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박물관 탐방기 – 칼빈과 경건」 시리즈
(2-2) 칼빈과 경건 –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김수용
저번 글에서는 칼빈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자료와 칼빈 선생님이 정의한 경건의 개념을 간략하게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칼빈 선생님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경건을 실천하셨는지를 칼빈 박물관의 자료와 함께 살펴보면서, ‘칼빈과 경건’이라는 첫 번째 주제 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누아용에서 제라르 꼬뱅과 잔느 르 프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잔느 르 프랑은 칼빈 선생님이 채 6살도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칼빈 선생님은 아버지 제라드 꼬뱅의 돌봄을 받으며 성장했습니다.
제라르 꼬뱅은 칼빈 선생님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로서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결국 제라르 꼬뱅의 바람대로, 칼빈 선생님은 사제 보조직에 임명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라에서 성직자에게 지급하는 사례금은 칼빈 선생님이 학업을 계속 이어가기 위한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제라드 꼬뱅은 사제라는 ‘직업’의 경제적인 혜택이 별 볼 일 없다고 판단했는지 갑자기 방향을 바꾸어 칼빈 선생님에게 법학을 공부하게 했고, 칼빈 선생님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법학을 공부했습니다.1
그러나 그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라드 꼬뱅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칼빈 선생님이 자기 진로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히브리어, 그리스(헬라)어, 라틴어와 그 언어로 쓰인 여러 작품을 탐독하고 연구한 뒤, 그 결과를 세상에 내놓는 학자로서 살아가기를 바라며 학업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칼빈 선생님이 바라던 학자의 삶이 아닌 전혀 다른 삶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칼빈 선생님이 사제가 되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하던 때부터, 장차 그에게 주어질 사명을 감당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갖추어가도록 하고 계셨습니다.
칼빈 선생님이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운 히브리어, 그리스(헬라)어, 라틴어 지식은 성경 원문과 교부가 무엇을 가르치는지 ‘직접’ 살펴보고 파악하는 일의 밑거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또한 인문학 석사와 법학 박사 과정을 밟으며 익힌 여러 학문들은, 자신이 이해하고 파악한 진리를 정확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하고 설명하는 일에 요긴하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칼빈 선생님이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예기치 못한 회심’을 겪게 하셨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 ‘예기치 못한 회심’에 관해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도 이 회심이 무엇이며,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단지 칼빈 선생님이 “‘로마 카톨릭의 미신들’에 빠져 있었을 때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굴복시켜 ‘참된 경건의 어떤 맛’을 알게 하시고, ‘그러한 공부에 대한 열망’이 일어나게 하셨다.”라고 고백한 것과 주변 상황을 그럴듯하게 엮어서 만든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나는 철학 공부를 그만두고 법률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신실하게 그 일을 행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숨겨진 섭리의 고삐로 내 인생의 길을 결국 다른 방향으로 굽게 하셨다.
처음에 내가 천주교의 미신들에 너무도 완고하게 빠져 있어서 그렇게 깊은 수렁에서 나를 끌어내기가 더더욱 쉽지 않았을 때, 하나님은 내 나이에 비해 매우 고집스러웠던 나의 영혼을 예기치 못한 회심을 통해 배우는 자의 자세를 갖도록 정복하셨다.
이런 식으로 나는 참된 경건의 어떤 맛을 본 뒤에, 더 무관심했던 다른 과목들을 전적으로 내버려 둔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러한 공부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올랐다.」2
칼빈 선생님의 회심에는 두 가지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우선, 회심 이전에는 칼빈 선생님의 심령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워서 가르치기 어려운 상태’였다는 점입니다. 즉, 참된 경건에 대한 혐오와 저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회심 이후에는 오만하고 거스르는 심령이 ‘겸손하고 부드러운’ 심령으로 변화하여 ‘가르칠 만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마음에서는 참된 경건을 향한 거룩한 열망이 일어났습니다.3
칼빈 선생님은 회심한 뒤에, 하나님의 말씀만 유일한 권위로 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부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그를 전혀 예상치 못한 삶으로 인도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께 충성하는 그에게 많은 영혼을 목양하는 귀한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칼빈과 경건(2)
–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죽으니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 칼빈 일대기 판화 : 제네바에서 추방당하는 파렐과 칼빈
위의 판화에서는 말을 탄 두 사람이 어디론가 가고 있습니다. 판화 속 두 사람은 기욤 파렐(이하 파렐)과 칼빈 선생님이며, 제네바 시(市)에서 추방당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파렐과 칼빈 선생님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제네바에서 추방까지 당하게 된 것일까요?
