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 시리즈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3-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비텐베르크: 95개 조 반박문)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1)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 루터 광장)
유럽 종교개혁 유적지 탐방기 (3-7-2) –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를 따라서(보름스:하일스호프 공원, 보름스 대성당, 마그누스 교회)
설형철
이번에는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시로 유명한 비텐베르크로 가보겠습니다. 하얀 모래 언덕이라는 뜻을 지닌 이 도시의 공식명칭은 ‘루터슈타트 비텐베르크(Lutherstadt Wittenberg: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입니다. 사실 비텐베르크는 제 독일 탐방 일정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입니다. 이 탐방기는 여러분이 읽기 편하게 루터의 생애에 맞추어 연재되고 있지만, 실제 탐방은 지리적·경제적인 여건에 맞추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저는 루터뿐만 아니라 그와 함께하며 독일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동역자와 관련된 유적도 많이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글을 쓰는 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내용을 어느 정도 간추렸음에도 너무 분량이 많아서 한동안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결국 비텐베르크 편을 ‘루터와 그의 동역자들’과 ‘95개조(個條) 반박문’ 편으로 나누기로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알면 알수록 배우고 전해야 할 내용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습니다.
비텐베르크 역에서 내려 조금만 걸어가면, 엄청나게 큰 나무 한 그루가 불쑥 나타나는 것만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거대한 나무가 바로 사람들에게 ‘루터의 참나무’로 불리는 나무입니다.
종교개혁의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거세지자, 교황은 루터에게 파문을 선언하면서 그가 지은 모든 책을 태워버리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오히려 교황이 자신에게 보낸 파문장과 해로운 가르침으로 가득한 로마 카톨릭의 책을 모아 태워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그 자리에 참나무를 심었습니다.
하지만 루터가 직접 심은 그 나무는 안타깝게도 훗날 소실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1830년에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탄생 300주년을 기념하여 그 자리에 새로 나무를 심었는데, 그 나무가 지금까지 계속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루터의 참나무를 뒤로하자 비텐베르크 구(舊)시가지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어떤 나무 사이에 걸려있던 현수막 하나가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현수막을 지나자 곧바로 루터가 오랫동안 생활한 비텐베르크 수도원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현재 이 건물은 루터 하우스(루터의 집)라고 불리며, 루터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당시 어거스틴 수도원이었던 이곳에서 비텐베르크 생활을 시작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만 머물렀습니다(물론 중간중간 이리저리 불려 다니기는 했습니다). 특히 루터는 이 수도원 탑에 있는 작은 방(혹은 서재)에서 회심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루터의 회심을 가리켜 ‘탑 체험(Turmerlebnis: Tower experience)’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책에서는 루터가 그때 화장실에서 큰일을 보는 중이었다고 말합니다.
물론, 루터가 회심한 정확한 시기와 정황은 알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탁상담화 (The Table Talk Of Martin Luther)』라는 책에는, 루터가 언제 회심했는지를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 있습니다. 그 책에서 루터는 1519년에 복음적인 ‘하나님의 의’에 대한 개념과 칭의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고 말합니다. 그가 그때를 설명한 대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울의 로마서를 이해하려고 몹시 애쓰는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하나님의 의” 였다. 그것은 내가 이 의(義)라는 말을 하나님께서는 의로운 분이요, 따라서 불의한 사람들을 공정하게 처벌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의 상황으로 말하면 수도사로서는 털끝만치도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여전히 마음이 괴로운 죄인이었기에 도무지 나의 공로를 가지고는 그분을 누그러뜨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공정하고 성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증오하고 그분께 투덜댔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바울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그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을까 하고 계속 캤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곰곰이 생각하던 어느 날, 나는 하나님의 의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 사이에 관련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때 나는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께서 은혜와 순수한 자비를 발휘하신 나머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죄가 없는 것으로 취급하는 그 의(Righteousness)라는 걸 터득했다.
