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사탄 진단3」 사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
김재호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면 많은 반대와 방해를 받게 된다. 비난, 멸시, 경제적 손해, 급한 일, 의심, 게으름, 탐심 등이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면서 물러서지 않으려고 애를 쓰게 된다.
이러한 일은 세상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라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이 세상은 절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에게 우호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세상은 왜 이런 특징을 보이는 것일까? 그리고 사탄의 존재와 활동과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지금부터 그 점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자.
1. 사탄의 전략과 전술
본래, 이 세상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참으로 아름답게 지으셨고, 지으신 세상을 보면서 참으로 즐거워하셨다(창 1:31).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운행되었고,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과 영광은 온 세상에 충만했다(롬 1:20).
그런데 사탄이 하나님과 같이 될 마음을 품으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사 14:13, 14). 사탄은 원래 하나님께서 지으신 가장 뛰어난 천사 가운데 하나였지만,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고 자기 것으로 취하고 싶었다. 그는 스스로 자기를 높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다.
사탄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질투하고 대적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영광으로 충만한 이 세상을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 영광을 짓밟고 파괴하여 자기가 하나님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은 열망으로 불타올랐다. 사탄은 그 일을 사람을 통해 이루기로 마음먹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이 죄에 빠져 스스로 파멸하게 한다면,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탄은 그런 마음을 품고 하와에게 접근했기에 외적인 힘이나 압력을 동원하지는 않았다. 사람이 스스로 죄를 짓게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닮은 존귀한 사람이 자기 손으로 그의 인격과 삶을 짓밟고 망가뜨리게 해야만, 같은 방법으로 전능하신 하나님과도 싸워볼 만하겠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에게 지극히 인격적으로 다가왔다. 자기 능력을 앞세우지 않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권리를 빼앗고 억압하시려고 선악과를 금하신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창 3:1). 그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한 다음,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게 하려고 선악과를 못 먹게 하신 것이라는 ‘아주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창 3:4, 5).
하와는 사탄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다시 바라봤다. 원래, 하와에게 선악과란 만지는 것조차 피해야 할 아주 위험한 열매(창 3:3)였기에, 그 먹음직스러움과 탐스러움이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사탄의 말을 듣고 ‘다시 바라본’ 선악과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그동안 볼 수 없었던 선악과의 탁월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뻗어 열매를 따먹었다(창 3:6).
이처럼, 사탄은 사람이 하나님을 스스로 미워하고 대적하게 하지, 마음에도 없는 반역을 억지로 저지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사건과 경험을 지극히 단편적으로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 왜 불합리하고 해로운지를 스스로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금하신 일, 곧 죄가 사람에게 참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 준다는 그의 ‘참신한 생각’에 동의하게 한다. 그런 다음, 양심에 거리낌없이 용감하게 죄를 짓게 해서 멸망하게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겨루어 이길 것이라는 헛된 확신에 사로잡힌다.
사탄은 오늘날에도 같은 방식을 사용한다. 더구나 사탄은 아담의 후손이 이미 그의 ‘새로운 생각과 관점’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람의 귀에는 건드리기만 하면 터질 것 같은 상황에서 들려오는 자기 완성이라는 사탄의 소리는 송이꿀보다도 더 감미롭게 다가온다. 저항도, 거절도 할 수 없다. 그저 자기를 완성하여 하나님처럼 되는 소망을 품는 일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게 된다.
이처럼, 사탄은 사람이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관점, 곧 그의 세계관을 하나님 중심에서 자기중심으로 바꾸도록 부추긴다. 이것이 바로 사탄이 사용하는 전략과 전술의 핵심이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점들을 분명히 보게 하면서, 사람이 이런 식으로 무한히 진보하고 발전할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한다. 그리고 그 헛된 꿈속에서 헤매다 스스로 파멸하게 한다.
사탄은 이 일을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척시킨다. 하나는 부귀, 영화, 성공, 출세, 건강 등의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가치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대개 하나님이 없다는 무신론적이고 물질적인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다.
그들은 리처드 도킨스 같은 신(新)무신론자의 주장에 깊이 감명을 받는다. 진화론을 가설이 아닌 확립된 자연법칙과 같이 받아들이며, 기독교를 비과학적이고 비이성적인 원시 신화처럼 여긴다. 그들의 신조는 “하나님은 없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라.”가 된다.
또 다른 하나는 고행, 명상, 몰아(沒我) 등의 초월적인 가치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사람이 곧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곧 사람이라는 범신론(汎神論)이나, 만유는 초월하는 하나님 안에 있다는 내재신론(內在神論)적인 세계관을 확립하게 된다.
