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11) 인간의 범죄와 타락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다함께 요한일서 3장 4절의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요일 3:4).」
오늘은 원죄(原罪) 교리를 증거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요리문답 제13문은 “인류의 첫 부모는 창조된 상태를 계속 유지했습니까?”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서 인류의 첫 부모란 아담과 하와를 말하고, 창조된 상태란 죄가 없는 완전무결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어떠했습니까? 흠 없고 경건했으며 어떠한 방식으로도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즉 “불법을 행한” 일이 전혀 없는 거룩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은 다음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죄와 사망의 올무에 매인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불법을 행한 그들의 책임을 물어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고, 살아가는 동안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죄를 허구나 허상의 산물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은 죄나 죄가 가져온 결과가 실재하지 않으며, 사람의 생각이나 마음 안에만 존재한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그들은 생각이나 태도를 바꾸면, 죄나 죄의 결과로 여겨졌던 모든 현상들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앞서 말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를 실제 사건으로 서술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주어진 여자의 후손에 관한 약속은, 사람의 생각과 마음 안에만 존재하는 허상이 아닙니다. 그 약속은 죄에서 사람을 ‘실제로’ 건져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함을 가르쳐주는, 실체가 있는 구원의 소식입니다. 그러나 죄를 오직 사람의 마음 안에만 있는 허상처럼 여기는 이들은, 결국 그 죄에서 사람을 실제로 건지신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실체가 없는 아름다운 전설이나 소설처럼 받아들이게 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죄는 실재하며 사람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뒤의 상황을 살펴보면, 죄의 실질적인 영향이 사람에게 미치기 시작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나뭇잎으로 치마를 엮어서 그들의 치부(恥部)를 서둘러 가리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회피하고 감추고 싶은 소욕이 그들의 인격을 강하게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교회가 성경의 가르침을 풀어서 감춰진 그들의 죄를 드러내는 일을 무척 싫어합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죄라는 개념 자체를 정죄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는 죄를 드러내는 일이 남의 치마를 들쳐 올리는 ‘파렴치한’ 일처럼 다가올 것입니다. 그렇게 그들은 교회가 하는 일을 갖가지 말로 비방하고 깎아내리며, 자신이 하는 일을 합리화하고 포장하여 어떻게든 죄가 죄로 드러나는 일을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죄인에게 “당신이 이런저런 죄를 지어서 죄인이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 말은 오직 죄인에게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여기서 세상 사람들 마음 안에 있는 진짜 생각이 드러납니다. 그들은 자신을 무죄하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의 치부 위를 덮은 조악한 나뭇잎쪼가리가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과 하와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든 죄인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있는 죄의 강력하고 실질적인 영향력입니다.
심지어 이런 죄의 영향력은 교회 안에서도 강하게 나타납니다. 현대 교인들은 교회가 죄를 이야기하고 가르치는 일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행복과 사랑과 축복 같은 밝고 긍정적인 내용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가 “당신은 이러이러한 죄를 지은 죄인이니, 빨리 회개하고 죄에서 떠나야 합니다.”라고 설교하면, 눈살을 찌푸리며 잘못 가르친다고 여기는 이들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대 교회가 얼마나 영적인 능력을 상실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분을 피하게 하는 일을 가져왔습니다. 죄의 열매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치명적인 해악이 바로 이것입니다. 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전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피해 다니지도, 숨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일을 즐거워하며 지극히 친밀하게 그분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 인격을 장악하기 시작하자,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을 피해 숨으려고 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떻게 편재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모습을 감출 수 있겠습니까? 아담과 하와는 정말 최선을 다해 나무 사이에 몸을 숨겼지만,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에 그런 일이 참으로 부질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참으로 초라하고 부끄럽고 무능력한 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자기 죄를 상대방에게 떠넘기기 바쁜 꼴사나운 모습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사람을 전도하는 일이 왜 그렇게 힘이 드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 마음 안에 이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피하려는 죄의 막강한 영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하고 가르쳐줘도 한 사람을 얻기가 이 세상 전부를 얻는 것보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단들을 보십시오! 저들이 가르치는 교리가 얼마나 이상하고 조잡합니까? 그러나 사람들은 그렇게 이상한 말에 쉽게 마음을 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상에게 마음을 열고 나아가는 일이 참으로 쉽고 편하지만, 죄를 심판하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은 정말로 죽을 만큼 두렵고 무서운 일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겠습니까? 또, 하나님께서도 어떻게 그런 죄인을 친밀하고 편안하게 맞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하나님 앞에 함부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지성소를 두꺼운 휘장으로 가려두지 않으셨습니까? 그 안쪽에는 오직 대제사장만 1년에 단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들어가기 전에 꼭 속죄하는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그 책임을 물어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또한,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외적인 부분에서도 큰 힘을 발휘합니다. 