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박물관 탐방기 – 칼빈과 경건」 시리즈
(2-1) 칼빈과 경건 – 경건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며, 또한 마침이다
김수용
지난 글에서는 칼빈 박물관 탐방기를 쓰게 된 배경, 동기, 전체적인 글 작성 방향, 그리고 칼빈 박물관이 소속되어 있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을 간략하게 소개해드렸습니다. 이번 글부터는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자료를 소개하면서, 칼빈 선생님의 생애를 몇 가지 주제에 맞추어 살펴보려고 합니다.
다시 찾은 칼빈 박물관
– 대한민국에 있는 칼빈 박물관을 소개합니다 (2)
3년 만에 다시 박물관을 찾은 때도 역시 8월이라서 무척 더웠습니다. 그래도 간간이 머리 위로 부는 바람이 더위를 조금씩 식혀주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려 주변 건물과 도로를 보자 3년 전 그때가 어렴풋하게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에 찾아간 탓에 어떤 길이 박물관으로 가는 길인지 조금 헷갈렸습니다. ‘이 길이 그 길인가, 아니 저 길이었던가?’ 하면서 조금 애를 먹었습니다.
박물관을 방문하기 며칠 전에 관계자분과 방문일시를 맞추어 놓았기에, 약속한 시각에 늦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미리 서두른 덕분에 다행히 약속한 시각보다 조금 일찍 건물 입구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입구에는 작은 열쇠꾸러미를 손에 쥔 관계자분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는데, 어디서 어떻게 오게 된 것인지 등을 짧게 묻고 답한 뒤에 그분과 함께 건물 지하로 향했습니다.
관계자분께서 열쇠꾸러미로 철문을 열어주시자 특유의 오래된 종이 냄새가 콧속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곧이어 전등에 불이 들어오자, 캄캄했던 주변이 밝아지면서 박물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박물관의 모습을 잠시 둘러보았습니다. 3년 전에 보았던 자료가 대부분 같은 자리에 놓여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그사이 새로 들여온 것으로 보이는 자료도 몇몇 눈에 띄었습니다.
박물관 측에서는 15평 남짓한 크기의 공간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지 않고, 하나의 큰 방처럼 사용하는 구조를 채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유럽 각국에서 수집한 소중한 자료를 담은 유리 전시장, 장식장, 책장, 액자 등을 벽면을 따라 일렬로 배치해놓았습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점은, 이곳에서는 여느 박물관처럼 각 자료에 대한 세세한 설명을 적어놓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박물관을 방문할 계획이 있는 분께서는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원장이신 정성구 박사님께서 칼빈 박물관을 소개해놓으신 영상을 미리 보고 가시는 것이 좋습니다.1
비록 이곳이 칼빈 박물관이기는 하지만, 칼빈 선생님과 관련 있는 자료만 전시해놓은 것은 아닙니다. 칼빈 선생님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어도 교회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라면 전시해놓았습니다. 이곳에 있는 가장 큰 유리 전시장에는 15세기에 양피지(羊皮紙)로 만든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본, 쉐마 본문으로 유명한 신명기 6장 4절 이하의 말씀을 기록한 양피지 사본 한 점, 성경의 언어인 아람어와 그리스(헬라)어가 적혀 있는 파피루스 다섯 점, 양의 뿔로 만든 나팔인 쇼파르, 그리고 예수님 시대에 사용한 토기를 전시해놓았습니다. 이 자료는 기독교 신앙이 성경에 근거한다는 점을 나타내려고 전시해놓았다고 합니다.2
▲ 모세오경 두루마리와 (하단 왼쪽부터) 쉐마 사본, 아람어-그리스어 파피루스, 쇼파르, 토기 두 점 등을 전시해놓은 유리 전시장
또한, 이 유리장 오른편에는 이 못지않게 큰 유리 책장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는 칼빈 선생님의 신학이 교부 신학의 부활이라는 의미로 아타나시우스, 크리소스토무스, 아우구스티누스, 암브로시우스와 같은 교부(敎父, Church Father)들의 작품을 전시해놓았습니다.3 여기서 교부란 열두 사도와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의 뒤를 이어 교회를 돌보는 일을 감당했던 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부 시대와 사도·속사도 시대의 사회상 사이에는 크게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기독교를 제국의 종교로 삼은 뒤에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와 속사도는 전성기에 이른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한참 경멸하고 핍박하던 때 활동했습니다.
