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5) 구원의 기쁨
김재호
▲ 십자가 앞에서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기뻐하는 크리스천
「그러나 그는 쉬지 않고 계속 뛰어가서 언덕받이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십자가(Cross)가 서 있었고 조금 떨어진 아랫 부분에는 무덤(Sepulcher)이 입을 딱 벌린 채 놓여 있었다. 크리스천이 십자가 위로 막 올라가려는 순간, 그의 어깨로부터 짐이 풀어져 등에서 벗겨지더니 계속 미끄러져 내려가 마침내 무덤의 입구에서 그 속으로 굴러 떨어져 다시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것을 본 크리스천은 무거운 짐을 벗어버린 홀가분함과 즐거움에 넘치는 마음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주께서 괴로움을 당함으로 내게 평안을 주셨고, 주께서 목숨을 버리사 내게 영생을 주셨나이다.”」1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교회 안에서 ‘진실한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 기쁨을 누리는 이들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물론, 오늘날에도 교회 안에는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이들은 여전히 많이 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구원의 기쁨’이란, 옛 성도들이 말하던 ‘그 구원의 기쁨’과는 거리가 멀다. ‘경배와 찬양’으로 대표되는 문화주의와 감정주의가 그 말의 실질적인 의미를 전혀 다른 의미로 바꾸어버렸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구원의 기쁨이란 말은 거의 심리 치료나 감정적 고조와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강단에서는 일상사의 고단함을 위로하며 이런저런 해결책을 제시하는 구원 설교는 자주 이루어지지만, 죄로 상한 심령을 십자가 복음으로 살려내는 본래 의미의 구원 설교는 선포되는 일이 거의 없다. 그 결과, 교인들은 슬기롭고 아름다운 말을 들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고, 감미로운 CCM을 부르며 그 감정을 극대화하는 일을 마치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인 양 오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지난 반 세기 동안, 구원(救援)의 의미가 영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의미에서 육적이고 인간중심적 의미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현대 교회의 행태와는 전혀 다른, 영적이고 하나님 중심적인 구원을 말한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고 빵을 먹고 배가 불렀기 때문이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에 이르도록 남아 있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여라. 인자가 이 양식을 너희에게 줄 것이니,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에게 인 치셨기 때문이다(요 6:26, 27).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를 것이나, 누구든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생에 이르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될 것이다.”라고 하시니(요 4:13, 14)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아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자들처럼 말하니, 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것이다(살전 2:4).」
성경은 일시적이고 인위적인 감정 고조나 심리적인 안정 현상을 누리는 즐거움을 구원의 기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알고, 죄의 악랄함, 죄인의 비참함,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해결해주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아는’ 데에서 말미암는 ‘항구적인’ 감정을 구원의 기쁨이라고 말한다. 마치, 자녀에게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부모의 사랑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 ‘항상’ 부모님께 감사 드리며 두 분의 무병장수를 바라 마지않는 마음을 갖게 되듯이 말이다.
참된 구원의 기쁨은 날마다 새롭고 자연스러우며 순전하다. 또한, 진실하고 변함도 없으며 마음을 올바르게 하며 의지에 새 힘을 불어넣어 준다. 그 기쁨을 누리는 사람은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자기를 기꺼이 부인하고 낮춘다.
하나님 앞에 자기 죄를 토해내고, 세상의 모욕과 조롱과 박해를 당하는 일을 별로 개의치 않는다. 그에게는 그 일이 더없이 당연하고 편하며 즐거우나, 그 기쁨을 알지 못하는 자에게는 참으로 불합리하고 어려우며 불쾌하다. 성경은 이런 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증거한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작은 자이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나는 사도라 불릴 자격이 없다. 그러나 내가 지금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한 것이다(고전 15:9, 10)
그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되돌아와서, 예수님의 발 앞에 얼굴을 대고 엎드려 감사드렸는데 그는 사마리아인이었다(눅 17:15, 16).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과 모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경을 기뻐하니,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하기 때문이다(고후 13:10).」
구원의 기쁨은 성도가 평생 누릴 영혼의 생수이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그 참된 기쁨을 문화와 음악 기법을 통해 인위적으로 산출하려는 것 자체가 그 기쁨을 모른다는 반증(反證)이다. 이 세대는 구원의 기쁨을 말하기에 앞서, 그 기쁨을 누릴 수 있을 만큼 거룩하신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충분히 알고 있는지 꼭 자문하고 점검해보아야 한다.
그렇게 주님 알기를 원하고 추구하는 자는 결국 거듭난 심령에서 흘러나오는 구원의 기쁨을 평생 맛보고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자기 감정 달래기와 띄우기로 일관한 자는 끝없이 반복되는 영적 목마름과 공허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광야에서 기진하게 되고 말 것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p. 62,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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