죽음, 질병, 자연재해, 전쟁, 기근 등은 모두 아담의 죄를 따라 이 세상에 들어온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런 것들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는 평생 이런 어려움을 안고 살아야만 합니다. 인생의 모든 내적, 외적 고통과 불행이 바로 아담이 지은 이 죄로부터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오히려 세상에 가득한 어려움과 고통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세상에 들어온 것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이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당하게 괴롭히시는 것이 아닙니다. 즉,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당신의 법을 어긴 대가를 치르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다 함께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봅시다.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성경은 죄를 무엇이라고 증거합니까?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피조물이 주제넘게 창조주를 무시하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창조주로 여기는 것이 바로 죄입니다. 우리가 짓는 모든 죄와 그로 인한 파괴적인 결과는 모두 바로 이 죄에서 말미암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법정도 나라의 질서와 권위를 무시하고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에게 다양한 형벌을 내립니다. 그 정도가 극도로 좋지 않은 경우에는 사형으로 다스리기도 합니다. 이 세상 법정도 나라의 질서와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렇게 하는데, 어떻게 온 천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형벌을 내리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기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을 무시하고 거스른 모든 피조물에게 영원한 사망이라는 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많은 어려움과 고통은 장차 하나님의 법정에서 벌어질 이 엄청난 일을 예고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서 있는 모든 죄인에게 형벌로 ‘죽는 것과 같은’ 정도의 혹독한 고통을 영원히 내리실 것입니다. 그 일에 비하면 우리가 겪는 이 모든 어려움은 정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자신이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참으로 아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청소년, 어른, 노인 가릴 것 없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타락한 심령을 소유한 죄인은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 정말로 알기 전까지는 절대로 예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찾게 되는 때는 자신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런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 어떠한지 알게 되는 때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정말로 한 영혼을 예수님께 인도하고 싶다면, 반드시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께서는 죄인을 어떻게 대하시는지를 먼저 알려줘야 합니다. 그러나 현대 교회는 그런 복음 전도 방식을 꺼립니다. 죄인이 자기 죄를 감추고 하나님을 피해 도망하려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현대 교회는 그런 복음 전도 방식으로는 사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죄인의 처지를 그대로 말해주는 대신, 위로와 소망을 주는 말로 전도를 시작합니다. 이러한 복음 전도 방식에는 사영리(四靈理)1가 대표적입니다. 사영리의 첫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며, 당신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올바른 말이 아닙니다. 물론 복음을 전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그가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내 맘과 생각에 좋은 대로 행동하기를 무척 좋아하는 참으로 지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먼저 말해줘야 합니다. 즉,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전도를 시작해야 합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멋대로 살기 좋아하는 타락한 사람입니다. 그러니 어서 그 죄를 회개하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야 당신은 당신이 지은 그 악독한 죄에서 건짐 받고 멸망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복음 전도에는 올바른 순서가 있습니다. 율법이 오고 난 뒤에 복음이 와야 합니다. 물론, 정말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순서가 바뀝니다. 그는 은혜 안에서 율법을 행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전도 대상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을 먼저 말해줘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자기 죄와 자기 처지를 깨달아 용서를 구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가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죄인인 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겉으로는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소원성취를 위해서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현대 교회는 사영리 식의 복음 전도 방식을 사용하여 많은 사람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얻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용서받고자 하는 이들이 아닌, 눈앞의 ‘위로와 소망’을 얻으려는 이들이나 좀 양심적으로 살아보려는 이들이 대부분이라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예수님은 구속주(救贖主) 예수님이 아닌, 상담자 예수, 빈곤 해결사 예수, 질병 치료자 예수, 윤리·도덕 선생 예수, 자선사업가 예수입니다.
그들이 그런 예수에게서 안정된 심리 상태, 물질의 축복, 병 고침, 양심 훈련, 자선을 베풀 동기 등을 정말로 얻어서 전보다 더 나은 삶을 살게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러면 이제는 그들이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까? 예전에는 삶이 너무 힘들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영혼 구원의 문제를 이제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나은 삶을 살게 된 만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큰 착각에 빠지게 됩니다. 인생의 부수적인 것들, 즉 썩는 양식을 얻는 일에 주어진 인생을 다 쏟아붓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상적인 것들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좇는 이들의 여러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필요를 채우기 위해 주님을 찾는 이들은 돌려보내기도 하셨습니다.