칼빈 선생님은 1536년에 동료 목회자 파렐의 사역을 도와 제네바에서 목회를 시작하였습니다(이 내용은 다음 편에서 더 자세히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칼빈 선생님이 제네바에 도착할 무렵, 이곳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타락에 저항하여 프로테스탄트 진영으로 돌아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기만 했을 뿐 아무것도 갖추어지지 않아서 모든 것이 혼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임종하기 전에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이 교회에 왔을 때 아무것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설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사람들이 물론 성상들을 찾아 불태웠으나, 개혁의 형태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 속에 있었습니다.」4
이처럼 제네바 시는 비록 종교개혁에 가담하기는 했지만, 거기서 한 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고 오히려 뒤로 물러서는 듯한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제네바 시민들은 방탕하고 퇴폐적인 삶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그런 제네바 시민들에게 우선 성경과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런 다음 21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시의회에 통과시켜 달라고 요청함으로써, 그들이 무엇을 믿고 지키겠다고 했는지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개혁해나가기 위한 계획을 제시하면서, 교회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권징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시의회에 좋은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여, 제네바 시민들이 도덕적으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민들은 이런 엄격한 개혁 작업에 심한 부담을 느끼기 시작했고, 그 부담감은 점점 칼빈 선생님과 파렐에 대한 격렬한 반발과 증오심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그들은 칼빈 선생님과 파렐에게 욕설을 퍼붓고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또 한밤중에 집으로 몰려가서 거칠게 문을 차고 하늘에 총을 쏘면서 겁을 주기도 했습니다.
1538년 부활절 주일에는 칼빈 선생님이 한참 설교하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난데없이 칼을 휘두르며 난동을 피우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시의회 지도자들은 이들을 추방하려고 머리를 맞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제네바 시의회는 1538년에 칼빈 선생님과 파렐을 추방하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위의 판화는 바로 그때의 모습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렇게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 선생님은 약 3년 동안 스트라스부르에 머물며 주변 나라에서 박해받고 피난 온 프로테스탄트 교인을 목양했습니다. 함께 추방당한 파렐은 뇌샤텔에 머물며 종교개혁을 위해 계속 수고했습니다.
그 사이 제네바의 상황은 더욱 나빠져 갔습니다. 상황을 감당할 수 없었던 제네바 시의회는 결국 칼빈 선생님을 다시 모셔오려고 편지를 보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친구인 피에르 비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그 일에 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늘 아래 (이곳만큼) 내가 더 큰 두려움을 가질 만한 곳은 없습니다.」5
칼빈 선생님이 제네바에서 겪은 인간적인 고독과 슬픔과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은 그 모든 것을 묻어두고 제네바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뜻하시는 바라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본인의 처지와 상황을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 바치는 희생물6’이 되어 그 험난한 자리로 기꺼이 다시 나아가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까지 제네바를 떠나지 않고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겼습니다.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일이 꼭 칼빈 선생님께 아픔과 슬픔만 안겨주었던 것은 아닙니다. 본래 결혼에는 큰 뜻이 없었던 칼빈 선생님은,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 중이던 마르틴 부처 가정이 신앙 안에서 서로 연합하여 화목하고 단란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마음을 열었습니다.
