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직업 진단1」 직업 전선(戰線)에서 분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김재호
1. 그리스도인과 세상
그리스도인의 시민권은 이 땅이 아닌 영원한 본향, 즉 천국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잠시 머무는 거류민이요 외국인과도 같으므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이 세상 풍조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히 11:9, 10; 약 1:27). 우리는 세상 사람과 어울려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멸망할 이 세상 사람들과는 소속이 다른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내야 한다. 따라서 진정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을 근본적으로 거스르고 역행하면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을 절대로 피할 수 없다. 그러니 세상은 세상대로 그런 우리를 미워하고 반대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는 만물의 찌꺼기처럼 천시하며 멸시하기도 한다(고전 4:13).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어려움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잘 감내하려고 해야 한다(벧전 4:12, 13). 만약 그 어려움을 피해가려고 얕은꾀를 내면, 그 순간 우리는 세상 사람과 별다를 것이 없는, 머리카락 잘린 삼손처럼 되고 만다. 우리는 잠깐의 배고픔을 면하려고 죽 한 그릇과 영원한 천국을 맞바꾸는 일에 ‘주의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히 12:16).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사사건건 부딪치고 매일 서로 얼굴을 붉히면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독불장군처럼 막무가내로 좌충우돌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뜻인가? 만약 누군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다음의 성경 구절이 대체 왜 기록되어 있는지 내게 답을 해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에게도 인정을 받는다.” (롬 14:18, 바른 성경)
“모든 이와 더불어 화평과 거룩함을 추구하여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히 12:14, 바른 성경)
“보아라,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해져라.” (마 10:16, 바른 성경)
많은 이들이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반정립(Anti-thesis) 관계를 너무도 크게 오해하곤 한다.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이 서로 반목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지, 그 죄를 억누르시고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붙드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반적인 섭리’ 때문이 아니다.
거룩한 하나님 나라는 죄가 번성하지 않게 억제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반 은총과 조금도 불화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까지 그런대로 세상을 존속하게 하는 선한 역할을 감당하는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가치 및 질서’와 신앙은 조금도 충돌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함 속에 그러한 것들을 존중하고 장려하며, 그러한 것들에 대항하는 일을 가장 열렬히 저주한다(딤전 5:8; 롬 13:1~7).
우리 그리스도인은 영원한 나라만을 마음에 품고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세상의 불신앙과 격렬하게 싸워야 한다. 적당히 물러나거나 봐주고 타협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세상의 죄를 억제하면서 주님 오시기까지 세상이 존속하게 하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반적인 섭리와 다투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그것을 옹호하고 장려해야 하며, 그리함으로써 ‘쓸데없이’ 세상 사람들에게 욕을 먹거나, 마땅히 잘못을 빌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자기 행동을 합리화하는 일을 주의하고 피해야 한다.
2. 교회와 정부
이러한 하나님의 선한 통치를 대표하는 두 기관이 바로 교회와 정부이다. 교회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멀리하려는 이 세상 사람들의 죄를 책망하면서,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생명의 복음을 선포하는 영적인 기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복음 사역을 통해 사람을 구원하시지, 정부의 법 집행과 치안유지를 통해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신다.
반면, 정부는 근본적으로 이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지 않게 최소한의 선한 사회 질서를 확립하고 유지∙보수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하나님께서는 정부를 통해 타락한 사람이 짐승보다도 못하게 되는 일을 막아주시지만, 그들의 심령을 다시 태어나게 하지는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의 죄(동성애, 간음, 이혼, 우상숭배 등)를 책망하면서 회개하지 않는 이들에게 마땅히 지옥 형벌을 선포해야 한다. 이들에게 그런 사실을 알려줄 수 있는 기관은 정부가 아니다.
