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헷숀의 『당신의 옷자락으로 나를 덮으소서』
(원제: Our Nearest Kinsman)
이지현
Ⅰ. 저자 소개
– 로이 헷숀(Roy Hession, 1908~1992)은 전후(戰後)에 활동했던 영국의 복음 전도자이다. 동아프리카 선교회 지도자였던 조 처치(Joe Church)와 함께 세계를 돌며 많은 교회와 집회를 섬겼다. 또한, 영국 전역을 다니며 40년 이상을 가정 사역에 힘을 쏟았다. 그의 저서는 80여 개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히고 있는데, 그중 『갈보리 언덕(The Calvary Road)』과 『예수님을 바라보라(We would see Jesus)』가 대표적이다.
Ⅱ. 도서 요약
1. 개요
– 이 책은 룻기를 강해 한 책으로서, 총 7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헷숀은 이 책을 통해서 ‘아주 특별한 구속과 부흥’을 역설한다. 나오미와 룻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죄를 지어 비참해진 사람이 어떻게 ‘기업 무를 자’를 통하여 사죄와 회복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지를 우리에게 말해준다.
2. 내용 요약
(1) 룻기에 나타난 구속과 부흥(들머리)
– 룻기는 ‘구속’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서사시(敍事詩)로서, 모세의 율법 가운데 두 가지 조항을 따라 이야기가 전개된다.
첫째, 가난한 사람이 자기 기업을 팔았을 때는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다시 물어줄 수 있다(레 25:23~25). 이것은 토지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해당되며, 이러한 자격을 가진 친족을 ‘기업 무를 자(히브리어로 ‘고엘’)’라고 부른다. 둘째, 어떤 남자가 자식 없이 죽었을 때는 그의 형제가 미망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손을 낳아 죽은 형제의 가계가 계속 이어지게 해야 한다(신 25:5~10).
이 율법은 룻기에서 매우 아름답게 적용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속에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최상의 은혜인 ‘구속’을 명확히 보게 된다. 이러한 ‘구속’에는 죄를 용서하시는 것뿐만 아니라, 그 죄로 인한 모든 손실을 메워주시며 어려운 상황을 회복해주시는 것도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실패한 자를 건져주시는 ‘구속자’가 되어주셔서, 회개한 죄인이 하나님을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게 해주신다.
(2) 구약의 ‘탕녀’ 나오미(룻기 1장)
– 신약의 ‘탕자’와 비슷한 인물인 나오미를 볼 수 있다. 나오미의 가족과 살던 곳의 이름을 잘 살펴보면, 나오미의 가정은 본래 올바른 신앙 위에 세워진 행복한 가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엘리멜렉(하나님은 왕이시다)과 나오미(희락)는 유다 베들레헴(떡집)에 살았다. 그들에게는 말론(노래)과 기룐(완전하다)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을 때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러다 그 땅에 기근이 찾아왔는데,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이와 같이, 성경 말씀에 주의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면 ‘영혼의 기근’을 겪게 된다. 이때,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회개하지 않고 다른 길을 찾았다. 이웃 나라 모압의 풍족함을 보고 번영을 기대하면서 그곳으로 건너갔다. 이처럼 ‘영적 기근’이 닥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하기보다 ‘세상의 들판’을 바라보며 그곳에 마음을 둘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오미를 긍휼히 여기셔서, 다시 돌아오게 역사하셨다. 먼저 나오미의 남편과 두 아들을 차례로 데려가심으로써, 모압에서 지내는 시간이 쓰라린 나날들이 되게 하셨다. 여기서, 나오미가 겪은 손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엘리멜렉이 죽은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왕으로서 다스리시기를 멈추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다음 말론과 기룐이 죽은 것은, 우리 삶에서 기쁜 노래와 온전한 만족감이 사라지게 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배역한 백성을 돌이키게 하시기 위해 흔히 ‘손실’이라는 교훈을 주신다. 하지만 이 손실을 절대로 ‘죄로 인한 형벌’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러기에는 그 형량이 너무 가볍다. 진정한 ‘형벌’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받으신 십자가의 형벌뿐이다. 그렇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닥칠 때, 우리는 “이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무엇을 가르치시려고 하시는 걸까?”라고 질문해야 한다.