그 순간 나는 새로 태어나서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낙원에 이른 기분이었다. 성경 전체가 새로운 의미를 지녔으며, 전에는 “하나님의 정의” 때문에 내 속은 증오로 꽉 차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하게 되었으며 더 큰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바울 서신의 이 대목이 나에게 있어서 하늘로 통하는 하나의 문이었다. …(중략)…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구주시라는 사실을 참으로 믿는 순간 당신 곁에는 은혜로운 하나님께서 계신다. 그것은 당신을 데리고 들어가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활짝 열어 제치고 당신에게 순수한 은혜와 넘치는 사랑을 보게 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을 뵙는다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더 이상 노여움이나 불친절을 찾아볼 수 없는 그분의 아버지로서의 마음, 다정한 마음을 우리가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성난 분으로 보는 사람은 그분을 제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분의 얼굴에 검은 구름이 덮였을 때처럼 하나의 커튼을 대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루터가 1525년에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자, 작센의 선제후인 프리드리히 3세(Friedrich der Weise)는 신혼부부에게 바로 이 수도원 건물을 결혼 선물로 주었습니다. 당시 루터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결혼하고는 거리가 먼 중년의 수도사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루터도 결혼에 별 뜻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결혼은 수많은 사람을 정말로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만큼 결혼과 거리가 있어 보였던 루터가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루터의 아내가 될 폰 보라는 149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10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수녀원에 들어갔으며, 16세에는 수녀 서원을 하고 수녀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수녀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그녀가 머물던 수녀원에는 몰래 들여온 루터의 책이 읽히기 시작했습니다.
폰 보라를 포함한 많은 수녀(9명~12명)가 루터의 개혁 사상이 담긴 글을 통해 자신의 오류를 깨닫게 되었고, 루터와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참 자유를 되찾기 위해 수녀원을 탈출할 생각을 품게 됩니다(당시 수녀원 탈출 시도는 사형에 처할 정도로 엄하게 다스리던 죄였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토르가우 지역의 시의원이자 상인이었던 레온하르트 코페에게 부탁하여 ‘수녀 탈출 작전’을 실행에 옮기게 합니다. 코페는 구운 청어를 담는 큰 통을 여러 개 준비한 다음 한밤중에 수녀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가 수녀원 문을 다시 나설 때 그 통 안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되찾기를 갈망하던 수녀들이 한껏 숨을 죽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거룩한 강도 행각’을 벌인 루터는 탈출한 수녀의 의식주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주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결혼을 주선해주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모든 수녀가 결혼하여 각자 행복한 가정을 꾸렸습니다. 단 한 사람, 폰 보라를 제외하면 말입니다.
루터의 아내가 될 폰 보라가 끝까지 남은 데에는 그녀의 당당하고 강인한 성품이 한몫했습니다. 폰 보라는 루터가 소개해준 남성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다하면서 당당하게 그 자리에 임했습니다. 몇몇 남자가 그런 그녀에게 매력을 느껴 청혼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성에 차지 않는 그 남자들의 구애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물론 그중에는 남자 쪽 부모의 반대로 결혼이 이루어지지 않은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녀가 계속 가정을 꾸리지 못하자, 루터는 막중한 책임감 속에서 많은 생각과 고뇌를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루터 자신이 폰 보라의 남편이 되어주기로 했습니다. 한편, 폰 보라도 그동안 내심 루터와 결혼하게 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전혀 예상치 못했던 두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 가운데 결국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이 둘의 결혼 생활에 관해서도 짤막하게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이 둘의 결혼 생활에 관해 자세하게 알고 싶으신 분은 솔라피데 출판사에서 나온 『눈 속에 피는 장미 (Rosen im Schnee)』라는 책을 참고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저는 이 루터 박물관 안쪽을 관람하고 싶었지만, 넉넉하지 않은 재정 상황을 생각하다가 그냥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참 감사하게도, 글을 쓰던 중 같은 교회에 다니는 한 형제가 작년에 저처럼 유럽의 종교개혁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바로 이 루터 하우스 안쪽도 돌아보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형제에게 글에 실을 사진을 보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제가 둘러보지 못한 부분은 이 형제님께 부탁해서 관련 사진을 실을 계획입니다.
▲ 루터 하우스 내부 모습 – 사진 제공: 이종현 형제
▲ 루터의 방 – 당시 모습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루터 하우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멜란히톤 하우스입니다. 비텐베르크가 작은 도시라서 그런지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유적은 모두 다 가까이 있습니다. 덕분에 다른 곳에 비해 돌아보기가 참 수월했습니다.