그러자 부처 목사님은 서둘러 칼빈 선생님의 아내가 될 사람을 골라 결혼을 주선했고, 결국 1540년에 칼빈 선생님은 이들레뜨 드 뷔르(이하 이들레뜨)라는 여성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는 이들레뜨에게 이 결혼이 초혼(初婚)이 아닌 두 번째 결혼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레뜨의 전 남편은 스트라스부르의 교회에서 칼빈 선생님의 설교를 즐겨듣던 피난민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스트라스부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역병에 걸려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들레뜨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이미 두 명의 자녀를 낳아 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이들레뜨를 선뜻 아내로 맞아들이기는 다소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은 이 여인보다 더 좋은 아내감을 찾을 수 없으리라고 여길 만큼 이들레뜨를 좋게 생각했습니다. 칼빈 선생님이 왜 그렇게 이들레뜨를 높이 평가했는지는 빨리 아내를 얻으라는 주변의 권유에 답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납니다.
「제가 찾는 아내상이 무엇인지 늘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우선 저는 첫눈에 훌륭한 외모에 반하여 사랑하는 이의 결점들까지도 포용하는 그런 얼빠진 연인은 아닙니다. 정숙하고, 지나치게 까다롭거나 괴팍하지 않으며, 검소하고, 인내심이 많고, 제 건강에 관심을 가져 준다면 그것이 저를 매혹시키는 유일한 아름다움이 되겠습니다.」7
이들레뜨는 칼빈 선생님이 자신의 아내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묘사했던 바로 그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이들의 결혼생활은 예상치 못한 죽음으로 참 빨리 마감되었습니다.
결혼 후 이들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칼빈 선생님은 그 아이 이름을 자크라고 지었습니다. 그러나 미숙아로 태어난 자크는 태어난 지 겨우 2주 만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그로부터 3년 뒤에 태어났습니다. 이번에는 딸이었지만, 이 아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세 번째 아이는 안타깝게도 태어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몇 년 뒤에는 이들레뜨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들레뜨가 1549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이들의 결혼생활은 10년도 채우지 못한 셈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잇따른 자녀의 죽음으로 혹독하게 쓰리고 아픈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대적자들에게는 칼빈 선생님에게 자식이 없다는 사실이 가장 좋은 비방거리이자 조롱거리였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자, 칼빈 선생님은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겪었습니다.
비레에게 가장 좋은 동반자를 잃었다고 하며 슬퍼했고, 파렐에게는 슬픔에 눌리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은 그러한 인간적인 아픔이나 고통 속에서도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 아들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혹독하고 쓰라린 상처를 주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친히 아버지가 되시는 주님께서 그분의 자녀에게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발뎅은 (중략) 내게 자식이 없다고 조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셨다가 데려가셨습니다. (중략) 하지만 지금은 그리스도인의 세계에서 나의 자녀가 무수히 많습니다.」8
앞서 칼빈 선생님이 언급한 아내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칼빈 선생님의 건강은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온갖 종류의 질병과 평생 싸워야 했습니다. 편두통을 비롯하여 만성적인 소화기 계통 질병, 가슴을 죄는 통증, 신장결석 등등, 거의 걸어 다니는 종합병원과 같았습니다.
더구나 당시의 의료기술은 지금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야만적이라고 할 만큼 별 볼 일 없었습니다. 잘못된 민간요법이 성행했고, 그로 인해 오히려 질병이 더 심각해지는 일도 비일비재했습니다.
▲ 칼빈 일대기 판화 : 제네바 시의회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가는 칼빈
원래 건강 체질도 아닌 데다가 아무것도 없는 제네바에서 수없는 문제와 씨름하며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으니, 건강이 좋았다면 오히려 더 이상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칼빈 선생님은 주일에 두 번, 평일에 네 번 정도 강해 설교를 하는 강행군을 이어갔습니다.9
또한 수많은 논쟁과 대적자의 위협과 압박 속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칼빈 선생님은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글을 쓰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 모든 일은 분명히 칼빈 선생님의 몸에 많은 무리를 가져왔을 것입니다. 친구였던 하인리히 불링거에게 보낸 편지를 살펴보면, 칼빈 선생님의 건강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습니다.