그러므로 만약 정부에서 이러한 일을 하지 못하게 막는 법과 제도를 만든다면, 그것은 명백한 월권이며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자초하는 심히 어리석은 짓이다. 교회는 나라가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 복음 사역을 훼방하는 일에 해당하는 저주와 경고를 엄중하게 선포하고 책망하며 기도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반대로 교회가 이념∙정치 집단화되어 복음과 아무 상관 없는 문제를 마치 교회의 소명인 양 천명하면서, 세상 문제에 끼어들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행태(사회 복음, 해방 신학, 민중 신학 등) 역시도 하나님의 통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다. 정부는 교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하여 멋대로 그런 일을 하려고 할 때, 세상의 여타 정치 집단과 동일하게 취급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과감하게 공권력을 투입해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사회 질서를 멋대로 교란한 응분의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그런 교회는 복음을 내다 버리고 스스로 교회이기를 포기한, 참으로 어리석고 한심한 정치 집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와 정부가 자기 본분이 무엇인지 알고 그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서로에게 무한히 유익하며 충돌하거나 싸울 일이 없다. 짐승만도 못한 이들을 벌주고 사회에서 격리하는 정부가 없는 무법천지 사회에서, 교회가 어찌 자기 사역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목사님께서 성경 좀 보시려고만 하면 집에 도둑 들고, 성도는 납치되어 협박당하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된다면 어찌 교회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겠는가? 최소한 맘 놓고 성경을 연구하고 기도는 할 수 있어야 교회도 온전하게 세워지든지 할 게 아니겠는가? 이처럼 복음 사역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기초적인 사회 안정이 꼭 필요하기에, 교회는 그러한 정부 본연의 일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중하면서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
반대로, 교회가 없다면 정부가 과연 자기 일을 온전히 감당해갈 수 있겠는가? 아무리 잡아 가두고 벌을 준다고 해도, 타락한 심령에서 말미암는 죄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런 악독한 죄인을 거듭나게 하여서, 죄에서 스스로 떠나게 하는 일을 감당해주는 기관이 바로 교회이다. 백범 김구가 할 일이 없어서, 교회 하나가 경찰서 100개보다 낫다고 말했겠는가?
이처럼 정부는 교회의 복음 선포와 기도라는 지원이 없으면 건전한 사회질서를 유지∙보수하는 일을 제대로 감당할 수 없다. 힘에 부쳐 겨우 명맥만 유지하기에도 급급하게 된다. 그러므로 양 기관은 하나님의 전능하신 섭리 아래 서로에게 베푸신 은혜와 맡은 역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서로의 역할을 존중하고 장려하면서 함부로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함으로써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피차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소명의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나, 둘 다 똑같이 귀중하고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는 데 선하게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중세 시대와 종교개혁
그러나 교회가 실질적으로 정부의 기능까지 장악했던 중세 시대에는, 교회와 정부가 은혜 안에서 서로 조화를 이루고 협력하는 성경적인 원리가 작동하는 일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세속 군주는 사사건건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교황의 정치적인 간섭을 매우 못마땅해 했고, 교황도 교황대로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세속 군주들을 견제하고 위협하는 일을 한시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복음을 저버린 교회가 세상 권력을 탐함으로써, 둘 사이의 관계가 조화와 협력 관계가 아니라 불화와 경쟁 관계로 뒤틀려버리고 만 것이다. 따라서 변질된 교회의 권세가 세속 권세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자기 종으로 삼든지, 반대로 세속 권세가 교회의 권세를 실질적으로 무력화하고 자기 얼굴마담으로 삼든지 해야만 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서로가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하므로, 상대방의 본질을 일단 깎아내리고 폄하하고 보는 악에 빠져들기 매우 쉬웠다. 교회는 그런 헛된 경쟁에서 자기 정당성과 우월성을 확립하기 위해 영적인 일과 육적인 일을 완전히 분리하고서, 육의 영역에 속한 자연적인 일을 본질적으로 더럽고 천하게 여기며 억압하는 일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려웠다.
반대로 이 세상은 세상대로 교회의 온갖 비합리적이고 부당하며 실로 뜬구름만 잡는 것 같은 하나 마나 한 소리와 처사에 질려, 실용주의적이고 무신론적인 자율적 사고의 달콤함 속으로 빠져들기가 무척 쉬웠다. 이처럼 중세 사회는 교회의 실질적인 지배 아래서 모든 것이 영적이고 거룩하게 돌아가는 듯했으나, 실제로는 온갖 억압과 천시 그리고 반항과 무시로 점철된 사회였다. 그리고 그러한 중세의 부조리함에 모두가 염증을 느끼고 있을 즈음, 하나님께서는 종교개혁의 밝은 빛을 이 세상에 비추어주셨다.
「루터는 그의 소명론을 통하여 중세의 성∙속개념을 무너뜨리면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소명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소명은 거룩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왕이 하는 일이든, 농부가 하는 일이든, 성직자가 하는 일이든, 젖 짜는 소녀가 하는 일이든, 가정주부가 하는 일이든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일이다.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것을 최선을 다해 수행함으로써 관계 속에 서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계속해서 수행하는 셈이다.」1
직업적 소명이나 목회적 소명이나 똑같이 하나님께 헌신하므로 똑같이 귀중하고 영광스럽다는 이 선언은, 잘못된 이원론에 깊이 빠져든 타락한 로마 교회를 향해 날린 진리의 포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일을 시작으로, 이 세상의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영역에 속한 것들을 부당하게 옥죄던 거짓의 올무를 하나씩 풀어주기 시작하셨다.