그렇게 질문하다 보면, 하나님 앞에서 ‘회복되어야’ 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던 하나님의 형상이 타락으로 얼마나 많이 파괴되었는지를 쉽게 잊어버리고, 어느새 우리의 자아(自我)가 많은 부분을 다스리게 허용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시련과 손실을 보내셔서, 우리가 잘못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며 굴복하게 하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나오미가 고향 땅에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 즉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셔서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하셨다. 빈곤과 불행 가운데 있던 나오미는 그 소식을 듣고 다시 돌아갈 마음을 품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나오미의 모습은 신약의 ‘탕자’와 비슷하다.
이런 일을 거치면서 나오미는 베들레헴을 떠났던 잘못을 참으로 뉘우쳤다.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룻 1:21).”이라는 나오미의 말에 그러한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나오미는 자신이 하나님의 연단과 교훈을 받고 있다고 겸손하게 인정한다. 이처럼 회개는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이 옳으시며 우리가 틀렸다고 시인하면서, 겸손히 하나님의 연단을 받아들이며 불평하지 않는 것이다.
모압으로 떠날 때, 나오미는 가족과 함께였고 재물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베들레헴으로 돌아올 때는 이방(異邦) 며느리인 룻 이외에 아무도 없었으며 둘 다 빈털터리였다. 게다가 베들레헴에 있는 남편의 땅은 방치되었기에 황폐했다. 게다가 그 땅은 이제 주인 없는 땅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이는 주인 노릇을 해야 할 남편과 두 아들이 다 죽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나오미처럼 빈털터리로 와서 고백하게 된다.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나로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 이처럼 우리에게는 잃어버린 기업을 되찾을 만한 능력이 전혀 없다.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죄로 인해 겪게 된 손실을 조금도 만회할 수 없다. 절대로 우리 안에서 손실을 회복할 만한 무엇을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낙심하지 말라. 나오미와 룻은 빈손으로 돌아왔지만 영원히 빈털터리로 남아 있지 않았다. 이처럼 우리도 가진 것 없는 죄인인 상태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는 수혜자가 될 수 있다.
탕자와 나오미 사이에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다. 탕자는 혼자 돌아온 반면, 나오미는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하나님에게서 떠날 때, 사람들은 보통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떠난다. 그리고 그들이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올 때가 이르면, 그들은 자기와 똑같이 회개하는 데 이르는 사람들과 함께 돌아온다. 룻은 돌이켜 회개하는 나오미에게서 선한 영향을 받아 회심한 성도로서 나오미와 동행했던 것이다.
자기 고향을 버리고 나오미를 따라나선 룻의 선택을 눈여겨보아야 한다. 어쩌면 룻과 같은 이방인의 눈에는 하나님은 그저 큰 곤경을 겪도록 허락한 신(神)으로만 보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모시기를 원했다. 아마도 룻은 하나님께 돌이켜 회개하고 평안을 되찾은 나오미의 모습을 통해, 당신을 떠나 고생하는 죄인들이 돌아오기를 참으로 바라고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긍휼 하심을 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참된 회개는 사람들이 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해 알게 하여서, 그들이 하나님을 영접할 수 있게 이끌어준다.
(3) 가까운 친척 보아스(룻기 2장 1, 20절)
– 보아스는 여러 면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豫表) 역할을 한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서 베들레헴에서 부유한 사람이었다. 앞에서 살펴봤듯이, 모세 율법에 따르면 자기 형제의 잃어버린 기업을 물어주거나 그의 후사를 잇게 해줄 책임이 가까운 친족에게 있었다. 그리고 보아스는 나오미의 가까운 친족이었으니, 그녀의 기업을 물어줄 자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기업 무를 자가 되려면,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기업 무를 자는 가족의 일원, 즉 가까운 친척이어야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기 위해 그들의 ‘가까운 친척’이 되셨다. 영원한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요 1:14).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모든 상실과 시험을 다 겪으셨다. 또한 우리의 죄책과 형벌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다 받아주셨다. 그러므로 모든 죄인들은 예수님을 얼마든지 ‘나의’ 기업 무를 자로 모실 수 있게 되었다.
