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요리문답 강해
(3)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
Geneva Reformed Church 제네바 개혁교회
Reformed Guardian 리폼드 가디언
The Band of Puritans 밴드 오브 퓨리탄스
Geneva Institute 제네바 신학교
오인용 목사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3문,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에 대해 강론하겠습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을 다 배우면, 다음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다음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그다음은 도르트 신조, 이런 순서로 정통 개혁교리를 꾸준하게 포괄적으로 다 배워야 합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도르트 신조 강해도 나중에 상황이 허락되면 반드시 할 생각입니다.
예전에 번역한 요리문답에서는 성경의 ‘요긴한’ 교훈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요긴한’보다는 ‘핵심적’이라고 하는 편이 이해가 더 잘 됩니다. ‘요긴한’이라는 말은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옛날 말이므로 가능한 더 나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좋습니다.
소요리문답은 ‘성경의 핵심적인 교훈’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첫째,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에 관하여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이며,’ 둘째,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를 중요하게 가르친다.’입니다. 성경이 가장 먼저 가르치는 내용은 우리가 어떤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하는가에 관한 것입니다.
오전에도 설교했지만 우리는 단순히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수준에 그치면 안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믿는지’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반듯하고도 체계적인 신앙의 모습을 나타내야 합니다. 많은 현대 그리스도인처럼 막연하게 “믿습니다.”라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막연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불확실함과 공허함을 해결하려고 표적과 이적과 신비한 체험과 은사를 쫓아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 잠시나마 뭔가 확실해지고 채워지는 것 같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고도 자세하게 나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해 분명하게 알기 위해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은혜의 수단은 성경 말씀이지 기적과 은사가 될 수 없습니다.
더욱이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을 분명하게 알려주는 선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 까지도 구체적으로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저런 분이신 줄을 참으로 굳게 믿습니다.”라고 한 다음, 그냥 두 손 두 발 다 뻗고 누워 곤히 잠들어버리면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섬기며 감당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의무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다시 성경을 펼쳐 연구하고 배워야 합니다. 반듯하고도 체계적인 신앙이란 이러한 의무와 책임 감당이 살아있는 신앙을 가리키지 무책임하면서 입만 살아있는 신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반면, 오늘날의 신앙은 참으로 무책임합니다. 하나님에 관해 마땅히 알아야 할 바도 잘 모를뿐더러, 신앙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아는 바는 더 얄팍합니다. 그러니 교회가 엉망이고 신자들도 제멋대로이지 않습니까? 이처럼 신자에게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이 두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하는 내용도 잘 알고, 그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도 잘 아는 사람이 참으로 ‘성경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잘 알고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진정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의 핵심 교훈은, 우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내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서 굳이 어떤 다른 일반적인 지식이나 정보를 추출하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자면 할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니 그렇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사람이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지식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성경에는 사람이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하나님에 관한 지혜와 지식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하며 무슨 길을 따라 어떤 인생을 살든지에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기본적인 지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에 관한 지혜와 지식입니다. 학교 선생님, 대학교수, 공장 근로자, 사무원, 가정주부, 군인, 그 어떤 사람이든지 아무 상관 없습니다. 그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에 관해 믿어야 할 것과 그분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에 관한 내용을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그러한 지혜와 지식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 어느 특정한 분야에 종사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됩니까? 그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 구석구석이 밝아지게 됩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사람이 정치인이 되면 이 세상과 정치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그런 사람이 학교 선생님이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역시 훨씬 더 나아질 것입니다. 만약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어린이집 교사라면 어찌 되겠습니까? 최근에 사회적인 논란이 된 것과 같이 아이들을 가차 없이 두들겨 패겠습니까?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을 아는 사람이 말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는 것과 없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20세기 초반까지 미국 대학에는 성경을 모르는 상태에서 지식을 추구하는 일은 고상한 야만인을 길러내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지식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말의 참뜻은 단순히 살아가는 데 유용한 기술, 정보, 학문을 가르치고 배운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만 알면 어떻게 됩니까? 고상한 야만인이 됩니다.
