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철학과 성경의 도덕적 권위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상)
조웅진
오늘날에는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사상으로 인해, 성경의 권위가 진리는 물론이고 도덕에 관하여서도 완전히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자연주의 철학이 발달하기 이전의 서양에는 대부분 기독교적 세계관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전체적인 모습과 상태—인간의 전적 타락,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구원의 필수성과 유일성—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문화에 배어 있는 성경의 도덕적 권위 덕분에 도덕과 실생활 사이의 조화가 전반적으로 잘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자연주의 철학이 근대에 들어 급속히 발달하자, 사람들은 도덕적인 권위를 행사하던 성경 말씀 대신에 인간 자신의 철학적 결과물로 슬금슬금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점진적인 도덕적 전제의 대체 현상에 박차를 가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이 자신의 진화론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여 발표했던 것이었다. 어두워져 가던 영적인 흐름이 결국 영국 생물학에서 곪아 터졌던 것이다.
다윈의 활동 중에 세계적으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것은 『자연도태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의 출판이었다. 흔히 『종의 기원』으로 줄여 말하는 이 책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에 현저한 변화를 가져왔다. 사실, 『종의 기원』에서 주로 다루는 내용은 진화라기보다는 종의 다양화 현상(diversification of species)이다. 다윈의 시대는 현재 기본적인 유전 원리로 인정받는 멘델의 유전 법칙조차 발표되기 전이었고, 그는 단순히 박물학자로서 자연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사색했을 뿐이다. 그런 끝에 그는 종이 다양해지는 현상을 진화라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다윈 자신도 자신의 판단이 성급하지 않았기를 바랐지만, 그의 책을 읽은 수많은 독자들은 그의 소심한 염려에 공감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당시에는 종의 개념이나 진화의 개념도 모호했기 때문에, 다윈이 내놓은 진화에 대한 반론도 많았다. 그러나 다윈의 책에 감동한 수많은 사람들이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고, 그 때문에 진화론은 과학적 패러다임으로서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높아졌다. 그렇게 거대해진 패러다임은 현대까지 이어져, 중‧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에서조차 단순한 ‘종 다양화’ 현상을 실존하지도 않는 ‘진화’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거짓 철학이 중등 교육을 통해서까지 진리를 거짓으로 매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사실 진화와 종 다양화 현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진화에는 반드시 새로운 유전 정보(genetic information)의 획득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진화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파충류에서 조류로 ‘진화’가 일어나려면, 파충류에게는 존재하지 않지만 새에게는 존재하는 수많은 DNA의 유전자 암호 코드 — 날개와 깃털을 형성하게 하는 유전 정보 등 — 가 점진적으로든 급진적으로든 생화학적으로 자연스럽게 합성되어야 한다. 즉, 지적이며 복잡한 정보 체계와 화학적 구조를 동시에 갖는 DNA 고분자가 자연적으로 발달하여, 기존의 유전 정보와는 전혀 색다르면서도 쓸모 있는 정보를 얻는 변화가 나타나야만 “진화가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
심지어 현대 진화론자들조차도 다윈의 해석이 미흡했다고 본다. 이제는 진화를 DNA 수준에서 정의하고 분석하므로, 새로운 유전 정보를 획득하는 일을 입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로운 유전 정보를 획득하는 일이 명확하게 확인된 실험 결과는 생물학 역사상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발현되지 않는 유전자도 있고 발현되는 유전자도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현재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언젠가 진화를 증명해 줄 유전 정보 획득 현상이 나타나기를 소망하면서 꾸준히 실험하고 있을 뿐이다. 즉, 유전 정보의 획득 현상이 없는 진화는 아무 실제적 증거가 없는 망상에 불과하다. 반면 자연에서 실제로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는 종 다양화 현상은 어처구니없게도 진화와는 본질적으로 정반대 현상이다. 자연도태를 포함하여, 현재 우리가 관찰하고 있는 종 다양화 현상은 사실 ‘유전 정보가 손실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림1> 출처: 이재만, 최우성 공저, 『빙하시대 이야기』, p. 145, 두란노
유전 정보가 손실되는 과정을 통해 종 다양화 현상이 나타나는 일을 간단하게 설명하면, 환경의 변화에 따라 개체가 지닌 다양한 유전 형질이 지역적, 시간적으로 좁혀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을, 대홍수 심판 이후 한 쌍의 개가 방주에서 나와 변화하는 환경 속에 번식한 것을 기록한 유전 가계도라고 가정해보자.