그들의 마음에는 토마스 머튼이나 달라이 라마의 말이 깊이 와닿는다. 그들은 세상을 말 그대로 덧없고 무의미한 곳으로 여기며, 빨리 이 의미없는 세상을 벗어나 하나님, 또는 일자(一者)와 존재론적으로 합일(合一)하기를 갈망한다. 그래서 극단적인 금욕이나 극단적인 방종에 빠져들곤 한다.
사탄의 기쁨과 즐거움은 이런 사람을 세상에 최대한 많이 배출하는 것이다. 사탄은 그들이 세상에 나가 영원을 바라보지 말고 지금을 즐기라는 교훈을 담은 드라마와 영화를 계속 만들어낼 때, 아주 흐뭇해한다.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광고가 끝없이 방영될 때, 진심으로 즐거워한다. 자기 감정을 분출하면서 기존 질서와 정서에 대한 끝없는 도전과 반항을 부추기는 록과 메탈 음악 축제가 열릴 때, 환호성을 터뜨린다. 감각적인 쾌락에 탐닉하는 이들이 많아질 때,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보람을 느낀다.
동시에 사탄은, 자기 힘으로 초월적인 가치를 구현하려는 사람들과 그들의 고상한 말에 사로잡히는 이들이 크게 늘어날 때 만세를 부른다. 그들의 외적인 선함을 기독교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재갈로 사용한다. 세상이 그들의 말을 듣고 진리를 상대화하여 자기가 보기 좋은 대로 다듬어 재통합하는 것을 볼 때, 승리감에 젖는다. 세상이 기독교의 참된 평안과 자유를 이방 종교의 참선과 고요함과 똑같은 고귀한 종교 체험으로 볼 때, 손뼉을 치면서 좋아한다. 유일하고 참된 기독교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편협하고 독선적이고 교만하며, 자기 종교밖에 모르는 속 좁은 사람으로 대우받을 때, 잔치를 벌이면서 기뻐한다.
이처럼, 사탄은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확립한 사람들을 크게 늘림으로써 성도를 전방위로 압박한다. 악한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들을 계속 성도 주변에 보내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갈등이 일어나게 한다. 성도가 그런 충돌과 마찰에 지쳐 넘어지거나 낙심하게 되는 순간이 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사탄은 인류 역사 내내 그런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심지어, 노아 시대 때는 노아와 그의 가족 8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확고한 자기중심적 세계관을 가진 이들로 만드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는 지치거나 중간에 포기하는 법이 없다. 둘 중에 하나는 반드시 지옥에 가야 한다는 자세로 오늘도 거짓의 검을 새파랗게 갈고 있다.
이 세상은 그런 사탄의 참소와 궤계가 펼쳐지도록 허용된 저주받은 곳이다. 우리의 죄악이 그러한 무서운 저주를 이 세상에 불러들인 것이다. 성경은 사탄을 이 세상의 신이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묘사한다(고후 4:4; 엡 2:2).
사탄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같은 대우를 받는다. 그는 저주받은 이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하나님과 비길 수 있다는 자기 생각이 이루어졌다고 느낀다. 스스로 타락하게 하는 자기의 지혜로움을 하나님도 이기지 못하리라고 확신한다. 사탄은 그런 확신으로 계속 완악한 사람들을 배출해내어, 하나님의 영광을 짓밟고 성도를 넘어뜨리는 일을 계속 해나가고 있다.
2. 하나님의 전신갑주, 사탄과 싸워 이기기 위한 무기
성도는 이러한 사탄의 전략과 전술을 알고 믿음으로 대항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그러한 소명을 잘 감당하라고 말씀하셨다(마 5:13~16). 또한, 그들을 보호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셨다(요 17:14, 15).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 생각 없이 시류를 따라 이 세상을 살지 말고, 말씀과 기도로 세상을 거스르면서 항상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안타깝게도, 현대 교인들은 어떻게 말씀과 기도로 이 세상과 싸워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심하게 세속화되어 불신자와 거의 똑같이 살아가거나, 극단적인 경건주의나 은사주의 신앙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 사탄의 궤계에 대항하기를 아예 포기하거나, 골방에서 성경만 보고 기도하면서 관조한다. 또는, 땅 밟기 등의 능력 대결을 통해 특정한 지역에 머무는 사탄의 권세를 결박하고 무너뜨려야 한다는 길로 나아간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사탄에 맞서서 이겨내셨는지가 잘 나와있다(마 4장).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사탄의 궤계를 대항해야 한다. 안 그랬다가는 길을 잃어 버리고 포로로 잡히게 된다. 머리카락이 잘리고 눈 뽑힌 삼손이 온갖 조롱과 모욕을 받으며 거대한 맷돌을 돌렸던 것과 같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질 수 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잘 살펴보면, 사탄이 하와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수법을 사용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우선 굶주림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하려고 했다.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을 받는 아들이 아닌, 고귀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라는 ‘새로운 시각’을 품게 할 생각으로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와처럼 사탄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을 구축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기록하였으되”라는 말로 대응하셨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사탄이 계획했던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셨다(마 4:4).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사탄이 쏜 의심과 불신앙의 불화살을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의 방패로 막고 꺾어버리셨던 것이다(엡 6:16).