루터가 든 진리의 횃불이 밝게 타오르기 시작한 뒤로 언어, 미술, 음악, 경제, 정치, 과학 등의 학문이 로마 교회의 부당한 간섭과 억압에서 꾸준히 벗어나 참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사람들은 더는 어떤 문헌에서 말하는 바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로마 교황청으로 달려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냥 ‘직접’ 그 글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관찰’과 ‘종합’이라는 ‘자연적인 사고’에 기초한 의미 파악 기능이 이원론의 사슬에서 풀려나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사회는 깊은 잠에서 기지개를 켜면서 깨어나 점점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최소한의’ 합리성을 서서히 되찾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를 주장하는 인문주의자들의 ‘자율적 사고’와도 똑같은 전투를 벌였다.
「에라스뮈스 :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보다 하와를 지나치게 사랑한 나머지 타락하게 되어 선을 향한 의지가 약해졌을 뿐이고, 의지의 원천인 이성을 잃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의지를 향상시킬 수 없고 오히려 죄를 짓게 되는 상태가 되었다. 그런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의지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져서 인간은 자유의지로 선을 행할 수 있다.
마르틴 루터: 하나님의 구원과 저주에 관련해서 인간은 아무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인간은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하나님의 종이 될 수도 있고 사탄의 의지에 따라 사탄의 노예가 될 수 있다.2
마르틴 루터는 ‘저 늙은 마녀, 이성 부인(Lady Reason)’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했는데, 그의 저서들을 두루 읽어본 분들이라면 이성이 늙은 마녀라는 점을 그가 얼마나 일관되게 강조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3」
이처럼 종교개혁자들은 로마 교의 부당한 억압과도 맞서 싸웠지만, 동시에 ‘하나님 없이 스스로’를 외치는 이 세상의 반역 및 도전과도 맹렬하게 맞붙어 싸웠다. 그리고 그러한 싸움은 모든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원리가 진정 확실성을 담보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전제’해야 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하는 현대 전제주의의 발흥(發興)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원리의 근거를 ‘자연 그 자체’에 두려는 세상 사람의 반역과 불신앙으로부터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지켜내려는 믿음의 싸움이다. 결코 이성을 부당하게 억압하고 간섭하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성이 폭주하여 본래의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도록 보호막을 쳐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죄에 물든 왜곡된 시각으로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종합하며 이해하는 잘못으로부터 사람을 보호하고 건져내려는 선한 투쟁이다.
실제로 이교(異敎) 철학은 기독교 역사 내내 뿌리 깊은 반감의 대상이 되어왔다. 왜냐하면 이교 철학의 핵심 교리가 바로 ‘하나님 없이 스스로, 혹은 하나님 없이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만약 육적인 것을 원초적으로 무시하는 이원론이 참된 학문을 그토록 억압하고 왜곡했다면, 영적인 것을 원초적으로 무시하는 자율적 인문학이야말로 얼마나 더 참된 학문을 억압하고 왜곡하겠는가? 저들이 말하는 그 자율적 학문이란 결국 이원론의 또 다른 얼굴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폭거(暴擧)와 맞붙어 싸워 참된 학문의 해방과 부흥을 가져와야 한다. 종교개혁자들이 타락한 로마 교회를 상대로 그러한 일을 이루어냈다면, 우리는 교만한 인본주의 철학자를 상대로 똑같은 진리의 싸움을 벌여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이 세상과 자연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면서 나름의 선한 역할을 감당하는 것은 그들 스스로 그러한 능력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인애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 죄와 불경건함에도 여전히 세상에 은혜 주시기를 좋게 여기시기 때문이다(마 5:45; 행 14:17).
4. 실제적 적용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소명을 말하기에 앞서, 성도와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와 소명부터 분명하게 말해야만 한다.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그 불의를 길이 참으시는 중에 교회를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먼저 제대로 깨닫고 이해해야 한다.
아직 그런 사실을 전 인격적으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직업이니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 운운하기 전에 먼저 진실하게 회개하고 올바른 교회에 출석하는 일부터 해야 한다. 이 둘의 순서를 거꾸로 가져가면 교회의 타락과 세속화만 부추길 뿐이다. 그리고 그 결국은 중세 시대처럼 둘 다 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거듭났다는 건전한 확증을 얻기까지는, 성경과 교리를 올바르게 배우고 은혜를 간구하는 일에 끈질기게 매달려야 한다(눅 11:9~13). 그리하여 하나님께 “앞으로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않고 ‘이스라엘(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이라고 부르겠다.”라는 확답을 듣기까지, 은혜의 보좌 앞으로 너무 뻔뻔하다 싶을 정도로 자주 나아가야 한다(창 35:10; 약 1:5).