실제로는 수많은 유전적 차이가 있겠지만, 그림에서는 편의상 털의 길이 변화에 한정했다. 털이 긴 유전 정보는 L(long), 털이 짧은 유전 정보는 S(short)로 표기하며, 가장 위에 있는 개의 조상은 LS를 모두 가졌다고 가정하자. 이들이 새끼를 낳았을 경우, 그림과 같이 유전 법칙에 의해 확률적으로 LL, LS, SS가 나온다. 이 중 LL은 가장 털이 길고 SS는 털이 가장 짧다. 노아 홍수 이후에 더위와 추위가 지역적으로 극단화하는, 급격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털이 짧은 SS는 추위를 피해 따뜻한 지역으로 이동하고 LL의 경우 추운 지역에 계속 생존했을 것이다. 이처럼 환경의 변화로 유전적인 변동이 일어나, 새로운 종이 나타나거나 새 형질이 굳어지는 경향을 자연도태 혹은 자연 선택이라고 하며, 이 과정은 실제로 존재한다.1
그 결과, 추운 지역에서는 S 유전자를 가진 개체의 비율이 감소하여 S 유전자가 상대적으로 적어진다. 이 일은 유전자의 손실로 간주해도 별 무리가 없다. 우리는 여기에서 종이 다양해진 모습을 볼 수는 있었지만, DNA 수준에서 유전 정보가 획득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우리가 기원에 관해 생각할 때, 선입견을 제거하고 성경만 살펴본다면 진화라는 개념은 아예 떠올릴 수조차 없을 것이다. 진화론에 의하면, 종의 다양화 현상은 종과 종 사이를 뛰어넘으면서까지 무한하게 펼쳐진다고 한다. 하지만 성경을 믿는 사람은 이러한 말에 속지 않을 것이다. 성경은 종의 다양화 현상이 어디까지 나아가지 않을지에 대한 경계선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이다.
성경의 첫 장에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지으시며 ‘종류대로(according to their kind)’ 창조하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경의 진리를 통해, 또 유전 정보를 획득하는 현상을 명확하게 확인한 일이 아직 전혀 없다는 경험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진화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성경의 진리를 통해 생물들이 진화를 통해서 발전해간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종류대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관찰을 통해 아무리 종의 다양화 현상을 확인하더라도 성경에서 말한 ‘종류’의 범위를 넘어서면서까지 다양화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2
이렇듯 성경의 진리를 전제로 할 때, 진화론은 과학의 옷을 두른 인본주의 철학의 속임수라는 사실이 명확해진다. 게다가 학문적으로도 정확하지 않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진화론은 영적 열매를 통해서도 결코 건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진화의 반대는 무엇인가? 대다수 사람들은 이 질문에 제일 먼저 ‘창조’를 떠올릴 것이다. 물론 창조도 맞다. 하지만 진화의 반대는 창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진화의 반대는 바로 성경이다. 진화론을 믿을수록 성경에 대한 불신은 성경 일부가 아닌 전체로 퍼져나간다. 성경에 기록된 계시를 믿는 믿음 자체가 서서히 찢겨나가게 된다.
진화론을 받아들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창세기의 맨 첫 장에서부터 실제 사실과는 맞지 않는 엉뚱한 말이 적혀있다고 보게 된다. 결국, 성경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계시하신 진리가 적힌 책이 아닌, 사람이 스스로 저작한 것으로 오해하게 만들어 별로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하게 된다. 성경이 믿을 만하지 못한 책이 되면, 성경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도 매우 어리석은 것이 되어버린다.
지식의 근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순간, 인간은 자신과 하나님 사이를 잇는 유일한 연결선을 스스로 잘라낸 셈이 되었다. 결국, 인간은 어떤 것도 정확하게 알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단지 ‘창조’에 국한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인간에 대한 지식, 우주에 대한 지식, 그리고 각 대상의 관계에 대한 정확한 지식, 기독교 교리 등 모든 절대 진리가 폐기되고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게 된다.
그 결과, 현대로 올수록 삶의 기반은 여러 면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인권에 대해 외쳐도, 사상의 진리성에 대해서 분석해도, 종교가 타락해도, 명확하고 반론 불가하게 만드는 절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보기에 더 마음에 드는가?’, ‘누가 인본주의 철학과 더 잘 어울리는가?’가 종교와 사상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 진리를 잃어버렸을 때, 도덕적 선의 기준이시며 자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을 자신의 기원을 알게 하는 대상에서 지워버리게 되었다. 이제 그 자리를 영혼도 없고 도덕도 없는 단세포 생물이 꿰차버리고 말았다. 우리의 기원은 도덕적인 하나님의 창조가 아니라, 이성도 도덕도 없는 단세포, 어류, 파충류, 이름 모를 포유류, 유인원이 되었다. 이제 도덕은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될 수 없으므로, 인간의 도덕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관계가 없게 된다. 이제 도덕은 과연 어떻게 될까?