「개암나무 씨앗만한 결석을 배출하면서 극도로 아팠다가 지금은 진정되었습니다. 소변을 보는 데 매우 고통스러워서 의사의 충고에 따라 몸이 심하게 흔들리면 결석이 배출되는 데 도움이 될까 하고 나는 말을 탔습니다.
그러나 집에 돌아오는 도중 오줌 대신에 피로 더럽혀진 것을 발견하고 매우 놀랐습니다. 다음날 결석은 방광에서 요도로 이어지는 부분을 막고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여전히 극심한 고통은 더해 갔습니다. 30분 이상이나 나는 온몸에 미치는 극심한 고통을 모면해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노력으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고 뜨거운 물로 찜질한 뒤에 조금의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요도관은 흘러나온 다량의 피로 찢어질 듯 고통스러웠습니다. 이런 고통이 사라지고 난 뒤 지난 이틀 동안 이제 나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듯했습니다.」10
칼빈 선생님은 생애 마지막으로 갈수록 병세가 더욱 무거워졌고,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즈음에는 때로 걷지 못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질병을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연약함을 드러내어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겸손히 낮추게 하고, 그분의 위안을 찾으며 세상에 대한 욕심과 불필요한 것들을 마음속에서 태워버릴 수 있는 치료 약이 바로 질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즉,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훈련에 사용되는 단련 도구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병을 통해 연약함이 드러날 때 겸손해야 합니다. 또한 자신을 잘 살펴서 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 안에서 위안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불필요한 것을 태워 버릴 수 있는 치료약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이런 병은 하나님이 원하실 때 언제든지 주님께로 갈 준비를 하라고 가르치는 죽음의 메시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11
칼빈 선생님의 생애를 다룬 책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그분의 삶에는 우리가 인간적인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것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만약 사람들이 칼빈 선생님이 겪었던 것과 같은 어려움 앞에 서게 된다면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운명과 팔자를 탓하며 자포자기하거나, 사회를 향해 격렬한 분노를 쏟아낼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 중에서도 자기 처지를 비관하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꽤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은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칼빈 선생님을 그런 길로 이끌어주었던 것일까요? 임종을 며칠 앞둔 1564년 5월 2일에 파렐에게 한 말에서 그 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모든 이에게 생명과 죽음을 모두 얻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 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12
이처럼 칼빈 선생님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참으로 낮추고 부인한 사람이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정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권세 아래 맡겼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공평하게 판단하시며, 하나님의 손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온전히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는 가운데 묵묵히 인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관대하심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인내하고 견디는 법을 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극한 지역에 있다고 해도, 그곳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필요한 것을 충분하게 공급해주실 것입니다. 마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충분히 내려주셨던 것처럼 말입니다.13
또한, 칼빈 선생님은 그리스도의 형상 닮기를 참으로 소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수고와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던 사람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에는 자기 옛사람을 부인하고 죄를 죽이는 내적인 일뿐만 아니라, 진리를 따르며 비난과 박해를 받고 심지어 순교를 당하는 것처럼 외부에서 찾아오는 일도 포함됩니다.14 칼빈 선생님은 이런 것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한 도구라고 믿었습니다.15
그래서 칼빈 선생님은 불평하지 않고 온갖 수고와 어려움을 기쁜 마음으로 평생 잘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건져 양자로 삼아주신 분, 그분의 피로 모든 죄를 씻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분, 우리를 지체로 삼아 그분과 연합하게 하신 분을 닮아가는 기쁨이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하는 수고를 잊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마치 라헬을 기다리던 야곱처럼 말입니다.