둘째, 기업을 물어줄 만한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기업을 무를 권리와 그 기업을 무를 능력은 별개의 문제이다. 그러나 보아스는 그 권리뿐만 아니라 능력도 갖추고 있었다. 이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시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결과를 선(善)으로 바꾸실 수 있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할 때가 많다. 그로 인해 깊은 회의에 빠지며 믿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옛 이스라엘 백성도 그러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때문에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히, 고엘)가 되셔서 그들을 구속하실 것이다.”라고 여러 번 강조하셨다. 더 감사하고 놀라운 것은, 예루살렘이 폐허가 되기 전부터 이미 회복이 예언되었다는 점이다. 이스라엘이 죄를 짓기 전부터 은혜가 예비되어 있었다! 이처럼 우리에게도 은혜가 예비되어 있다. 이 은혜를 누리려면, 먼저 하나님께 회개하면서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해야 한다. 그러면 그 죄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용서되며, 그 죄로 인해 망가진 것들은 다 주님께서 책임져주신다. 주님의 능력은 그 모든 것을 다시 새롭게 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셋째, 기꺼이 기업을 무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 기업을 무를 자격이 있는 사람이 그 기업 물어주기를 싫어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보아스는 기꺼이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원했다. 거기에는 룻을 아내로 맞이해야 하는 책임도 있었지만, 보아스는 룻을 사랑했기에 기꺼이 그 책임을 감당하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기꺼이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주시며 우리 문제를 해결해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소유하기 원하신다. 우리가 죄로 인해 최악의 상황을 맞이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를 속량할 권리를 소유한 기업 무를 자로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그리고 우리의 구속자(Redeemer)가 되어주셔서 계속 우리를 죄에서 건져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 자체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 죄로 인해 일이 잘못되었을 때, 즉시 예수님께 가면 된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할 때, 우리는 단호히 죄를 거절하는 용기와 능력을 얻게 된다.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은, 빚을 져서 자기 땅을 팔거나 종으로 팔렸을 때 꼭 희년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기업 무를 자가 있고 그 기업을 무를 만한 여건이 되며 그가 그 기업을 물어주기를 원한다면, 즉시 그 땅과 몸을 속량 받을 수 있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다면 우리는 ‘천국’이라는 희년이 되기 훨씬 이전부터 구속의 은혜를 조금도 부족함 없이 누릴 수 있다!
(4)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 줍는 룻(룻기 2장)
– 일반적으로 룻과 같은 처지에 놓이면, 자기 백성과 전에 섬기던 신에게 돌아가서 새 남편을 만난다. 그러나 룻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룻에게 이 일은 일생일대의 중요한 선택이었다. 시어머니와 빈털터리로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언제 벗어날지 알 수 없는 가난 가운데, 생활 방식과 습관이 다른 낯선 백성들과 어울려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을 잘 알면서도 시어머니를 따라오기를 택한 룻의 선택은 모든 베들레헴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베들레헴 사람들은, 많은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그들에게 온 룻에게 마음이 끌렸다. 이 이방 소녀에 대한 소문은 보아스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보아스도, 룻과 만나기 전부터 룻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게 틀림 없다(룻 2:11~12). 그래서 룻이 자기 밭에 이르렀을 때, 보아스는 특별한 관심과 호의를 베풀었다. 보통 농부들은 이삭 줍는 사람들을 눈감아 주기는 하지만 환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보아스는 룻을 환영하면서,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했다. 그러고는 곡식 베는 자들이 길어온 물을 마시도록 허락했다.
게다가 소년들이 룻을 건드리거나 괴롭히지 못하게 지시해 두었음을 알려주어서 룻이 안심하고 이삭을 주울 수 있게 배려해주었다. 또한 룻이 곡식 베는 자들과 함께 점심을 먹도록 허용했으며 직접 볶은 곡식을 룻에게 건네주어 배불리 먹게 했고, 남은 음식을 시어머니에게 갖다 주게 했다. 나중에는 소년들에게 명하여, 룻이 곡식 단 사이에서도 이삭을 주울 수 있게 하고, 심지어는 룻을 위하여 아예 조금씩 곡식 단을 뽑아두게 했다.