우리가 보통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 지식인, 지식인 그러곤 하는데, 그들은 전혀 지식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무엇을 얼마나 배우고 익혔든지 상관없이 다 고상한 야만인에 불과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 곳곳에 그런 야만인들이 활동하는 모습을 상당히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을 진정으로 갖추었을 때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지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앉아 있는 청년들은 꼭 명심하십시오. 어떤 전공 분야를 잘 선택하고 자기 앞길을 훌륭하게 개척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저 잘 차려 입히고 잘 꾸며놓은 원숭이 한 마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렇게 교리와 성경을 바르게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그래서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서양 문양을 보십시오. 전부 기독교적인 바탕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서양 문명이 훌륭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오직 그리스·로마 문명을 토대로 서양 문명이 세워졌다면 참으로 별 볼 일 없었을 것입니다. 분명히 동양 문명보다도 한참 뒤떨어졌을 것입니다. 서양 문명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유대-기독교의 문명이 버팀목이 되어주었기에, 그나마 쓸만해 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같은 신앙교육서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교육서는 우리가 믿어야 하는 분에 관해 분명하게 알려주고 강조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서를 제대로 잘 배우고 익힌 사람은 믿음의 초점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신앙교육서를 전혀 접하지 못한 채로 그냥 되는 대로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항상 막연해 합니다. 그런 모호한 신앙이 궁극적으로 교회에 가장 큰 해를 주는 법입니다.
소요리문답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같은 신조와 신앙고백서를 잘 배워놓으면,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일반 복음주의 교회 신자들이 영문도 모른 채로 주기적으로 겪곤 하는 영적 침체나 방황이 없습니다. 또한, 어떤 세속적인 풍조나 사회 속에서도 가야 할 길이 무엇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어떻게 사는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지 분별할 수 있게 됩니다.
그 결과, 그들의 삶에는 알아야 할 것을 몰라서 생겨나는 막연한 두려움이나 갑갑함이 없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신앙과 삶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과 의문을 안고 살아가는 이유는 대부분 신앙교육서를 제대로 배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외형만 대강 갖추어 놓았지 실제 내용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마치 잔뜩 부풀어 오른 공갈빵처럼 속이 텅 비어 있습니다.
여러분, 바다에 사는 게 좋아하십니까? 아마도 사람들 대부분이 맛있게 즐겨 먹는 음식일 것입니다. 뜨거운 물에 푹 삶은 게를 건져서 게딱지를 “딱”하고 벗겨내면, 하얗고 보드라운 속살과 고소한 주황빛 알들이 도도한 자태를 뽐내면서 우리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런 기대를 한가득 품고 게딱지를 깠는데, 그 안에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습니까?
만약 식당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성격 괄괄한 손님은 당장 주인을 불러 격렬하게 항의할 것입니다. “이게 뭐야, 주인 나와! 도대체 어느 바다에서 온 게가 이렇게 생겨먹었어? 게딱지 안쪽이 텅 비어서 먹을 게 아무것도 없잖아!” 우리는 신앙교육서를 통해 하나님에 관해 분명하게 알고 신앙생활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알맹이 없이 겉만 그럴싸한 자가 되면 절대로 안 됩니다.
이제 두 번째로, ‘신앙의 의무’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진실한 신앙을 갖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행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신앙교육서를 배우는 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신앙교육서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이런 부분에서도 많은 약점을 갖고 있습니다. 많은 이들이 “아,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 거야. 그러니 행위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너무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절대로 의무를 배제하지 않습니다. 신자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의무를 “아, 이런 건 행위야.”라고 하면서 무시해버리면, 그 신앙은 ‘신앙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여러분, 신앙주의는 신앙이 아니라 미신에 불과합니다. 오순절 은사주의 신앙이 아무리 그럴싸하게 자신을 합리화해도, 실제로는 미신 수준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올바른 신앙의 의무를 무시하고, 그저 “믿습니다.”라는 말 하나면 만사형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 오! 성령의 역사입니다.”라고 하면서 자기감정을 붕 띄우는 일입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가 없습니다. 안 되는 게 없는 그 만능의 불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만 있습니다. 이러한 헛된 신앙에 대해 성경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4)?”