이미 사도 시대부터 들끓기 시작한 반(反)기독교 정서는 속사도 시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그때,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께서 주(主)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는 이유로 심한 핍박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고문과 목 베임과 불살라짐을 당했고, 사자 같은 맹수에게 갈기갈기 찢겼으며, 심지어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던져졌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렇게 죽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구경하는 일을 자신의 오락거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콜로세움에 사자의 먹이로 던져진 이그나티우스라는 속사도는 그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나는 맹수의 이빨 사이에 낀 하나님의 곡식으로 빻아져서 주님을 위한 거룩한 빵이 되고자 한다.」4
말이 끝나자 굶주린 사자들이 그를 덮쳤고, 그 자리에는 몇 개의 뼛조각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맹렬했던 박해는 콘스탄티누스의 포용정책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파괴하려는 마귀의 공격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외적인 평온이 찾아오자, 교회 안에서는 이단적인 가르침이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그때, 교부들이 일어나 그러한 거짓 가르침과 싸우며 세상에 진리를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거짓 가르침과 대항하여 싸우던 교부의 가르침을 자신의 시대에 적용하면서,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부분은 교정하고 올바른 내용은 본래 의미를 더욱 명료하게 다듬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교부의 글 중에서 크리소스토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를 많이 인용했습니다. 특별히 칼빈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 신학의 부활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받은 영향이 컸습니다.5
이 유리 책장을 뒤로하면 종교개혁 선구자인 존 위클리프, 윌리엄 틴데일, 얀 후스의 작품과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존 위클리프는 처음으로 성경 전체를 영어로 번역하여 성경 번역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인물입니다. 그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불가타 성경이라는 라틴어 성경만을 사용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신자가 성경을 아예 소유하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니 일반 신자가 설령 어떻게 성경을 구한다고 해도, 라틴어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의 일반 신자는 신앙과 관련한 모든 부분에서 전적으로 사제를 의지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규범을 오직 성경에 두었던 존 위클리프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진리를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결국,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위클리프가 세상을 떠난 지 약 40년 뒤에 그를 이단자로 정죄하였습니다. 그의 무덤은 파헤쳐졌으며, 그의 시신은 저주를 받고 불태워졌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단자에게 두 종류의 형벌을 내립니다. 하나는 포에나 센수스(poena sensus)로서, 범죄자를 기둥에 묶고 불사름으로써 지옥과 같은 고통을 받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포에나 담니(poena damni)로서, 사제가 이단자를 확실히 지옥에 떨어지게 하려고 그의 영혼에 저주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카톨릭 사제는 무덤에서 꺼낸 위클리프의 시신에 저주를 퍼부은 다음, 그 시신을 기둥에 묶고 불로 태웠습니다. 그런 다음 남은 재를 스위프트 강에 뿌려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존 위클리프의 개혁 사상을 따랐던 이들은 그의 재가 스위프트 강에 뿌려진 일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합니다.
「스위프트 강의 잿빛 강물이 에이번으로 흘러갔고 그곳에서 세번으로, 그리고 또다시 바다로 흘러들어 가서 결국 온 세계와 온 그리스도교 세계가 위클리프의 묘소가 되었노라.」6
▲ (왼쪽부터) 윌리엄 틴데일과 존 위클리프의 초상화, 그리고 화형당하는 얀 후스의 모습과 그의 초상화
그러한 종교개혁 선구자의 사상과 용기는 마르틴 루터와 칼빈 선생님에게 이어져 활짝 꽃피우게 됩니다. 마르틴 루터는 로마 카톨릭이 부를 쌓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면죄부의 잘못된 점을 알리는 「95개 조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내걸었습니다. 중세 유럽 전역은 그 일을 계기로 종교개혁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종교개혁 선구자들이 오랫동안 쌓아놓은 장작에 드디어 불이 붙은 것이었습니다.
루터보다 약 20년 뒤에 태어난 칼빈 선생님은 루터를 스승으로 여겨 존경하여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루터가 쓴 책을 깊이 연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칼빈 선생님은 루터에게 다소 미흡했던 점을 신속하게 보완하여 진리의 불길이 계속 타오를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그래서 필립 샤프라는 교회사가(敎會史家)는 루터를 ‘단단한 바위산을 깨뜨린 사람’에, 칼빈 선생님을 ‘그 바위에 글을 새겨 넣은 사람’에 비유하기도 했습니다.7
또한 이곳에는 역사적 신앙고백인 벨직, 도르트 신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관련된 자료를 비롯하여, 한국 교회와 관련된 자료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개혁 신학을 전수하신 박형룡, 박윤선 박사님과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님, 그리고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양아들로 삼으신 손양원 목사님에 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자료를 직접 살펴보는 일에는 많은 유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보존하시고 그 영광을 세상에 나타내신 일들의 의미를 훨씬 더 실제적으로 생각해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회가 닿을 때, 이런 기독교 박물관을 찾아가 보시기를 바랍니다.