룻은 이러한 보아스의 은혜에 완전히 압도되어, ‘땅에 엎드려 그에게 절하며’ 물었다. “나는 이방 여인이어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아보시나이까(룻 2:10)?” 보아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모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들렸느니라(룻 2:11).”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적용된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고개를 숙여 실패와 빈곤을 인정하며, 예수님만이 우리 같은 죄인에게 선한 일을 이루실 수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의뢰할 때, 하나님의 사랑과 도움이 아주 특별하고도 가슴 벅찬 방법으로 우리에게 다가옴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게 긍휼 베풀기를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해 탄식하며 정직하게 하나님께 나아오고, 예수님의 복음에 희망을 두는 것을 눈여겨보신다. 그리고 기꺼이 그런 우리를 도우려고 다가와 주신다.
보아스가 룻에게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에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룻 2:8)”라고 한 말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사역 외에 다른 것을 찾지 말라. 모든 게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금방 달라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안심하라. 그 ‘은혜의 밭’에 계속 머문다면, 반드시 우리의 짐은 벗겨지며 모든 것이 바른 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룻은 아직 이삭 줍는 가난하고 비천한 여인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그때 자기가 누구의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 사람이 앞으로 룻에게 얼마나 큰 일을 해 줄 사람인지 전혀 모른 채로 말이다.
(5) 보아스의 발치에 누운 룻(룻기 3장)
– 룻이 나오미에게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주웠다고 말했을 때, 나오미는 보아스가 죽은 남편의 가까운 친족이며 그들의 기업을 무를 자 중 한 사람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나오미는 이때부터 그 권리를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오미는 룻에게 기업 무를 자에 대한 규례를 보아스에게 시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계획을 말했다. 이것은 땅만 속량하는 게 아니라, 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일도 포함되어 있기에 아주 민감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오미는 보아스와 룻 사이에 사랑이 싹트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룻에게 행할 바를 지시했다.
그때는 보리 수확이 막바지여서 타작마당에서 먹고 즐기는 일이 잦았다. 룻은 나오미의 지시대로 단장했는데, 이는 자신이 더 이상 과부가 아니라 결혼할 수 있는 여인임을 알리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아스에게만 그 모습을 보여야 했기에, 룻은 다른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어둠 속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그리고 보아스가 자리를 잡고 눕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보아스가 곡식을 도둑맞지 않기 위해 노적거리 옆에서 잠을 청했기 때문이었다.
이윽고 보아스가 자리를 잡고 누워 잠들자, 룻은 그 발치의 이불을 들고 살며시 들어가 누웠다. 아마도 보아스가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한밤중에 깨어나서 발치에 웬 여인이 누워있는 상황에 깜짝 놀라 까닭을 묻는 보아스에게, 룻은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당신의 시녀 룻이오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시녀를 덮으소서. 당신은 우리 기업을 무를 자가 됨이니이다(룻 3:9).”
남자가 자기 옷자락으로 여자를 덮는 일은, 그 여자가 자기 아내라는 것을 주장하는 상징적 행동이다. 즉, 룻은 보아스에게 “당신이 죽은 남편의 기업을 무를 사람이니, 저와 결혼해 주세요.”라고 정식으로 요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행동이다. 어서 가서 예수님의 발치에 누워, 룻이 올렸던 기도를 드려라. 주님께서는 이런 죄인을 결코 실망하게 하지 않으신다. 때로는 우리가 어떤 일에 대해 잘못 반응하여 죄를 짓기도 한다. 그럴 때도 죄를 고백하며 예수님의 발치에 누워야 한다. 이런 일은 배워야 하는 일이며, 또한 상당한 훈련이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보아스는 룻의 요청을 받고 기뻐했다! “내 딸아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룻 3:10).” 보아스가 기뻐한 이유는, 룻이 가난한 이방인임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법령에 호소하는 믿음의 용기를 보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우리들이 망설임 없이 주님께 나아갈 때 기뻐하신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신다. 기도는 우리에게 주기 싫어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억지로 되돌리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주님께서 기꺼이 주시려는 것을 감사함으로 붙잡는 일이다.