진화 철학이 도덕의 근간이 될 때 인간에게 어떠한 도덕관이 심어지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예를 살펴보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Harry Compton Crick)은 유전학의 발달에 크게 공헌하여 노벨상을 받은 뛰어난 생물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진화론자로서 기독교를 혐오하여, 기독교를 파괴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감수했다고 한다.3 그는 “인간은 본질적으로 DNA 복제 메커니즘을 이루는 화학적‧물리적 속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라고 주장했다. 즉, 인간이 하는 모든 일은 결국 화학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으로 다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한 면에서 환원주의자였다고 볼 수 있다.4
그러나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을 과연 잘 설명할 수 있을까? 진정 도덕적 절대자 없이도 인간이 도덕을 알 수 있었을까? 전능하신 대폭발 님(The Big Bang)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의 거룩함을 따라 선하신 입자(The Particle) 님과 시공간 님(The Space-Time)께서 나오게 되었고, 시공간 님 안에서 입자 님의 근원적 지혜와 도덕으로 말미암아 현재 인간이 도덕을 알 수 있게 된 것인가?5
아니다. 저런 식으로 기원을 설명할 때, 인간은 창조주(創造主)를 잃어버리게 되고 동시에 도덕주(道德主) 역시 사라지고 만다. 도덕주를 배제한 인간의 윤리학은 엘리트 윤리, 실용적 윤리, 통계학적 윤리(평균적 윤리), 상대주의적 윤리 등 궁지로 몰리게 된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궁지에 몰린 이 상황을 도덕이 역사를 통해 점차 발전한 것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이 택할 수 있는 윤리 체계의 정수는 성경적 도덕(biblical morality)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법의 기초이며 도덕적 판단의 절대 기준이다. 십계명을 살펴보면 그 사실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출 20:1~7).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법은 애매하지 않으며 절대적이다. 하나님의 법은 사회법의 기초로 삼기에 참으로 합당하다. 이 기초가 없이는 어떤 민족도 도덕적으로 온전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러나 세속 사회는 이 법을 점차 무시해왔고, 너무 힘들고 종교적이어서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든 필요했기에, 고등(高等)한 사회일수록 통치 기준이 될 수 있는 어떤 법적 프로그램을 채택하게 되었다.6
이 법적 프로그램, 즉 두 번째 윤리 체계는 기껏해야 합의된 도덕(consensus morality)이라 할 수 있다. 이 도덕규범은 한 사회를 이끄는 사람들의 상호 합의를 통해 일종의 문서로 등장하게 된다. 이를테면 헌법, 권리 장전, 대헌장 등이다. 그 문서들은 어떤 것이 합법이며 어떤 것이 불법인지에 대해 합의된 사항을 기록한 다음, “우리는 사람의 정부가 아니라 입헌적 정부이다”와 같은 희망적인 진술이 따라 나온다. 그러므로 합의된 도덕은, 수용할 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의 합의를 근거로 하는 행위 규칙을 제공한다.7 우리는 이런 형태의 통치를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된 행동은, 대체로 법을 잘 준수하며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에게만 타당할 수 있다. 만일 한 국가를 이루는 구성원 대다수가 불안정하고,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싸우기를 좋아하고, 비합리적이며, 과격하다면 합의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자기 보기에 옳은 것을 행하고자 할 때 민주주의는 더는 유지될 수 없다. 결국, 민주주의란 율법의 행위가 마음에 새겨져 있는 책임 있는 다수가 사회 내에 존재하는 범위 안에서 편의상, 임시로 존재할 따름이다.8
세 번째로 가능한 시민 도덕 형식은 실용주의(pragmatism)라는 말로 가장 잘 표현된다. 이는 어떤 절대적 권위에 근거하지 않고, 개인의 이익이 도덕적 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도덕은 도덕으로서의 의미를 상실해버린다. 실용주의자들은 윤리적 상대주의자들의 비판에 맞설 방어막이 전혀 없으며, 결국 인간의 욕구와 욕망만이 도덕의 기준이 된다는 도덕적 쾌락주의(hedonism)와 상통하게 된다. 철학적 수준에서 쾌락주의를 공평하게 논의할 수는 있다. 하지만 형이상을 벗어나 실제 상황에 맞닥뜨리면, 검은 욕망을 가리는 역할을 한 공평은 금세 잊혀지고 그 자리는 열정이 장악하게 된다.9
우리는 이러한 도덕적 현실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도덕 형태가 도덕적 억압에서 벗어난 인간의 자유를 존중한 합리적인 형태라고 생각한다. 사실 위에서 언급한 네 가지 도덕, 즉 성경적 도덕, 합의된 도덕, 실용주의적 도덕, 쾌락주의적 도덕에 대한 반응을 동성애 문제에서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로 동성애자들은 그들의 행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한다. 또한,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합의된 도덕인 결혼과 관련된 헌법 질서를 흔들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실용주의적 도덕의 관점에서 “왜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가? 동성애는 취향이다. 비(非) 동성애자들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니다.”라며 옹호하기도 한다. 일부 쾌락주의적 도덕론자들은, 인간의 동성애 현상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에게는 일면 필연적이라고 하면서 관조하기도 한다. 