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6) 영적 무감각
김재호
▲ 아무 위험이 없다면서 크리스천의 경고를 무시하는 단순(Simple), 나태, 거만의 모습
「이 말을 듣고 잠자던 세 사람은 제각기 크리스천을 바라보면서 한 마디씩 대꾸하기 시작했다. “난 아무런 위험을 느끼지 않습니다.”하고 천박(Simple)이 말하자, 나태(Sloth)는 “난 조금 더 자야 되겠소.”하고 말했고, 거만(Presumption)은 “사람들은 다 제 각각 사는 거요.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자기 일이나 잘 알아서 하시오.”하고 말했다. 말을 마친 후 그들은 제각기 도로 누워 잠자기 시작했고 할 수 없이 크리스천은 가던 길로 다시 떠나고 말았다.”」1
살아있는 사람은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은 사지(四肢)가 떨어져 나가도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영적으로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도 그러하다. 전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그대로 실천하려고 많은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후자는 성경이 아무리 긴급하고 엄중하게 심판을 선포해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되려 귀찮아한다.
영적인 잠에 깊이 빠져 지각이 없는 이들에게 가장 짜증이 나고 수고스러운 일은 잠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피해 영원한 도피성으로 도망하는 일을 불필요하게 여긴다. 지금 잠에서 깨지 않을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라도 기꺼이 치르려고 한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 임신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르듯이 파멸이 갑자기 그들에게 닥칠 것이니, 그들이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않으므로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이르지 않을 것이니, 너희는 모두 빛의 아들들이며, 낮의 아들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처럼 잠자지 말고, 오직 깨어서 정신을 차리자.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한다(살전 5:3~7).
이사야의 예언이 저들에게서 성취되었으니, 말하기를 ‘너희가 듣고 또 들어도 결코 깨닫지 못할 것이며, 보고 또 보아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 백성의 마음은 무디어졌으며, 그들의 귀로 둔하게 듣고, 그들이 자신들의 눈을 감았으니,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서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마 13:14, 15).
롯이 나가서 자기 딸들과 결혼할 사위들에게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여호와께서 이 성읍을 멸하실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나, 그의 사위들에게는 그가 농담하는 자처럼 보였다(창 19:14).」
그들은 영적인 것의 가치와 의미를 지각할 수 없으므로,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대로 믿는 길로 나아가게 된다. 그 길이 ‘보이는’ 육체의 노예로 사로잡히는 길인 줄도 모른 채로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육체를 자기 주인으로 섬기며, 육체를 기쁘게 하는 재미와 즐거움을 힘입어 평생 살아간다. 그들에게는 육체의 소욕을 제어하는 일만큼 끔찍한 고문이 없다.
그들은 점점 자기 주인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면 간음, 사치, 교만, 허풍, 음해와 같은 죄를 짓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게 된다(요일 2:16). 육체의 욕망을 만족하게 하고 이생의 자랑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거리낌 없이 양심을 잠재우게 된다(요일 2:16). 그들의 눈에는 자기 육체의 일시적인 아우성이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크고 엄청나게 보인다. 심지어는 그런 일을 행하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크신 진노와 심판보다도 크게 보인다.
그러나 들불처럼 모든 것을 한꺼번에 집어삼킬 듯했던 육체의 소욕은 눈앞의 목적을 이룸과 함께 빠른 속도로 사그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공허함과 허무함만이 남게 된다. 더구나 그런 상황은 끝없이 반복된다.
그 공허함과 허무함의 깊이는 그가 잠깐 누렸던 육신적인 기쁨과 행복의 크기에 정비례한다. 그 괴로움과 끔찍함을 맛본 이들은 다시는 그 끔찍함을 맛보고 싶어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아예 깨어나지 못할 정도로 강력하고 중독성 있는 쾌락을 탐닉하게 된다. 그러는 동안, 그의 육체는 버티지 못하고 점점 망가진다.
결국, 육체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오면, 그가 그토록 두려워하며 회피하려고 했던 그 끔찍한 공허함과 허무함이 영원히 그를 집어 삼키게 된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그들의 지각은 어두워져 있으며, 그들 속에 있는 무지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다. 그들은 감각 없는 자들이 되어 자신들을 방탕에 내어 줌으로 탐욕 가운데서 온갖 더러운 일을 행한다(엡 4:18, 19).
그러나 이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알지 못하는 것들을 모독하다가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니, 그들은 불의의 대가로 불의한 일을 당할 것이며, 대낮에 연회로 즐기는 일을 기뻐한다. 이들은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도 자신들의 속임수와 방탕을 즐기니, 오점과 흠이다. 그들은 음란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죄짓기를 쉬지 않으며,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단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받은 자식들이다(벧후 2:12~14).
그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감사드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나 어리석게 되어,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멸망할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의 형상으로 바꾸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 마음의 욕망대로 살도록 더러움에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셨다. ……
그들은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수군거리는 자이고, 비방하는 자이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이고, 무례한 자이며 교만한 자이고, 자랑하는 자이며 악을 꾸미는 자이고, 부모를 거역하는 자이며, 우매한 자이고 신의가 없는 자이며, 무정한 자이고 무자비한 자이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는 하나님의 심판을 알면서도, 그런 일을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하는 자들을 옳다고 한다(롬 1:21~24, 29~32).」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무감각한 상태만큼 심각한 일은 없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거룩하신 진노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영적으로 감지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는 보이는 육체의 소욕을 그만큼 깊이 느끼고 좇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상태가 어떠한지 각자 잘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성령의 조명하심을 따라 영적으로 지각하는가? 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으로 매일 심령이 새롭게 되는가? 그 소망으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온갖 죄를 회개하며 멀리하는가? 다른 이들을 말씀으로 깨우치면서 온유함으로 끌어안는가? 그 일이 삶을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이자 소망이 되는가?
아니면, 그 모든 영적인 일에는 별 관심이 생기지 않고 그냥 무덤덤한가? 오히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에 마음이 더 끌리는가? 그 화려함에 사로잡혀서 어떻게든 그것을 많이 가지려고 애를 쓰고 있지는 않은가? 매일 이 세상에 속한 열매를 소유하고 즐기는 일로 일희일비(一喜一悲)하고 있지는 않은가? 자기보다 더 가진 이들을 질투하고, 자기보다 없는 이들을 멸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귀영화와 육체적 쾌락과 유행을 선도하는 연예인을 따라 하면서 살아갈 힘과 소망을 얻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의 은혜로 영혼이 살아난 이들은 이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감지하고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충분히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두려움 가운데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기에 힘쓰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이 죽어 있는 세상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깨어있었던 사람이 감지했던 것보다도 더 크고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이 그들을 영원히 삼켜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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