필리프 멜란히톤은 1518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비텐베르크 대학에 그리스어(헬라어) 교수로 초빙을 받으면서부터 루터와 인연을 맺게 됩니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그늘에 가려진 종교개혁의 2인자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의 도움과 협력이 없었다면 루터의 개혁도 그렇게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은 말로써 멜란히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내게 그리스어를 가르쳐 준 멜란히톤에게 감사한다. 나는 그보다 나이가 많지만 그것이 내게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교수보다 멜란히톤의 의견을 더 존중한다. 그의 판단과 권위는 저 로마 카톨릭의 에크(당대 최고의 로마 카톨릭 학자)보다 훨씬 뛰어나다.」
멜란히톤은 루터의 개혁신앙을 잘 정리하고 체계화해서 1521년에 개신교 최초의 조직신학 책이라고 할 수 있는 『신학총론 (Loci communes)』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또한, 1530년에는 역시 개신교 최초의 신앙고백이자 지금까지도 루터교 공식 신앙고백서 역할을 하는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했습니다. 독일 종교개혁은 루터가 선두에서 진리를 외치며 거대한 바위를 치워놓으면, 멜란히톤이 뒤따르면서 길을 닦고 정리하는 형태로 진행되었습니다.
멜란히톤 하우스는 멜란히톤이 작센의 선제후(지금으로 말하면 도지사)에게 직접 선물 받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멜란히톤의 명성이 점점 커지자 많은 대학에서 그를 모셔가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루터는 선제후에게 그가 계속 머물 집을 지어달라고 요청했고, 선제후는 그 요청을 받아들여 멜란히톤에게 집 한 채를 지어주었습니다.
그런 배경을 지닌 멜란히톤의 집을 볼 수 있다는 기대를 품고 걸어가는 도중, 저만치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는 건물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설마 저 건물은 아니겠지?’ 하면서 계속 걸어갔는데, 결국 그 설마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한동안 주변을 서성이다가 별수 없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이렇게 제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과 가끔 맞닥뜨리곤 합니다. 그럴 때는 그 상황에 너무 얽매이지 말고 그냥 다음 일정을 진행하는 편이 훨씬 좋습니다.
▲ 새롭게 단장하고 있는 멜란히톤 하우스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적어 놓은 안내판
멜란히톤 하우스와 아주 가까운 곳(거의 바로 옆 건물)에는 마르틴 루터가 신학을 배우고 가르친 비텐베르크 대학교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현재 비텐베르크 대학교는 할레(Halle) 대학교와 합병하여 ‘할레-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대학교(Martin Luther University of Halle-Wittenberg)’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대학 지방 분교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할레-비텐베르크 마르틴 루터 대학교(옛 비텐베르크 대학교)
이렇게 작고 별 볼 일 없는 도시의 소규모 대학에서 중세 유럽 전역을 뒤흔들 복음의 불길이 시작되어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갔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도 참 믿기 어렵습니다. 변방의 일개 수도사요, 조그만 대학 교수에 불과했던 루터를 통해 수많은 이가 새 생명을 얻으리라고 예상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그런 사실을 생각해볼 때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사람의 보잘것없음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비텐베르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보잘것없는 시골 마을 베들레헴처럼 성도들의 마음 안에서 항상 고귀하게 기억될 이름이 아닌가 싶습니다.
▲ 비텐베르크 대학 교패 – 비텐베르크(하얀 모래 언덕)를 그리스어로 ‘로이코레아(Leucorea)’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특히 ‘코레아’가 한국을 뜻하는 옛 영어 표현이라서 그런지(전혀 관련은 없지만) 괜히 더 반가웠습니다.
비텐베르크 대학을 뒤로하고 찾아간 곳은 루터가 30년 동안 시무한 성 마리엔 교회(Stadtkirche Sankt. Marien)입니다. 루터는 이 교회에서 요하네스 부겐하겐이라는 목회자와 함께 합동 목회를 했습니다. 부겐하겐은 원래 로마 카톨릭 신부였으나 루터의 책을 통해 개혁신앙이 참으로 올바른 신앙이라는 사실을 깨닫고서 비텐베르크로 찾아온 인물입니다.
