력의 세례’와는 거리가 멀다. 왜냐하면, 성경은 죄인이 구원받아 예수 그리스도께 접붙임 받는 일을 ‘성령의 세례’라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다(고전 12:13).」
그러므로 ‘성령 세례’는 전통 신학 용어인 ‘거듭남’과 의미가 같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죽은 사람의 영혼을 복음으로 살려내신다. 성령님께서는 죄인이 복음을 들을 때, 죄로 굳게 닫힌 그의 마음을 열어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하게 역사하신다(행 16:14). 그렇게 그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고후 5:17).
이처럼, 성령 세례는 성령님께서 죄로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시는 일이므로 반복해서 받을 수 없다. 성도는 평생 단 한 번만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다. 이미 거듭난 신자에게 또다시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말은, 한 번 더 거듭나라는 말과 같다. 마치, 무덤에서 나온 나사로에게 “당신은 다시 한 번 더 무덤 문을 열고 나와야 합니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과 같다.
한 번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이들은 주님께 다시 접붙여질 필요가 없다. 그분의 손에서 신자를 빼앗아 갈 자가 없기 때문이다(롬 8:38, 39).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 세례’ 받기를 간절히 사모하고 추구하라는 말을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그런 일은 예수님과 그분께서 선물로 주신 영원한 생명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반론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많은 이들에게 교리적 기독교에 눈뜨게 해주신 고마운 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 성령 세례에 대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핵심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러나 오순절-은사주의자들이 성령 세례 교리를 옹호할 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논증을 주로 사용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거듭난 사도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은 일(행 2:1~4)과 바울 사도가 세례 요한의 제자에게 ‘믿은 뒤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었던 점(행 19:1~7) 등을 성령 세례의 근거로 제시한 일은 오순절-은사주의자를 돕는 천군만마(千軍萬馬)가 되었다.
그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주장을 앞세워 성령 세례 교리를 옹호한 다음, 성령 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나 치유 같은 초자연적인 은사로 나타난다는 그들만의 주장까지 받아들이게 하려고 무던히 애를 쓴다. 이처럼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반론은 사람들을 오순절-은사주의 신앙으로 끌어들이는 관문이나 다리처럼 악용된다.
또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 세례를 옹호하면서 ‘성령의 인치심’이라는 개념을 완전히 잘못 가르치는 중대한 실수도 저지르셨다. ‘성령의 인치심’이란 원래 성령의 내주하심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다시 말해, 성도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누리는 참 평안과 안식이, 마지말 날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온전하게 받으리라는 사실을 확실히 보증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성령의 인치심을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성령을 특별하게 부으셔서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임을 공적으로 확증해주시는 일처럼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일부 은사주의자들과 교리적 토대가 약한 신자들은, 성령 세례를 받았다는 내적 체험을 자기 신앙의 절대적인 토대로 삼는 치명적인 오류로 담대하게 나아갔다. 간음 같은 큰 죄를 짓고서도 “하나님께서 성령 세례를 통해 친히 성도로 인정해주셨는데 누가 나를 정죄하겠느냐?”라고 하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그들은 구원파와 같은 율법폐기주의의 늪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그런 이들이 하나님의 주권과 성령의 열매라는 기본 토대 위에서 말하는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가르침을 심각하게 오해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이 제시한 그릇된 논거가 그런 오해를 더 악화시켰다는 부분은 부인하기가 쉽지 않다. 참으로 안타깝지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반론은 구속 언약의 성취라는 중요한 측면을 충분히 헤아리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도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믿은 뒤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던 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구속 언약이 실제 역사 속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예외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이다(눅 17:21).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구속 언약이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던 옛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보고 기뻐하며, 장차 주어질 영원한 상급과 나라를 소망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히 11:39, 40; 갈 6:16). 그러므로 사도 시대 이후(A.D.70년 이후)부터는 믿은 뒤에 성령으로 세례받는 일이 일어날 수 없다. 인제는 믿을 때, 곧바로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좋은 것에 온전히 참여하기 때문이다.
3.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께 능력을 구할 필요가 없는가
지금껏 살펴보았듯이, 성령 세례는 본래 하나님의 능력과는 큰 관련이 없다. 하지만 성령 세례가 거듭날 때 단 한 번 주어지는 일이라고 해서, 신자가 매사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힘입어야 할 필요성까지 사라지지는 않는다. 신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권세와 능력을 항상 의뢰해야 한다(엡 6:19, 20).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자는 계속 무기력해지고 뒤로 물러나게 된다(히 10:38, 39). 사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은사주의 진영이나 개혁주의 진영이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는 게 무엇인가?’라는 부분으로 들어가면 양 진영의 인식 차이가 뚜렷해진다. 오순절-은사주의 진영은 대개 초자연적인 현상 그 자체와 현실 문제 해결에 주안점을 두지만, 개혁주의 진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둔다.