▲ 하이델베르크의 옛 모습과 (하단 왼쪽부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산파 역할을 한 팔츠 연방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 올레비아누스, 우르시누스의 초상화, 그리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모습
▲ 일제 강점기의 예배 순서지
– 일본 국가 봉창, 동방요배(東方遙拜, 일왕이 사는 황궁을 향해 고개를 숙여 절하는 것), 대동아경제권 필승기원 묵도, 황국신민의 서사 제송(齊誦: 다 같이 읽거나 외우는 일) 등의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8
칼빈과 경건 (1)
– 경건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며, 또한 마침이다
이곳 박물관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것은 칼빈 선생님의 초상화였습니다. 박물관 이름에 걸맞게 그분의 초상화가 곳곳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초상화는 현재 전 세계에 약 80점 정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초상화 중에는 정말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인상이 전혀 다르게 느껴지는 그림도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생애 내내 수많은 적대자에게 둘러싸여 지냈습니다. 그분이 사역을 이어간 제네바라고 해서 상황이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칼빈을 격렬하게 미워한 사람이 제네바에 더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네바에서 그린 칼빈의 초상화는 유별나게 눈매가 날카롭고 눈에서 흰자위가 차치하는 비중이 높으며, 인상이 전반적으로 차갑고 전투적입니다. 한편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에서 그린 초상화는 유순하고 자비로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9
칼빈 선생님의 초상화 중에는 재미있는(?) 사연을 지닌 초상화도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자크 부르고앙이라는 학생이 그린 그림으로, 칼빈 선생님이 구약을 강의하는 모습이라고 합니다.10 사실 말이 좋아 초상화지, 실제로는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학생의 심심풀이용 낙서라고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다음으로 눈에 띈 자료는 칼빈 선생님의 학창시절부터 임종 순간까지를 그린 일대기 판화입니다. 이렇게 일대기를 판화로 만들 만큼 교회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칼빈 선생님이지만, 정작 칼빈 선생님의 생애를 연구하는 학자들의 입에서는 쓸 만한 사료(史料)가 많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끊이질 않습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칼빈 선생님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가 아닌 자신에게 주목할 것을 염려해서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행동을 극도로 삼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서전이 없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어떻게 회심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진술조차도 지극히 단조로운 몇 마디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11
그래도 많은 분이 칼빈 선생님의 생애를 저서나 설교, 편지 등을 통해 최선을 다해 연구해서 좋은 결과물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칼빈 선생님에 대해 알고 싶으신 분은 해당 책을 참고하면 많은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칼빈 선생님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방법은 역시 그분이 직접 쓴 책을 읽어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책에는 자신에 관한 진술을 극도로 삼가면서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들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칼빈 선생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신앙의 주제는 ‘경건’입니다. 이런 사실을 대표적으로 뒷받침하는 책이 바로 『기독교 강요』입니다. 이 작품은 칼빈 선생님이 아직 27살 청년이었던 1536년에 처음으로 발행되었습니다. 원래 아주 간명하게 쓰인 이 작품은 그 뒤로 23년 동안 끊임없는 수정과 증보를 거쳐, 1559년에 총 4권으로 이루어진 최종판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자신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가리켜 ‘숨마 피에타티스(Summa Pietatis)’, 즉 ‘경건의 대전(大典)’이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러한 사실은 『기독교 강요』 초판의 책 제목에 달린 부제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구원론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망라하였다. 경건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다」12
또한, 초판부터 최종판까지 항상 글머리를 장식하고 있는 ‘프랑스 왕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헌사’에서도 이러한 사실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인이 원래 의도했던 것은 단지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기술하여 제공함으로써 종교에 열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으로 경건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습니다.」13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경건을 말하기에 앞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는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 있는 ‘구원론과 몇 가지 기초적인 원리를 아는 일’부터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도 『기독교 강요』를 배울 때 이 부분이 꽤 낯설게 다가왔습니다.