그런 룻의 요청에 보아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네가 빈부를 물론하고 연소한 자를 좇지 아니하였으니 너의 베푼 인애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하도다(룻 3:10).” 룻이 ‘처음 베푼 인애’란 나오미를 따르겠다고 결정했던 선택이고, ‘나중에 베푼 인애’란 모세의 법을 따라 가정을 다시 일으키려는 결심이다. 룻은 다른 젊은 과부들과는 달리, 나오미를 떠나지 않았고 나아가 죽은 남편의 기업을 이어가려고 했다.
보통 우리는 일이 잘못되어 원하는 대로 안 풀리면, 더 이상의 손실을 막으려고 새로운 장(章)을 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일이 우리 잘못 때문이라면 상황이 달라지더라도 여전히 모든 것은 계속 잘못되어 간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예수님을 통한 부흥을 추구하기를 원하신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 자신부터 회개하고 주님을 찾아야 한다.
(6) 보아스와 그보다 더 가까운 친척(룻기 4장 1~8절)
– 보아스는 룻의 요청을 받아들였지만, 당장 그 일을 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참으로 나는 네 기업을 무를 자나 무를 자가 나보다 더 가까운 친족이 있으니(룻 3:12).” 그 친족이 기업을 무를 우선권이 그 친족에게 있으니 그에게 먼저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아스가 예수님의 예표라면,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친족은 하나님의 율법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죄인들에게 권리를 행사할 우선권을 하나님의 율법이 가지고 있다. 이 율법은 성경 전체에 걸쳐 나타나고 있는데, 율법의 명령을 지키면 영원히 살게 되지만 명령을 어기면 영원히 죽게 된다. 그러므로 율법이 결국 죄인에게 행사하는 권리는 오직 정죄하는 것뿐이다. 즉, 지키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을 우리 모두가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이다(롬 7:10).
보아스가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우선 그 친족과 만나서 일을 해결해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 친히 하나님의 율법을 만족시키셔야만 했다. 보아스가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율법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영문 밖에 있는 치욕의 장소로 나가셔야 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의 권능을 빼앗으시고 모든 대가를 치르심으로써 율법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율법은 더는 주님과 주님께 속한 자들을 정죄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흘려주신 보혈의 능력은 죄뿐만 아니라 치욕의 잔재까지도 덮는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과오를 해결해 주실 것을 참으로 기대할 수 있다.
보아스보다 더 가까운 기업 무를 자는, 두 번씩이나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라고 하면서 자기 권리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신발을 벗어 보아스에게 주었다. 신발을 벗어 주는 행동은, 그가 그 토지를 물어줄 권리를 포기하고 그 권리를 다른 사람에게 양도한다는 의미가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보혈을 통해 율법은 우리를 소유할 권리를 포기하게 된다. 우리는 어린 양의 피로써 율법의 정죄와 사탄의 참소를 이길 수 있다. 또한, 그러한 보혈의 능력을 충분히 깨달은 사람은 그러한 사실을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증거하며 전할 수 있다. 그리할 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통한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쯤에서 우리는, 나오미가 룻에게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 딸아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 있으라. 그 사람이 오늘날 이 일을 성취하기 전에는 쉬지 아니하리라(룻 3:18).” 이와 같이, 우리도 예수님께 모든 염려를 내려놓은 뒤, 잠잠히 앉아서 하나님께서 일을 해결하시기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의무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의무를 행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특별히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이 말씀에 주의하라. 이미 구원의 사역을 성취하시고 천국에 들어가신 주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분을 믿고 구원받았음을 깨달으라!
(7) 해피엔딩(룻기 4장 9~22절)
–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행복한 결말을 가져오는데, 그 결말은 세상의 그 어떤 행복한 결말보다도 월등히 탁월하다. 하나님의 노여움은 잠깐이고 하나님의 은총은 평생이다(시 30:5). 우리는 나오미와 룻을 포함한 성경 인물들을 통해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아내가 없던 보아스와 과부가 된 룻이 마침내 하나가 된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도록 아내를 구하지 못했던 보아스는 기업을 물어주고 룻을 아내로 맞이하게 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관한 희미한 그림자이다.