그때,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 불려가서 비텐베르크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부겐하겐은 루터가 아닌 멜란히톤을 통해 종교개혁 사상을 배우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루터의 부재로 중단되어 있었던 시편 강좌를 맡아서 많은 학생을 진리의 길로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다가 1523년에 이 교회의 담임 목사로 부임했으며,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비텐베르크에서 자신의 소임을 잘 감당했습니다.
특별히 부겐하겐은 루터의 고충을 들어주고 말씀으로 그를 위로해주던 사람이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이끌어가면서 많은 어려운 일을 감내해야만 했기에, 정신적인 압박과 고통으로 종종 힘겨워하곤 했습니다. 그때 부겐하겐은 그러한 루터의 무거운 짐을 함께 나누어 져주었습니다. 같이 대화를 나누면서 그가 그리스도를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또한 많은 사람이 루터와 폰 보라의 결혼을 많은 나이 차이 때문에 반대할 때, 부겐하겐은 두 사람의 결혼을 지지하며 주례를 맡아주기도 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자녀가 태어나자 세례를 주고, 루터가 먼저 소천하자 장례 절차를 맡아 진행해주고 유족을 끝까지 보살펴준 사람도 역시 그였습니다.
성 마리엔 교회에 도착해서 저는 다시 한 번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교회 예배당도 멜란히톤 하우스처럼 보수공사 중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도 그냥 발걸음을 돌려야 하나 했는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다행히도 부분적으로 공사를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관람료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교회 예배당은 13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기도 합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뒤로 이 교회는 ‘종교개혁 모교회(母敎會)’라고 불릴 정도로, 루터의 설교와 가르침을 정기적으로 들을 수 있었던 교회입니다. 또한 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가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의 자녀 모두가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멜란히톤과 조금 뒤에 소개할 루카스 크라나흐의 가족도 이 교회에 출석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가 만약 종교개혁 시대에 이곳을 찾아왔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루터와 그의 동역자를 모두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 안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그림 4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종교개혁 제단화’라고 불리는 이 커다란 그림은 루터의 친구이자 당대에 가장 명성을 떨친 화가였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그린 그림입니다. 어떤 책에서는 크라나흐의 둘째 아들도 아버지처럼 화가가 되었는데, 그가 아버지를 도우며 이 그림을 함께 그렸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을 크라나흐 부자(父子)의 작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저는 위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설교단이 당연히 루터가 올라가 설교한 설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글을 쓰면서 확인해보니, 루터가 사용한 설교단은 이곳이 아닌 루터 하우스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루터가 사용한 설교단은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던 루터의 모습을 그려보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진리를 확실하게 깨닫고 붙든 심령에서 솟아나는 확신 가득한 루터의 목소리가 예배당 곳곳을 울리며 퍼져나가면서 어둠 속에 잠자던 영혼들을 흔들어 깨웠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강론이 오직 라틴어로만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니 설교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는 서민들은 설교를 듣고 진리를 배우러 오기보다는, 의식에 참여하려는 목적으로 교회를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서민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냥 넋 놓고 있다가 마지막에 사제가 주는 빵 한 조각을 받아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 의식적인 행위가 자신을 재앙에서 지키고 건져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니 중세 교회의 신앙은 복음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신앙이 아닌 지극히 미신적인 신앙으로 치우치게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523년에 루터가 독일어로 복음을 풀어 강론하기 시작함으로써 사람들은 비로소 진리 안에서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섭리가 이 교회 안에서 펼쳐지던 일을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예배당을 나서려고 할 때, 문득 아주 익숙한 글자가 적힌 종이가 제 눈에 띄었습니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 종이는 한국어로 발행한 교회 안내지였습니다. 예배당 한쪽에 여러 나라의 언어로 작성한 안내서를 가져다 놓고 사람들이 편리하게 관람할 수 있게 돕고 있었습니다.
한동안 꼬부랑거리는 알파벳만 보다가 오랜만에 한글을 보니, 참 반갑고 시야가 탁 트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기 옆에 북한의 인공기가 함께 그려져 있어서 참 안타까웠습니다. 어서 빨리 통일이 되어, 북한에 사는 우리 동포들도 마음껏 복음을 듣고 주님을 섬길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 마리엔 교회 가까운 곳에는 특이한 황토색으로 단장한 건물이 하나 자리 잡고 있습니다. 바로 이곳이 앞서 말씀드렸던 루카스 크라나흐가 살던 집입니다. 루카스 크라나흐는 1505년에 작센의 선제후에게 궁정화가로 초청을 받아 비텐베르크에 오게 됩니다.