다시 말해, 전자는 초자연적인 힘이 나타나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 자체가 복음과 같지만, 후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광을 더 깊이 알고 사랑하는 게 능력이다. 전자에게 초자연적인 현상은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후자에게는 그런 일은 그분의 주권에 달려 있으며, 그 열매를 보고 나서 신중하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개혁주의 진영은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면서 초자연적인 능력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 은사주의 진영을 강하게 비판하고 반대한다. 그들이 말하는 ‘능력’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고 쫓아내는 쪽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저명한 개혁주의 신학자인 마이클 호튼 박사님은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에서 사탄이 펼치는 최고의 전략이 그리스도가 없는 신앙 행위에 빠뜨리는 것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반하우스의 상상은 이랬다. 사탄이 필라델피아를 장악한다면, 술집은 모두 문을 닫을 것이고, 도색물들은 자취를 감출 것이다. 깨끗해진 거리는 서로 웃음을 머금은 보행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저주 악담도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은 “예, 선생님” 혹은 “예, 부인”라고 공손하게 말할 것이며, 교회는 매 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1
또한, 존 맥아더 목사님은 위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했다.
「전도에 대한 이 운동의 주요 교과서인 윔버의 『능력 전도(Power Evangelism)』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나 속죄의 교리에 대한 언급을 생략한다. 그러한 결함에 대해 집중적인 비판을 받은 윔버는 (2백 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십자가, 그리스도의 죽으심, 칭의, 중생 및 그와 관련된 주제들에 고작 열세 페이지를 할애한 새 책을 냈다.
은사주의자들은 유일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유일성을 버렸고 그 결과는 영적인 무한 경쟁이다. 무언가 새롭고 비밀스러운 것에 대한 갈망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역사적 기독교의 굳은 확신을 대체했다. 그리고 그것은 사탄의 거짓으로 이끄는 유혹이다. 혼란, 오류, 심지어 사탄적인 기만은 그 불가피한 결과다.」2
물론, 거듭난 성도는 여러 가지 일을 놓고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하심을 구할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그런 기도에 큰 능력과 위로로 응답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세우신 뜻과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지, 사람이 자기 마음과 뜻대로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능력은 본질적으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義), 곧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아는 일에 왕성하게 되는 것에서 나온다(마 6:33). 노예 장사꾼, 오늘날로 하면 인신매매업자였던 존 뉴턴이 그 은혜를 알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이라는 찬송을 지어 부르며 하나님께만 영광을 올려드리는 놀라운 일을 일으키는 게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다.
또한, 그런 일을 위해서라면 모든 이들의 미움과 핍박을 받고 고생하는 것을 개의치 않으며, 그런 일을 하는 자를 지극히 귀하게 여겨서 자기 눈이라도 빼어줄 만큼 깊이 사랑하는 게 하나님의 능력이다(고후 11:23~30; 갈 4:13~15). 그러면서도 자기 악함과 어리석음을 알아,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겸손의 열매를 맺게 하는 능력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능력인 것이다(고전 15:9, 10). 그러한 능력으로 충만해지는 일이 바로 ‘성령 충만’이다.
성도는 그런 성령의 충만함 속에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모두 다 무너뜨리고, 그리스도께 복종하게 하는 일을 감당한다(고후 10:5). 또한, 삶 속에서 사랑, 기쁨, 화평, 오래 참음, 친절함, 선함, 충성, 온유, 절제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다(갈 5:22~24).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와 긍휼을 베푸셔서 삶의 모든 부분을 초자연적인 섭리로 돌보아주시기를 구하면서, 그분의 돌보심을 기뻐하고 찬송하게 된다. 그들은 헛된 능력을 따라 교만해지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는다(골 2:18, 19). 그러한 잘못된 능력을 추구하다 보면, 결국 적그리스도의 품에 안기게 되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4. 마무리하며
성도는 성령 세례를 받으라는 말을 주의하며 멀리해야 한다. 그런 이들의 말에 동조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모독하는 일에 참여하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한 번 구원한 자를 내버리거나 다른 이에게 접붙임을 받게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또한, 성도는 위로부터 오는 진정한 능력, 곧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한 복음의 위대함을 매일 심령으로 깊이 깨닫고 붙들기를 간절히 구해야 한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기억하여, 그러한 능력을 항상 구하고 힘입어 모든 일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해야 한다.
각주
1 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Christless Christianity)』, 김성웅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9, p. 27.
2 존 맥아더, 『무질서한 은사주의 (Charismatic Chaos)』, 이용중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8, pp. 82,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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