즉, 죄에서 건짐 받기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린 이들의 필요는 기쁘게 돌아보셨지만, 먹고 입는 문제를 죄 문제 해결보다 앞세우는 이들은 돌려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고 개선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필요를 위해서는 가이사, 곧 정부라는 하나님의 사자가 세움 받아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누군가의 구원을 놓고 기도할 때는, 가장 먼저 그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정말로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아직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그들을 진정으로 가엾게 여긴다면,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자라는 사실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셔야 합니다. ‘아, 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서 타락한 죄인이구나.’ 하면서 매우 애통해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죄로 무너지고 상한 심령만이 성경이 증거하는 바로 그 예수님을 자신의 구속주로 알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는 사람들에게 무작정 그리스도를 들이대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의 심령이 사망의 곤고함으로 고통받고 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무조건 “예수님을 믿어. 믿기만 하면 돼.”라고 말합니다. 회중이 무감각하게 사는 것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진노와 책망이 그들의 양심을 깊이 파고들게 하지는 않습니다. 그 무지무각한 심령에 계속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셔야 합니다.”라고 말하기에 바쁩니다.
그런 방법이 당장에는 외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나, 그것은 한 영혼이 계속 죽어가게 유도하는 죄악입니다. 그런 소리에 계속 귀를 기울이면 나중에는 무감각함이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일말의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죄로 여기지도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고 맙니다.
여러분,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정말 주님을 믿는 성도라면 ‘아, 내가 하나님 앞에 또 악한 짓을 저질렀구나. 주님, 이런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는 고백이 나오기까지 그 심령에 불편함이 가시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무작정 그리스도를 들이대는 것에 익숙해진 현대 교인들에게서는 이런 성도의 슬픔과 회개를 찾아보기가 참 어렵습니다. “아, 내가 뭘 어쨌다고?” “다 그렇게 사는데 참 유별나게…”라는 반응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7장 23~24절에는 이런 현대 교인들의 반응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도 바울의 고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노를 부르는 죄악이 자기 인격을 사로잡는데도, 자신에게는 그것을 이겨낼 어떠한 힘도 없다는 사실 앞에서 깊이 괴로워합니다. 마치 고양이 앞의 쥐와 같은 자신에게 남은 것은 사망밖에 없다는 사실로 인해 탄식을 토해냅니다. 그러나 그런 그의 곤고한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줄기 밝은 빛이 비춰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의 눈에는 죄 앞에서 전적으로 무능한 자신에게 지극히 은혜롭고 친절하신 주님의 모습이 정말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짓누르던 그 사망의 곤고함은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과 감사와 찬송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죄를 다루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듣기 좋은 소리라는 진통제를 처방해서 계속 그 고통을 가라앉히기만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죄 그 자체를 십자가의 은혜로 깨끗이 제거하는 것입니다. 진통제 처방은 잠깐은 고통을 겪지 않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니기에 결국 죄로 멸망하게 됩니다. 한편, 율법으로 죄의 악독함을 드러내면, 잠깐은 정말 죽을 만큼 심한 심적 괴로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연합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율법의 정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사영리와 같은 사람 중심의 전도 방법으로 교회에 나오게 된 이들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죄에 대한 각성을 대개 윤리·도덕적인 가책과 후회 정도로 가볍게 생각합니다. 얼굴에 웃음을 띠고 부끄러워하면서 “아유, 저는 하나님 앞에 잘못을 저지른 부족한 사람이지요.”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번지수를 잘못 짚어도 한참 잘못 짚은 것입니다.
자, 우리 앞에 극악무도한 죄를 짓고 사형 집행을 앞둔 죄인이 있다고 생각해봅시다. 집행관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은 없는지, 저지른 죄를 정말로 반성하는지 아주 엄중한 어조로 물어봅니다. 그러자 사형수가 입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합니다.
“아유, 저는 잘못을 저지른 참 부족한 사람이지요.”
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한 대답입니까? 그런데 그런 황당한 일이 바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정말로 죄가 무엇인지 아는 이들은 죄의 심각성과 그 강력한 힘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혼신을 다해 발버둥을 쳐도, 자꾸만 몸이 가라앉을 뿐인 그 속수무책의 상황을 정말로 당해본 사람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죄와 사망의 늪에서 은혜로 사람을 건져내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이 무엇인지 정말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라는 로마서 8장 2절의 말씀이 전하는 참 의미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죄로 부패하고 타락한 존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아니면, 단 한 순간도 살아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한 채로 교회를 다니는 이들은 정말로 교회를 잘못 다니는 것입니다. 그런 무지한 믿음에 근거하여 ‘죄와 사망’을 이겨내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유일하게 불법에서 건져낼 수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깊이 감사하십시오.
부디, 여러분의 심령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더욱더 온전하게 서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각주
1 ‘4가지 영적 원리’의 줄임말. 한 선교단체에서 도입한 전도방식으로 오늘날 복음주의권에서 많이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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