물론, 크라나흐를 단순하게 화가라는 시각으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는 약국과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고, 나중에는 비텐베르크 시장까지 역임한 참으로 다재다능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운영하는 출판사를 통해 수없이 많은 종교개혁 양서(良書)가 인쇄되었고, 또 그가 운영하는 서점을 통해 그 책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크라나흐가 별 볼 일 없는 2류 화가였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벌인 유명한 화가였으며 미술사에서도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크라나흐는 성경의 가르침을 주제로 삼아 그림을 많이 그렸으며, 무엇보다도 루터의 초상을 연령대별로 많이 그려 놓았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가 루터의 생김새를 떠올리는데 아무런 어려움을 겪지 않는 것입니다.
크라나흐 하우스(박물관) 안에는 크라나흐의 다재다능함에 걸맞은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박물관 2층은 많은 사람이 인쇄와 관련된 여러 물건을 관람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크라나흐와 관련된 유물을 전시해놓은 1층은 입장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1층에는 입장료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진입해 사진을 찍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내 직원이 저에게 다가와 이곳은 입장료가 있는 곳이라고 말해주면서 저를 돌아서게 했습니다.
크라나흐가 얼마나 루터와 그의 종교개혁 사상을 좋아하고 지지하며 후원했는지는, 그의 입이 아닌 그의 친구들의 입을 통해서 더욱 잘 알 수 있습니다.
「자네는 늘 비텐베르크 수도사(마르틴 루터) 자랑을 그치지 않네그려.」
폰 보라, 멜란히톤, 부겐하겐, 그리고 크라나흐까지… 루터 옆에는 복음을 위해 마음과 힘을 모았던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 누구는 당찼고, 누구는 세심했으며, 누구는 온화했고, 또 누구는 다재다능했습니다. 오늘 언급된 이들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만 자기 이름을 남긴 이들까지 고려한다면, 그 다양함은 사람이 이루 다 헤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특정한 사람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지 않으십니다. 복음과 진리 안에서 셀 수 없이 다양한 배경을 지닌 이들이 한마음과 한뜻으로 함께 주님의 일을 감당하도록 섭리하십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지닌 특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일에 유익하고 적합하게 다듬어져서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전체주의적으로 모든 일에 사사건건 개입하고 통제하려는 형태의 목회가 이루어지는 교회는 절대로 올바른 교회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교회야말로 마귀의 속임수에 가장 보기 좋게 넘어가 있는 교회입니다. 목회자는 성도가 자원하여 교회를 섬기며 거룩함과 겸손함으로 서로 조화를 이루게끔 교회를 섬기고 돌보며 모든 일에 모범을 보여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올바른 교회는 목회자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위해 서로를 돌아보면서 합력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교회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일을 감당할 때, 주님께서는 그 모든 일에 은혜와 평강을 넘치도록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 저 멀리 보이는 궁성 교회(Schlosskirche)의 모습
다음 편에는 비텐베르크에서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사건이 벌어진 장소인 궁성교회로 가보겠습니다.
참고한 도서들
1. 박양규, 『유럽비전트립1』, 두란노, 2011
2. 롤라드 베인톤, 『마틴 루터의 생애』, 이종태 역, 생명의말씀사, 1990
3. 이은선, 『종교개혁자들 이야기』, 도서출판 지민, 2013
4. 라은성, 『이것이 교회사다: 진리의 재발견』, 페텔, 2013
5. 권영진, 『엘베 강변 하얀 언덕 위의 친구들』, 예영커뮤니케이션, 2014
6. 파울 슈레켄바흐 · 프란츠 노이베르트, 『마르틴 루터』, 남정우 옮김, 예영커뮤니케이션, 2003
7. 파이트 야코부스 디터리히,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이미선 옮김, 홍성사, 2012
8. 우즐라 코흐, 『눈 속에 피는 장미』, 이은자 옮김, 솔라피데출판사, 2009
9. 존 딜렌버거 편집, 『루터 저작선』, 이형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5
10. 로버트 갓프리, 『종교개혁과 개혁신앙』, 박응규 옮김, 크리스챤출판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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