보아스와 그 친족의 거래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거래가 확정되고 보아스가 룻과 결혼한다고 선언하자 크게 기뻐하며 축하했다. 보아스가 그들에게 이 일의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하자, 그들은 모두 “우리가 증인이 되노라!”라고 소리쳤다. 이처럼 예수님을 통한 위대한 구속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증거했을 뿐만 아니라 성부 하나님께서도 친히 증거하셨다. 이런 구속의 일이 우리 삶 속에서 일어나는 것을 볼 때, 우리도 구속의 증인이 되어 기쁨으로 소리치게 된다.
그 성읍 사람들은 보아스와 룻의 결혼을 축하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라헬과 레아 같게 하시고(룻 4:11).” 이처럼, 룻은 이제 이스라엘 백성으로 여김 받고 있다. 그들은 룻의 출신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진심으로 룻이 열두 지파의 근원이 되는 두 어머니처럼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할 때, 과거의 슬픈 탄식 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권속으로 입양되어 다른 성도들과 참된 교제를 누리게 된다.
사람들은 보아스에게도 이렇게 축복한다. “너로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케 하시기를 원하며(룻 4:11).” 우리의 보아스이신 예수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죄인에게 행하신 긍휼과 은혜의 일을 통해 명성을 얻으신다. 그들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축복한다. “여호와께서 이 소년 여자로 네게 후사를 주사 네 집으로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룻 4:12).”
아마도 그들은, 혹시라도 룻이 이 결혼을 ‘차선’ 정도로 여길까 봐 염려해서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큰 실패를 맛보고 인생의 늦은 시기에 주님께 나아온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은혜를 ‘차선’ 정도로 생각하기도 한다. 더 이상 인생이 망가지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기면서 말이다. 그러나 절대 그렇지 않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것을 아시고 그에 맞는 계획을 세워 놓으셨다. 그러므로 그 일은 ‘차선’이 아니라 ‘두 번째 최선(Best)’인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축복한 그대로 되게 하셨다. 아무런 기업도 없던 이 가난한 이방 과부가 기업을 회복했을 뿐만 아니라, 메시아의 조상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남성만 기록하는 히브리 관습을 깨고 네 명의 여성(다말, 라합, 룻, 밧세바)이 등장한다. 그 여성들은 한결같이 ‘부적격자’, 즉 오점(汚點)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흠 있는 계보를 통해, 죄인들도 그리스도의 몫을 같이 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증거해 주신다. 물론 이러한 흠 있는 혈통이, 예수님의 무죄한 인격과 그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보아스와 룻에게서 아들이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나오미의 삶에도 좋은 변화가 찾아온다. 하나님의 징계로 슬픔에 빠져있었던 나오미의 입에서는 웃음꽃이 한가득 피어나게 된다. 주변 여인들은 나오미에게 이렇게 말한다. “찬송할찌로다. 여호와께서 오늘날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아니하셨도다……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룻 4:14, 15).” 즉, 나오미에게 항상 기업 무를 자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기업 무를 자가 없는 상태로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주님의 보혈은 결코 효험을 잃지 않는다. 참으로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기업을 무를 자가 되시며, 우리 삶을 끊임없이 회복시키는 분이시다.
Ⅲ. 마무리하며
개인적으로 이 룻기 강해서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모든 성경은 구속사(救贖史)의 관점에서 보아야 그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둘째, 하나님의 구속 사역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영광스럽다. 본인 역시 죄로 인해 방황하다가 깊은 실패를 맛보았기에, 이 강해 설교가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특히 처음에 예수님 믿을 때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다시 죄를 짓고 실패할 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업 무를 자가 되신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게 다가왔다. “주의 인자가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시 63:3) 이 책을 읽을 때마다, 이토록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평생, 아니 영원토록 누리며 찬양하는 삶을 살게 해 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큰 은혜가 영원토록 머물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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