그리하여 은혜 안에서 진정 참된 자유와 평안을 얻었다면, 그때부터는 그 자유를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까를 놓고 또 한 번 때와 장소를 가리지 말고 주님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서 성경의 각 사건을 구속사적으로 탐구하고, 거기 깔린 기본 전제를 오늘의 내 삶에 그대로 가져와서 적용하며 종합하는 일을 조금씩 병행해야 한다. 그리하여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경적인 삶의 토대를 하나씩 갖추어가야 한다.
예를 들면, 현대 실험과학이 충분히 타당하다는 근거를 프랜시스 베이컨이나 윌리엄 오컴 또는 칸트 등의 철학에서 찾아내지 말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이 세상 환경을 일정하게 유지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노아 언약(창 8:21, 22)’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현대 실험과학이 내놓는 결과물들을 노아 언약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건전하게 수용하며 살아갈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나 노아 언약은, 지금의 자연 환경이 처음 그대로가 아니라 이미 엄청난 격변을 겪었으며 예수님의 재림 때 상상을 초월하는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러므로 오직 지금의 안정된 환경에만 토대를 두고 모든 자연 현상을 포괄하려는 현대 실험과학에는 명백한 한계(기원, 연대측정의 문제 등)가 있다는 사실 역시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런 헛소리를 걸러낼 토대를 노아 언약이 아니라, 니체나 동양 철학의 엉뚱한 소리들에서 얻어내는 것은 믿음을 저버리는 행동이다. 우리는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라는 단 하나의 기독교 세계관 전제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법을 배워가야 한다.
이러한 기독교 세계관 사고방식이 점점 익숙해지면, 조금씩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봐야 한다. 물론 이 부분은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예정하신 섭리와 은사가 매우 다양하므로, 일괄적으로 이렇다저렇다 하기가 어렵다.
누구는 전업주부로, 누구는 학생으로, 누구는 교사로, 누구는 노동자로, 누구는 기술자로, 누구는 회사원으로, 누구는 상인으로, 누구는 군인과 경찰로, 누구는 법조인으로, 누구는 학자로, 누구는 의사로, 누구는 예술가로, 누구는 은행가로, 누구는 정치인으로 ‘하나님께서 좋게 여기시는 대로’ 부르심을 받는다.
물론 이 모든 일에는 귀천이 없다.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귀하고 소중한 일이다. 오히려 우리 눈에 천해 보이는 일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이 사회의 가장 귀한 역할을 감당하곤 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어떤 일이든 소중하게 여기면서, 맡겨주신 어떤 일이든지 항상 ‘성실하게 감당’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
우리는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만을 바라보면서 좋은 때든지 나쁜 때든지, 그 일이 내 맘에 들든지 안 들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오늘의 일에 항상 성실해야 한다.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아야 한다(엡 6:6, 7). 그리고 그러한 우리의 일이 목회자로 부르심을 받은 이가 ‘평안히’ 자기 일을 감당해가는 밑거름이 되기를 소망하며 기도해야 한다(딤전 2:2, 3).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가 부르심을 받은 분야를 힘써 연구하여 실력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최고가 되고 출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께서 교회가 평안히 자기 일을 하도록 내게 맡겨주신 이 귀중한 일을 어떻게 하면 더 잘 감당할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그리해야 한다. 열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종처럼 받은 것을 최대한 계발하여야 하며, 겁을 내면서 땅에 몰래 감추어 두어서는 안 된다(마 25:14~30).
그러나 한편으로 이러한 일에 주의하며 조심하는 일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세상은 어디까지나 멸망할 세상이지, 주님께서 성도에게 약속해주신 약속의 땅이 아니다. 악의 세력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기까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계속 커져간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는 성도가 주어진 범위 안에서 상당히 선전(善戰)할 수는 있으나, 전체적인 측면에서는 근근이 버티는 형국을 벗어나기가 어렵다(눅 16:8).