첫 번째 주제를 마치며
우리가 이렇게 신앙 위인들의 삶을 살펴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을 높이고 칭송하기 위함은 결코 아닐 것입니다. 우리와 다른 시대를 살아간 이들을 향한 호기심 때문도 아닐 것입니다. 역경 속에서 힘겨워하는 그들의 모습을 동정하거나, 팍팍한 우리 마음을 연민의 감정으로 촉촉하게 하려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살펴보는 이유는 우리 신앙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그들의 공통점인 하나님께 복종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모습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우리처럼 많은 허물과 약점을 지닌 그들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헌신하고 전인격적으로 그분을 닮기 위해 분투했는지를 본받으려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은 유창한 말에 있지 않고, 실제 삶에서 나타나는 거룩의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위대한 종교개혁자이기 이전에 누구보다도 연약하고 병약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런 약한 자를 쓰셔서 우리에게 귀한 신앙 유산을 물려주셨습니다. 물론 칼빈 선생님의 시대와 우리 시대의 상황은 무척 다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근본적인 것들은 바뀌지 않았고 앞으로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앞서 살아간 신앙 선배의 모습을 살펴보고, 거기서 유익한 점을 기꺼이 배우고 취할 줄 아는 지혜로움을 가져야 합니다. 많은 것을 앞서 겪으며 주님께 헌신했던 주님의 종은 우리에게 “만약 당신이 오직 경건을 위해 모든 열정과 능력을 쏟아붓는다면 당신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하는 것이다.”16라고 말해줍니다.
물론, 그의 삶도 다른 이들의 삶처럼 불완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가장 가치 있는 일을 위해 한 걸음씩 계속 전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참으로 잘 보여줍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들처럼 푯대를 향해 힘차게 내딛읍시다. 미약하더라도 한 걸음씩 영원한 나라를 향해 계속 나아갑시다.
첫 번째 주제, ‘칼빈과 경건’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와 같이 하나님을 알아가고 계신 중에 있는 성도 분께 도움이 되는 연재물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각주
1 존 칼빈, 『칼빈의 경건』,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89, p. 57에서 참고. 칼빈은 자신의 『시편 주석』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나의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는 나에게 신학수업을 시키기로 결심하셨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법학이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학문임을 간파하신 아버지는 마음을 바꾸셨다.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나는 철학공부를 보류하고 법학공부를 시작했다.”
2 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 『칼빈의 생애와 신학』, 박태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9, p. 48에서 재인용.
3 퍼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외 공역, 부흥과개혁사, 2012, p. 68.
4 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 『칼빈의 생애와 신학』, 박태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9, p. 89에서 재인용.
5 퍼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외 공역, 부흥과개혁사, 2012, p. 76.
6 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 『칼빈의 생애와 신학』, 박태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9, p. 126에서 참고. 칼빈 선생님은 당시 파렐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내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내 마음을 주님께 희생 제물로 바칩니다.”
7 테아 반 할세마, 『이 사람 존 칼빈』,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옮김, 성약, 2007, p. 166.
8 같은 책, p. 216.
9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 43.
10 퍼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외 공역, 부흥과개혁사, 2012, pp. 77~78.
11 헤르만 셀더르하위스, 『칼빈』, 조숭희 옮김, KOREA.COM, 2009, p. 280에서 재인용.
12 퍼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외 공역, 부흥과개혁사, 2012, p. 66에서 재인용.
13 장수민, 『개혁신앙의 모범 그리스도인의 삶』, 칼빈아카데미, 2007, pp. 85~86에서 참고.
14 같은 책, p. 76.
15 같은 책, p. 77.
16 도널드 맥킴 엮음, 『칼빈 이해의 길라잡이』,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p. 213에서 재인용.
참고서적
–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 도널드 맥킴, 『칼빈 이해의 길잡이』.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 버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 빌렘 판 엇 스페이커르, 『칼빈의 생애와 신학』, 박태현 옮김, 부흥과개혁사, 2009
– 테아 반 할세마, 『이 사람 존 칼빈』, 강변교회 청소년학교 도서위원회 옮김, 성약,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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