특히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성당에 다녔기에, 참으로 자연스럽게 거룩하고 엄숙한 외적 분위기나 마음가짐 정도를 경건으로 여기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칼빈 선생님은 경건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칼빈 선생님이 저술한 첫 번째 요리문답에는 이러한 사실이 한층 더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경건(piety)은 하나님의 심판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는 두려움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은 회피할 수 없기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다.
참된 경건이란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이같은 경건을 가진 자는 누구든지 자기 자신들을 위해서 성급하게 어떤 신을 고안해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그에게서 참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찾으며 그가 자신을 보여주고 선언하는 모습 그대로를 받아들인다.」14
또한, 칼빈 선생님은 『기독교 강요』에서도 경건을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알 때에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것이다.”라고 정의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열렬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으로서, 여기 나타나는 두려움 안에는 자발적인 경외감이 포함되며 그 경외감과 더불어 율법에 규정된 바와 같은 합당한 경배가 수반된다.”라고 부연 설명하였습니다.15
이처럼 칼빈 선생님이 말하는 경건은 ‘하나님의 은총을 아는 지식’이 ‘하나님을 주(主)로서 두려워하는 것’과 ‘그분을 자발적으로 경외하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것’이 서로 단단하게 결합해 있는 개념입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경건한 삶이 무엇인지를 지극히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설명해나갑니다.
「경건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임의의 신을 꿈꾸지 않고, 유일하신 참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본다. 또 경건한 마음은 하나님에 대해 자기 좋은 대로 생각을 덧붙이지 않고 하나님이 계시하는 그대로 하나님의 모습에 만족한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고, 하나님이 자신의 길잡이며, 지켜 주시는 자임을 확신하고 자신을 온전히 바쳐 하나님을 믿는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선의 근원임을 알고 있으므로 어떠한 어려움이나 어떠한 궁핍이 있을지라도 즉시 그의 보호를 믿고 그로부터 오는 도움을 기다린다. 그는 하나님이 선하고 자비로우신 것을 굳게 믿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 가운데서도 항상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구제책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을 주와 아버지로 믿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의 위엄을 존귀히 여기고 그의 영광을 더욱 빛내며 그의 계명을 준수하는 것이 마땅하고 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심판관이며 죄악을 벌주기 위해 엄격함으로 무장하고 계시다는 것을 앎으로 항상 하나님의 심판석을 눈앞에 보는 것처럼 경외함으로 자신을 삼가 하나님의 노를 격발시키지 않도록 처신한다. 경건한 사람이 스스로 죄를 피하는 것은 형벌의 두려움 때문만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을 아버지로서 사랑하고 경외하며 하나님을 주로 예배하며 찬양하기 때문이다.」16
칼빈 선생님은 이러한 경건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말미암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러한 참된 지식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닌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또한 참된 가르침과 교육이 없으면, 참된 경건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17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임의의 신을 꿈꾸고,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에 무지한 상태라면, 그가 경외한다는 그 신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또한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가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뢰하면서 항상 평안을 누리며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를 올려드릴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와 형제와 자기 이웃을 참으로 사랑하며 그들에게 합당하게 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그리스도인이 전 생애에 걸쳐 경건을 추구해야 하는 실제적인 이유와 토대를 제공해줍니다. 칼빈 선생님은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로서 나타내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자녀임을 자원하여 드러내야 하며,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배은망덕한 행위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그러한 모범을 보이셨으므로 전인격적으로 그분을 본받아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한 가지 조건, 즉 우리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나타낸다는 조건으로 우리를 그의 자녀로 받아들이셨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의를 위하여 우리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배신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일 뿐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자신을 저버리는 행위이다.」18
하나님께서는 사망에 매여 있던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시고, 우리의 타락한 의지를 새롭게 하여 그분을 믿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그분의 의로 덧입혀 주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아버지로 나타내주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는 우리에게 이러한 은혜를 베푸셔야 할 의무나 책임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우리에게 은혜를 거저 베풀어주셨습니다. 칼빈 선생님은 이러한 값없는 은혜를 알고 믿는 이들만이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님은 교리와 경건 또는 신학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칼빈 선생님에게 신학은 지적 유희를 위한 단순한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경건을 올바르게 실천하기 위한 성경의 지침이자 도구였습니다. 칼빈 선생님의 신학적 목표는 경건의 모든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진술하는 데 있었습니다.