실제로 이 세상에서는 어느 영역이든지 최고의 자리로 가면 갈수록, 죄악의 강력한 저항과 상상을 초월하는 술책이 난무하게끔 되어있다. 이 세상에서 손에 때 안 묻히고 재벌의 자리에 오를 수는 없다. 거짓말하는 법을 모르면 정치는 아예 입문조차 어렵다. 군인으로서 별을 달고 회사에서 임원 자리에 앉아보려면 접대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는 최고의 자리로 나가면 나갈수록,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영합하라고 요구받는 일을 피할 수 없다. 사탄은 늘 그런 식의 미끼를 던져 수많은 이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딤전 6:10). 심지어 예수님께도 그러한 낚싯줄을 던졌는데, 벌레 같은 우리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마 4:5~10)?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최대 범위까지 나아가기보다는, 도리어 두어 단계 정도 눈을 낮추고 매사 주의하면서 살아가는 편이 우리 영혼에 훨씬 더 좋다. 부자도 천국에 갈 수는 있다. 다만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기가 더 쉬울 정도로 어려울 뿐이다(마 19:23~26). 그러므로 우리는 좀 더 편하게 경건의 일(성경 읽기, 교리공부, 기도, 교회 봉사 등)에 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길로 인생의 진로를 정하는 편이 여러 면에서 좋고 선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문 좋고 학벌 좋은 이를 그리 많이 택하지 않으셨음을 늘 기억하고 조심해야 한다(고전 1:26~29).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의 보잘것없고 투박한 손길을 가장 귀하게 보시고, 그것을 통해 대대로 은혜의 영광스러움을 세상에 증거하시기를 훨씬 더 기뻐하셨다(막 12:41~44; 마 26:6~13; 마 4:18~22).
따라서 교회도 이러한 하나님의 전체 계획을 이해하는 가운데 일반적인 섭리로부터 오는 유익을 건전하게 장려하고 활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에 의존하거나 해당 일에 직접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바울이 머리가 별로 좋지 않아서 사람의 지혜 있는 말로 사람을 설득하는 대신, 선포의 미련한 것으로써 사역을 감당했겠는가(고전 2:4)? 심지어 바울은 그 모든 것을 아예 배설물처럼 여기며 살았다(빌 3:8).
그러면서도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대하는 지혜로움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테네 사람들 앞에서는 변증에서 출발하여 십자가 소식을 선포하는, 일반 섭리와 특별 섭리가 조화를 이룬 방식의 설교를 하기도 했다(고전 9:19~23; 행 17:22~31).
이처럼 교회는 철학에서 자기 사역의 근거와 합리성을 찾아내고 의지하려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그런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교회는 항상 선포의 미련한 것, 즉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여 그 내용을 풀어 가르치는 것으로써 자기 사역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런 일을 어리석게 여기며 세상 지혜에 터를 잡은 잘못된 교회들이 있다. 특히 자유주의에 물든 교회가 그렇다. 그들은 매우 아름다운 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직업과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소명,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와 정의를 부르짖지만, 그런 말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오히려 참된 하나님의 사역을 방해할 뿐이다.
우리는 그러한 듣기 좋은 아름다운 말에 귀를 틀어막고 돌아서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인 영역에 속한 일에 헌신하는 것은 순전히 장차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고 소망하기 때문이지, 이 땅에 뿌리내리고 세상 사람들의 인기와 환호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다. 즉 교회가 자기 사역을 평안하게 감당하도록 도우려는 것이지,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하게 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부르심에 충실하면 충실할수록, 해당 영역의 주류에서 밀려나고 좌천되며 모함과 조롱과 멸시와 따돌림을 점점 심하게 받을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런 일이 다가올 때, 모든 것을 섭리하며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매사에 인내하면서 그 모든 악을 악으로 갚지 말아야 한다(롬 12:19).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진실하게 기도해주는 긍휼과 인애가 풍성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 5:44).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선지자의 사역에 함께한 자의 영광을 누리게 해주실 것이다(마 10:41, 42).
5. 마무리하며
그리스도인은 장차 임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법에 따라 이 세상을 살아야 한다. 그 법이 세상과 불화하면 우리는 진리의 검을 들고 전선에 나가 용감히 싸워야 하며, 그 법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게 붙들어준다면 쓰러져가는 건물의 마지막 버팀목처럼 꿋꿋이 버텨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은 참으로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마 5:13~16). 우리가 그와 같은 일을 ‘이 세상 속에서’ 잘 감당하면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복음 사역이 더욱 원활하고 평안하게 이루어지도록 섭리해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받은 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일에 더욱 성실하도록 하자(고전 7:20~23).
각주
1 이은선, 「루터, 칼빈, 그리고 청교도의 소명 사상」, 대신대학 논문집 12집(1992) 신학편, p. 402.
2 김세민, 『교리가 이끄는 삶』, 밴드 오브 퓨리탄스, 2012, p. 131에서 재인용.
3 마틴 로이드 존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What is an Evangelical?)』, 이길상 옮김, 복 있는 사람, 2009, p. 69.
「직업 진단」 기획 기사 시리즈
「직업 진단1」 직업 전선(戰線)에서 분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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