그러나 신앙교육서를 잘 가르치고 배우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 즉 의무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예배, 기도, 계명 지킴, 선한 길을 갈 의무 등을 알고 지키게 됩니다. 이런 의무를 가리켜 행위 구원이라고 한다면 구원파와 다를 게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하는 신앙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냥 믿으면 돼. 그 이상 알 필요 없어. 그러면 만사 끝이야.”라고 사람들을 부추기는 신앙주의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셔야 합니다. 그런 미신과 악습에서 빨리 벗어나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는 신앙고백서를 열심히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의 의무를 알려주는 율법이 왜 신앙교육서에서는 느지막하게 다루어지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경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습니까? 율법과 복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입니다. 그러므로 신앙교육서에서는 율법을 뒤에 배치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먼저 드러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먼저 가르치고 난 다음에, 율법을 가르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믿는’ 분께서 무엇을 기뻐하시는 가를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해, 율법이 우리 신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방향지시등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 율법이 왜 필요합니까? 왜 우리가 무율법주의로 빠지면 안 됩니까? 여러분이 자동차를 한 대 샀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런데 그 자동차에는 운전대가 없습니다. 자, 여러분은 그 차를 어떻게 원하는 지점까지 몰고 가시겠습니까? 운전대 없는 자동차는 그냥 거대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또, 배에 조타기가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저 바람과 조류가 이끄는 대로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난파선이 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기독교 신앙에 율법이 없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에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무한 자유를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이 됩니다. “간음해도, 도둑질해도, 오만 별짓을 다 해도 괜찮아. 이미 넌 자유로운 사람이잖아? 넌 복음 안에서 믿음으로 구원받은 자잖아? 그러니 율법에 매일 필요 없어. 괜찮아, 괜찮아.” 이런 신앙이 바로 무율법주의입니다.
물론, 율법주의도 나쁜 것이지만 무율법주의는 더 나쁜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는 이 무율법주의가 크게 번성하여 참된 신앙에 엄청나게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60년대까지는 비교적 율법주의적인 요소가 강했는데, 90년대로 넘어오면서부터는 무율법주의가 세력을 얻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무율법주의가 완전히 교회를 평정해버렸습니다.
오전에도 설교했지만, 예수님께서 우리 구세주만 되시면 안 됩니다. 꼭, 우리 주(主, Lord)도 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에게는 그 주인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그 의무를 등한히 하면서 “예수님, 나를 구원해주십시오. 그러면 나머지는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그러니 구원만 해주시고 제 삶에는 간섭하지 마세요.”라는 형태의 신앙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런 구원을 가져다주는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는 이러한 거짓 신앙과 복음이 마치 올바른 것인 양 둔갑해서, 수십 년 동안 가르쳐지지 않았습니까? 그저 자기감정과 기질과 분위기에 들떠서 뭘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교회에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신앙은 전혀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교육서를 배우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교육서는 신자가 어떤 정확한 목적지도 없이 그냥 되는 대로 흘러가는, 잘못된 무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붙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교육서를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이 체계적이고 올바르게 하나하나씩 세워져 가야 합니다.
여러분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가르칠 어린아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은 절대 제멋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 단계, 한 단계씩 진리의 말씀을 따라서 튼튼하게 설계되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 바로 신앙교육서입니다.
먼저, 소요리문답, 다음으로 대요리문답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그다음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벨직 신앙고백서, 도르트 신조. 이런 순서로 다 배워야 합니다. 벨직이나 도르트는 조금 이전 시기에 작성되었기에 미처 다루지 못한 내용들이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에는 다 들어가 있습니다.
소요리문답을 잘 배운 뒤에, 대요리문답과 다른 신앙교육서도 잘 배우면 흠 잡을 만한 것들이 다 사라집니다. 지금 유행하는 수많은 다른 신학과는 달리 우리 장로교 신학, 즉 개혁 신학은 이렇게 사람을 반듯하게 해줍니다. 우리 신앙이 표준에 딱 맞게 설계해줍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일을 다들 좋아하지 않습니다. 교리를 몰라도 그냥 침묵하고 가만히 있으면 다 알아서 신앙이 형성되는 시대입니다. 얼마나 손쉽고 편합니까? 그러니 마귀도 얼마나 손쉽게 그 마음을 들락거리겠습니까? 교리를 무시하니 자꾸 기독교가 반쯤 미쳐 돌아가는 것입니다. 겉은 분명 기독교인데 속은 불교입니다. 절에나 가 앉아 있어야 할 사람들이 꾸역꾸역 예배당에 나와서, 진리의 기독교를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상한 종교나 선불교처럼 바꿔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신앙교육서를 잘 배우고 익혀서 이런 망령된 일에 조금도 참여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내용과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바를 분명하게 깨우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올바른 신앙의 체계를 잘 세워가시기를 바랍니다.
* 소요리문답 강해 설교 시리즈에는 녹음이 되지 않아 누락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강론은 교리학교용 소요리문답 강의로 대신하였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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