특히, 칼빈 선생님은 신학자이기 이전에 제네바에서 목회를 감당한 목회자였기에 그러한 특징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제네바 시민의 신앙과 삶을 실제로 개혁해나가면서 신학을 현장에 적용했으므로, 칼빈 선생님의 신학은 성도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하는 부분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19
그렇게 신학을 가르치고 적용하기에 힘쓴 칼빈 선생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일부 초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날카롭고 차가운 사람이었을까요, 아니면 다른 초상화가 말해주는 것처럼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였을까요? 칼빈 선생님의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본 후계자 테오도르 베자는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난 16년간 칼빈의 행동을 지켜본 나는 …(중략)… 이제 감히 이렇게 선언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칼빈에게서 그리스도인의 성품의 가장 아름다운 모범을 볼 수 있다. 모방하기도 어렵고 쉽게 비방할 수도 없는 모범이다.」20
물론, 경건은 칼빈 선생님만 가르친 독특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바른 교훈을 하며,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대한 교훈에 착념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딤전 6:3). 또한 빌립보 성도들에게는 “무엇에든지 경건할 것”을 권면하였습니다(빌 4:8).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기를 소망하는 성도가 더욱 경건에 힘쓸 수 있도록 칼빈 선생님에게 경건과 관련한 핵심 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을 따라 어릴 때부터 성당에 다니다가 20대 중반에 이르러 비로소 개종하고 교회를 다닌 관계로, 교회를 다니고 계신 분들의 일반적인 모습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경건하다고 일컬어지는 분들의 모습이 어떠한지 궁금합니다.
부디 그런 분들이 단순히 예배에 빠지지 않고 헌금을 잘 내며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이유로 그러한 사람으로 불리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더불어 한국 교회와 우리 모든 성도가 외적인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실제적인 능력을 부인하고 있지 않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딤후 3:5).
다음 글에서는 경건한 신자로 살아간 칼빈 선생님의 모습을 살펴보면서, ‘칼빈과 경건’이라는 첫 번째 주제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각주
1 정성구 박사와 함께 하는 칼빈 박물관 탐방
2 정성구, 한국 칼빈주의 연구원 연혁
3 같은 글.
4 시드니 휴튼, 『기독교 교회사』, 정중은 옮김, 나침판, 1988, p. 29.
5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 26.
6 브라이언 모이너핸, 『신의 베스트셀러』, 김영우 옮김, 민음in, 2007, pp. 13~14.
7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p. 27-28.
8 일제 강점기 예배순서지에 대해서는 네이버 카페 <밴드 오브 퓨리탄스> ‘일제시대 교회 예배순서지’(오인용 목사 칼럼)를 읽어보시기를 바랍니다.
9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 116.
10 케네스 브라우넬, 『존 칼빈과 떠나는 여행』, 김희정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1, p. 87.
11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 122.
12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초판』, 양낙흥 옮김, 크리스천다이제스트, 2008, p. 34.
13 존 칼빈, 『기독교 강요1』, 고영민 옮김, 기독교문사, 2006, p. 63.
14 장수민, 『칼빈의 기독교강요 분석1』, 칼빈아카데미, 2006, p. 57에서 재인용.
15 같은 책, p. 57에서 재인용.
16 박희석,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총신대학교출판부, 2011, p. 15에서 재인용.
17 같은 책, p. 16에서 재인용.
18 같은 책, p. 21에서 재인용.
19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p. 130.
20 도널드 맥킴 엮음, 『칼빈 이해의 길잡이』,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pp. 246~247에서 재인용.
참고서적
– 시드니 휴튼, 『기독교 교회사』, 정중은 옮김, 나침판, 1988
– 라은성, 『이것이 복음이다』, PTL, 2011
– 정성구, 『교회의 개혁자 요한 칼빈』, 하늘기획, 2009
– 박희석,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원리』, 총신대학교출판부, 2011
– 도널드 맥킴, 『칼빈 이해의 길잡이』, 한동수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 버크 파슨스, 『교리, 예배, 삶의 균형을 추구한 사람 칼빈』, 백금산 옮김, 부흥과개혁사, 2012
참고영상
예장 제작, 정성구 박사와 함께 하는 칼빈 박물관 탐방
KBS 기독신우회 제작, 칼빈 박물관 정성구 원장 교회사 강연
<추가>
칼빈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은 관계자분의 허락을 구하고 찍은 사진임을 밝힙니다. 이 글을 빌려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칼빈 박물관 탐방기 – 칼빈과 경건」 시리즈
(2-1) 칼빈과 경건 – 경건이란 그리스도인의 삶의 시작이요, 과정이며, 또한 마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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