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로역정의 크리스천과 함께 천성을 향해 나아가자
(11) 마귀의 훼방과 신앙의 정수
김재호
「꿈 속에서 보니 해석자는 크리스천의 손을 잡고 또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곳의 한쪽 벽에는 벽난로가 있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벽난로 옆에 서서 그 불길을 끄기 위해 많은 물을 끼얹고 있었으나 불은 꺼지기는커녕 점점 더 높이 그리고 더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었다.」1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택하신 자기 백성을 끝까지 붙드신다. 그러므로 한 번 구원받은 사람이 중간에 믿음을 잃어버리고 멸망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구원받은 성도가 깊은 시험에 빠져 사경(死境)을 헤매면서 오늘, 내일 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마귀는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영원한 사랑과 보호 하심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하고 지워내려고 기를 쓴다. 하나님께서도 당신의 전능 하심을 온 세상에 분명하게 나타내시려고, 어느 정도는 마귀가 원하는 대로 하게 그냥 내버려 두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기 삶에 찾아오는 불같은 시험과 고난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면 안 된다(벧전 4:12, 13). 또한, 우리 죄와 허물로 찾아온 고통과 어려움을 하나님의 시험에 비기며 책임을 회피하는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벧전 2:20; 약 1:13).
그러나 딱히 이렇다 할 잘못이 없는 이들, 오히려 혹시라도 그러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나 하면서 매사 주의하는 이들에게도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큰 어려움과 고통이 분명히 찾아온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는 그 사람의 신앙에 숨어 있는 미세한 결점을 제거하여, 참 신앙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깨우쳐 주시려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가 숨어있다(욥 1:5; 40:1~5).
그러므로 그런 어려움이 찾아올 때, 성도는 욥의 아내처럼 어리석게 행하지 말고 욥처럼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바라보면서 잘 인내하려고 애써야 한다(욥 2:9, 10). 그 인내하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는 자라는 확증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분이 아시니, 그분이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올 것이다. 내 발이 그분의 걸음을 바로 따랐으며, 내가 그분의 길을 지켜 치우치지 아니하였고, 내가 그분의 입술의 명령을 어기지 아니하고 일용할 양식보다 그분의 입의 말씀을 귀하게 간직했구나. 그분의 뜻이 일정하니 누가 돌이키랴? 그분은 마음에 원하시는 것이면 그것을 행하시니, 진실로 그분은 내게 정하신 것을 다 이루실 것이다. 이런 일이 그분에게 많이 있다(욥 23:10~14).
기록된 바와 같으니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라고 하였으니, 아브라함은 그가 믿은 하나님, 곧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가운데서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와 같을 것이다.”라고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백 세나 되어 이미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 또한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믿음에 견고해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다(롬 4:17~22).
나의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겨라. 이는 너희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알기 때문이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라. 이는 너희가 온전히 구비하여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약 1:2~4).」
그러나 시험 속에서 인내하는 일은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러한 시험이 정말로 다가오면 주변에서 우리를 돕던 손길이 하나 둘씩 모습을 감추며, 우리 말과 처지에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된다. 싸늘한 눈길만 돌아올 뿐, 가족과 친지는 이제 살길을 찾아야 할 때라고 하면서 호통과 회유를 끊임없이 반복한다. 어디선가 갑자기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들이 몰려와 그동안 쌓아놓은 견고한 신앙의 토대를 대대적으로 허물어버린다. 눈앞이 캄캄해지며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된다.
이때, 믿음이 있는 것처럼 보였던 이가 수도 없이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 절망의 늪에 빠진 온순(pliable)2처럼 분노하면서, 또 예수님을 은 30닢에 팔아넘긴 가롯 유다처럼 이제는 모든 것이 끝났다고 고개를 내저으면서 멸망의 도시(The City of Destruction)로 돌아가 버린다. 이들은 시험의 날에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에 믿음을 굳게 결속시키지 않고, 주변 환경과 여건에 자기 영혼을 맡기는 불신앙의 길로 나아간다(히 4:1~3).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한 사람의 인격과 의지를 새롭게 하는 일을 정말로 경험한 이들은 수많은 이가 그런 길로 나아간다고 해도 절대로 자기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그들도 사람이므로, 그러한 시험의 날에 깊은 고통과 근심으로 괴로워하며 실족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모든 것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을 항상 더 높고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모습이 그들 가운데서 나타난다. 설령, 그런 일이 자기 생명을 앗아가는 적대적인 환경을 피할 수 없게 한다고 해도 기꺼이 말씀을 따른다(단 3:17~20).
그들은 그런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면서 자신의 무력함과 어리석음, 어쩔 수 없는 사람의 타락한 본성, 하나님만이 유일한 참 소망이라는 사실을 깊이 체득하게 된다. 즉, 자신을 바라보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본다는 말의 참뜻을 참으로 깊고 진실하게 깨닫고 이해하게 된다. 그전까지는 아주 막연하기만 했던 그 말이 참으로 분명하고 친숙하게 다가오게 된다. 성경은 이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란에 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니, 우리가 힘으로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고난을 받아 살 소망까지도 끊어졌었다. 우리가 속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고 느꼈으니, 이는 우리가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죽은 자들을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고후 1:8, 9).
기록된 것과 같으니, “우리가 종일 주님 때문에 죽임을 당하며, 도살될 양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으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나는 확신한다.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력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롬 8:36~39).
형제들아, 주님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을 고난과 인내의 모범으로 삼아라. 보아라, 우리는 인내하는 자를 복 되다고 말한다.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으니, 주께서는 긍휼이 많으시고 인애하시다(약 5:10, 11).」
이처럼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미세한 결점을 자극하고 악용하는 마귀의 궤계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서 성도의 신앙을 정결하게 단련하는 풀무 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는 참 성도가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릴 정도의 엄청난 시험을 허락하지는 않으신다. 언제나 피할 길을 내셔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안전하게 그들을 인도하신다(고전 10:13).
성도는 그러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가운데 모든 어려움을 능히 이겨내게 된다. 또한, 그런 어려움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하나님께서 참으로 하나님이 되신다는 사실을 깊이 체험하게 된다. 그들에게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자신을 참으로 부인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각주
1 존 번연, 『천로역정(The Pilgrim’s Progress)』, 유성덕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6-포켓판, p. 57.
2 2015년에 발행한 완역판에서는 온순(Pliable)이라는 표현이 유순(柔順)이라는 단어로 개정되었습니다. 이 표현이 이랬다 저랬다하는 사람을 말하려던 버니언의 원래 의도를 더 잘 표현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우유부단(優柔不斷)이라는 표현이 원문에 더 가깝지 않나 싶습니다. 이처럼 번역본은 원문에 더 가깝게 번역하기 위한 개정 작업이 끊임없이 필요하며, 그 과정에서 적절하지 못한 표현이 바로 잡혀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문으로 읽으실 수 있는 분은 번역본보다는 원문으로 읽으시기를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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