이것이 도덕의 절대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구성원들이 갖게 되기 쉬운 성(性) 윤리관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수적 윤리관이 건재했던 불과 2, 30년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사람들은 “틀렸다.”라고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에게 동성애는 절대적인 도덕의 문제였다. 그러나 점차 동성애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드러나는 모습이 아닌 도덕적 비판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대상, 다시 말해 소수의 성적 취향으로 차지하는 자리가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제 동성애는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가, 맘에 들지 않는가?’의 문제가 된 것이다. 여기에 인본주의 철학이 더해지면서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동성애 반대는 ‘차별’로 매도된다. 차별은 인격을 무시하는 슬픈 것이므로 차별을 하지 말고, 그들을 존중하며 다른 사람과 똑같이 여겨야 한다는 소리가 커지게 되었다. 사람들은 ‘차별’과 ‘인권’이라는 단어에 점점 더 쉽게 속아 넘어간다. 덕분에 동성애자는, 마치 멸종 위기에 처한 종(species)이 보호받듯이 보호받아야 하는 특별한 범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세 가지 부분에서 따져볼 필요가 있다.
1.동성애 옹호자들이 주장하는 동성애에 관한 과학적 주장이 타당한가?
2. 인간에게 해로움이 없는가?
3.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거짓 철학과 성경의 도덕적 권위 –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하)에서 이어집니다.
각주
1 이재만, 최우성 공저, 『빙하시대 이야기』, 두란노, pp. 144~147.
2 성경을 진화론의 거짓됨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사용하는 것에 관하여 일부 사람들은, 성경은 과학 교과서가 아니므로 신앙으로 과학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한다. 또한, 그들은 과학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려 한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진화론의 본질은 물론 창조 과학의 본질 역시 모르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그러한 말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유신론적 진화론자(theistic evolutionist)다.
그들은 성경이 무오하다는 믿음이 없거나, 진화론이 성경을 철저하게 배격하는 이론임을 모르고 있거나 둘 중 하나다. 성경은 모든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지만, 진리의 척도를 제공하기 때문에 학문하는 인간들에게는 큰 선물이다. 성경은 하나님, 인간, 우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하나님과 우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 관한 진리를 제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적 진리는 물론 자연 과학적 진리 역시 얻을 수 있다고 담대히 선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창조 과학자는 성경을 과학 교과서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진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대우하는 것이다.
또한, 과학으로 성경의 무오성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오하다는 믿음으로 진화론의 거짓된 속임수를 들추어내는 성경의 진리를 전제로 한 과학적 학문 활동을 하려는 것이다. 물론 성경이 선포한 진리를 개개인이 해석하면서 의견 차이가 발생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한다. 또 그 과정에서 창조 과학자들이 잘못 해석한 부분도 있음도 인정해야 한다. 성경을 전제로 하고 연구할 때는 ‘어떤 연구가 성경의 진리와 더욱 부합하는지, 성경의 진리에 배척되지 않는지’의 여부를 가장 중요한 척도로 삼아야 한다. 그 안에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며 자연에서 얻은 경험적 자료들에 대해 함께 논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다.
3 Francis Schaeffer, 『자유와 존엄성의 회복(기독교 문화관 Ⅳ권)』, p. 394.
4 Ibid, p. 395.
5 물론 진화론자들은 인간의 의식과 지각이 ‘자연적으로’ 발달함에 따라 문명 체계가 발전하였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문명이 발전하면서 서서히 법 체계가 형성되고 그에 따라 도덕적 원칙이 정해졌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의식과 지각이 어떻게 자연적으로 발달할 수 있는가에 관한 명확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한다. 결국, 그들은 길고 긴 세월과 우연이라는 우상을 믿는 신앙을 전개하는 종교인이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독자들은 전능하신 대폭발 님이라는 말이나 입자 님이라는 말과 같은 존칭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입장을 존중해주기 위해 쓴 것임을 알아주기 바란다.
6 Dave Breese, 『무덤 속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일곱 사람』, p. 129.
7 Ibid, p. 130.
8 Ibid.
9 Ibid, p. 131.
거짓 철학과 성경의 도덕적 권위
동성애 문제와 관련하여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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