이처럼, 사탄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충분하게 알고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 하나를 좌우명으로 삼고 어려울 때마다 감상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된다. 성경의 전체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핵심 교리를 대표하는 성경 구절 몇 개는 외워서 생각과 마음속에 새겨놔야 한다.
아무리 성도라고 해도 이러한 교리 학습과 성경 암송을 충분하게 해놓지 않으면, 사탄이 의심의 불화살을 날릴 때 제대로 대응을 할 수 없다. 뭐라고 할 말이 없어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있게 되고, 사탄의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이 참으로 합리적으로 보여지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따라서 사탄과 싸워 이기기 위해서는, 매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정통 개혁주의 교리를 꾸준히 학습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그다음에는, 배우고 읽은 말씀 위에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사람이 말씀을 배워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어도, 실생활에서 그 말씀을 실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종종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정말로 벅찬 계획과 뜻을 세우곤 하신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에게 백 살이 되어 얻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일이나,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척박한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일과 같이 말이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버거워하신 적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는 일을 정말로 버거워하셨다(마 26:36~38).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그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셨다(눅 22:43, 44). 예수님께서는 그 시간을 통해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신 쓴 잔을 기꺼이 받으셨다.
이처럼, 성경의 가르침을 아무리 잘 알고 있다고 해도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능력을 힘입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경건은 그냥 머리로 아는 수준에 그치고 만다. 삶의 현장에서는 온갖 불순종과 타협이 우후죽순처럼 자라나서 결국에는 무서운 징계의 채찍이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힘입어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믿음과 성령의 충만함을 간절하게 구하고 또 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탄이 쏘는 불화살에 급소를 맞고 사경을 헤매는 일을 피하기가 어렵다.
그렇게 일상 생활에서 말씀과 기도로 신앙의 토대를 굳건히 다진 다음에는,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건물을 그 위에 튼튼하게 지어야 한다. 사탄이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게 했듯이, 우리는 성령님을 의뢰하면서 진리로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사고의 틀을 갈고 닦아야 한다. 그래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마귀가 틈타는 것을 막아내야 한다.
예를 들면, 과학 분야에서는 창조 과학으로 진화론에 맞서고, 사회 분야에서는 남녀의 고유한 역할이 존중 받게 함으로써 동성 결혼이 인정되는 일을 막아야 한다. 이런 일에 나 몰라라 하면서 참된 신앙과 경건이 부흥하고 열매 맺기를 기대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성도는 말씀과 기도라는 튼튼한 토대 위에 꼭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의 거센 유혹과 시험에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신앙의 터만 겨우 남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마치, 소돔에 살았던 롯이 매일 한탄하면서도 실생활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말이다(고전 3:10~15; 벧후 2:7, 8).
우리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튼튼하게 무장해야 한다. 우리의 세계관을 자기중심적으로 돌려놓으려는 사탄의 불화살을 다 꺾고 무너뜨려야 한다.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발 앞에 꿇어 엎드리게 해야 한다(고후 10:3~5).
하나님께서는 성도를 세상의 거짓과 불경건함에 맞서 싸우게 하려고 부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과 기도 그리고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하고, 불신앙이라는 골리앗을 무찌르러 전쟁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분투하는 사람을 마지막 날에 잘했다고 칭찬해주실 것이다.
3. 마무리하며
성도는 이 세상이 사탄의 활동이 허용된 저주받은 곳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단순히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생각하지 말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따르지 못하게 하려는 사탄의 궤계가 활발히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성도는 항상 사탄과 맞서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말씀과 기도로 신앙의 토대를 든든히 하고, 기독교 세계관을 가지고 어떤 영역에서든지 진리를 따라 행할 수 있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를 통해 사탄의 궤계를 무너뜨리고,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기를 기뻐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을 내야 한다. 허리 띠를 조이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믿음의 방패를 들고 전쟁터로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성도들을 보호하시고 주님을 더 잘 섬길 수 있게 돌봐주실 것이다.
「사탄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사탄 진단3」 사탄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활동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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